천재는 당대에 인정을 못 받는 경우도 많다; 공교롭게도 요재지이, 홍루몽, 유림외사는 근대 이전 청나라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으로 꼽히며, 작가들은 생전에는 빛을 못 보다가 사후에 작품과 함께 유명해졌다. 또한 홍루몽에서도 가보옥을 통해 작가가 팔고문의 허례허식을 비판한 바 있다.

홍루몽 조설근


하지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옹정제가 즉위한 후, 조씨 가문은 옹정제의 막가파식 숙청을 피하지 못하고 부패세력으로 단단히 찍혀 몰락하고 만다.[3] 그리고 조설근의 대에 이르러서는 모든 권력을 잃고 가문 전체가 북경으로 이주당했으며, 조설근 자신은 북경 외곽의 기인마을에서 여생을 보내며 홍루몽을 집필하게 된다. 그러나 조설근은 이 소설을 끝내 완성시키지 못하고 1763년에 사망하여 홍루몽이 인기소설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필사본으로 유포되던 홍루몽이 활자본으로 출간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30여년이 흐른 뒤였다.

 

 

유림외사 오경재

2. 상세[편집]

저자인 오경재는 1701년, 아주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떠돌이 생활 중 23세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친척들에게 속아넘어가 유산 전부를 빼앗겼다. 그리고 그나마 있던 재산도 과거시험에 전부 썼었으나, 요재지이 작가 포송령 홍루몽 작가 조설근처럼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지냈고, 그 당시 지식인처럼 과외나 기타 글쓰는 일만 하다 53세에 사망했다.[1]

 


요재지이

 중국 명나라  청나라 초에 살던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이 1670년대 산둥에서 지은 기담 모음집으로 모두 12권이다. 요재지이의 요(聊) 자부터가 산둥성 서부의 現 랴오청(요성:聊城)시의 요 자와 같다. 포송령은 환갑이 넘어서야 겨우 1차 시험 붙은 '만년 고시생'이었다.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세도가의 가숙에서 한동안 교사로 있으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불운한 선비였으나, 요재지이를 씀으로써 중국에서 김시습급 반열에 올랐다. 유학을 닦은 선비였지만 일찍부터 각지에 전하는 수많은 괴사나 전설 등에 관심이 많았고, 갖가지 이물(異物)들에 해박했고 산해경이나 박물지 등 기서에도 밝았던 듯하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살아생전 찬사를 듣지 못했다. 포송령이 죽은 지 51년이 지나 1766년에서야 책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포송령이 직접 쓴 원본 중 절반은 남에게 빌려주었다 잃어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생전부터 인기작이라 남이 베껴 갔기에 내용 전체는 온전히 전한다.

포송령은 요재지이에서 자신을 '이사씨(異史氏)'라고 칭하여 "이사씨는 말한다(異史氏曰)." 하며 운을 떼어 단편의 결말부에 자기 의견을 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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