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조선보다 빨리 근대화하며 조선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 참근교대, 은제련과 광산업, 농산물 선물거래, 네덜란드와의 교역 /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의 경제호황이었던 겐로쿠 시대 / 그러나 빈부격차와 높은 세율 때문에 조선과 일본의 농업인들 중 어느쪽이 더 윤택했는지는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1. 개요[편집]

17세기 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현 도쿄)를 본거지로 창설한 에도 막부(江戸幕府)가 집권하던 시대.

2. 역사[편집]

1603년에 정이대장군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천하패권을 확립한 1615년부터 1867년 11월 9일의 대정봉환 때까지 약 252년 간 지속되었다. 전란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이전의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 전국시대와는 달리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큰 혼란이나 전쟁 없이 평화가 지속된 안정기였다. 또한 일본 역사 전체 기준으로 볼 때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1] 사실상 반(半)중앙집권 시대이라는 것.

또한 이 시기부터 전국시대까지 변방이었던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됐고, 홋카이도 류큐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으며[2] 특히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의 중심지는 기존의 교토, 오사카 중심의 긴키 지역에서 현대의 도쿄 중심의 간토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3] 다만 에도 막부가 권력의 상당수를 독식하였을 뿐 지배 명분이 없다는 한계가 있어 언젠가 다시 내전이 일어날수 있다는 한계 또한 분명했다.

에도 시대 중기인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에는 경제 호황기로 국부를 축적하고 국력도 신장해[4] 소위 겐로쿠 시대를 맞았다. 겐로쿠 시대는 일본 막부 최대의 전성기로 이 기간동안 상업이 흥업하고 오늘날의 선물거래와 같은 쌀 선물거래가 등장하고, 이러한것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카부나카마(株仲間)를 형성하기도 했다.[5]

겐로쿠 시대가 끝날무렵, 방탕해진 재정을 개혁하고자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필두로 享保の改革(きょうほうのかいかく, 교호년의 개혁)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막부의 재정지출을 줄이며 세금의 증세와 치수사업, 신전개발(新田開発)[6]을 실시했다. 또한 급격하게 올라간 쌀값을 견제하고자 금 비율이 낮은 겐분코방(元文小判,げんぶんこばん)을 제조해 의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7] 이를 통해 에도시대는 중흥의 시기를 열었다.

이후 타누마 시대(1751~1789)에는 긴축재정을 버리고 상업자본의 이용과 적극적인 정책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부패와 뇌물의 시대로 일컬어지며 농민들의 반란(잇키)가 많아졌다. 계속적으로 재해, 기아가 속출하고, 1772년 에도에서 화재가 발생해 약 2만명 가량의 인명피해를 입자 결국 마츠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쥬(老中)가 되어 쌀의 선물거래 규제 완화, 귀농민 보호, 술 생산량 제한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寛政の改革(かんせいのかいかく, 간세이년의 개혁) 을 실시했다. 이것으로 다시 막부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텐보(1841~1843)년에 대기근, 반란, 소동, 모리슨호 사건등이 겹쳐 다시 막부가 기울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로쥬 미즈노 타다쿠니는 위의 교호년의 개혁과 간세이년의 개혁에 따라서 개혁을 실시했다. 주로 탐관오리를 귀양시키거나, 가부키쵸 일대의 오락가를 닫아버림으로서 민간의 낭비를 없애버리는식이었다. 또한  아편전쟁에서 패배한걸 듣고는 서양식 포술을 도입하게하고 군사 체제를 서양식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그외에 선물시장에서 쌀 시세를 혼란시키게 하고있던 카부나카마를 추방시켰으며, 파산한 다이묘들을 위해 그들이 가지고있던 빚을 무이자로 해주고 원본은 20년안에 갚으면 된다는식으로 재정을 안정시켰다.

결국 1853/54년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한 뒤 격동의 동란기에 빠져 사쿠라다 문 밖의 변(櫻田門外の變)이 일어나고 번들은 대놓고 막부의 말을 안 들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등 사실상 통치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사쓰마, 조슈 등의 토막(討幕)파 번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1867년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소멸, 이듬해 무진전쟁(보신(戊辰)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에도 막부가 소멸한 1868년은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明治) 시대의 시작이라 하여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도.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에도 막부 문서
 참고하십시오.

4. 경제[편집]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화를 이룩하여 일본 내수 경제의 기틀을 잡은 시기로, 이 2세기 반의 기간이 20세기, 21세기까지 일본 내수 경제의 규모가 성장하고 유지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 시기는 전국시대의 자유로운 교역보다는 쇠퇴했지만[8], 해외에 도자기 우키요에 등을 수출하고 , 을 대대적으로 채굴[9]하면서 국부를 쌓은 시기다. 각 번의 다이묘가 기거하는 곳 근처에는 온갖 특산품이 거래되었고 유통량이 늘어난 덕분에 금, 은 화폐 사용이 일반화 되었으며, 한편으로 전국시대 난립했던 관소[10]들이 철폐되고 해상 교통이 대통합하는 등 상업 발달이 두드러진 시기. 다만 후기에는 중국의 명나라와 그 후신 왕조인 청나라가 이 일본 금, 은, 동을 죄다 흡수해버려서 곤란했던 적이 있다.[11] 그래서 청나라 상선 중 허락을 받은 배만 무역할 수 있게 1715년부터 신패라는 것을 발급했다.

실제로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서 일본의 최대 수출품이 에도 막부 극초기에는 이었고 이후 구리였다. 네덜란드와 중국의 상인들은 데지마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은, 구리를 구입했다. 초창기에는 은이 주된 수출품이었지만 문제는 은을 지나치게 많이 캐다보니 은의 생산량이 매년 기복이 심하고 점차 고갈됨에 따라 일시적으로 막부가 보유하고 있던 금을 수출하기도 했는데[12] 때마침 일본 각지에서 대규모 구리광산들이 개발되면서 구리가 일본의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잡았다. 사타케 가문이 지배하던 쿠보타(아키타) 번의 인나이 광산이 오랬동안 일본 최대의 구리광산이었는데 막부와 쿠보타 번은 수출용 구리 물량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을 했다.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서 수출하기 위한 구리는 일본 각지의 구리 산지에서 일차 가공을 한 뒤에 모두 오사카로 운반하여 오사카의 구리 제련업자들이 독점적으로 제련을 했는데 막부는 수출용 구리의 가공 및 유통을 오사카로 집중시킴으로써 구리의 생산을 통제하고 세수를 확보하려고 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 3대 재벌이던 스미토모 재벌이 바로 에도시대 오사카의 구리제련업자 가문에서 비롯했다. 스미토모 가문은 오사카 구리 제련업자 조합의 주식 8주 중 3주를 보유한 일본 최대의 구리제련업자였다. 오사카 제련업자들의 구리제련기술 독점은 무려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쿠보타 번을 비롯해서 구리광산을 보유하고 있던 여러 번들이 점차 구리제련기술을 확보하기 시작하고 구리제련업자들 또한 직접 구리 광산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다.

매해 수백만 관의 구리를 해외로 수출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세계적인 구리 생산지역이었기 때문에 에도시대 일본은 상업과 화폐경제 발달이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였다. 윗 문단에서 언급한 스미토모와 함께 일본 3대 재벌인 미쓰이 그룹 역시 1673년 교토의 포목상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에도 시대에서 쌓여진 경제와 국력은 훗날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에 큰 기반이 되었다.

4.1. 생활 수준[편집]

"너무 배부르면 농사일을 싫어하게 되고, 농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곤궁해지면 흩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님께서는 향촌의 농민들이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도록 주의해서 쌀을 잘 바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 에도시대의 저서 '승평야화(昇平夜話)' 중에서
16세기경 일본의 더 높은 토지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농민들은 조선의 농민들보다 더 나은 삶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일본의 농민들은 60%의 생산량을 세금으로 바쳐야 했고, 이는 조선의 농민과 비교 불가한 수준이다.

- 언제, 어떻게 일본은 한국을 따라잡았는가 중에서

나라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높았고, 괄목할 만한 경제적 발전이 있었으나 그 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했고 농민들이 농노마냥 착취당했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평민들의 생활수준이 국가의 경제력에 비해 열악했다. 일례로 에도 시대에는 〈무명이외는 입어서는 안 된다〉·〈아침부터 밤까지 일할 것〉·〈술이나 차는 마시지 말 것〉 등의 엄격한 룰로 막부에서 농민들을 심하게 통제했었다. 심지어는 〈농민과 깨는 짜면 짤수록 나온다〉는 막부 관리의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장인과, 상인, 무사계급이 살던 도시와는 딴 세상인 것. 거기다 무사들은 농촌에 기거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농민은 사회를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존재이기에 농민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는 법까지 등장했다(....). 당연한 것을... 한마디로 〈살리지 않고 죽이지도 않는 정책〉으로 일관한 것이다. 당시의 농민은 수확의 40~50%를 세금으로 착취당했다.[* 일명 오공오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수확량을 측정하기 위해 실시한 태합검지(太合檢知)를 보면 평균 세율은 칠공삼민이라 불리는 67%였다. 그나마도 세키가하라 이후 많은 다이묘와 무사들이 내쳐지면서 저정도로 줄어든거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과 청나라에 비해 관료층들이 비대했기 때문에[13] 세금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절대적으로 높았던것이었다. 물론 세금이 높았다고 영주들이 참근교대로 인해 실제로 쓸수있는 예산이 적은 경우가 많아 환곡같은 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14] 이마저도 지주 밑에서 소작을 하였다면 삼정의 문란 시기 마냥 절반 뜯기고 또 뜯기는 격이었다. 다행인 점은 소작농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조선과 달리 에도시대에는 영주(다이묘)가 지주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 그러니까 40~67% 세금은 소작료와 세금을 합친 것이었다. 동시대에 다른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보통 10%를 세금, 50%를 소작료로 지불하였다. 이 시대는 대규모 간척과 치수사업을 동반하였고 농업도 급속도로 발전하여 생산성이 무로마치 시대의 3배까지 급상승했지만 농민들의 생활은 가렴주구로 고통이 끊이질 않았다.[15] 덕분에 잇키 또한 자주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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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위의 그래프에서 보는거와 같이 에도시대의 성인의 평균 신장은 남성이 150센티대 중반대로, 여성은 그것보다 10센티 정도 더 작았으며 조선시대 남성들에 비하면 왜소한 수준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모든 시대 중에서 일본인들의 몸집이 가장 작았던 시기가 바로 이 에도 시대이다. 이는 영양상태가 나쁜 데다가 좁은 연립 주택 등에 밀집해 생활한 스트레스의 영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즉, 극빈한 생활고로 인한 발육부진으로 키가 이전 시대보다도 더 작아졌다는 것이다.에도시대- 출토된 인골로 본 영양상태 실제로 그 당시 영양상태의 간접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는 신장에서의 비교만 봐도 동시대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약 6cm 정도 더 컸다고 한다. 출처 현재 한국인과 일본인의 키 차이가 대략 3cm 정도이니 오히려 전근대에 한일간의 키 차이가 2배 가량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하의 연구들은 주로 학술적 논문으로, 전문적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 가능한 정도지만, 요약하면 일본은 그 당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이 높은 세율로 착취당해서 농본주의 사회였던 조선과 중국의 일반적인 농민들보다 삶의 수준이 더 높았다고 단정짓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이 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시사한다. 특히 인두세를 피하기 위해 신생아를 죽이던 마비키 풍습은 뭘 어떻게 해석해도 일본 농민들의 삶이 고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심한 착취를 당했다는 것이 피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 마비키 말고도 일본 농민들이 극심한 세금 착취와 가난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여자아이를 유녀(매춘부)로 팔아넘기는 일이었다. 특히 일본 동부의 에치고 출신 여성들이 다른 지방의 여성들보다 20% 정도 더 많이 유녀(매춘부)로 팔렸는데, 피부가 부드럽고 인내심이 강한 점 때문에 선호되었다고 한다. # 이렇게 팔려나간 유녀(매춘부)들의 비참한 삶은 요시와라 유곽 문서와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문서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아울러 가난 때문에 농촌의 여자들을 유녀(매춘부)로 파는 일본의 풍습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이들을 가라유키상이라고 부른다. 1920년까지 약 30만 명의 일본인 여성들이 가라유키상이라는 이름으로 해외 각지에 매춘부로 팔려나가야만 하였다. #, #

그외 자료로는 나카무라 사토루와 박섭의 저서인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의 본문에서도 에도 막부의 공식적 수취율은 21%였다고 서술하고 있다.[16] 또한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에서 밝히기를 에도 시대의 공식적 세율은 조선의 6배,청의 11배였다고 한다. 그외 경제사학자 이헌창은 조선 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2010)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의 1인당 소득이 조선보다 높았지만 조세 부담률은 조선보다 월등히 높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외 런던정경대 경제사학과 교수인 스티븐 브로드웨이는 1990년의 미국 달러로 환산한 1800년의 일본과 청, 인도의 구매력 지수는 일본 876 달러, 청 639 달러, 인도 569 달러 이후 1850년 일본 933 달러, 청 600 달러, 인도 556 달러로 추산한다. 더하여 근세 일본의 일인당 소득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으며[17] 자료 일본의 평균 수명 또한 중국과 인도보다 10년 이상 높았다. 자료 [18] 다만 18세기 이후로는 평균수명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만큼 인구가 더 늘지는 않았는데 이는 고율의 세금으로 인해 일본 농노들의 삶이 발전된 상업수준에 비해서 팍팍했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한 마비키의 영향 때문이었다. 링크

그러나 수취의 정황 만을 놓고 당시의 삶의 질을 평가하기에는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반론도 일부 있다. 첫 문단에서 언급된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돼있다.
1870년의 일본은 일인당 연간 1.76석(이중 실제 쌀은 1.14석)을 생산하고 있었다. 조선의 경우 1910년의 농업생산량은 개항기 동안 도입된 일본의 다수확 품종 벼, 일본이라는 대규모 쌀 수출 시장의 등장과 미가 상승으로 인한 동기부여에 의해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상당량 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전 수치는 잘 알 수 없으므로 일단 이 수치를 통하여 비교해보기로 한다. 1910년의 조선 인구는 164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2682만석이므로 인구 1명당 생산량은 1.63석으로 이는 kg 단위로 환산하여 234kg이며 이 중 실제 쌀은 96kg이다.[19]

오히려 일본인의 곡물 생산량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 박섭 교수는 해당 저서에서는 1910년 조선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이 96kg(0.64석) 수준이라 서술하였지만 정작 박섭 교수의 또 다른 연구저서[20]를 보면 1911년 일인당 미곡생산량은 0.72석이라 서술하였다. 이렇게 박섭 교수 스스로의 연구에서도 꽤나 상반된 통계가 나온 만큼 적어도 두 통계중에서 하나는 본인의 연구 결과에도 어긋나는 주장으로 보여진다.

또한 일인당 미곡 생산량/소비량의 격차발생은 근세의 것이라기 보다는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농업이 근대화 됨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심지어는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농업의 근대화가 일본 정부의 주도로 대대적으로 시작된 이후의 일본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과 일본 만큼 농업의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한일강제병탄 직후 조선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을 비교하면 그다지 큰 차이가 존재한다 보기 힘들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조선의 농촌에서 농업에 관하여 동시대 일본 만큼의 근대화가 제대로 진행되기 이전인 1911년 조선의 1인당 미곡생산량은 약 0.72석, 총 곡물 생산량은 약 1.65석으로 추정되며[21], 그외 허수열 교수의 추계를 인용하면 1910년 조선의 1인당 미곡생산량은 약 0.84석에 이른다. 일본측의 1인당 생산량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0년을 기준으로 했을시에는 일본의 일인당 연간 총 곡물 생산량은 약 1.76석(이중 실제 쌀은 약 1.14석)으로 추정된다.[22] 하지만 또 다른 자료인 1881년 일본 통계연보중 미곡생산량 값만을 바탕으로 구한 1881년 일본의 1인당 미곡생산량을 살펴보면 약 0.81석 수준이었다. 즉, 일본과 조선 사이의 미곡생산량 차이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간적인 차이를 생각했을 때 생각보다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인 것이다.
"일본 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에 일에 불구하다."

- 조선통신사 원중거, 승사록 중에서
"일본 시골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아로 들어가고 풍년이 들어도 콩 반쪽도 잇기 어려워 스스로 처자를 팔아먹기 까지 한다. 빈부가 균등치 않음은 다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 조선통신사 신유한, 해유록 중에서[23]

물론 "일본의 공식적 공조율은 21%"라 논하였던 나카무라 교수가 조선의 공식적 공조율에 관해서는 "3.7%"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그리고 에도시대에 일본을 방문하였던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 사실상 농노화가 된 일본 농민들의 심각한 빈곤상태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등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마비키를 포함한 실제로 존재했던 풍속들을 보면, 적어도 극심한 빈부격차, 혹은 생활격차가 존재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거기다 당대 일본은 육식금지령으로 인해 육류섭취 또한 불가능했다. 실제로 18세기 이후로는 에도 시대 일본의 인구가 계속해서 비정상적으로 일정하게 2700만명 선으로만 유지(정체)되었고 다음 자료에서 보듯이 일본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노들에 대한 식사량 제한과 이 부족한 식사량 그리고 과중한 세금 부담 때문에 마비키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 등을 보면 에도 시대 일반 백성들의 삶의 질이 전혀 저하되지 않았다고 보기 힘든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다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경제사학자 이헌창은 <조선 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2010)에서 일본의 일인당 소득이 조선보다 높았지만 조세 부담률은 조선보다 높았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수취 정황만으로 당시의 삶의 질을 평가하기에는 일부 무리가 있다. 가령 19세기 초 호남지역의 농가호수의 비율에 대해 丁若鏞은 호의 비율로 살펴볼 때 전체 호수 가운데 지주는 5%, 자작농은 25%, 소작농은 70%라고 보았다. 병작반수제, 지주의 전정을 소작농에게 부담시키는 행위, 변질되어버린 잡세, 환곡, 군정 등으로 그 부담이 매우 커진 까닭이다. 배향섭 교수의 저서 임술 민란과 19세기 동아시아 민중 운동에서는 조선 후기 농민들이 일년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물로는 소작료와 환곡을 감당하기도 힘들었으며 기타 각종 잡세의 부담은 직포를 짜서 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직포업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으나 가장 기본적인 생산물인 곡물은 지주와 국가에 수취 되어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가내 수공업에 의지하였는데 이마저도 군역으로 수취 되었던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정약용 또한 생활고에 못 이겨 소작농들이 자신의 처자를 노비로 매매하는 행위와 군역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거세를 하는 행위를 보고 개탄 하기도 하였다. 한길사 한국사에서는 조선 후기 일반적인 지대와 세금은 수확량의 70~80% 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결국 수취의 정황(일본의 높은 세율) 만을 놓고 조선의 생활이 일본이 그것보다 나았다고 보기에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어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더하여 조선은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자 18세기 중반까지 인구의 3할을 차지했던 노비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일본은 농노 비율이 80%였으며[24] 조선의 노비 비율은 18세기 영조 시대 이후로는 10% 미만으로 떨어졌고 그로인해 영조 이후 조선후기에는 노비제가 사실상 해체되었음은 조선사에 비판적인 이영훈 교수와 그 이영훈과 노비제도 문제로 대립했던 미국의 제임스 팔레 교수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므로 이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애초에 일본의 마비키 풍습 만큼 자기 자식들을 지속적으로 죽여야 할 만큼 노비들의 생활이 매우 처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25]

무엇보다 그 노비들을 제외한 조선의 소작농들의 경우 최초의 주장대로 반작법을 적용해 소작을 한다 해도 소작에 적용되는 반작법은 국가에 원천징수되는 세금의 개념이 아니며 지주가 전세를 대신 내주거나 반작법임에도 수확물의 1/3을 받는 등의 소작농과 지주 사이의 자율적인 계약조건의 사전 합의가 있었으며, 링크 그렇기에 조세와 상관없이 추가 수확을 위한 땅을 임대하는 자율적인 계약조건으로 보아야하며 추가 수확량에 따라 소작인들이 자영농으로 변환되거나 하는 경제논리적 사항일 뿐이었다. 즉, 강제적으로 원천 징수되는 당대 일본의 세금과는 전제 자체가 아예 다르다는 것이다. 거기다 조선에서는 순수하게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만 부담하는 순수 자영농과 다수의 외거노비로 경작하는 지주계층이 일제의 수탈이 시작되던 시기의 자료로 비교해도 링크 이미 20%를 넘겼지만 당대 일본 농노들은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줘서 징세권을 나눠가진 '기생지주'들에게 내야하는 몫이 기본 세금 부담에 추가로 더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 세금 부담은 일본 농민들이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외에 에도시대 당시의 생활상을 참조 할 자료로는 다음의 기사가 있다. "도시=개미지옥"이었다... 에도 시대로부터 본 일본의 인구 감퇴기에 일어났던 것들 이 기사는 에도 시대의 인구 변동에 대해 시즈오카 현립대학(静岡県立大学)의 학장인 키토 히로시(鬼頭 宏) 역사인구학(歴史人口学) 교수가 에도시대 당시의 생활상에 대하여 해설한 것이다.

위의 기사는 여러가지로 참고할 내용이 많이 있는 기사로 해당 기사에서 키토 히로시 교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던 17세기에는 여성이 한 사람당 5~6명은 낳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여러 지역에서 4명에 못 미치게 되었다. 수유 기간을 늘려 임신을 막는다거나 낙태나 솎아내기 등의 수단을 통해 출생 억제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생률을 낮췄다는 것은 '출생억제'뿐만이 아니다. 각지에서 여성의 만혼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이 늦어졌다라고해도 고작 3년 정도이지만, 자녀 수를 1명 정도는 적게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중략... 토지에 의존하고 사실상의 쇄국으로 인해 자원을 국외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 없다는 조건하에 인구 3천만 명의 도쿠가와 일본은 8대 장군 요시무네 시대에 성장의 한계를 맞았던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일본의 인구 정체에 대하여 경제적인 요인에 의한 마비키와 낙태 등의 수단이 인구 정체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키토 히로시 교수는 "에도 시대는 시장 경제화가 진행된 농경 사회이다. 당연히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도시 인구도 전국 인구의 정체에 보조를 맞추도록 한계점에 도달했다. 사이토 세이지 씨의 조사에 따르면, 도시 인구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크게 증가했지만, 이후 19; 세기 중반까지는 감소하고있다. 그동안 농촌 인구는 17세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꾸준히 증가했다. (사이토 세이지 「에도 시대의 도시 인구」). 중략... 도시의 규모별 분포의 변화를 보면 1750년부터 1850년까지 기존의 대도시에서는 인구가 정체했지만 1 만명 미만의 지방 도시에서는 도시 발전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하며 인구 정체가 농촌 뿐만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설명하였다.
에도시대 후반에 일어난 도시 인구의 정체에는 주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는 도시 환경이다. 도시=묘장설, 혹은 도시=개미지옥설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존재했다. 도시의 위생환경이 농촌보다 현격히 나빠 정상적인 해에도 농촌부보다 사망률이 높았다. 천연두, 홍역, 결핵, 독감, 설사·장염, 매독 등이 만연하기 쉽고, 막부 말기에는 콜레라가 여러 번 덮쳤다. 과밀한 거주 환경과 함께, 소독되지 않은 수도가 감염증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또 현재와 마찬가지로, 도시에서는 가족을 가지는 것이 곤란하고, 출생률은 농촌보다 낮았다. 종종 사망률은 출생률보다 높았고 20세기에 가까워질 때까지 도시 지역에서는 자율적으로 인구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도시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농촌부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도시의 존재는 지역 인구를 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즉, 요약해보자면 에도시대 당시 대도시 지역의 주민들은 생각과 달리 열악한 환경 탓에 위생환경이 농촌보다도 더욱 나빠서 정상적인 해에도 농촌부보다 사망률이 더 높았고 인구정체가 마비키 등의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농촌과 대도시 모두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 당시 일반 일본 평민들의 평균적인 삶은 번화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서 일본 농업의 생산성이 기후의 영향으로 조선보다 비교적 높았음에도[26] 조선의 농민들에 비해 생활수준이 특별히 나았다고 결론내리기는 어려운 점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칠공삼민[27]으로 대표되는 과중한 세금 부담은 일본 농민(농노)들에게는 크나큰 부담이었으며 이는 마비키라는 영유아 살해 문화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28] 즉, 전체적인 경제력은 조선에 비해서 앞서나가기는 했지만 세율 문제 때문에 일반 평민들의 삶이 당대 조선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결론내리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29]

그외 2010년에 발간되었던 매디슨 프로젝트에선 1820년 일본의 소득은 669달러, 조선은 600달러로 큰 차이가 나진 않았다고 추정했었다. 하지만 이후의 2018년 1월 발간된 매디슨 프로젝트(출처)를 확인해보면 16세기 이후 일본의 1인당 경제력은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남한과 북한의 데이터는 1820년부터 제시되어 있는데,[30] 지역별 성장 비교에 알맞은 소득으로 1800년의 일본은 1009 달러, 1820년의 남한과 북한은 465달러와 245달러, 남북한을 포함한 조선은 411달러로 나타나 있으나, 이것이 빈부 격차를 감안한 수치인지는 불명이다. 다만, 전근대 조선시대의 1인당 GDP에 대해서는 아직 신뢰할만한 추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유념해야 한다.[31]

한편 2007년에 이헌창 교수와 쿄지 후카오 교수가 공동저술한 논문 'When and how did Japan catch up with korea'에 따르면 1800년의 조선의 1인당 gdp는 600달러, 일본의 1인당 gdp는 700달러였다고 추정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16~18세기에 일본이 조선의 1인당 gdp를 따라잡았고 19세기에 양국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졌다고 추정했다. 정확히는 16세기만 해도 일본 국민은 고세율 때문에 조선보다 삶의 질이 낮았지만, 생산력의 차이로 점점 오르기 시작해 에도시대 말기 쯤 일본 국민의 삶의 질이 조선 국민의 삶의 질을 추월했다고 한다. #

4.2. 화폐제도[편집]

에도 시대 이전에는 일본의 각지마다 다양한 지역 화폐가 쓰였지만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는 화폐발행권을 독점하고 금은동 3종 동전을 기반으로한 통화양식으로 전국적으로 통일한다. 이 동전들은 서로 교환할 수 있었고 교환 비율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교호의 개혁이라던가 간세이의 개혁이라던가 주로 금 화폐를 조정재정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금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서 바뀌었다.
예를들어 소액 거래에 쓰이는 일반 동전은 전(錢) 또는 몬(文) 이라고 불렸고 1,000 전이 1 칸몬(貫文), 금 1냥과의 교환비율 대체로 전4칸몬, 4000 전이 금화 1냥이었다. 즉 에도시대 초기에는 금(金) 1냥(両) = 은60 몸 (匁 , 돈 = 3.75 그램, 60몸=약225그램) =전4칸몬 (4,000文). 고정 비율은 아니고 시세에 따른 변동제여서 정책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인플레가 심해져 동전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다.[32]

금화(金貨)로는 코반 (小判, Koban) 금화가 1냥(両)으로 가장 널리 쓰인 대표적인 금화였고 다른 화폐의 기준이 되었다. 약간 길고 둥근 타원 형태로 일본 사극 등 시대물 에 흔히 등장한다. 무게는 금 15그램 가량. 에도시대 당시 1냥의 가치는 쌀 3~4 고쿠(石, 1석 = 한 사람의 1년분 식량, 약 150 kg )으로 4석을 기준으로 무게로 약 600 kg 분량, 20 kg 쌀 포대로는 30포대 분량이었다. 1,000달러 가치 이상의 매우 고액권인 셈이다.

오오반(大判, Ōban) 금화[33]는 그 10배인 10냥(両)으로 초기에는 재산축적이나 고액 거래에만 한정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막부의 재정 정책에 따라 자금이 필요할 때에는 금의 비율을 적게 조절해 많이 유통시키거나, 긴축을 실시할 때에는 금의 비율을 올리는 식으로 화폐 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냥의 1/4 인 1 분(分) 화폐는 금 또는 은으로 만들어졌다. 1냥의 1/16 인 1주(朱)라는 단위도 있었다.

에도시대 금화 1냥의 가치는 오늘날에는 약 12-17만 엔 정도로 본다. 1700년 당시 음식 소바 250 그릇 값. 일급 은화 5문 4분인 목수가 금화 1냥을 벌려면 12일간 일을 해야 했다. 1전은 현대의 4엔 가량이니 한화로 40원 정도.

4.3. 메이지 유신과 에도시대[편집]

과거 유신지사들은 메이지 유신과 개국의 공로를 과장하기 위해 에도시대가 유럽과 비교해 후진적인 체제였다는 관점을 주장했으나 현대에는 수정되었으며, 이에 대해 재반박이 이루어지는 등 논쟁이 있는 편이다. 실제로 일본의 근대화 시기는 러시아나 스페인,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의 국가들에 비해선 다소 늦지만 착실히 뒤따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며, 메이지 유신을 실시 할 당시에 지식인들은 필요이상의 급박감을 느껴 서양문물을 많이 들여왔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제기획청의 보고서에서는 1830년대에 산업혁명을 마무리한 영국과 같은 국가에 비교하면 일본은 굉장히 뒤쳐져 있었으나 일본은 이미 해로와 육로로 도로를 만들어서 운송의 기본 시스템을 확보하고 있었고, 쌀 선물거래와 같은 유사 주식시장 같은 시스템을 구축했다. 교육면에서는 테라코야나 다이묘들이 설립한 학교들이 200개가 넘었다. 또한 일본의 수출이 1600년대에서 1740년까지 100년사이 4배로 급확대하고있음을 보아 선대제수공업(공장수공업의 전단계)이 확립되어있었음을 알수있다.

실제 메이지시대 초기 수학률은 남자 43% 여자10% 정도로 나타나며, 이는 이미 이전의 세대가 테라코야나 다이묘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기초적인 학문을 배워서 적응하던 인수가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한다. 다만 테라코야의 절대적인 수는 조선의 서당보다 적었으며 일부 농촌 지역에는 편지글을 읽고 쓰는 비율이 10%이하로 나오는 등 당시 서양에 비해 부족했다 볼 여지가 크다. 흔히 말하는 식자율 70%는 이름만 읽고 쓰는 비율이다.

에도시대의 일본이 타국과 비교해서[34] 나았던 국가적 인프라와 교육, 경제적 여유가 메이지 유신에 공헌한 정도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일본으로 하여금 개국을 하고서도 다른나라에 식민지가 되는 일 없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는데에 공헌했다는 해석도 있으며 반대로 메이지 유신이 에도시대의 폐쇄성과 후진성을 극복함으로서 현재의 일본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의견도 있다.#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 성공 원인을 단순히 에도 시대의 내재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만은 없다.

5. 문화[편집]

5.1. 식문화[편집]

에도 시대에는 에도를 비롯한 대도시들은 빠른 발전을 거듭하였고 이들 도시에는 대규모 공사가 매일같이 진행되는 등 한밑천 잡아낼 건덕지가 많았기 때문에 전국에서 청년들이 꿈을 가지고 상경하였고 한편으로는 독신생활을 하고 있는 하급 사무라이들도 대도시에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이처럼 에도 시대 대도시에는 독신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현대의 패스트푸드와 비슷한 요식업이 전례없이 발전하였는데, 17세기 에도에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전문점이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에도 시대 일본의 대도시들은 노점 음식의 천국이기도 하였다. 노점에서는 텐푸라, 장어꼬치, 스시, 오뎅, 우동, 소바, 모치, 단고, 오징어구이 등을 취급하였다. 이 중 텐푸라는 노점에서만 먹을 수 있었는데, 이는 에도 막부가 화재 예방책의 일환으로 텐푸라를 실내에서 튀기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노점의 음식은 대개 정규 음식점의 음식에 비해 질적 수준이 낮았지만 이러한 특권(?)도 있었다는 것.

현재 일식의 얼굴마담인 스시도 에도 시대에 현재와 비슷한 꼴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에도 시대 일본에서 즐겨먹던 스시는 오늘날의 스시와는 모양새나 만드는 방식이 다른 육면체의 하코즈시(箱寿司)였다.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스시'는 니기리즈시인데, 니기리즈시는 에도 시대 막부실세 저택 앞에 한 스시 명인이 점포를 차려 가장 맛있는 생선부위를 활용해 만든 고급 스시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시가 대중들의 식탁에 올라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자 어업과 어패류 교역업도 활기를 띄었는데, 오늘날 세계 최대의 수산물시장인 츠키지 시장은 이 시기에 에도에서 형성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것이다.

다도 또한 에도 시대에 이르러 더 발전하였고, 류큐를 통해 설탕이 대규모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다도의 필수요소인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도 오늘날의 그것과 가까운 형태로 진보하였다.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 특히 유럽과의 교역으로 새로운 요리기법들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포르투갈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빵 문화가 들어왔으며, 오늘날 동아시아권에 잘 알려진 빵인 카스테라(カステラ)는 이 때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빵이다. 상기에 언급한 텐푸라도 유럽식 튀김법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이다.

단, 이 자료에서 보듯이 에도시대 일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노들은 거의 대부분 일즙일채(一汁一菜)의 식사만 하는 등[35], 식사량과 음식 반찬에까지 상당한 제한을 당해서 다양한 요리들을 맛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5.2. 교육[편집]

에도 시대의 초등 서민교육은 테라코야(寺子屋)에 의해 수행되었다. 중세 사원의 교육원에 유래를 두고 있는 테라코야는 입학생들에게 문자의 해독과 쓰기, 계산 등 간단한 산수, 도덕, 그리고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 등을 가르쳤다. 테라코야의 교사는 주로 학식있는 평민들이었고, 전체교사의 10% 가량이 여성이다. 테라코야는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는데 10명 가량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부터 100명 이상의 학생이 수학하는 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테라코야는 남녀공학이었다.

상위 학교로는 번교(藩校)와 사숙(私塾)이 있었다. 학교는 서민용 교육기관이었으며, 사숙은 민간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 번교는 각 번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일반적인 번교는 재지 사무라이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나, 개중에는 서민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도 있으며 일반적인 사족학교들 중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수가 일반 평민에게도 입학을 허용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생도들은 번교에 대개 7~8세에 입학하여 교육적 성취도에 따라 13세에서 2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에 졸업하였다.

대부분의 번교는 유교(특히 성리학) 위주의 교육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었으나 소수의 일부는 국학이나 난학, 의학 등을 메인으로 삼기도 하였다. 번교는 사무라이 학교인만큼 검술과 궁술 등의 무예도 중시하였으며, 번교생들은 각종 기예에 대한 수행도 겸하였다.

유교 이외의 학문을 중히 여기는 학교의 비중은 번교보다 사숙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사숙으로는 일본 개화기를 주도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들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사숙에는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입학할 수 있었고, 유교 위주의 번교 교육에 염증을 느낀 학구열이 높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번교에서 이탈하여 사숙에 몸을 담기도 하였다.

5.3. 철학[편집]

Motoori Norinaga...
국학을 정비한 일본의 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
전국시대가 평정된 이후 임진왜란을 통해 들어온 조선 출신 포로들을 통해서 성리학이 발달했다. 신토와 불교 위주 문화를 가진 일본에서 성리학이 주류를 차지할 수는 없었으나,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는 데에서는 높은 권위를 가졌다.

18~19세기에는 성리학을 비판하며 과거 성인들의 유학으로 돌아가자는 고학이 나타났으며,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아예 중국의 철학을 부정하고 일본 고유의 문화를 숭상하는 국학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5.4. 과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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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 난학자 스기타 겐파쿠가 쓴 서양의학 도서 카이타이신쇼(해체신서)

1641년 네덜란드와의 데지마 무역이 고착화된 이후부터 데지마를 통해서 많은 서양 학문이 유입되었는데, 홀란드(화)에서 들어온 문이라고 하여 난학이라고 불렀다. 의학, 물리학, 화학, 지질학, 천문학 등이 발전했으며 18세기에는 에레키테루(Elekiter; エレキテル)라는 장치를 통해 전기를 생산했다. 다만, 서양 학문이 활발히 수입되었던 때는 도리어 센고쿠 시대라는 반론도 있다.#

5.5. 그림[편집]

카나가와의 파도
카츠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우키요에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우키요에라는 그림 양식이 발달했다. 위의 그림이 가장 유명하며 그 외에도 같은 작가가 그린 최초의 촉수물도 존재한다. 그리고 일본 에도 시대부터 오늘날의 망가(만화)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으며, 18세기에는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로부터 서양화가 도입되었다.

5.6. 기타[편집]

문학 등에서 판타지 문화가 번성하였다.

이전까지 [je]로 발음했던 가 이 시대부터 [e]로 바뀌어 발음하기 시작했다.[36]

에도 시대에 사용했던 연호는 총 36개였다.

6. 매체[편집]

일본의 매체에서 한국 조선 시대처럼 단골로 나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에도 시대(막부 말기)는 일본 사극 3대[37] 인기 시대 중 하나.

일부 작품은 일본 제국을 아예 없애고 에도 막부가 계속 존속했다는 대체역사를 배경에 깔기도 한다. 역으로 에도 막부가 존재치 않거나 일찍 멸망하고 에도 막부를 모티브로 한 다른 막부나 혹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공전기 대체역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6.1. 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분류:에도 시대/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주로 막부 말기의 작품이 많다.

[1] 도중의 개혁노선에서는 조선의 영의정격인 로쥬(老中)에게 실권이 쏠렸다.[2] 현재는 러시아령인 가라후토(남사할린) 치시마 열도(쿠릴 열도) 역시 막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왔다.[3] 단 에도시대까지는 여전히 긴키의 위세 역시 무시할 수 없었으며 실제 막부 말기의 정국은 에도가 아닌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간토가 일본의 유일한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가 제국의 수도가 된 1869년 이후의 일이다.[4] 에도 시대가 막을 내린 메이지 유신 초의 일본 인구가 3,200만에 달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초는 중앙집권이 다시 확립되어 질서와 안정을 되찾았기에 인구 증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전에는 인구가 2,600만~2,700만을 계속 유지했다.[5] 카부나카마(株仲間) 는 현대에서 말하는 합명회사로,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나타나는 가장 원초적인 회사의 형태이다. 물론 현재 한국어에서 쓰이는 주주(株主),주식(株式)등의 용어는 이 카부나카마에서 유래한다.[6] 막부와 영지에 의한 새로운 논밭의 개척을 말한다.[7]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인플레이션은 쌀 가격을 올리는게 아닌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쌀은 화폐와 비슷하게 취급되어 다른 작물과 교환할 수있었다. 따라서 쌀이 아닌 다른 작물이나 상품을 구매케함으로서 상대적으로 쌀에대한 수요를 낮추는 방식으로 쌀 가격을 낮추었다[8] 물론 다이묘들의 독자적인 교역을 막았기 때문이다.[9] 현재는 천연자원이 없어 대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하며 사람이 자원 운운의 원조인 일본을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의 일본에서는 광물 자원이 매우 풍부했으며 특히 은과 구리 생산량은 한 때 세계적 기준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게다가 전근대 기준에서 필요한 희소광물의 대부분이 일본 국내에서 나왔고, 금과 마찬가지로 귀중했던 설탕도 재배되었다.[10] 다이묘들이 통행세를 비싸게 뜯어내다보니 상업발전의 걸림돌이었다.[11] 명은 일조편법, 청은 지정은제로 은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은을 수입해다 썼는데 상당수가 일본산 은이다. 대항해시대2에도 일본의 특산물 중 하나가 은으로 매우 싸다. 일례로 오늘날 "일본 명동"으로 불리는 긴자 지역의 이름은 과거에 이곳에 은 주조소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12] 당시 나가사키를 통한 국제무역은 일본의 상류층들에게 각종 사치품을 공급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리고 막부의 중요한 세입원이었다.[13]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들은 260만명 정도였는데, 이들에게 일일히 다 녹봉을 주어야했으니 당연히 세금을 많이 거둬들일수밖에 없었다. 물론 녹봉 액수는 하급 사무라이들은 딱 먹고살 정도였다.[14] 거기에 수도인 에도는 품위유지 명목으로 세금을 더 거둬들였기에 무려 80%에 육박하기도 했다.[15] 에도 시대의 정치 <江戶時代の政治> (키워드로 여는 일본의 향, 2009. 3. 26. 김용안 저)[16] 일본의 에도시대는 총생산량으로 볼 대, 중앙정부인 막부가 전국의 약 4분의 1(700~750만 석)을 영유했고, 게다가 그중 대부분을 직속가신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막부 직할령은 약 420만석이었다. (중략) 1871년의 전국 공조액은 1,225만석이었으며, 정부가 파악한 공식적인 수확량이 3,220만 석이었으므로 공식적인 공조율은 39%였다. 실제 수확고가 4,681만석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이 역시 과소평가된 것으로 판단되어 대략적인 수확고는 6천만석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면 공조율은 약 21%가 된다. 1870년의 일본 인구는 3,440만 명이니, 1인당 공조액은 0.365석이다.[17] In particular, Japan had very low levels of per capita GDP at the start of the second millennium, then experienced modest but steady growth at 0.06% per annum through to the mid-nineteenth century. Japan’s more dynamic growth after the Meiji Restoration of 1868 thus built on this earlier progress. China’s per capita GDP, by contrast, was on a downward trajectory from its high-point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On these estimates, Japan overtook China during the seventeenth century. India. shared in the Chinese pattern of declining per capita GDP from 1600, at the height of the Mughal Empire under Akbar. However, Japan was already slightly ahead of India by the time the Indian series starts in 1600.-<Asia's little divergence>[18] 위 논문의 30p 참고[19] 조선의 생산량은 박섭의 연구가 출처이다. 다시 말해 같은 시기 조선과 일본의 곡물 생산량은 이것보다 더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20] 박섭, “식민지기 미곡 생산량 통계의 수정에 대하여”, 『경제학연구』 제44집 제1호[21] 이는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에서 박섭이 제시한 1910년의 추계치가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연구 저서인 “식민지기 미곡 생산량 통계의 수정에 대하여”에 나오는 별개의 추계치이다.[22] 나카무라 사토루와 박섭의 저서인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에 나오는 추계치이다.[23] 이러한 신유한의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링크에 적힌 것처럼 가난 때문에 농촌의 여자들을 매춘부로 팔아넘긴다는 내용에서 확인된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 시대에서도 시골에서는 인신 매매를 맡은 노파가 12세 전후의 아이들을 샀고, 특히 여자 아이들은 5~6엔으로 팔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링크[24] 자료[25] 애초에 조선은 충효를 중요시하는 유교국가이고 당연히 천륜을 중요시해서 부모가 자식을 죽였다는 얘기는 기록에 남길만한 대사건이다. 하다못해 워낙에 굶주림이 극심해서 각지에서 일어나는 패륜사건을 제대로 처벌하지는 못하던 경신대기근에서도 일어난 사건 자체는 기록했다.[26] 한반도의 기후는 비슷한 위도의 중국 화북 지역과 비슷하고 삼남 정도가 화중 지역까지 비슷하지만 일본은 구로시오 난류와 비교적 낮은 위도의 영향으로 한참 남쪽의 강남지역(단 아열대지역인 광동성 광서성은 제외)과 기후가 비슷하다.[27] 에도 시대의 연 세율 중 하나. 한해 수확물 중 7할을 다이묘에게 세금으로 바치고 남은 3할을 농민이 가지는 제도였다.[28] 특히 에도시대 일본 인구의 80% 이상이 농노 즉, 농민들이었다. 자료[29] 이 때문에 일부 일뽕진영에서 이루어지는 조선에 대한 비하를 반박하는 근거로 자주 사용되는 편[30] 물론 조선 시대에는 현대의 남북한 구분이 없었으니 현대의 휴전선을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나눈 것이다.[31] 식민지근대화론의 쟁점, 2007, vol., no.41, pp. 227-250 (24 pages), 허수열[32] 참고로 에도시대 초기에 막부에서 정한 금은 교환비는 1:10. 당연히 명목상 환율이고, 1859년(안세이 6년)은 금은 교환비는 1:4.65이며, 서양의 교환비는 1:15.3 정도. 막부에서 정한 교환비를 알 수 있는 게 막부가 주조한 코반 (小判, Koban) 금화가 1냥(両)은 약 15그램, 상인들이 주조한 조긴 은화 1냥은 약150그램이었다. 코반의 무게가 조긴의 10분의1인 이유는 기존 조긴 은화를 교환할 목적도 있었다.[33] 오방이라고도 하는데, 오방떡할 때의 그 오방이다. 참고로 포켓몬스터에서 나옹의 이마에 붙어있는 것도 오방이다.[34] 주로 비교대상은 단숨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베트남, 영국에게 많은 상처를 입은 청나라, 조선이다. 다만 조선은 에도 시대 일본보다 다른 부분은 뒤쳐졌으나 농업 부분과 교육부분에서는 일본에 버금갈 만한 요소가 있다고 평가받는다.[35] 한국식으로 말하면 밥, 국, 김치가 전부 였던 셈이다.[36] 에도벤의 영향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37] 겐페이 합전, 센고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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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화 세력의 집권 여부
2.1. 일본2.2. 조선
3. 근대화 기반 마련
3.1. 지리적 배경3.2. 일본3.3. 조선
4. 외국어 통번역
4.1. 일본4.2. 조선
5. 정치 구조
5.1. 일본5.2. 조선
6. 외세의 목표였는가
6.1. 일본6.2. 조선
7. 외교
7.1. 일본7.2. 조선
8. 국부와 세금 제도
8.1. 일본8.2. 조선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19세기 중후반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 근대 제국주의 열강으로 거듭난 당시 조선 근대화와 일본의 근대화의 차이와 성공 및 실패했던 이유와 당시 현실을 비교하는 문서이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당시 일본은 분명한 명분, 방향성(탈아입구, 화혼양재[1]), 추진력을 지니고 개혁을 시도한 반면, 조선은 소중화 사상에 물들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뒤늦게 크게 당하고서야 불리한 조건으로 개항을 시도한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보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일찍 문을 열었으면..."하고 아쉬워하지만, 늦은 개항은 수많은 실패 요인들과 악조건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냥 문을 연다고 해서 근대화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문을 여는 순간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대격변을 견뎌낼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2] 서구 열강이 각종 문물을 공짜로 베푸는 것도 전혀 아니다.[3] 전반적으로 근대화 자체가 정치 체제의 변화, 근대화를 위한 자본 등 많은 것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4]

또한 일본의 근대화가 오로지 서양과의 교류로만 성립된 것도 아니다. 현대 한국인은 유교망국론에 빠져 유교 사상의 폐쇄성으로 인해 조선이 서양 세력과의 교류 거부로 근대화에 실패하여 조선이 망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은 조슈, 사쓰마 양대 웅번을 중심으로 지극히 성리학적 유교 논리인 존황양이란 호소력 있는 반체제 이데올로기를 가공하고 퍼뜨려서 토막 혁명을 이룩하고 근대 국가를 설립했다. 즉 메이지 유신의 명분은 유교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이는 17세기 임진왜란기 조선 유학자 포로들에서부터 시작한 일본 성리학의 자체적인 발전에 따른 지극히 동아시아적인 문명 교류 덕분에 생긴 결과였다. 조선과 중국에선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이 일본에선 왜 혁명의 이데올로기가 됐는지를 이해하려면 에도 시대 자체의 시대적 특수성[5]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진지하게 메이지 유신의 성공 비결을 파고들려면 수많은 역사적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에도 시대 일본의 자체적인 경제 발전부터 시작해서, 막부 말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탄력적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내재화하는 과정과, 막상 무진전쟁 이전에도 근대화에 대한 필요성 자체는 토막/좌막 세력을 넘어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던 당대 정치 문화와, 조슈/사쓰마 지방 세력이 혁명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일본 봉건제의 특징까지 전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이 이 시기 일본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러한 고찰은 하나도 없이 한국의 내적 측면에만 집중한 채 "우리 조상은 왜 따라하지 못했을까?"라며 자문하는 상당히 일차원적이고 비생산적인 자학적 사고방식에 기반해 있다.

2. 개화 세력의 집권 여부[편집]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즉, '기존의 집권자들이 개화 의도가 있었는가', 혹은 그러지 않았다면 '개화 의지를 가진 이들이 반개화 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2.1. 일본[편집]

일본은 적어도 위기 상황이라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조선과 서민의 생활과 인식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일본의 집권층은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직시했다. 보신전쟁부터 애초에 근대화 할거냐 말거냐 이걸로 싸운 게 아니다. 근대화를 해야된다는 필요성은 당시 막부측이나 유신측이나 너무도 당연하게 초당파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애초에 이런 시대적 공감대가 있었던 덕분에 카츠 카이슈부터 에조 공화국의 수괴 에노모토 다케아키까지 패배한 막부측 인사도 대부분은 큰 문제 없이 신정부에서 등용, 재능을 필 기회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17세기 에도 시대부터 막부는 네덜란드와의 정기적 교역과 그 무역항구인 데지마의 상관을 통해 서구의 정세와 기술, 문화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았다. 이 때문에 다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 빠르고 정확한 서구의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봉건적 구체제로서 근본적인 개혁에 한계를 보였던 에도 막부 사쓰마, 조슈 등의 웅번의 실력자들과 하급 무사들이 뒤엎는 데 성공, 구체제 자체를 갈아엎었다.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막부라는 구체제를 갈아엎으면서도 훨씬 더 구체제의 유산인 천황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유는 그 천황이 자신들의 집권의 명분을 가져올 수단이었기 때문이다.[6]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메이지 덴노는 서구에 그다지 우호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메이지 덴노가 개화 정책에 태클을 걸기라도 했다간 개혁의 속도가 지지부진해질 수도 있었다.[7] 사실 신정부 측의 각 번들도 보신전쟁 이전까지는 존황양이[8]를 주장하거나 막부 편이었지만,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열강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는 전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을 개혁하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신정부는 현명하게도 존황을 계속 유지하여 천황의 권위를 인정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유신을 이끈 신정부의 실력자들이 그대로 가져갔다. 이들은 신정부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뒤 작정하고 총체적인 근대화를 진행시켰다.[9] 천황이라는 민심 장악 수단과 실제 성과가 이어져 불만도 거의 없었고, 그나마 당시 대표적 보수파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입장도 너무 급한 개혁과 사무라이들의 집단 실권만 막자는 입장이었지 적극적 개혁 자체는 찬성하는 경우였다.

정리하자면 실제 역사 속의 막부 타도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신세력이 구세력인 막부를 몰아낸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서양에게 굴복하고 일본을 개항한 막부에 분노한 존황양이[10] 세력이 일으킨 것이다. 심지어 사쓰마 번주의 경우는 그냥 자기들이 새막부를 열고 싶어했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다. 다만 그 존황양이파가 열강의 힘을 직접적으로 체감한 후 매우 재빠르게 태세전환하여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던 것. 오히려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존황양이세력이 막부를 몰아냈냐가 아니라, 도바 후시미 전투 이전에만 하더라도 그리 환장하던 양이란 대의가 막상 그 유신 웅번들이 집권하자마자 어찌 그렇게 간편하게 버릴 수 있었을까가 더 미스테리이다.[11] 이 때문에 신정부 수립 이후에도 내부적으로 잡음과 숙청이 끊이지 않았는데, 존황양이 사상이라는게 고위층에게는 그냥 막부와의 정치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하급 사무라이들의 경우에는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존황양이 지사들 사이에선 신주일본을 외국에 바친 막부를 타도한다고 해서 충성을 바쳤는데 이놈들이 막부랑 다를 것 없이 서양에 고분고분 하네? 하는 불만이 팽배했던 것이다.

결국 메이지 유신의 명분은 왕(천황, 사실상 일본 그 자체)을 드높이고, 외세(오랑캐, 서구)를 배격한다는 존황양이(尊皇攘夷)였다. 이를 위해 일본의 정신(혹은 고유한 것)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활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본 골자로 하여 근대화를 시작하였다.[12] 이후 급진파와 온건파가 알력 다툼을 하는 양상이 된 것이다.

2.2. 조선[편집]

"이른바 미리견(彌利堅)은 부락만 있을 뿐인데, 그들 가운데 화성돈(워싱턴)이라는 자가 있어, 도시를 개척하고 터를 다졌으며, 바다 밖 양이들과 서로 통교하니…이들은 바다를 왕래할 때 약탈하는 습성이 있고, 해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고종의 질문에 대해, 영의정 김병학이 답한 내용. 단, 저기서 나오는 '부락(部落)'이라는 단어는 미국의 개별 주(State) 즉, 행정구역상의 주(州)를 뜻하는 것으로 정말로 촌락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실제로 국역본이 아닌 원문과 김병학이 인용한 《해국도지(海國圖誌)》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락(部落)의 진짜 뜻을 알 수 있다.[13] 과연 신미양요 시점에서 조선은 미국을 몰랐는가?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18~19세기 미국이 다른 유럽권 국가들처럼 국가 공인 해적선인 사략선을 운용했으며 1856년 파리선언을 통해 사략선이 금지될 때에도 이 선언에 가입하지 않고 그 후에도 사략면장을 발급한 사례들이 있는 점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대 조선의 유학자들이 서방 세력을 약탈자로 여긴 것은 의외로 정확한 통찰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여기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법을 고안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기의 문벌 가문들은 국제정세에 대해서 별반 지식, 관심, 대책이 없었고, 이들의 대외관은 중화사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역외 문화를 전부 오랑캐의 문화로 보는 그것이었다. 이는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을 '우월한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 국가'라는 '소중화(小中華)'론의 대두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소중화론은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의 멸망 이후 노론의 거두인 우암 송시열 북벌을 외치면서 제기된 것이 본격적인 소중화론의 시작으로, 중국의 정통 왕조인 명나라를 계승한 것은 오랑캐 청나라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였다. 이는 송시열의 유명으로 제자들이 만동묘를 세운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즉, 이제 중원에서 유일한 문명이었던 중화가 파괴되고 야만적인 오랑캐가 들어섰지만, 그들은 정통이 아니며 조선만이 유일하게 중화(문명)의 정통을 이었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소중화론의 가장 큰 원인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의 멸망과 북벌론 즉, 인조 효종 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 영조 대에 이르면 담배 고구마, 감자가 들어왔고[14] 안경[15], 망원경, 지도, 자명종[16], 서구의 책자까지 다 들어왔다.[17] 하지만 이런 선진 문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정치 권력과는 인연이 없던 박지원과 같은 일부 실학자들 뿐이었고, 후일 정치 권력을 쥔 안동 김씨는 전혀 선진 문물에 관심이 없었으며 오로지 안동 김씨 가문의 권력유지에만 혈안이 된다. 이 때부터 이미 싹수가 보였던 셈이다.[18]

흥선대원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각종 개혁을 시행하며 내치에는 힘을 썼지만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서양에는 거부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흥선대원군이 아예 처음부터 반대한 것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대외개방을 염두에 둔 흔적은 남아있으나(천주교 신자를 통해 프랑스와 접촉 시도), 두 번의 양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겪으면서 쇄국 정책이 정점에 달한 것도 있으며 개혁을 통해 권력이 축소된 양반계층과 경복궁 중건으로 과도한 세금을 매겼던 것때문에 불만이 있던 평민계층도 양이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하나가 되다보니 내부사정 정치로 인해 결정된 사안인것도 있다.

당시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으로 노동력이나 돈을 반강제로 걷거나 서원을 철폐하는 등 오로지 중앙집권화를 위한 행동을 위주로 했다. 물론 근대화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화 자체에만 신경썼지 더 나아가 근대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서원 철폐 등 백성에게 이득이 된 정책도 없지는 않았지만, 경복궁 중건을 보면 진정으로 민심을 신경쓰는 것도 아니었고 서원 철폐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원칙대로 시행한 정책이었을 뿐이다.[19]

흥선대원군이 실각되고 고종이 정권을 잡았으나, 국제법에 무지했던 탓에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을 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까지 분명 시간이 있었지만, 이미 조선의 경제는 엉망이었고 세금도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이런 최악의 조건들 속에서 고종은 멍청하지도 않았지만 불행히도 똑똑하지도 않았으며 개화파 일부는 친일파가 되는 등 고종을 뒷받침해줄 신하도 없었다. 나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는 인물이었지만[20] 그 방법이, 기존의 조선 왕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세도정치로 무너진 왕권을 바로세워, 왕권을 강화시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를 고종 개인의 권력욕이라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처낸 것[21]도, 명성황후의 장단에 놀아난 것도 결국 왕권 강화를 위해서였고, 개혁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국 자신의 권력을 절대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선에서만 추진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이는 비단 고종 개인만의 특징이 아니다. 역사상 모든 왕정 국가의 왕은 왕권을 강화시키고 싶어했지, 약화시키고 싶어했던 적은 없다.[22]

한편 당시 근대화를 이끌어갈만한, 이른바 개화파라 부를만한 인사는 당시 조정에는 박규수가 유일했고 민영익, 김홍집, 김옥균처럼 훗날 이름을 날렸던 개화파 인사들은 1870년대쯤에나 막 30대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나마도 갑신정변 때 상당수가 쓸려나갔다. 박영효 같이 살아남은 자들은 외국에 의탁하거나 친일파로 변모해 버렸다.

3. 근대화 기반 마련[편집]

3.1. 지리적 배경[편집]

조선과 일본이 각각 자리잡은 한반도 일본 열도 유라시아의 극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 세계와의 연결 길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로부터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극동이라는 같은 악조건에도 이들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한반도에 자리한 조선은 대륙 국가였고 일본은 태평양을 마주하는 해양 국가이다. 이러한 지리적 차이는 조선과 일본의 운명에 쐐기를 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해양국가라는 특성상 외세의 침략이 원나라의 대대적인 침공 외에는 본토 타격[23]은 거의 없었고 조선 초창기만 해도 서양은 항해술이 발전하던 시기라 일본에 도달하기도 힘들었다. 대신 일본은 거대 국가인 중국의 영향을 받긴 받되 중국->조선->일본이라는 루트 때문에 영향력이 적었고, 중국에서 도입된 문화를 자기들에게 맞게 변형시킨 독자적인 문화와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고립된 국가라는 이유로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적어, 쇄국을 하기는 했지만, 서양이 희망봉을 시작으로 동아시아까지 항해하면서 중국과 함께 해양 교류 최전선이 되는 등 유리한 지리를 활용해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 같은 서구와 비교적 유동적으로 접촉했다.

더군다나 15세기부터 대항해시대가 시작됨에 따라 문물은 대륙의 실크로드가 아닌 바다를 통해 이동되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돌출된 해양 국가라는 지리적 이점을 통해서 외양선을 타고 온 유럽인들을 조선보다 한걸음 더 빨리 마주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300여 년 전 이미 일본은 포르투갈과 접촉하고 이들과 교류하여 화승총을 알게되고 이를 일본의 기술력으로 카피하여 타네가시마 총을 개발 및 양산하였으며, 천하인이 될 뻔한 오다 노부나가도 서양문물에 매우 관심을 보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는 국익도 있지만 사익을 충족하기 위해 사카이를 무역항으로 만들었고 막부가 설립되고서는 데지마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도 정기적으로 직접적인 일대일 교역을 하게 되면서 서쪽 세계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고 난학을 발전시킨다. 지리적 이점을 통한 서양과의 300년 간의 교류 경험은 곧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조선은 서쪽과 북쪽이 중국으로 인해 교류의 길이 꽉 막혀 있어서 중국을 통하지 않으면 서쪽 세계와는 도통 교류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극동이라는 악조건은 조선을 체계적으로 화이관이라는 대외관으로 물들게 했다. 세상을 중국 중심으로 바라보는 탓에 조선은 결국 중국과 중국의 간섭을 받는 세력 외의 외부 세계와 유동적으로 교류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조선이 자리한 한반도는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남해와 동해 역시 일본 열도로부터 오키나와, 센카쿠 열도, 대만 섬으로 이어지는 열도들이 길게 가로막고 있어 동아시아의 바깥에 있던 해양 세력이 바다를 통해 직통으로 들어오기 힘들 만큼 지리적으로 외부 길이 꽉 막혀 있는 구조이다. 거기다, 굳이 한반도로 그 어려움을 뚫고 들어가기엔 중국 본토, 일본 열도의 세력이 워낙 크고 시장성이 컸기 때문에 서양 열강들이 한반도의 이권만 노리고 들어오기는 어려웠다. 어디까지나 만주와 연계된 이권의 덤이었을 뿐.

예외로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제주도 바다와 곧장 연결되는 터라 헨드릭 하멜이 타고 있는 네덜란드 상선이 표류한 적이 있었고 조선도 서양과 직접적으로 교류할 길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외 몇번의 외양선 표류도 있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 직접적으로 교역하기를 원하기도 했다. 다만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조선이 서양을 무시해서 성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조선이 네덜란드와의 교역에 끼어드는 것을 경계한 일본의 반발, 그리고 여러 불운들이 겹쳐 성사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선 조선과의 직교역을 위해 여러 차례 원정대를 보냈지만 풍랑에 휩쓸리거나 길을 잃는 등 여러 불운들이 겹친 바람에 조선에 도착한 원정대는 한 척도 없었다. 여기에 일본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이러한 시도에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네덜란드는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 주었던 일본과의 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과의 수교 시도를 완전히 중단했다.링크 이후에도 흥선대원군 때 개화의 길이 왔지만 상술한 여러 사건과 정치적인 이유[24]로 이 기회마저 놓치게 되어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즉, 조선의 쇄국 마인드를 논하기 이전에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양과의 접촉이 극악 수준으로 적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3.2. 일본[편집]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근본적인 측면을 살펴 볼때 서구화에 대해 일본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준비가 상당히 잘 되어 있었다. 16세기 전국시대 때부터 지방/중앙 정부 차원에서 유럽과 직접 교류를 해오며 가톨릭을 비밀리에 받아들이거나 조총과 같은 기술을 도입하였고 전국적으로 쇄국했던 에도 막부 시절에도 본토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만, 인공섬을 거점으로 네덜란드와는 제한적으로나마 교류하면서 주기적으로 들어오던 국제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오란다 풍설서)와 난학[25]을 통해 지식인층 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서구권의 사상과 문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주입되었다.[26] 개혁 자체가 급했을 뿐이지 그것을 보고 적응할 정도의 준비는 이미 이루어졌었다는 것. 흑선개항 역시 하급관리나 농민들은 놀랐어도 막부나 유력 번에서는 '올 게 왔구나'라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네덜란드 풍설서를 통해 이미 1년 전부터 페리가 미국 동부에서 출발하여 희망봉을 타고 접근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함대의 규모, 이동경로, 내항 목적, 무장 수준 등등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1852년 초부터 일본의 해안 주요 거점의 방어시설이 보완되었고, 1853년 초부터는 에도를 포함한 주요 해안 거점에서의 방어훈련이 주기적으로 열렸다. 페리가 우라가 만으로 접근했을 때에도, 일개 요리키가 부부교쇼를 사칭하고 승선하여 내부의 구체적인 사정을 파악하고 돌아와 보고할 정도였다.

이러한 일본의 사상적 변화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에게 큰 위화감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지대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근대화를 거부하고 4번이나 거부한 끝에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서양 군사기술을 받는 등 근대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기술, 난학이라 이름붙여진 서양 학문은, 19세기 초 조선의 서양에 대한 이해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미 개항 이전부터 서양 각국의 정치체계,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페리의 일기에 따르면, 미국의 정치체제에 대해 일개 막부 관료가 놀라운 수준의 이해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3.3. 조선[편집]

조선 서양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진 못했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촉했다. 동시대 조선과 일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도착한 양인들의 수가 크게 차이 나며, 일본까지 가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도 조선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직접적으로 양인들과 교류할 수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벨테브레 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와 같은 기회가 있었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던 일본과 비교해보면 조선은 그들로부터 서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다른 서구인과의 대화 창구로 사용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다. 하멜 표류기를 보면, 당시 조선 정부는 그들을 단순노동력으로만 활용할 뿐, 그들을 통해 지식을 얻거나, 외부와의 통로로 활용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정의 높은 관료들의 시선에서조차, 하멜과 같은 서양인은 그저 '신기하게 생긴 사람'이었을 뿐이었고, 그들로 인해 서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일도 없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각 지방들이 서로 나뉘어 서구와의 교류나 근대화에 관한 경쟁을 벌였지만, 명분상으로나마 중앙집권체제였던 조선에서는 지방의 세력들은 서로 손잡아 재산이나 불리기 바빴지 성장이나 대외교류 따위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 일본은 사츠마 같은 일개 지방도 군함을 20척 가까이 보유했던 데에 비해,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에야 짐배에 포얹은 양무호 광제호가 전부였다.[27][28]

4. 외국어 통번역[편집]

4.1. 일본[편집]

외국어 통번역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비록 막부 쇄국 정책을 유지했을지언정 에도 시대 중후기에 이르면 수많은 난학숙(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 설립되어 민간인이 네덜란드어 의학서나 백과사전을 완역하거나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류지인 데지마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통해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접할 정도였고, 또 대대로 네덜란드어를 통번역하는 가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막부가 영어 통역사로 발탁한 인물로 존 만지로가 있다. 그는 무인도에서 표류했다가 미국 포경선에 구조되어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고 왔다. 만지로는 일본에 들어와서 미국에서 겪은 일들을 전해, 많은 지식인들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시바 료타로는 만지로에 대해 "그러한 인물이 쇄국 시대에, 「표류」라고 하는 우연한 기회로 북미 대륙의 문명을 보고, 게다가 페리 내항 소동의 직전에 돌아왔다는 것은, 일본의 행운이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덤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거쳐 간단하게 의사소통할 수도 있었다.

4.2. 조선[편집]

조선 서구권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항상 청나라를 통해야만 했고 청나라에서 번역된 문서가 오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기 때문에 교류는 커녕 자체적으로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29]

이러한 실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의 표류이다. 조선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조차 몰라서 그저 "남만인()"이라고만 부르고[30] 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13년 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렀을 때 나가사키의 '총독(부교)'은 네덜란드어 → 포르투갈어[31] → 일본어 통역을 통해 그들을 심문한 결과 금방 그들의 정체 및 표류, 억류, 탈출 과정 전부와, 덤으로 당시 조선의 내부 사정(!)까지 상당히 세세한 수준으로 캐냈다. 즉, 이미 17세기에 불과한 이 시점에서도 일개 무역도시의 행정관이 일국의 군주보다도 정보력이 앞섰다는 뜻이다.

5. 정치 구조[편집]

5.1. 일본[편집]

서구에 대한 접촉이나 학문적 이해도 면에서 결코 일본에 뒤떨어지지 않았던 중국의 경우도 전면적 개화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회적 구조적인 측면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경우, 조정은 실권이 없으며 막부라는 이원정부가 통치하는 불안정한 체계였을 뿐 아니라, 막부가 그나마 중앙집권단체에 해당하긴 했지만 일본 전국시대 도쿠가와 막부로 바뀐 상황 등을 보면 일본의 막부라는 존재는 제일 강한 다이묘 가문의 의미가 강했을 뿐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탓에 여러 유력자들이 힘을 잃는 동안 와신상담을 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대로 막부를 꿀꺽한 시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중앙집권체제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체제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근거도 미약했고, 무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각종 지방세력들을 굴복시켰던 막부가 크게 쇠퇴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막부의 실정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는 지방세력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서구와 싸워보기도 하고(사쓰에이 전쟁, 시모노세키 전쟁) 쇄국이 답이 아님을 인지한 후에는 급격한 개혁이 필요함을 느끼고 중앙정부를 무너트렸다. 조선이나 중국이 중앙정부가 고여있으니 급진적인 개혁을 할 수 없었지만 일본은 여러 지방세력들이 끊임없이 견제하는 구도가 존재했고 지방의 젊은 인재들이 중앙정부를 대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확고한 통치 철학의 부재를 비집고 들어가 막부 체제에 대항해 존황과 근대화를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을지언정) 새 캐치프레이즈로 내걸 수 있었던 것이다.[32]

5.2. 조선[편집]

중국 조선의 경우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중앙집권화를 완성하였으며[33], 철학적(이데올로기)으로 뒷받침되는 체계적이고 탄탄한 정부 제도 및 관료제 하에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권력이 대대로 상속되며 고착화해 속된말로 고인물이 되어버리며 웬만한 사회적 충격으로는 이를 뒤바꿀 만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를 일거에 변혁시킬 정치세력도 생성되기 어려웠다. 실제로도 조선은 이러한 체계적인 정치 체계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 등의 다른 나라였으면 무너질만한 대혼란 속에서도 국가가 무너지지 않았다.

덤으로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했던 개혁은 중국, 조선에선 이미 예전부터 비슷하게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체계적인 관청도 6조로 어느 정도 있었다. 고종이 통리기무아문을 세웠음에도 근대관제로 바꾸지 않은 것도 갑오개혁을 보듯 궁내부, 외부를 제외하곤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6조는 각각 인사, 재정, 교육, 군사, 외교, 법집행, 공공공사를 담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구학문을 학습하기도 했기 때문에(열린연단 문중양 편에 나온다.) 역설적으로 동도서기의 이념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탐스러운 동아시아사 9강>, <우리무사넷>).

6. 외세의 목표였는가[편집]

앞서 언급한 개혁세력의 집권과 의지가 내부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면, 이 부분은 국가 외부적으로 가장 큰 요인이다. 또한 어찌 보면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유럽과 비유럽의 차이가 가장 심각했던 서세동점의 시기에는, 열강의 의지와 간섭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일개 비유럽 국가인 일본이 아무리 자체적인 근대화 노력을 기울였다 한들 서구 열강의 영토 침탈 야욕이 그들을 향했다면 그 노력은 바람 앞의 촛불이 되었을 것이며, 일본 역시 결국 식민지나 보호국이라는 끔찍한 미래를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열강의 극동아시아 이권 분쟁에서 배후 지역에 위치해 있던 일본은 열강의 이러한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것이 일본을 여타 비유럽 국가들과 다른 길을 걷게 만들었다.

같은 시기, 자체적인 근대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개항을 했던 국가는 일본 외에도 많다. 사실 일본의 개항은 세계적으로도 늦은 축에 속했으며 중동 각국과 핵심 항로에 위치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일본보다도 훨씬 일찍 유럽 국가들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그들과 문물을 주고받았다. 이들이 유럽과 맺은 관계의 깊이와 정도는 개항 전까지 고작 1.5 헥타르에 불과한 데지마 따위에서 네덜란드와의 제한적인 무역만을 허용하며 난학[34] 자포네스크라는[35] 단편적인 영향만을 주고받은 일본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당시 세계 각지에는 공행무역이 이뤄지던 중국 광저우, 포르투갈인들이 머무르던 마카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무역로의 중심지 코스탄티니예, 북아프리카의 창구 에사우이라,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무스카트, 서인도의 무역 중심지 수라트, 동인도의 중심지인 치타공 다카 등 데지마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세계무역 중심지들이 즐비했다.

오스만의 니자므 제디드 개혁이나 탄지마트 개혁, 이슬람권 전역에서 일어났던 이슬람 모더니즘 운동 등에서 알 수 있듯, 유럽을 본뜬 근대화 시도 역시 이들이 일본보다 최소 수십 년 전부터 시작해 왔다. 때문에 '이른' 개항과 유럽과의 밀접한 관계가 근대화를 이끌어냈다는 가정은 상관관계가 있을지언정 인과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세계적으로 보면, 서구와의 이른 접촉과 근대화 추진은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각국의 자체적인 노력과 별개로 그들에게는 서양이 노리는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왕국의 경우 무하마드 알리의 치세 이래로 근대화를 강력히 추진하였으나 영국의 인도 지배에 수에즈 항로가 필수적이었기에 식민지로 전락했다. 나스레딘 샤가 개혁을 추진하던 이란의 카자르 왕조는 영국의 핵심적인 석유 공급원으로 낙인찍혀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인도 방위를 위한 길목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영국의 3차례에 걸친 침략을 받았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마개라는 입장 상 식민지화는 면했으나 다시는 기존의 위상을 복구할 수 없도록 경제적으로 완전히 종속되고 말았다. 인도 아대륙의 국가들은 유럽과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때로는 대등하게 공방을 주고받기도 했으나, 그 거대한 경제력을 노린 영국이 무굴 제국의 분열을 이용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알제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일대와 트란스라이타니아의 이슬람 왕조들은 안보적인 이유로 인해 각각 인접한 열강인 프랑스와 러시아에 군사적으로 정복당했다. 향신료 산지이자 아시아 무역을 위한 핵심 항로에 놓여 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 역시 오랜 기간 저항했으나 결국 태국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 합병된다. 중국 역시 양무운동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그 거대한 시장 때문에 서구 열강의 이권 각축장이 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열강은 때로는 군사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이 국가들이 근대화를 위해 도입한 고문단과 차관을 무기 삼아 경제적으로 그들을 자신들의 발 아래 종속시켰다. 때문에 열강이 일본을 노렸다면, 존황양이 운동이나 보신 전쟁과 같은 하늘이 내린 일본 내정에 대한 개입 기회들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운이 좋게도 이러한 조건에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며 시장이 큰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식민제국 유지를 위해 무조건 장악해야 할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열강 입장에서 일본 열도는 우선적으로 노려야 할 메리트가 크지 않았다.

이는 에도 막부가 센고쿠 시대의 자유 무역을 금지해버리면서까지 해안을 철저하게 봉쇄한 정책과 맞물려, 다른 국가들과 달리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유럽에 종속되는 것을 방지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데지마를 통한 최소 수준의 국제 교류를 통해 해외의 동향을 파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근대화와 서구화의 제반 조건은 개방성과 자유 무역보다는 지극히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에서부터 달성된 것이다.

막상 일본이 정책을 바꾸어 자유무역과 근대화에 뛰어들면서 외세에 가장 취약해졌던 1850~80년대 사이에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일대 외교적 격변이 일어났고, 발칸 반도의 문제로 인한 열강 간의 신경전도 극에 달했다. 미국 역시 내전이라는 크나큰 진통을 겪었다. 동아시아에서의 열강의 관심 역시 일본이 아니라 최고의 시장인 중국과 핵심적인 원자재 공급처인 동남아시아를 향했다. 그 덕에 일본은 별다른 외세의 방해 없이 가장 취약한 시기를 넘기곤 조용히 힘을 길러, 20세기 초에는 아예 영국의 대러시아 전략의 파트너로 낙점되기에 이른다.

물론 조선 대한제국 역시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양 열강의 직접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본과 같은 행운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하게 조선에게 관심을 보인 러시아 제국은 조선에게 우호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열강 외에도 열강의 자리를 노리던 일본과 기존 종주국의 지위를 놓기 싫었던 청나라의 경쟁이 19세기 후반 내내 조선을 향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달랐다. 즉 조선에 진짜 위협이 된 세력은 서구 열강이 아니라 이웃 나라였던 청나라와 일본이었다.

서양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천하국으로서의 입지가 무너지는 과정을 좌시할 수 없던 청나라는, 19세기 중후반부터 기존 중화적 조공 책봉 질서를 서구적 종속 관계로 전환시키고자 시도하며 1894년까지 조선에 전에 없는 내정간섭을 일삼았다. 청에게 있어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던 중화 질서의 핵심적인 조공국이었던 조선이 서구 국가들과 같은 대등한 외교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들의 천하가 완전히 붕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새로 접한 서구적 국제관에 있어서도, 명색이 문명국이고 제국이라면 그에 걸맞은 식민지를 거느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렇기에 청은 제 코가 석 자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어서만큼은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묶어두고자 고집스럽게 시도했다.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들어온 해관장 묄렌도르프,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사실상의 조선 총독으로 군림했던 위안스카이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서양 열강과 조선 간의 외교 관계에는 항상 청이 개입하였다. 이는 조선의 자유롭고 자주적인 서구 문물 수용과 개혁 추진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했다. 조선이 진정한 자주국임을 만국 앞에 천명하고 본인들의 손으로 광무개혁이라는 근대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던 것은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패권이 몰락하고 나서였다. 조선인들이 서구인들의 진출 때까지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청나라와 삼전도의 굴욕을 그토록 증오하고, 고종이 괜히 청의 패전 이후 영은문을 헐고 삼전도비를 뽑아 엎어버린 것이 아니다. 청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진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영은문 터에 새로 세운 개선문에 '독립문'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로, 19세기 후반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은 심각했다. 대한제국 칭제를 한국인들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이라 여겼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한국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청 다음으로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이 밀고 들어온 것. 본래 식민지 개척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어나는 행위로, 자국 내에서의 경제 발전 단계가 한계점에 도달하여 외국 시장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막 근대화를 시작하던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 야욕은 그 경제력이 전혀 뒷받침되지 않았음에도 비정상적일 수준으로 집착적이었다. 가령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일본이 체제 전환을 이룬 지 고작 8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산업 혁명 역시 출발선에 머무르던 때이다.

이는 심리적인 이유였다. 당대 일본은 한번도 외침을 허용한 바 없다는 독자적 천하관과 자부심이 매튜 페리 제독의 대포 몇 방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는 위기감과 피해의식이 만연했다. 서구 열강에 대한 두려움은 일본 역시 식민지를 획득하여 소위 '문명화'하는 문명국으로서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유럽과 동등한 존재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적인 불안감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국경을 맞댄 가장 가까운 열강이자 호시탐탐 남진을 시도하는 러시아 제국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식민지이자 러시아를 막을 방파제를 찾아나섰으며 한반도가 두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이는 러시아를 대륙에 가둔다는 대전략을 추진하던 영국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당대 최강의 열강의 지지까지 얻게 된 일본은 거칠 것이 없었다.

러시아 제국의 경우 조선과 대한제국에 대한 명확한 방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려 했는지, 보호국화하려 했는지, 아니면 그저 영향권에 넣고자 했는지는 여러 의견이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표트르 대제 이래로 내려오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려는 국시 수준의 정책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며 대한제국이 그 목표에 포함되어 있었음은 확실했다. 청나라의 몰락 이후 대한제국 내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갔으며 이는 다시 영국과 일본을 자극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대부분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는 것은 피했다. 하지만 그들의 무관심과 묵인 아래, 무너지는 제국 떠오르는 제국이 새로운 서구적 국제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외교적 위상을 지키고 또 갖추기 위해 무조건 획득해야 하는 최우선적 목표가 되어버렸다. 두 국가는 19세기 후반 내내 끊임없이 한국의 내정에 개입했다. 이는 한국이 결과적으로 자체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서구 열강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원인이 된다.

6.1. 일본[편집]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일본의 각 번들이 서로 대립하고 여기에 막부와 토막파까지 대립하는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 때 서구 열강이 개입해서 더욱 분열을 조장했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까마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신 전쟁 등 일본의 분열이 극에 달한 1860년대 무렵의 시기는, 하필이면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주요 서구 열강들이 모두 일본에 신경을 쓸 수 없던 시기였다. 그나마 하와이를 먹은 이후 일본 시장을 노리던 미국은 쿠로후네 사건 이후 본격적인 일본 반식민화를 시도할 즈음에 중부와 서부에서는 서부개척시대가 겨우 시작했으며 동부는 노예제도로 인해 발발한 남북 전쟁이 한창이었다.

영국 역시 세포이 항쟁  애로호 사건으로 인한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등으로 인해 인도 중국에 눈길이 가 있었다. 프랑스는 이후 멕시코 제2제국을 건국하게 되는 멕시코 내전에의 개입, 베트남 침략, 애로호 사건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와 이탈리아 통일전쟁에도 병력을 파병한데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인한 중부 유럽 정세의 변화 등으로 바쁜 상태였고, 그나마도 인도차이나에 눈길이 가 있었다. 러시아 역시 이제 막 연해주를 차지해 새로 획득한 영토 정리에 바쁜 상태인데다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영국과의 대립 상황으로 인해 아직 일본에 관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영국 세 나라 모두 일본에서는 쿠로후네 사건이 일어난 해와 같은 1853년부터 3년간 크림 전쟁을 치렀으며, 50만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패배한 러시아는 패전의 충격으로 인해 전쟁 중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죽고, 크림 전쟁으로부터 15년 후에야 겨우 흑해 함대를 재건할 수 있었을 정도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사실 각종 서구 열강들이 제대로 침략의 손아귀를 뻗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이런 천금 같은 시기에 개항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일본보다 빠르게 근대화를 이룬 대표적인 국가인 이집트 베트남은 아직 여력이 있던 서구 열강에게 무너졌고, 일본보다 늦으면 서구 열강과 일본에게 무너졌기 때문에 유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본이 천재일우의 기회 속에 개항할 수 있었던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의해서 유발되었다. 당시 미국은 초강대국이 아니라 아직도 노예제를 운영하며 농산품과 원자재를 유럽 공업국들에 수출하는 게 주요 산업이던 국가로, 먼로 독트린이 나온지 불과 30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시기였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기껏해야 지역강국으로 열강에 포함시키기도 어려운 정도의 나라였다. 그러던 중 19세기 중반 영국 등 서구열강들의 세력이 동남아시아를 넘어 중국을 본격적으로 넘보기 시작하자 이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어물쩡대다간 태평양 너머에서 자국의 지분을 하나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에 미국의 국력이 아직 태평양 너머 본격적으로 세력을 뻗어나가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36] 일단 태평양 너머에 자국의 지분을 확보해 두기 위해 먼저 일본을 강제 개항시키기로 1853년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출동했던 것이다. 이렇게 2번의 방문[37] 끝에 일본을 강제로 개항 시킨 미국은 정작 기껏 개항시켜놨더니 식민지 확장을 위한 기반을 다져야 할 서부는 아직 지역이 안정되지 않았던데다 얼마 못 가서 노예 제도 갈등을 계기로 남부 연합의 연방 탈퇴와 남북 전쟁에 빠져들며 자국 내부 상황을 수습하기 바빠 일본에 신경 쓸 상황이 되지 못했다. 결국 일본에게는 강제 개항이라는 악재가 남북전쟁이라는 바다 건너의 사건 탓에 일본이 20년간 문제 없이 개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유례 없는 행운이 되어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38] 결국 미국은 미국이 없는 사이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였으므로 식민화 내지 속국화하는 게 힘들어졌기 때문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지원해주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러일전쟁 이후 영국과는 인도 영토 지배 인정,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서로 필리핀과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밀약을 맺을 정도의 파트너십을 가졌다. 게다가 러일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사례처럼 전쟁 한번 잘못해서 이기고도 나라가 파산해서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며 전쟁 특수로 한국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들인 수준과 맞먹는 이득을 보며 성장한다.

6.2. 조선[편집]

서구 열강들은 조선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39] 중국과 일본, 러시아는 아니었다. 쿠로후네 사건 이후 20년 사이에 메이지 유신을 거치고 그야말로 허리띠를 졸라매 서양 무기 전함으로 무장에 성공한 상황이었지만 국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정한론이 대두된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 역시 아편전쟁이 끝나고 이홍장을 중심으로 해 양무운동을 통해 북양함대를 구성한 후 자신감이 생겨 조선에 대해 기존의 자주국 체제하의 조공 관계가 아닌 근대적 종속 체제의 형태로 영향력을 뻗으려고 시도하는 상태였다. 러시아 또한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중국, 일본 중 가장 가깝고 만만한 조선을 노려 한반도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었다.[40] 영국은 이러한 러시아를 막는다는 구실 하에 거문도 무단 점거했다.

즉 한반도 자체가 목적이진 않았지만, 한반도를 발판삼아 이익지대를 팽창시키려는 열강들이 몰려와 맞부딪히고 있을 때 조선은 이를 전부 외교적 혹은 군사적으로 막아내며 근대화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조선이 사실상 자주적으로 개혁했던 광무개혁도 그나마 러시아의 개입으로 다른 열강이 접근하지 못했으며 일본도 당시에는 아직 러시아를 상대할 전력이 미비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의 차이에는 이러한 차이도 상당히 작용했으며 실제로 러일전쟁 중 러시아는 더 상대할 여력이 있었지만 국내에 터진 대형사건 때문에 그냥 물러가자마자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적으로 성사시켜버렸다.

7. 외교[편집]

7.1. 일본[편집]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할 당시 세계에서는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더욱이 일본이 개화하던 시기 당시의 외교상황이 일본에게 매우 유리했는데 프랑스는 멕시코 내전에 개입, 러시아는 크림전쟁 후폭풍으로 움직이기 힘들었고 영국은 크림전쟁이 끝나자마자 세포이 항쟁에 휘말리며 코가 석자였다. 더욱이 일본을 개화시킨 미국은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이 터지면서 일본에게 신경쓸 여유조차 없었다.

주요 서양 열강들이 혼잡할 때 기반이 어느정도 있는 상태서 개항한 뒤 세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친 수구세력의 반발로 일어난 세이난 전쟁서 열강의 개입도 없이 자국의 선에서 빠르게 끝냈다.[41] 이후 반대세력들의 전멸로 근대화로 빠르게 넘어갔는데 특히 가장 위협적인 열강 군대에 맞서기 위해 최우선으로 사관학교 창설, 영관급 장교들을 초빙해 교육, 외국산 신식무기 도입, 예산을 쥐어짜내서 군함 구입[42] 등등 행정과 국내정비에 들어갈 돈까지 빼돌려 최우선적으로 국방력을 기르며 근대화하였고 서양 열강들이 내부사정을 다 정리했을 때는 일본 제국정도야 밟을수 있으면 밟을수 있지만 유럽열강과 미국에게는 원정비용이 비싼데다가 괜히 건드렸다가 피해입기 딱 좋은 나라가 된 상태였다.

크림전쟁을 통해 동유럽 부동항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러시아는 제2차 아편전쟁 때 중재를 해 준 대가로 연해주를 확보했고, 블라디보스토크, 즉 부동항을 손에 넣는데까지 성공하자 대영제국은 러시아를 경계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때 당시의 서양 열강들은 식민지는 물론 각자 사정으로 벅찬 까닭에 머나먼 아시아까지 견제할 겨를이 없었고, 그래서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할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 일본이었고 미국 또한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을 보고 일본과 척질 바에 같이 협력해 러시아를 견제하는게 나았다. 그때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뒤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아시아의 승자로 자리잡은 반면 중국 청나라는 양무운동의 한계와 열강개입으로 인해 여러 군벌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상태가 되는 바람에 영국 입장으로는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결론이 나버렸다.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 대영제국은 러시아가 회복하여 다시 부동항을 노릴때 견제할 국가로 일본제국을 선택하여 영일동맹을 맺으며 같이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게 됐고, 러일전쟁 이후 더 이상 경쟁자가 사라진 조선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7.2. 조선[편집]

반면에 조선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일단 조선에게 가장 치명적인 점은, 열강들이 조선의 처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단 점이었다. 근대화에 성공해 강대국으로 우뚝 선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이제야 막 개항을 한 약소국이었고, 거리도 멀고 얻을 것도 별로 없는 조선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싶었던 열강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서양 열강들은 조선에서는 적당히 이권을 먹는데만 중점을 두었고, 근대화에 성공해 자신들처럼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을 파트너로 선택하게 되었다. 힘의 논리가 통용되는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인 일본을 두고 약소국인 조선과 손을 잡으려는 국가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한마디로 조선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조선이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시작하려 할 때쯤에는 진작에 일본을 중심으로 판도가 짜여 있었고,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의 파트너인 일본이 무얼 하든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최후로 택한 국가가 부동항을 원했던 러시아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더 이상 조선의 처지를 신경써줄 나라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조선은 헤이그 특사로 마지막 도움을 요청했으나 열강은 아시아 유일의 강대국 자리에 오른 일본을 저버리고 약소국인 조선을 편들어줘야 할 이유가 없었고, 조선은 그대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8. 국부와 세금 제도[편집]

8.1. 일본[편집]

이미 당대의 일본 조선 사이에는 상당한 국력차가 벌어졌다. 물론 인도 청나라를 보면 단지 국력이 강하다고 해서 서구화도 수월했으리라고 볼 수만은 없지만, 그래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당시 일본 조선보다 인구가 많았고 영토도 넓었다. 1869년 홋카이도 일본 행정구역으로 완전히 편입되기 전에도 일본 면적은 조선의 1.3배 정도였다. 홋카이도를 완전히 개척하는 과정도 소수의 수렵채집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무주공산 수준이라 장애물이나 방해요인이 거의 없었다. 야마토 민족이 혼슈 북쪽까지 확장하는데 들인 수고조차 한민족이 북쪽 영토를 확보, 사수하기 위해 여진족(9성, 4군 6진 등), 거란족(강동 6주, 대거란전) 등과 죽기살기로 사투를 벌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선보다 덥고 습한 기후 탓에 넓은 지역에서 2모작이 가능한 농업 조건도 일본이 더 좋은 편이었다. 또 일본은 특이하게도 연교차가 크면서도 강수량은 고른 기후(대신 그 습도 때문에 한여름에는 정말 답이 없다. 나라 전체가 한증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라서 농사 짓기가 대체로 수월한 편이다. 반면 조선은 겨울이 일본보다 길고 건조해서 농사짓기에 매우 불리했다.[43]

또한 화산지형이라는 지질학적 특성 상  구리의 매장량이 많은 것도 일본의 큰 이점이었는데, 에도 막부 시절 본격적으로 개발된 이와미 은광의 은은 17세기 전세계 은 유통량의 30%를 차지할 정도였고, 일본은 이 은과 구리를 이용하여 화폐를 만들었고 특히 은으로 만든 화폐이자 조선에서 왜은이라 불린 이 것은 네덜란드, 중국, 조선과 무역을 할 기초자본을 축적하여 활발한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와미 은광의 은이 고갈 조짐을 보여 일본에서 은 수출을 감소시킨 것이 19세기 초 조선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삼정의 문란을 촉발한 한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상공업의 측면에서도, 전국시대 이래 꾸준히 상공업이 발달해 이 시기에 많은 기업들이 출몰하였고[44] 상인들이 득세하여 사농공상의 계급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각지에 할거하는 영주들이 전략적으로 성하촌(조카마치)을 거점화하면서 도시화율도 더 높았으며,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대내외 무역도 활발해 이미 에도 중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시장 경제를 이룩하고 있었다.

세율은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 "농민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처음부터 강한 세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후술된 대로 막부에서만 거두는 세금이 통상 35%[45]였는데, 이는 번국에서 자체적으로 거두는 세금을 제외한 비율이다. 즉, 35%를 세금으로 내고나서도 번국에서 또 따로 세금을 거두었다.[46] 이는 참근교대를 비롯한 에도 막부의 번국 쥐어짜기 정책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잇키를 막기 위했던 점도 있었다. 반란도 최소한 각자가 당장 먹고 살고 여럿이 힘을 합칠 수 있어야 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잇키 막고자 지나치게 수탈하면 되려 농민들 입장에서 굶어죽으나 반란 일으키다 제압당해 죽으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될 수 있어 잇키를 일으키는 경우도 많아서 상황에 따라서는 영지민들 불만이 터지지 않게 베풀거나 세금을 조절해야 했다. 어찌되었든 잇키가 발생하면 에도막부는 그 책임을 다이묘에게 물어서 영지를 압수하기도 하였다. 즉 위의 에도 막부의 말대로 반란 일으킬 여유도 없게 딱 굶어 죽지만 않을 정도까지 세금을 뜯어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당시 에도 막부하의 일본 경제는 상당한 부를 축적해놓은 상태였고, 이런 일본 열도의 경제력이 일본 근대화의 속도를 빠르게 추동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농부들에 대한 공식적인 세율은 내려갔지만 문제는 체계적인 토지조사로 그동안 막부 다이묘들이 암묵적으로 수취하지 않거나 신고되지 않는 토지까지[47] 찾아내서 세금이 부과되면서 일본 농민들 부담은 메이지 유신 이전 보다 더욱 커졌고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서 식량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팔고 노동자들은 저임금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등, 농민을 포함한 일본 국민들 부담이 매우 늘어나서 여러번의 폭동 시위 심하면 내전까지 벌어져서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일본은 대대적인 개혁과 근대화를 할 수 있게된다. 하지만 그에 따른 일본 국민들 불만도 커져가고 이에 따라 국민의 관심을 해외로 돌리고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조선을 포함한 여러 나라를 침략하는 등 일본이 폭주하는 계기가 되고 이는 훗날 태평양 전쟁으로 발전된다.

8.2. 조선[편집]

조선은 건국부터 민본주의 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고 세종대왕 시절 전분 6등법 등으로 구체화하여, 세율은 10%(공식적인 세금 5%+잡세 등)에 불과하였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 시절 삼정의 문란이 급격화되지만, 이건 정부에 들어가는 세수가 폭증한 게 아니라, 자주농이 몰락하고 소작농화 하면서 생긴 농민에 대한 지주의 소작료 착취 및 지방 세무관들의 세금 착복 문제이다.

또한 18세기 이전까지는 중계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획득했던 조선 18세기~19세기에 들어서면서 환금작물이던 인삼의 대외 수요 급감과 조선을 거치지 않은 직계무역 활성화 등으로 오히려 대외무역이 위축되었다.

조선 정부는 백성(농민)들을 나라의 근본으로 명시하고 이들의 생활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여 세금을 최대한 덜 걷어 운용했고 그 덕택에 전근대 사회 단계에선 전세계적으로도 안정된 국가에 손꼽힐만 했고, 이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변질되었다. 조선의 세금체계를 보면 조용조 제도에 기반을 두고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을 내는 전정과 사람의 노동력을 대상으로하는 부역, 그리고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공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48] 조선도 정말 다채롭고 어마어마한 종류의 세금을 걷어들인 국가였다. 훈련도감의 병사들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세금이라 하여 삼수미를 걷고, 세금 걷는 관리들이 고생한다며 이를 위로하기 위해 인정미를 걷었으며, 세금을 운반하는 와중에 부패나 재해로 손실이 발생할테니 손실분 예상치까지 미리 걷는 곡상미, 항구에서 조운선에 실린 곡식을 하역하는 인부들의 임금을 주기 위해 걷어들이는 하선입창미, 조세행정에 쓰이는 종이값을 백성들에게 전가시키는 창작지미 등등 정말 별의별 세금을 다 운용한 나라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여러 종류의 세금은 중앙정부, 즉 조정에서 걷는 세금만 늘어놓은 것이며 지방세인데 곡식의 품질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기 위해 미리 쌀 몇 섬 챙겨놔야겠다며 간색미를 걷어들이는 기록을 보자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조선에는 유럽의 부르주아나 일본의 조닌(상인)처럼 기존의 지배계층과 맞먹으며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는 신흥 상인집단이 끝내 나타나지 못했다.[49] 단 분명 조선이 일본의 농노보다 세금이 적은건 사실이다. 환곡 제도를 보면 조선은 일본보다 백성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50][51][52]

원래 조선은 땅의 비옥도로 세금을 걷는 결부제를 운영했으나 18세기 전반이후 양전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부역실총으로 각도 각군에 세금을 액수를 조사해서 문서화시키고 그것을 동결했다. 이를 비총제라고 한다. 그러나 잡세 특히 수송비는 완전하지 않았고 그리 문서화 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의 문제점이다. 그러나 조금더 생각해봐야 되는게, 중앙재정만이 아니라 지방재정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앙 재정과 더불어 비공식적인 지방재정이 공존했다. 그래서 세금도 지방마다 차이가 나고 부과방식도 차이가 컸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조선은 최대한 세금을 아끼려고 노력했고 그것은 이원적인 재정구조로 나타났다. 다만 문제는 그 지방재정의 세금부과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은 최대한 합리적으로 세금을 매기려고 노력한 거다.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

18세기 말 부역실총을 통해 당대 조선의 실질세율을 계산해볼 수 있는데 당시 지세는 전세가 1결당 4두, 대동미가 1결당 12두였고 여기에 삼수미 등을 합치면 결당 20두 수준이였다. 여기에 지세의 수송에 필요한 비용이 결당 2두~6두 정도 추가적으로 부가되었고 여기에 지방세[53] 결작 17두가 부가되었다. 당시 1결당 생산량은 알곡 기준으로 240두였으니 실질세율은 비정규적인 세금까지 합해서 16~18% 수준이었던 것이다.[54][55] 그리고 이런 세금은 세도정치 시대가 되며 증가했는데 정약용이 저술한 경세유표에 따르면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에서 징세되던 세금의 양은 불법적인 세금들까지 합해서 결당 45두 9되, 엽전 9전 4푼이였다. 이는 결당 수확량의 20~23% 수준이다. 여기에 군포도 내야 했는데 군포는 균역법 실시 이전엔 장정 한 명당 1년에 2필이였으며 실시 이후엔 장정 한 명당 1년에 군포 1필을 내야 했다. 면포의 가치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면포 1필의 가치는 쌀 4두의 가치와 같았다. 다만 주의해야할 점은 저 수치는 법적으로 경작지인 수세 전결에 대한 실효세율로 토지의 누락이 반영되지 않은 수치라는 점이다. 일본의 세금제도 항목에서 제시된 일본의 실효세율[56]은 토지의 누락이 반영된 수치라 단순비교는 어렵다. 실효세율을 계산할 때 토지의 누락까지 반영한다면[57] 조선의 실효세율은 저 수치보다 낮았다고 봐야한다.[58]

요약하자면, 명목상 세율은 낮았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갈수록 부실한 토지 조사와 부정부패로 인해 걷어들이는 것에 비해 낮아지는 세수, 회계와 재정관리 능력부족으로 비효율적으로 운용되던 재정, 그것을 매꾸기 위해 각종 잡세의 남발, 지방에 대한 통제능력이 부실해지고, 행정체계가 무너져 폭등하는 지방세 등등의 이유로 실질적 세율은 폭등했지만 정작 정부에서 운용 가능한 재정은 세종시절보다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지면 조선의 상업이나 경제가 일본에 비해 못하다고 하는데 물론 일본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업은 수공업수준에서는 상당히 발달했다. <개항기 면업에서 볼 수 있는 시장구조의 함의>에 조선은 일본과는 다르게 장시를 중심으로 한 농민시장이 발달했고 농가겸업으로 면포를 생산했는데 상품을 생산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나누어져 있고 그 면포는 도를 넘어 유통되었다. 그리고 그 수준은 1780년대 영국의 면포생산량에 필적했고 수입품까지 합치면 면포 절반을 시장에서 구입했다. 그러나 조선의 시장은 도시중심으로 발달한 일본에 비해 세금을 부과하기 힘들었다.

자원 문제 또한 비슷하다. 물론 조선의 자원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중국과 일본에 비해 부족했고 금 같은 자원은 북부에 몰려 있었다. 당장 조선 최대의 금광인 운산금광이 북부에 있었고 조선 최대의 은광이 있던 단천은광조차 북부에 있었으며 가장 생산력이 많았던 16세기 말에서 조차도 1년에 5천냥 정도밖에 못 캤다. 이게 연은분리법 나오고 나서도 저 정도였다. 동시대 일본에선 이와미 은광이 터질 때였는데 말이다. 거기에 조선은 구리, 청동도 부족하였다. 총통에 쓸 청동이 부족해서 절에 있던 청동을 녹여서 썼다는건 이미 유명한 일화다.[59]

전근대에 금과 은은 곧 화폐를 의미했고 화폐의 유통량은 곧 경제력을 의미했다. 전근대 한국이 지독하게 상업 발전이 더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근대 조선의 경제력은 곧 농업생산량이었고 이것을 물물교환 형태에서 화폐경제로 변화하려면 막대한 량의 금과 은이 있어야 했다. 운산금광은 전근대에는 채광이 안 됐고 은도 조선의 농업생산량을 커버해주지 못했다. 일본의 은을 수입하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중국에 조공을 하기 위해서 줄줄 새던 것도 은이었다. 즉, 조선은 일본처럼 엄청난 양의 은광도 없었고 금광은 있었지만 전근대에 채광이 안 되었다.

물론 흥선대원군 시기 북부에 있는 자원들을 개발하기 시작하며 조선 후기에는 이를 바탕으로 개항말 조선 세수에 크게 도움을 보탰다.[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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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和魂洋才 일본의 전통적 정신 + 서양의 기술.[2] 공산주의 국가들이 갑자기 붕괴되고 자본주의로 이행했을 때를 보면 이해가 쉽다.[3] 당연하지만 서구 열강의 문물 제공은 식민지화를 위한 것이다. 그 첫단계가 바로 문물 제공을 위한 개항, 그게 아니라 해도 개항 그 자체가 서구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 조약으로서 개항할 당사국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역시 맨 처음에는 서구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모두 승리하고 나서야 불평등 조약을 대거 수정할 수 있었다.[4] 일본 역시 에도 시대부터 발전했지만 그 이면에는 백성들의 고통과 착취가 있었기에 백성들 평균 삶의 질이 나빴다.[5] 사무라이가 만든 체제였지만 정작 그 사무라이는 지극히 살기 팍팍한 시대였고, 지방 유림과 서원을 중심으로 사대부 사회가 발전한 조선이나 중국과 달리 일본은 막상 직업으로 이를 다룰 만한 사람들은 막부의 관학자 밖에 없어서 세상에 불만이 많은 재야 유생들이 쏟아졌다.[6] 초창기 사쓰마, 조슈 등 이른바 유항이라 불리는 세력들은 존황양이를 내세웠지만 사쓰마, 조슈 모두 각각 사쓰에이 전쟁과 4국 함대 포격 사건을 겪고는 '양이를 외쳤다간 우리부터 박살날 판이다.' 라고 여겨 양이 대신 개국을 외쳤는데, 이렇게 되면 막부와 다를 바 없다 보니 적극적으로 토막을 외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사쓰마는 이전까지 양이는 조슈와 동일했지만 공무합체, 즉 천황의 조정과 막부가 합쳐지는 방식을 주창했다. 조슈는 반대로 존황양이를 이전부터 주장했지만, 똑같이 개국을 외치는데 누군 집권하고 누군 물러나라 할 수는 없기에 존황이라는 전혀 다른 구호를 내세운 것. 물론 그렇기 때문에 천황은 허수아비였고, 코메이 덴노가 이 쪽에 의해서 죽었다는 설 안중근이 언급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7] 다만 식습관은 반대였는데 나중에 거의 점심을 양식으로 고정하여 먹었을 만큼 즐겼으며, 당뇨에 걸리기 전까지 화과자와 함께 양과자도 하루에 한 번 이상씩 디저트를 챙겨먹었다.[8] 천황의 이름을 높이고(존황), 외세를 배격(양이)[9]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보이듯 모든 권력 자체는 천황이 가지고 있었다. 그니깐 천황이 마음먹으면 의회도 해산가능한 일종의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천황이 관례상 행하지 않았다.[10] 세부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대충 일본판 위정척사파라 보면 된다.[11] 그리고 사실 진중한 대답은 사가의 난을 비롯한 유신 직후 수많은 사족 반란을 보면 '간단하게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상으론 세이난 전쟁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사실 세이난 전쟁 자체도 그 전부터 무수히 많았던 유신 직후 사족 반란의 연장선에 있었다. 정확히는 사족 반란의 그 마지막 장이 세이난 전쟁이라 봐야한다.[12] 사실상 일본식 중체서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13] 해국도지를 실제로 보면, 프랑스가 미국 독립을 도왔으며 링컨이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다는 내용 같은 것도 적혀 있다. 김병학이 해국도지를 얼마나 자세히 읽고 기억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제대로 읽었다면 미국에 대해 당시 기준으로는 꽤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14] 단, 담배와 감자는 각각 선조, 숙종때에 들어왔다. 이미 담배는 인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었을 정도였고 거기서 임진왜란 이후 들어왔다 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15] 안경도 선조때 들어와서 김성일도 안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비싼 고가품인데다가 어르신 앞에선 안경을 쓰면 안된다는 예법이 있어서 대중적인 물건은 아니었다.[16] 조선 자체에서 수리 뿐만이 아니라 카피하여 왕에게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17] 영조가 망원경을 부숴버렸다는 얘기는 기록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영조가 부순 것은 천문관측 기구인 '규일경'이었다. 그리고 승정원일기를 보면 성능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수었다고 되어 있으며 이 사건이 있고 몇 년 뒤 규일경을 보며 이것의 원리에 대해 장인에게 물어본기록도 있는 걸 보면 '규일경'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던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18] 이런 이유는 하필 인조 이후 소중화사상이 발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중화인데 어찌 오랑캐 풍습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라는 것 물론 군사 등 일부는 받아들여 홍이포 등을 도입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극히 제한적인 도입이었다. 단, 세도정권이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지 반대했던 건 아니다. 즉 서양문물이 들어오든 말든 상관없었다는 소리였다.[19] 다만 서원 철폐의 명분으로 백성에게 민폐가 된다는 것을 내세우긴 했다.[20] 개화파가 일본에 이용당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등 사건이 벌어지자, 고종은 일본의 야욕을 파악했고, 부동항을 노리던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으나 독립협회가 막자 분노하는 등, 조선에서 가장 세계가 돌아가는 일을 잘 알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고종이 주도한 광무개혁을 보면 광무개혁도 한계가 있었다.[21] 이는 흥선대원군의 잘못도 있는데 고종이 11세에 즉위하고 몇년이 흘러 성인이 되었다. 일단 겉보기라도 섭정에서 내려와 일부 권력이양을 하는 모습을 보여야했는데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종은 아버지의 도움 덕에 즉위했으나 조선의 지존은 엄연히 고종인데 성인이 되어 자신이 판단을 해보고 싶어했는데 때마침 흥선대원군을 적대하던 최익현이 탄핵 상소를 올리자 최익현을 죽이라는 흥선대원군을 무시하고 최익현을 중용하며 실각시켰다.[22] 이것은 고종이 유난히 권력 욕심이 많은게 아니라 거의 모든 전제군주정 군주들의 공통점이다. 전제정 군주들은 자신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권한을 자신의 타고난 권리라고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사수하려고 하지, 자기 손으로 알아서 내려놓지 않는다. 고종과 비슷한 시기의 전세계 100여개나 되는 여타 비서구권 국가의 국왕들도 다들 근대화 해서 부국강병을 이뤄내고 싶다는 생각 자체는 했지만 고종과 마찬가지로 자기 권한을 양보하지는 않았기에 근대화에 실패했다. 중간계급이 주도하는게 아니라 국왕이 주도하는 근대화란 실패하는게 보편적인 것이고, 태국이나 에티오피아처럼 국왕이 주도했음에도 어떻게든 근대화를 성공한 케이스는 매우 운이 좋았던 특수 사례다.[23] 세종 초기에 벌어진 대마도 정벌은 어디까지나 왜구 토벌을 명분으로 하였기에 대마도 한정이었고 본토 타격은 하지도 않았다.[24] 흥선대원군도 양이(서양인) 세력이 강대한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어디까지나 중앙집권에만 신경 쓸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서원철폐, 무리한 경복궁 재건 정책으로 양반, 민중 계층에게 반감이 심했는데 병인양요, 신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3연속으로 터지자 민중들이 양이세력 배척을 외쳤고 흥선대원군도 이에 동승하여 불만을 잠식시켰다.[25] 사실 난학보다는 국학을 근대 일본의 기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더군다나 난학은 널리 퍼진 것도 아닌 일부만 연구하던 학문이었다.[26] 일례로 에도시대에는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현미경을 통해 눈의 결정이 기하학적인 육각형 모양임이 알려져 이를 무늬로 한 유카타가 팔려나갔을 정도다.[27] 단, 상선은 조선도 개항 이후에는 수로를 통해 물자를 운반하던 경강상인들의 주도로 수많은 증기선들이 들어왔다.[28] 전부는 아니다. 대한제국 역시 대형함을 사들이려는 노력을 하긴 했으나 해군의 첫 함선을 일본에게 강매당하는 굴욕도 당했다. 청년학파에서의 어뢰정 논리가 논파당하기도 했다.#[29] 에도 막부도 초창기엔 알파벳을 외우고 십여 개의 단어를 암기하는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1811년에 외국어 전문번역기관이 설립되고 나서 해결되었다.[30] 아마 벨테브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의사소통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일본 측이 알려줘서 그들이 '화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31] 현장에 직역이 가능한 통역사가 없었다고 한다.[32] 에도 막부는 체제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채우기 위해 조선에서 성리학(퇴계학 쪽)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선 이러한 성리학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가지 학문이 퍼저나오는데 하나는 성리학과 불교,중국학을 모두 배척하고 일본 고유의 학문을 연구하자는 국학과 하나는 성리학의 영향을 매우 짙게 받은 존황양이 사상의 근본이 되는 미토학파다.[33] 한국사에서 일본처럼 중앙권력이 약화되어 전국시대에 준하는 혼란기가 왔던 건 신라 후대에서 그나마 3개로 정리됐던 후삼국시대 사이 뿐이였고, 그 신라도 말기에나 그랬지 그 외 시기엔 내내 중앙귀족의 권력과 지위가 막강해 중세 일본식 봉건제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34] 난학이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은, 사실상 동시기 조선에서 서학과 실학이 끼친 영향과 거의 유사하다. 물론 중국을 거쳐 수입한 조선과 달리 유럽과의 직접적인 교류로 얻어낸 지식이었으니만큼 과학적 지식의 깊이에 있어서만큼은 보다 더 세밀하고 깊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외, 즉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 바로 탄압당했던 것은 서학이나 실학과 매한가지였으며, 심지어 그 처벌 강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조선이 더 느슨한 편이었다. 당대 일본 사회의 지배적 학문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성리학이었다.[35] 일각에서의 오해와 달리, 자포네스크는 일본의 개항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가령 일본 화풍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주의 사조가 유럽 회화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는 시누아즈리 튀르크리의 영향력이 더 깊었으며, 문화적으로도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36] 1840년대 말에 미국의 땅이 서부에 닿게 된 이후 서부개척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어서, 쿠로후네 사건이 일어난게 1853년임을 감안하면 비록 주변에 미국을 건드릴 국가가 없었음에도 성급하게 일을 벌인거에 가깝다. 미국 필리핀을 식민지화할 수 있었던 것도 1896년에나 가서였다.[37] 첫 방문 당시 에도 막부와 상의해야한다며 1년이라는 유예시간을 벌었다.[38] 즉, 남북전쟁이 늦춰졌거나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은 근대화를 실패하고 라틴아메리카처럼 미국의 반속국 내지 미국기업들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39] 프랑스와 미국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로 조선을 몇번 건드려보긴 했지만, 예상보다 반발이 거세고 그 반발을 감수할 만한 가치는 없다고 여겼기에 조선 개항을 포기했다.[40] 그 중 1896년에 아관파천으로 인해 조선에서의 자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1903년에는 용암포를 점령하기 까지 하였다.[41] 만약 여유가 있던 열강이 있었다면 이때가 기회다 싶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다카모리의 반란군이나 일본 정부에게 접근하거나 양측에 무기를 제공해 전쟁 장기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42] 특히 영국이 도움을 많이 줬는데 시키시마급 전함과 첫 드레드노트급 전함 카토리급 전함을 건조한건 영국 회사였다. 보통 군현대화를 추진하던 국가들에게 비싼값을 매겨 바가지 씌우는게 열강의 방식이었는데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제국의 구매의사를 받자 바가지까지는 안 씌우고 합당한 가격에 팔았다.[43] 한반도의 기후는 중국으로 치면 화북지역과 비슷하고 일본은 구로시오 난류로 인해 비슷한 위도임에도 불구하고 장강 이남지역과 비슷하다.[44] 이 때문에 일본 오래된 기업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꼽히고 있다.무려 ▲1000년 이상 기업은 7개 ▲500년 이상 32개 ▲200년 이상 3,146개 ▲100년 이상 50,000여개 등이다. 출처 : SBS 뉴스[45] 원칙적으로는 4공 6민 내지 5공 5민으로 4~50%이나 실제 과세 기준액이 하향되었다.[46] 다만 토지가 누락되는 경우도 꽤 있었기 때문에 세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막부직할령과 대번의 경우 농민들에 대한 실효세율은 25~30% 수준이였다. 물론 이건 세율이 낮은 막부직할령, 대번의 얘기였고 '촌'으로 불리던 도시의 경우 상업 이윤을 고려해 법정세율이 80%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실효세율은 당시의 추정 농업생산량 중 실제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양이 25~30%였다는 뜻이다. 중간관리들의 수탈 및 횡령도 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부담해야 됐던 세율은 실효세율보단 높았다.[47] 집 앞마당에 있는 텃밭이나 에 조금식 개간한 토지[48] 조선 후기의 조세제도를 보면 전세는 영정법 시행 이후엔 결당 4~6두를 납부하는 것으로 제도화되었고 공납의 경우엔 대동법 시행 이후엔 결당 12두를 납부해야 했다. 여기에 결작과 삼수미를 포함해도 결당 20두 수준이였다. 1결당 수확량을 감안하면 중앙정부에서 징수한 세금이 많다고 말하기엔 어려웠다. 군역의 경우엔 균역법 시행 이후엔 1년에 1필을 납부하게 되었다.[49] 상인집단은 있었다. 개성에 위치한 송상, 의주에 위치한 만상 등 상업집단은 있었고 상인으로 시작해 벼슬까지 얻은 임상옥도 있었다. 그러나 임상옥과 같은 대상인들은 어디까지나 나라에게 허락을 받은 뒤 인삼, 홍삼 수량을 배당받아 중국으로 가는 사신 행렬에 따라가 판매하는 무역상으로 쌓은 부귀였기에 국가의 규제를 받았기에 일본 상인처럼 기존 지배층과 맞먹지 못 했고 실제로 고위관리보다 넓고 방수도 많은 대저택을 지었다가 관리가 맞먹으려한다며 일부 밀어버렸다는 후문도 있다.[50] 출처: https://cafe.naver.com/booheong/156350[51] 조선왕조실록으로 세율을 계산해본 결과 중앙에서 때간 세금은 6% 정도이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46334[52] 흔히 말하는 세도정치에서의 부세수취율 조차도 경북,안동지역 한하지만 20% 언저리이다. https://cafe.naver.com/booheong/60476 세도정치 시기에도 20% 언저리였다는 말이다. 조선의 소작농은 지주한테 소작비만 내지 세금은 안냈다.[53] 이런 세금의 경우 법률에는 없는 세금인 부분이 많았다.[54] 출처: 손병규,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 17~19세기 지방재정사 연구, 역사비평사, 2008[55] 나락 기준으로는 1결당 600두였다.[56] 막부직할령, 대번 등 세금부담이 적은 지역의 농촌에선 25~30%[57] 18세기 전반부터 양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토지의 누락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8] 조선시대에 농지가 어느 정도 누락되었냐에 대해 정확한 추정은 힘들다. 김성우의 '전쟁과 번영 :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2014)에선 17세기 초중반엔 실제로 경작 중인 농지의 절반 이상이 수세대장에서 제외되어 있었다고 추정하고 이 추정을 근거로 각종 잡세, 수수료 등을 다 합해도 농민들이 내는 세금은 전체 수확량의 10%를 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59] 현대 한국 고고학자들이 전적지 유적을 발굴해 발굴되는게 거의 없다고 하는데 학자들이 추정하기엔 전투가 끝난 후 전사자들의 유해에서 알뜰살뜰하게 거의 모든걸 챙긴게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60] 흔히 개항기에는 홍삼으로 돈 벌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초기 한정이고 후기부턴 북부에 있던 자원들이 개발되기 시작하며 꽤나 많은 이윤을 창출했다.[61] 출처: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760896764             https://brunch.co.kr/@junatul/172 

<먼 나라 이웃 나라> 일본 편에서 본 이야기다. 기존의 상점에서는 예컨대 빨간색 비단 한 폭 달라고 하면 창고에 둔 물건을 가져다주는 시스템이었는데, 새로운 상점에서는 손님들이 직접 옷감을 볼 수 있도록 전시했더니 대박을 쳤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에도 시대에 일어났다고 적혀 있었다. 에도 시대라면 우리나라 조선 시대인데, 너무 현대적인 것 아닌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를 읽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에도 시대는 그런 '마케팅 혁명'도 충분히 일어날 만한 시대였다. 에도 시대는 동시대의 우리 역사, 즉 조선 후반기와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영웅들의 투쟁으로 점철된 전국 시대나 막부 말기에 비해, 에도 시대는 아무래도 지루하다. 그러나 정중동이라 했던가. 그것은 역사의 에너지가 응축되는 과정이었다. 에도 시대에 일어난 사회적 변화 중 일부는 심지어 동시대 유럽을 앞질러갔다.


봉건 제도가 가져온 뜻밖의 결과

쇼토쿠 태자, 남북조 시대 초기, 또는 메이지 시대에 일본 왕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 역사 대부분은 막부의 역사다. 막부란 그저 영주 중 가장 강한 자에 불과하다. 에도 막부 말기, 조슈 번이나 사츠마 번처럼 막부의 지시를 대놓고 어기는 영주들이 나타난 것도 이 제도의 근본적인 한계가 표면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에도 막부는 영주들을 견제하기 위해 '참근교대'라는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기인제도와 유사한 인질 제도였다. 하지만 영주와 가족은 물론 가신들까지 1년 주기로 에도와 영지를 번갈아 가며 생활해야 했다는 점이 다르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숙박은 물론 식사, 여흥 등 각종 소비재의 수요가 크게 일어났다. 쌀이나 옷감을 들고 다니며 경비를 지불하는 것보다 화폐가 훨씬 편하였으므로, 화폐 경제 역시 크게 진작되었다.







참근교대 행렬을 그린 그림 © 츠야마향토박물관참근교대 행렬을 그린 그림 © 츠야마향토박물관




양차 대전 이전 유럽과 마찬가지로, 에도 막부 역시 금본위제를 택했다. 문제는 네덜란드를 통한 무역 거래 결제에 은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전국 시대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무역 덕택에, 일본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유럽 열강이 남미에서 강탈해 온 은을 빨아들였다. 에도 막부가 시작될 당시 일본 전체의 상업 중심지였던 오사카는 그런 연유로 은을 중심으로 한 화폐 경제를 구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주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는 금을, 상업활동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은을 구매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은과 금을 교환해주는 업자가 나타났다. 이들은 교환에 따르는 차액(spread)을 얻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귀금속을 직접 옮겨 결제하려면 위험과 비용이 따랐으므로, 이들은 서로 간에 서류로 결제를 대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예금증서, 어음, 수표 등의 서비스가 발생했다.

막부의 금본위제는 의도치 않은 또 하나의 혁신을 가져왔는데, 바로 지방 화폐의 발달이다. 금태환을 기본으로 하는 금본위제는 결국 금 보유량에 화폐량이 묶이게 된다. 따라서 화폐가 부족하게 된 지방 영주들은 어음을 발행했다. 그러나 이는 막부의 화폐발행권에 대한 도전이다. 따라서 지방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만 유효한 어음을 발행했는데, 이것이 지방 화폐인 '한사쓰'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지자체가 지방 화폐를 지역경제 활성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옆 나라에서는 이미 300년 전에 그런 일을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출판문화 또한 융성했다. 정부나 종교가 출판을 장악했던 조선이나 근대 유럽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수요에 기반한 출판업이 활발했다. 이에 따라 에도 시대 신문은 지진 등 자연재해 소식이나, 치정 살인과 같이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할만한 사건을 다루었다. 책을 빌려 읽을 수 있는 대본소는 물론, 책을 등짐으로 가지고 다니며 빌려주는 대본업자도 많이 있었다고 하니, 독서 대국 일본은 과연 그 뿌리가 깊다.


배울 점은 배우자

저자는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 현실을 개탄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보통 19세기 후반에 한일 양국 간 격차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개항한 마당에 조선은 쇄국 정책을 고집했기 때문에 뒤쳐졌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 책을 썼다. 일본이 19세기 말 이미 열강 대열에 합류한 배경에는 265년에 걸친 에도 시대가 있다. 에도 시대 일본은 사회, 문화, 경제에 걸쳐 엄청난 에너지를 쌓아 올렸고, 그 힘을 배경으로 제국주의 강도단의 막차를 탄 것이다.

오사카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에도 시대 번화가 풍경오사카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에도 시대 번화가 풍경



에필로그에서 또 한 번 저자는 번뜩이는 논점을 제시한다. 우리말의 '억울'과 일본어의 '구야시이'가 묘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억울한 일은 속으로 삭이고 말지만, 구야시이한 일을 당하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고,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바꾼다는 것이다.

일본은 미국에,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당했고, 치외법권을 포함한 통상우호조약을 맺었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치외법권에 대해 배우며 분개한다. 억울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선진국 법제를 연구, 1896년 소위 '6법 체계'를 완성한다. 구미 열강에 뒤지지 않는 법제를 근거로, 일본은 각국과 조약 개정 협상을 벌여 치외법권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구야시이'한 일을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

막부 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개혁자를 자처했던 유신지사들은 결국 어리석은 길을 택했고, 약육강식을 믿는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전범들을 키워냈다. 그런 역사를 부러워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2차 대전 패망 후에 빠르게 재기한 일본의 저력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민중의 힘이다. 일본은 조선보다 거의 3백 년 먼저 민중을 키워냈다. 농노 기반 경제에서 갑자기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봉건 제도를 딛고 올라 강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봉건 제도가 너무 오래 지속된 덕일까. 에도 시대 민중은 더 이상 우매한 대중이 아니었다. 독서와 여행, 그리고 토론을 즐기던 그들은 이미 시대의 모순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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