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17세기 소설 호색일대남의 주인공 요노스케는 7세에 이성에 눈을 떠 60세가 되기까지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가 3742명, 남색 상대가 725명이었다; 에도시대의 성풍속과 사회구조, 그리고 인간심리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이 돋보이는 책; 사이가쿠의 소설에서 드러나듯, 상업이 낙후되었던 조선과 다르게, 근세 일본의 경제 시스템은 같은 시기 동아시아 봉건주의 국가 중 상대적으로 가장 앞선 자생적 전기 상업 자본주의의 골격을 확립했고, 이는 상인들의 활약과 더불어 강력한 계층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하라 사이가쿠는 에도시대 최초의 경제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한자와 나오키의 조상뻘); 사이가쿠의 소설들은 다니자키 준이치로,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1976) 같은 관능주의적인 근대 일본문화의 프리퀄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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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출간한 <호색일대남>. 2017 세종도서 교양도서에 선정되었다.

이 책은 주인공 요노스케의 7세부터 60세에 이르기까지 호색 편력을 나이별 에피소드로 기록하고 있는 일본 근세소설이다. (1682년 출간) 이 소설은 우키요조시, 즉 오락성에 중점을 둔 풍속소설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각 에피소드마다 삽화가 하나씩 곁들여진다. 총 54개다. 부록으로 에도 시대의 단위 표기, 소메야 도모유키 교수의 특별기고논문이 수록되었고 충실한 작가 연보와 옮긴이 후기도 곁들여진다.

이 작품은 이런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요노스케는 7세가 되던 해 어느 여름날 밤 쉬가 마려워 잠에서 깨었다. 매자나무가 서 있는 동북쪽 집 구석으로 다가가 솔잎이 깔려 있는 소변통에 볼일을 본 후 손을 씻었다. 동행했던 하녀는 툇마루 쪽으로 늘어진 대나무가지에 도련님이 다치지는 않을까 해서 촛불을 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요노스케가 하녀에게 말했다.

"그 불을 끄고 좀 더 옆으로 다가오너라."

"넘어지실까 걱정이온대 불을 끄라니 어인 말씀이십니까?"

"사랑은 어둠 속에서 한다는 걸 모르는가?"

7세에 이미 이렇게 호색의 본능을 드러냈던 요노스케는 상속받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유곽을 드나들며 수많은 여성 또는 미소년과 향락을 즐기며 산다. 그는 60세가 되던 해에 영원히 여성과의 애욕을 즐길 수 있는 뇨고의 섬(女護の島)으로 호색호(好色丸)를 타고 떠난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참으로 넓은 세상의 온갖 유곽을 남김없이 돌아보니 이제 몸은 어느덧 사랑에 찌들었고, 지금 이 순간을 맞고 보니 이 세상에 미련이 없어지고 말았다. 부모는 이미 안 계시고 처자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생 애욕에 빠져 멈출 줄 몰랐으나, 이제 내년이면 환갑이 될 정도로 나이를 먹어 뽕나무 지팡이가 없으면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귀도 멀어 점점 추한 몰골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나뿐만이 아니다. 전부터 면식이 있었던 여자들이 모두 백발이 되고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메슥메슥해진다. 우산을 받쳐 주고 목말을 태워 주었던 어린 여자애가 어느새 남자의 마음에 들어 부인이 되어 있다. 시간이 가면 변해 버리는 이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토록 엄청나게 바뀔 수가 있을까? 지금까지 내세의 안락을 비는 신앙생활을 한 적이 없으니 죽으면 지옥에 떨어져 악귀에게 잡아먹히면 그만일 터, 이제 와서 갑자기 마음을 다시 먹어 봐도 고마운 불도의 길에는 그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리라.

"9세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될 것" 에피소드에 수록된 삽화.

요노스케가 옆 건물 정자 위에서 하녀의 뒷물하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몰래 들여다보고 있다.

일본 근세 풍속소설의 원조

이하라 사이카쿠의 첫소설인 ≪호색일대남≫은 일본 근세소설사에서 '우키요조시(浮世草子)' 장르의 효시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우키요조시'는 오락성에 주안을 두고 당세의 풍속이나 인정에 관한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자 했던 풍속소설을 말한다.

'우키요(浮世, 부세)'는 ‘덧없는 세상’ 정도의 의미이지만 일본어로는 좀 더 의미가 다양하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 현실의 모든 것이 살기 힘들고 무상하다는 불교적 생활 감정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한편에는 삶의 순간순간을 즐기는 향락이 존재하고 그것이 또한 현실이기도 하다는 다소 상충적인 의미를 가진다.

지진과 기근,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중세의 전국 시대가 끝나고 일본의 근세기에는 도쿠가와(徳河) 막부(幕府)가 강력한 봉건 지배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농업과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평화 시대를 맞게 되었다. 교토, 에도, 오사카 등의 도시에 인구가 집중하고 도시민들의 경제력 증가 및 상인들의 부의 축적이 이루어짐에 따라 도시 곳곳에 소비와 향락의 현실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근세기의 ‘우키요’는 이러한 소비와 향락이 전 시대에 비해 더욱 두드러지는, 세속의 변화를 동반하는 근세적 무상감의 세계였을 것이다. 즉, '우키요조시'라는 소설 장르에는 바로 이러한 17세기 후반 근세 일본 민중의 불교적 생활감의 변화가 담겨 있는 것이다.

"12세 번뇌의 때밀이" 에피소드에 수록된 삽화.

요노스케가 들른 효고의 욕탕 내부.

왼쪽 두 번째에 서 있는 요노스케는 패랭이꽃 가문이 새겨진 욕의를 벗으면서 유녀와 잡담을 나누고 있다.

일생을 오로지 호색만으로 일관한 남자

≪호색일대남≫의 작품명을 의미 그대로 풀어 보면 ‘일생을 오로지 호색만으로 일관한 남자’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세계 문학에서 호색 문학이라고 하면 노골적인 성 묘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의미의 호색 문학은 아니다.

이 작품이 태어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근세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을 통해 주자학 등을 도입해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어 있었다. 무사, 농민, 장인, 상인이 사회의 주요 계층이었고 주자학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충'과 '효'가 강조되었다.

다만 근세 일본이 조선 왕조와 달랐던 점은 '충'이 '효'보다 우선적인 가치로 내세워졌다는 것과 상인의 위상이 그들의 막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농민과 장인의 지위를 능가해 실제적으로는 무사 다음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근세기 일본의 주요 도시였던 에도(도쿄), 오사카, 교토 등에서는 상인이 인구 전체의 과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주요 시민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근세 일본의 경제 시스템은 같은 시기 동아시아 봉건주의 국가 중 상대적으로 가장 앞선 자생적 전기 상업 자본주의의 골격을 확립했고, 이는 상인들의 활약과 더불어 강력한 계층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상인을 천시했던 풍조와는 매우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근세 일본 사회의 경제 시스템 안에서 일본의 상인들은 그들 나름의 비교적 명확한 직업관과 상인 윤리를 지니고 있었고 그들의 가장 큰 사명과 덕목은 가업을 충실히 이어 가는 것이었다. 가업은 상인에게 상식이며 의무였고 국가에 대한 충이고 부모에 대한 효였다. 근세기 일본 봉건 체제의 틀에서는 아무리 방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이라고 할지라도 사농공상의 계급적 틀을 넘어 무사의 영역인 정치적 권력으로의 확장은 절대로 용인되지 않았다. 상인에게는 부의 축적으로 이룬 경제력과 가업의 계승만이 일생의 목표였고 과제였기에 궁극적으로 그들은 금전(경제력)에 집착하면서 한편으로는 결국 세속에서의 금전이 지니는 의미와 유한성을 되묻는 구조에 처해 있었다.

주인공 요노스케(世之介)는 수천억 재산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가업을 충실히 이어 가면서 더욱 부를 축적해 가는 것이 의무이고 도리였지만 이를 철저히 외면한 탈세속적인 존재였다. 작품명에서도 드러나듯이 주인공은 일생을 유곽(遊廓) 등에서 호색 생활로 일관하면서 대부분의 재산을 탕진함으로써 국가에는 상인 본분을 망각한 불충(不忠)을, 부모에게는 가업을 이어 가지 않은 불효를 행했다.

"46세 바라본 건 새해 첫 모습" 에피소드에 수록된 삽화.

하쓰네 다유가 기분이 상해 요노스케를 짓밞고 있는 모습.

≪겐지 모노가타리≫에 대한 패러디

그렇다면 작가는 당시의 봉건 체제에 반역적일 수도 있는 주인공 요노스케의 호색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그리려고 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이 작품에는 일본 고전 소설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 대한 패러디 의도가 담겨 있다. ≪겐지 모노가타리≫가 창작된 시기는 11세기 초 헤이안(平安) 왕조의 귀족 시대다. 이 작품은 잘 알려진 대로 최상층 귀족 신분의 히카루 겐지(光源氏)와 수많은 헤이안 귀족 여성들과의 만남(실제로는 성애)을 둘러싼 영화로운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사이카쿠는 이와 견줄 만한 근세 상인의 히어로로서 주인공 요노스케를 설정하고 그의 호색 생활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겐지는 귀인답게 7세의 어린 나이에 학문에 뛰어난 기량과 총명함을 보여 부모인 천황 부부를 놀라게 하는데, 이는 고대 소설의 전형적 영웅담의 한 패턴이다. 이에 반해 근세기 상인의 히어로로 설정된 요노스케는 같은 7세의 나이에 집안 하녀에게 “사랑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 등불을 끄고 가까이 다가오너라” 하고 명령을 내린다. 작가는 이러한 희화적 묘사를 통해 그가 의도하는 패러디의 내실을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겐지 모노가타리≫에서 묘사되는 남녀 귀족들의 만남(사랑) 또한 성애를 동반한 것이지만 당시의 풍류 묘사는 그러한 성애의 부분이 사상(捨象)된 형태였던 데 비해 ≪호색일대남≫은 인간의 원천적 본능인 애욕을 모티프로 삼고 있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귀족이나 무사와 같은 지배 계급의 사랑 이야기의 위선을 야유하는 시각이 내재된 패러디다.

주인공 요노스케는 상속받은 엄청난 재산의 힘으로 근세 도시 경제 체제에서 최고 수준의 환락적 소비와 향락이 허용되는 유곽을 드나들며 수많은 여성 또는 미소년을 편력한다. 이는 당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의 자기 과시의 한 행태였다. 아무리 부를 축적한 상인이더라도 권력이나 사회적 공공성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부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작가는 주인공 요노스케를 근세 상인들이 선망하는 부호의 아들로 설정해 주로 유곽을 무대로 상인의 굴절된 존재감을 과시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이바라기그리스도교대학의 소메야 도모유키(染谷智幸) 교수의

특별기고문 일부

"한국 문화의 눈으로 읽는 ≪호색일대남≫"

동서고금에서 ≪호색일대남≫(이하 ≪일대남≫으로 줄여서 표기)만큼 오해를 불렀던, 혹은 부르고 있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 작품은 작품명에 ‘호색’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바람에 일본에서 외설적인, 또는 엽색적인 작품으로 간주되어 외잡(猥雜)하고 저속한 호색 소설로 오해받았던 경위가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현대에도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일독하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작품 중에 외잡한 장면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애초에 이 작품에는 성 묘사가 아주 적다. 만일 그러한 외잡한 장면을 기대하고 읽는 독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바로 실망할 것이다. 예를 들면 권5−1(35세 나중에는 정처 대접을 받다)의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온다.

교토 시치조(七条) 거리 쪽에 살던 스루가노카미 긴쓰나(駿河守金綱)라는 도공(刀工)의 제자가 먼발치에서 요시노를 본 뒤 그만 그녀에 반해 남들에게 말도 못하는 짝사랑에 괴로워했다. 이 제자는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채 밤샘 작업으로 하루에 한 자루씩 53일간 53개의 칼을 만들어 다유 화대 53돈을 모아 놓고 언젠가 때가 되면 그녀를 만날 수 있겠지 하면서 지냈지만 노반(魯般)의 구름사다리를 붙잡을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에 괴로워하며 소매에 떨어지는 초겨울 비 같은 눈물은 신에게 맹세해도 추호도 거짓이 없고 애달프기만 했다. 후이고마쓰리(吹革祭り) 날 저녁 시마바라 유곽에 몰래 찾아가 “유곽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던데”라며 돈이 있어도 요시노를 만날 수 없는 자신의 미천한 신분을 비관하고 있자니 마침 어떤 사람이 딱하게 여겨 요시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요시노는 측은하게 여겨 조용히 불러 그의 심정을 들어 보았다. 그는 몸을 앞뒤로 가누지도 못하고 부르르 떨면서 작업 때가 묻은 얼굴 위에 눈물을 흘리면서 “이 고마우신 마음씨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간의 제 염원은 이걸로 충분합니다”라고 말한 뒤 도망치듯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요시노는 옷자락을 붙잡고 등불을 끈 뒤 허리띠도 풀지 않은 채 그를 껴안고 “바라시는 대로 제 몸을 맡기겠습니다”라면서 하반신으로 달라붙었다. 남자는 허둥지둥 당황하면서 고쓰마(勝間)산 싸구려 면으로 짠 속옷을 벗는가 했더니 “누군가 오는 것 같습니다”라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요시노는 그 남자를 힘차게 껴안고 “이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밤새도록 보내 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남자이신데 요시노 배 위에 이렇게 올라오셔서 허망하게 그냥 가려고 하나요?”라고 겨드랑이 아래를 꼬집으면서 가랑이를 더듬고 목덜미와 옆구리를 애무하면서 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어 밤 10시 종이 울릴 때가 되자 가까스로 그럭저럭 뜻한 바를 이루고 술잔을 나눈 뒤 돌아가게 했다.

유곽집 주인은 미천한 남자를 받은 것을 못마땅해하며 “이유 여하간에 너무한 처사”라고 다그치자 “오늘 오실 손님은 이 길의 달인이신 요노스케 님이시니 있었던 일을 숨기지 않고 말씀드릴 것이고 여러분들 탓으로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던 중, 밤이 깊어 가자 “요노스케 님이 드십니다”라는 전갈이 왔다. 요시노 다유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자 요노스케는 “그런 마음 씀씀이야말로 유녀의 참모습이오. 나는 결코 그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하면서 그날 밤에 바로 그 유곽집과 교섭을 해 요시노를 본처로 삼았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화대 53돈을 필사적으로 모은 도공의 제자를 불쌍히 여긴 유녀 요시노는 유곽의 규율(신분이 낮은 자와 만나서는 안 됨)을 어기고 만나, 한 수 더 떠서 눈물을 떨구며 유녀 앞에서 움츠리기만 하는 제자를 다독거리고 격려해 정분(情分)을 맺게 된다. 이러한 유녀의 처신에 화를 내는 유곽집에 대해 주인공 요노스케는 그녀야말로 유녀의 전범이라고 크게 감동하면서 자신의 정처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의 정교(情交) 묘사를 읽게 되면 요시노 유녀의 사려 깊은 정분에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은 몰라도 욕정을 느낄 독자는 전무할 것이다.

그렇다고 ≪일대남≫에 생생한 정교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권6−7(48세 와카 고필 조각으로 누벼 입은 호화로운 겉옷)에 유녀 노아키의 정교 장면이 있다.

유녀 평판기 ≪마사리구사(まさり草)≫나 ≪후토코로카가미(懐鑑)≫에도 이 여자에 관해 자세히 적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외에 실제로 이 여자를 만나 보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이건 이 여자의 타고난 복이라 할 수 있는데, 옷을 벗으면 곱고 따뜻한 피부에, 콧김이 세고 머릿결이 흐트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베개는 늘 흐트러져 있고, 푸른 기운이 배어 있는 눈가에, 좌우 겨드랑이 속이 촉촉하고, 잠옷은 땀에 배어 있고, 늘 떠 있는 허리에, 발가락 끝은 굽혀져 있고,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 이것이 누구나 좋아하게 되는 첫 조건이다.

남녀 정교의 정경을 강렬하게 떠오르게 하는 사이카쿠의 묘사력에는 감복할 수밖에 없다. 직접적인 신체 접촉은 거의 묘사되지 않고 머리카락이나 베개가 흐트러진 모습 등 주변 상황으로부터 박진감 있는 정교 장면을 상상케 하는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이카쿠는 이러한 묘사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

근처 침소 소리에 귀 기울여 보니 이미 단골이 된 듯한 유객 침소는 물론이고 처음 만난 사이라도 허물없는 잠자리 분위기에서 여자 목소리로 “보기보다 살이 좀 쪘는데”라면서 서로 부둥켜안는 소리, 남자는 병풍과 베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동작이 점점 거칠어지고 여자는 진짜로 울음소리를 내게 되니 저절로 베개가 튕겨 나가고 머리빗이 부러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2층 침소에선 “아아, 이제 그만”이라며 휴지로 닦는 소리가….

≪호색일대녀(好色一代女)≫ 권1−4 <음탕한 여자의 미모> 부분

이 묘사는 유녀가 옆 침소의 소리를 귀 기울이며 듣고 있는 장면이다. 직접적인 시각 묘사가 아니고, 피부를 ‘꼭 부둥켜안는 소리’ ‘여자의 진짜 울음소리’ ‘머리빗이 부러지는 소리’ ‘휴지로 닦는 소리’ 등 청각에 호소해 박진감 있는 정교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머리빗’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 것은 격렬한 정교 장면을 한순간에 표현한 결정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사이카쿠의 호색 작품이 여타의 저속한 호색본과 달리 오래전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온 것은 이러한 사이카쿠의 묘사력에 기인한다. 결코 ‘호색’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유명한 ≪일대남≫ 의 모두부 문장도 보기로 하자.

그토록 화사했던 벚꽃도 덧없이 순간에 져 버리고 산머리에 모습을 드러낸 달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마는 이루사 산(入佐山)

이 묘사는 “아름다운 벚꽃도 바로 져 버리고 마니 안타깝기만 하고 또한 달도 져 버리고 마니 그 다지마(但馬) 쪽 이루사 산은 아니지만 바로 산 뒤쪽으로 숨고 만다”는 의미다. “달이 져 버린다, 들어간다”는 표현에 이어 들 입(入) 자로 시작하는 이루사 산(入佐山)이 등장하는 중의(重義)적 수사법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벚꽃과 달이라는 일본 고대 이래의 전통미인 무상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면서 앞으로 등장하게 될 요노스케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애담의 굳건한 독자적 미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번역하고자 한다면 ‘감추고 마는’의 뒤에 “그에 비해 인간의 애욕 세계의 아름다움은 실로 굳건한 것이도다”라고 넣어야만 할 것이다. 즉, 단지 몇 자에 불과한 짧은 문장에 ≪일대남≫의 주제가 충분히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사이카쿠의 표현력에는 그저 경탄할 뿐이다.

이 책의 차례

7세 촛불을 꺼야 사랑이 시작되는도다

8세 부끄럽기만 한 연애편지

9세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될 짓

10세 소매를 적시는 초겨울비에 맺은 사랑

11세 알면 알수록 깊어지는 정

12세 번뇌의 때밀이

13세 이별은 현금 지불

14세 흙벽 방 침구

15세 두발을 밀어 버려도 버릴 수 없는 세상

16세 여자를 멋대로 생각해서는 안 되지

17세 맹세 쪽지에 찍은 옻칠 도장

18세 여행길에서 생긴 마음

19세 어쩔 수 없이 출가하다

20세 뒷골목도 사람 사는 곳

21세 헛돈 쓰는 사랑

22세 소데(袖) 해변의 생선 장수

23세 의복을 낚아채는 여자

24세 하룻밤 광란의 베개 다툼

25세 화대는 다섯 돈 외에

26세 무명옷 유녀의 덧없는 세상

27세 떠벌리다 구설수에

28세 인과의 관문지기

29세 추억의 빗

30세 꿈의 검풍

31세 하녀의 첩이 된 요노스케

32세 대낮의 여우 올가미

33세 눈앞에 펼쳐진 3월

34세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춘 날벼락

35세 나중에는 정처 대접을 받다

36세 같이 먹고 싶은 정월 찰떡

37세 욕심 많은 세상에 이런 일이

38세 목숨을 건 빛나는 물건의 정체

39세 하루 빌려주어 뭐가 되지

40세 당대 멋쟁이를 몰라보다니

41세 지금 여기에 엉덩이가 튀는 여자

42세 먹으려다 말고 소맷자락에 넣어 드린 귤

43세 몸이 불구덩이가 되더라도

44세 마음속 상자

45세 잠을 깨우는 채소 취향

46세 바라본 건 새해 첫 모습

47세 방귀는 하사품

48세 와카 고필 조각으로 누벼 입은 호화로운 겉옷

49세 첫눈 오던 날 아침 찻잔에 떠오르는 모습

50세 바람잡이들과 실컷 놀아 본 날

51세 아무도 모르는 내 돈

52세 술잔 받으러 120리

53세 유곽의 일기장

54세 입맞춤한 술잔이 실린 사각 종이 그물틀

55세 신마치의 저녁, 시마바라의 새벽

56세 편하게 잠을 잔 쇠달구지

57세 정을 건 도박 승부

58세 한잔이 부족해 찾은 사랑 동네

59세 교토의 미인 인형

60세 침실의 최음 도구

지은이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1693)

일본 근세 소설 작가 중 문학사적으로 가장 비중 있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일생 일본 근세기의 주요 시 장르였던 하이카이(俳諧)의 창작자인 하이카이시(俳諧師)를 자처했다. ≪호색일대남≫으로 시작된 일련의 소설로 근세 소설사의 큰 획을 긋는 새로운 장르(浮世草子)의 효시가 되었다.

사이카쿠의 본명은 히라야마 도고(平山藤五)이고, 호는 작품 활동 초기에는 가쿠에이(鶴永)였으나 후에 사이카쿠(西鶴)와 사이호(西鵬) 등도 같이 사용했다. 그는 오사카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5세경부터 하이카이를 익혀 21세경에는 이미 하이카이의 덴샤(点者), 즉 평자(評者)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하이카이 작풍은 처음에는 교토를 중심으로 한 마쓰나가 데이토쿠(松永貞德) 하이단(俳壇) 계열의 흐름에 속해 있었지만, 이후 단린 하이카이(談林俳諧)의 중심이었던 니시야마 소인(西山宗因)과 가까워져 1670년대에는 단린풍(談林風)으로 변모해 갔다. 특히 자파의 신풍을 고취하는 ≪이쿠타마 1만 구(生玉萬句)≫(1673) 창작 이후, 그 화려한 활동에 의해 단린 하이카이(談林俳諧)의 대표적 존재로 주목받았다. 1675년에는 세상을 떠난 아내의 추모를 위해 하루 만에 1000구를 완성해 ≪하이카이 독음 1일 1000구(俳諧独吟一日千句)≫를 간행하는 개성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후 그의 하이카이시(俳諧師)로서의 활동은 정해진 시간에 많은 하이쿠를 짓는 것을 주안으로 하는 야카즈 하이카이(矢数俳諧) 등을 중심으로 더욱 본격화되어 갔다.

그러던 중 집필한 그의 첫 소설 ≪호색일대남≫(1682)이 크게 호평을 받자, 그는 시인을 자처하면서도 동시에 소설 작가로서 41세가 넘은 나이에 많은 산문 작품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 후 ≪제염대감(諸艶大鑑)≫, ≪호색오인녀(好色五人女)≫, ≪호색일대녀(好色一代女)≫ 등과 같은 이른바 일련의 호색물(好色物) 계통 소설을 발표해 상인들의 향락 생활을 둘러싼 여러 모습들, 여성의 성이나 풍속에 관련한 다양한 모습 등을 뛰어난 수법으로 묘파함으로써 인간의 성(性) 문제를 본격적으로 소설의 주제로 설정했다. 이어서 ≪사이카쿠 제국 이야기(西鶴諸国話)≫, ≪후토코로스즈리(懷硯)≫ 등의 작품에서는 여러 지방의 기담과 진기한 사건 등을 통해 당대 민중의 다양한 관심과 흥미에 부응하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또한 ≪본조 20불효(本朝二十不孝)≫라는 작품에서는 20개의 불효담을 통해 인간에게 효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본원적인 문제를 허구의 세계를 통해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남색대감(男色大鑑)≫에서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당대인들의 남색 행위의 이면의 세계가 작가 특유의 문체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

무가(武家)의 복수나 의리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무도 전래기(武道伝来記)≫와 ≪무가 의리 모노가타리(武家義理物語)≫에서는 상인 출신의 작가로서 당대의 현실 안에서 무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그는 1688년에 이르러 일본 최초의 경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영대장(日本永代蔵)≫을 발표한다. 주로 상인들의 경제 생활을 주제로 하는 이른바 조닌모노(町人物)의 첫 작품인 것이다. 이후에는 사후 간행된 ≪사이카쿠 오리도메(西鶴織留)≫를 비롯해 본격 서간체 소설인 ≪요로즈노 후미호구(萬の文反古)≫를 집필했고, 섣달그믐을 작품의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중·하류층 상인의 생활상을 집단적 묘사의 형식으로 창작한 ≪세켄무네잔요(世間胸算用)≫와 상인의 향락 생활의 끝을 그린 ≪사이카쿠 오키미야게(西鶴置土産)≫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그는 1693년 8월 10일, ‘부세라는 달맞이 구경을 하고 지낸 마지막 2년(浮世の月見過しにけり末二年)’이라는 사세(辭世)의 구를 남기고 52세로 생을 마감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5%98%EB%9D%BC_%EC%82%AC%EC%9D%B4%EC%B9%B4%EC%BF%A0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년~1693년 9월 9일)는 일본 근세 소설 작가 중 문학사적으로 가장 비중 있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문인이다. 본명은 히라야마 도고(平山藤五)이고, 호는 작품 활동 초기에는 가쿠에이(鶴永)였으나, 후에 사이카쿠(西鶴)와 사이호(西鵬) 등의 호도 같이 사용했다.

생애

[편집]

오사카(大阪)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5세경부터 하이카이를 익혀 21세경에는 이미 하이카이의 덴샤(点者), 즉 평자(評者)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하이카이 작풍은 처음에는 교토를 중심으로 한 마쓰나가 데이토쿠(松永貞德) 하이단(俳壇) 계열의 흐름에 속해 있었지만, 이후 단린 하이카이(談林俳諧)의 중심이었던 니시야마 소인(西山宗因)과 가까워져 1670년대에는 단린풍(談林風)으로 변모해 갔다. 특히 자파의 신풍을 고취하는 《이쿠타마 1만 구》(生玉萬句), 1673) 창작 이후, 그 화려한 활동에 의해 단린 하이카이(談林俳諧)의 대표적 존재로 주목받았다.

그러던 중, 하이카이 창작 작업 와중에 집필한 그의 첫 소설 작품인 《호색일대남》(1682)이 크게 호평을 받자, 그는 시인을 자처하면서도 동시에 소설 작가로서 41세가 넘은 나이에 많은 산문 작품을 만들어 내게 된다.

호색일대남》은 주인공 요노스케(世之介)의 일대기의 형식을 취하면서 그의 호색 편력을 중심으로 17세기 일본의 세속적 현실인 부세(浮世)의 모습과 당대인들의 심적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이카쿠의 청신한 발상과 문체는 그 이전의 가나조시를 뛰어넘어 현대의 풍속 소설의 성격을 지니는 우키요조시의 새로운 영역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 후 《제염대감》(諸艶大鑑), 《호색오인녀》(好色五人女), 《호색일대녀》(好色一代女) 등과 같은 이른바 일련의 호색물(好色物) 계통 소설을 발표해 상인들의 향락 생활을 둘러싼 여러 모습들, 여성의 성이나 풍속에 관련한 다양한 모습 등을 뛰어난 수법으로 묘파함으로써 인간의 성(性) 문제를 본격적으로 소설의 주제로 설정할 수 있었다. 이어서 《사이카쿠 제국 이야기》(西鶴諸国話), 《후토코로스즈리》(懷硯) 등의 작품에서는 여러 지방의 기담과 진기한 사건 등을 통해 당대 민중의 다양한 관심과 흥미에 부응하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또한 《본조 20불효》(本朝二十不孝)라는 작품에서는 20개의 불효담을 통해 인간에게 효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본원적인 문제를 허구의 세계를 통해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남색대감》(男色大鑑)에서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당대인들의 남색 행위의 이면의 세계가 사이카쿠 특유의 문체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 무가(武家)의 복수나 의리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무도 전래기》(武道伝来記)와 《무가 의리 모노가타리》(武家義理物語)에서는 상인 출신의 작가로서 당대의 현실 안에서 무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1688년에 이르러 일본 최초의 경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영대장》(日本永代蔵)을 발표한다. 이후에는 사후 간행된 《사이카쿠 오리도메》(西鶴織留)를 비롯해 본격 서간체 소설인 《요로즈노 후미호구》(萬の文反古)를 집필했고, 섣달그믐을 작품의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중·하류층 상인의 생활상을 집단적 묘사의 형식으로 창작한 《세켄무네잔요》(世間胸算用)와 상인의 향락 생활의 끝을 그린 《사이카쿠 오키미야게》(西鶴置土産)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사이카쿠는 1693년 8월 10일, ‘부세라는 달맞이 구경을 하고 지낸 마지막 2년(浮世の月見過しにけり末二年)’이라는 사세(辭世)의 구를 남기고 52세로 생을 마감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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