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투철한 기록정신

더 대단한 것은 전국 각지에 조선왕조실록 백업본을 분산 배치해 둬서 한양이 불타도 복원이 가능했다는것 

 

 

2.3. 조선[편집]

조선시대는 전직 관원도 있었지만 겸직 관원도 존재했었다. 예문관의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이 춘추관의 관원을 겸하여 매일 매일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이들 8명의 관원을 ‘사관(史官)’ 이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사를 중요시해서 이 직책 또한 중요시되었다. 보통 사관은 춘추관의 관원과 예문관 한림이 겸직하는데 실력과 가문이 두루 좋은 인재를 뽑았다. 젊은 사관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이 투철해 자연히 왕과 권력자들에게는 껄끄러운 존재였으며 수난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후기 들어서면서부터는 사관도 당색에 물들어 사관들의 평가가 편파성을 띄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승정원일기를 작성하는 승정원의 정7품 주서(注書),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주서의 자리가 비었을 때 임명하는 임시직)도 넓은 의미에서 사관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승정원일기 특성상 '사신은 논한다'로 시작하는 사관으로서 평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관의 기록인 사초는 실록 편찬 전까지는 그 누구도 열람할 수가 없다. 심지어 왕이라고 해도. 딱 한번, 연산군 무오사화 때 이를 읽어보고 사관들을 대거 숙청하였던 관계로 사초를 열람하는 것은 '폭군이나 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때문에 연산군 이후에는 실록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연산이다. 연산이 했던 짓이다!' 라며 치를 떠니 감히 임금들이 행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연산군도 사초를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읽어본 것은 아니고 사초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확인해본 게 다였다. 더불어 사관들조차도 기록을 적은 왕이 승하(昇遐)한 후에야 실록 편찬의 목적으로 열람이 가능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1519년) 4월 22일의 기록을 보면 신료들이 남성인 사관이 드나들 수 없는 규문에서 기록을 담당할 여사(女史)를 둘 것을 청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 신입사관 구해령. '정말로 저 의견이 실현되어 여성 사관이 생겼다면??'하는 전개로 나가는 일종의 대체역사물이다.

2.3.1. 유명한 사관[편집]

국왕 태종: "사관의 붓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전 밖에 있더라도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史筆宜直書. 雖在殿外, 豈不得聞予言?

사관 민인생: "신이 곧게 쓰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臣如不直, 上有皇天.

- <태종실록>, 태종 1년(1401년) 4월 29일. 태종이 왕이 평소에 기거하는 편전까지 사관이 입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이를 두고 태종이 민인생과 논쟁을 하는 기록이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 4년(1404) 2월 8일 4번째 기사

사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자를 꼽으라면 단연 태종 시대의 민인생(閔麟生)[5]을 들 수 있다. 사실 민인생은 사실 그대로 곧게 쓰는 것 자체보다는 진실을 직접 캐기 위해 벌인 전설적인 첩보행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왕이 공신들과 사적으로 어울리는 자리에 몰래 따라가기, 몰래 사냥 나간 태종을 복면 쓰고 미행하기, 출입이 금지된 왕의 거처에 잠입하여 병풍 뒤에 숨어 태종이 하는 말 도청하기 등 사생팬, 아니 스토커, 아니 그 수준을 넘어 정보기관 뺨치는 수준으로 태종을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했다. 무슨 닌자도 아니고 말 타고 사냥하는 왕을 발로 뛰어 추적했을 정도로 비범한 행보를 이어갔다.

물론 사관 자체가 왕이 스스로 언행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민인생의 행보는 만약 그가 반정부세력에게 매수되었다면 태종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결국 기어이 편전 잠입이 들통나 귀양을 가게 되면서 결국 그의 활동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귀양가기 전 마지막 청으로 본인이 귀양간다는 기록까지 직접 작성하여 후대에 전해졌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대한 신뢰성과 사관들의 비범함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기록인 '왕께서 말에서 떨어졌는데 사관 보고 이를 쓰지 말라고 하였다'도 바로 태종과 관련 있는 일이다.[6] 그 관대한 태종조차 민인생에게 어지간히 짜증났는지 그를 직접 욕한 것을 보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듯. 그럴만도 한게 민인생은 일을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수준을 넘어, 상전, 그것도 임금의 사생활까지 침해했으므로 현대에도 스토킹에 주거침입 등으로 잘리는 수준 이상의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천일야사에서 묘사한 민인생과 태종의 갈등. 이미 썸네일부터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태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기록하는 민인생의 집념과, 그런 민인생에게 시달리며 고통받는 태종의 분노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후일담으로 실록에서 검색해보면 민인생은 귀양갔다 돌아온 이후로도 금성 현령이나 한성부 판관 등을 역임하다 이런 저런 사유로 파면 혹은 강등당하는 등 순탄치 못한 벼슬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7][8]

결과적으로 보면, 민인생 덕에 조선왕조실록의 신뢰도가 보장될 수 있었고, 태종도 '권력욕에 찬 패륜아'에서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으면 하급자에게도 관대하고, 여러 에피소드가 있는 인간적인 철혈 군주'로 재평가 받을 수 있었다. 말마따나 '태종, 더 나아가 조선왕조에 대한 후세의 평가'에 있어 민인생의 노력이나 역할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고, 특히 태종에게는 큰 스트레스를 준 반면 큰 이득을 준 경우라 할 수 있다.

3. 중국사[편집]

중국에도 사관이 있었으며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남긴 사관의 사초가 역사서를 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록 조선왕조실록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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