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조선보다 빨리 근대화하며 조선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 참근교대, 은제련과 광산업, 농산물 선물거래, 네덜란드와의 교역 /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의 경제호황이었던 겐로쿠 시대 / 그러나 빈부격차와 높은 세율 때문에 조선과 일본의 농업인들 중 어느쪽이 더 윤택했는지는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1603년에 정이대장군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천하패권을 확립한 1615년부터 1867년 11월 9일의 대정봉환 때까지 약 252년 간 지속되었다. 전란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이전의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 전국시대와는 달리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큰 혼란이나 전쟁 없이 평화가 지속된 안정기였다. 또한 일본 역사 전체 기준으로 볼 때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1] 사실상 반(半)중앙집권 시대이라는 것.
또한 이 시기부터 전국시대까지 변방이었던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됐고, 홋카이도와 류큐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으며[2] 특히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의 중심지는 기존의 교토, 오사카 중심의 긴키 지역에서 현대의 도쿄 중심의 간토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3] 다만 에도 막부가 권력의 상당수를 독식하였을 뿐 지배 명분이 없다는 한계가 있어 언젠가 다시 내전이 일어날수 있다는 한계 또한 분명했다.
에도 시대 중기인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에는 경제 호황기로 국부를 축적하고 국력도 신장해[4] 소위 겐로쿠 시대를 맞았다. 겐로쿠 시대는 일본 막부 최대의 전성기로 이 기간동안 상업이 흥업하고 오늘날의 선물거래와 같은 쌀 선물거래가 등장하고, 이러한것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카부나카마(株仲間)를 형성하기도 했다.[5]
겐로쿠 시대가 끝날무렵, 방탕해진 재정을 개혁하고자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필두로 享保の改革(きょうほうのかいかく, 교호년의 개혁)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막부의 재정지출을 줄이며 세금의 증세와 치수사업, 신전개발(新田開発)[6]을 실시했다. 또한 급격하게 올라간 쌀값을 견제하고자 금 비율이 낮은 겐분코방(元文小判,げんぶんこばん)을 제조해 의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7] 이를 통해 에도시대는 중흥의 시기를 열었다.
이후 타누마 시대(1751~1789)에는 긴축재정을 버리고 상업자본의 이용과 적극적인 정책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부패와 뇌물의 시대로 일컬어지며 농민들의 반란(잇키)가 많아졌다. 계속적으로 재해, 기아가 속출하고, 1772년 에도에서 화재가 발생해 약 2만명 가량의 인명피해를 입자 결국 마츠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쥬(老中)가 되어 쌀의 선물거래 규제 완화, 귀농민 보호, 술 생산량 제한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寛政の改革(かんせいのかいかく, 간세이년의 개혁) 을 실시했다. 이것으로 다시 막부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텐보(1841~1843)년에 대기근, 반란, 소동, 모리슨호 사건등이 겹쳐 다시 막부가 기울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로쥬 미즈노 타다쿠니는 위의 교호년의 개혁과 간세이년의 개혁에 따라서 개혁을 실시했다. 주로 탐관오리를 귀양시키거나, 가부키쵸 일대의 오락가를 닫아버림으로서 민간의 낭비를 없애버리는식이었다. 또한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걸 듣고는 서양식 포술을 도입하게하고 군사 체제를 서양식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그외에 선물시장에서 쌀 시세를 혼란시키게 하고있던 카부나카마를 추방시켰으며, 파산한 다이묘들을 위해 그들이 가지고있던 빚을 무이자로 해주고 원본은 20년안에 갚으면 된다는식으로 재정을 안정시켰다.
결국 1853/54년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한 뒤 격동의 동란기에 빠져 사쿠라다 문 밖의 변(櫻田門外の變)이 일어나고 번들은 대놓고 막부의 말을 안 들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등 사실상 통치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사쓰마, 조슈 등의 토막(討幕)파 번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1867년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소멸, 이듬해 무진전쟁(보신(戊辰)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에도 막부가 소멸한 1868년은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明治) 시대의 시작이라 하여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도.
또한 이 시기부터 전국시대까지 변방이었던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됐고, 홋카이도와 류큐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으며[2] 특히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의 중심지는 기존의 교토, 오사카 중심의 긴키 지역에서 현대의 도쿄 중심의 간토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3] 다만 에도 막부가 권력의 상당수를 독식하였을 뿐 지배 명분이 없다는 한계가 있어 언젠가 다시 내전이 일어날수 있다는 한계 또한 분명했다.
에도 시대 중기인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에는 경제 호황기로 국부를 축적하고 국력도 신장해[4] 소위 겐로쿠 시대를 맞았다. 겐로쿠 시대는 일본 막부 최대의 전성기로 이 기간동안 상업이 흥업하고 오늘날의 선물거래와 같은 쌀 선물거래가 등장하고, 이러한것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카부나카마(株仲間)를 형성하기도 했다.[5]
겐로쿠 시대가 끝날무렵, 방탕해진 재정을 개혁하고자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필두로 享保の改革(きょうほうのかいかく, 교호년의 개혁)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막부의 재정지출을 줄이며 세금의 증세와 치수사업, 신전개발(新田開発)[6]을 실시했다. 또한 급격하게 올라간 쌀값을 견제하고자 금 비율이 낮은 겐분코방(元文小判,げんぶんこばん)을 제조해 의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7] 이를 통해 에도시대는 중흥의 시기를 열었다.
이후 타누마 시대(1751~1789)에는 긴축재정을 버리고 상업자본의 이용과 적극적인 정책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부패와 뇌물의 시대로 일컬어지며 농민들의 반란(잇키)가 많아졌다. 계속적으로 재해, 기아가 속출하고, 1772년 에도에서 화재가 발생해 약 2만명 가량의 인명피해를 입자 결국 마츠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쥬(老中)가 되어 쌀의 선물거래 규제 완화, 귀농민 보호, 술 생산량 제한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寛政の改革(かんせいのかいかく, 간세이년의 개혁) 을 실시했다. 이것으로 다시 막부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텐보(1841~1843)년에 대기근, 반란, 소동, 모리슨호 사건등이 겹쳐 다시 막부가 기울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로쥬 미즈노 타다쿠니는 위의 교호년의 개혁과 간세이년의 개혁에 따라서 개혁을 실시했다. 주로 탐관오리를 귀양시키거나, 가부키쵸 일대의 오락가를 닫아버림으로서 민간의 낭비를 없애버리는식이었다. 또한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걸 듣고는 서양식 포술을 도입하게하고 군사 체제를 서양식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그외에 선물시장에서 쌀 시세를 혼란시키게 하고있던 카부나카마를 추방시켰으며, 파산한 다이묘들을 위해 그들이 가지고있던 빚을 무이자로 해주고 원본은 20년안에 갚으면 된다는식으로 재정을 안정시켰다.
결국 1853/54년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한 뒤 격동의 동란기에 빠져 사쿠라다 문 밖의 변(櫻田門外の變)이 일어나고 번들은 대놓고 막부의 말을 안 들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등 사실상 통치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사쓰마, 조슈 등의 토막(討幕)파 번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1867년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소멸, 이듬해 무진전쟁(보신(戊辰)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에도 막부가 소멸한 1868년은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明治) 시대의 시작이라 하여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도.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화를 이룩하여 일본 내수 경제의 기틀을 잡은 시기로, 이 2세기 반의 기간이 20세기, 21세기까지 일본 내수 경제의 규모가 성장하고 유지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 시기는 전국시대의 자유로운 교역보다는 쇠퇴했지만[8], 해외에 도자기와 우키요에 등을 수출하고 금, 은을 대대적으로 채굴[9]하면서 국부를 쌓은 시기다. 각 번의 다이묘가 기거하는 곳 근처에는 온갖 특산품이 거래되었고 유통량이 늘어난 덕분에 금, 은 화폐 사용이 일반화 되었으며, 한편으로 전국시대 난립했던 관소[10]들이 철폐되고 해상 교통이 대통합하는 등 상업 발달이 두드러진 시기. 다만 후기에는 중국의 명나라와 그 후신 왕조인 청나라가 이 일본 금, 은, 동을 죄다 흡수해버려서 곤란했던 적이 있다.[11] 그래서 청나라 상선 중 허락을 받은 배만 무역할 수 있게 1715년부터 신패라는 것을 발급했다.
실제로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서 일본의 최대 수출품이 에도 막부 극초기에는 은이었고 이후 구리였다. 네덜란드와 중국의 상인들은 데지마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은, 구리를 구입했다. 초창기에는 은이 주된 수출품이었지만 문제는 은을 지나치게 많이 캐다보니 은의 생산량이 매년 기복이 심하고 점차 고갈됨에 따라 일시적으로 막부가 보유하고 있던 금을 수출하기도 했는데[12] 때마침 일본 각지에서 대규모 구리광산들이 개발되면서 구리가 일본의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잡았다. 사타케 가문이 지배하던 쿠보타(아키타) 번의 인나이 광산이 오랬동안 일본 최대의 구리광산이었는데 막부와 쿠보타 번은 수출용 구리 물량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을 했다.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서 수출하기 위한 구리는 일본 각지의 구리 산지에서 일차 가공을 한 뒤에 모두 오사카로 운반하여 오사카의 구리 제련업자들이 독점적으로 제련을 했는데 막부는 수출용 구리의 가공 및 유통을 오사카로 집중시킴으로써 구리의 생산을 통제하고 세수를 확보하려고 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 3대 재벌이던 스미토모 재벌이 바로 에도시대 오사카의 구리제련업자 가문에서 비롯했다. 스미토모 가문은 오사카 구리 제련업자 조합의 주식 8주 중 3주를 보유한 일본 최대의 구리제련업자였다. 오사카 제련업자들의 구리제련기술 독점은 무려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쿠보타 번을 비롯해서 구리광산을 보유하고 있던 여러 번들이 점차 구리제련기술을 확보하기 시작하고 구리제련업자들 또한 직접 구리 광산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다.
매해 수백만 관의 구리를 해외로 수출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세계적인 구리 생산지역이었기 때문에 에도시대 일본은 상업과 화폐경제 발달이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였다. 윗 문단에서 언급한 스미토모와 함께 일본 3대 재벌인 미쓰이 그룹 역시 1673년 교토의 포목상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에도 시대에서 쌓여진 경제와 국력은 훗날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에 큰 기반이 되었다.
실제로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서 일본의 최대 수출품이 에도 막부 극초기에는 은이었고 이후 구리였다. 네덜란드와 중국의 상인들은 데지마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은, 구리를 구입했다. 초창기에는 은이 주된 수출품이었지만 문제는 은을 지나치게 많이 캐다보니 은의 생산량이 매년 기복이 심하고 점차 고갈됨에 따라 일시적으로 막부가 보유하고 있던 금을 수출하기도 했는데[12] 때마침 일본 각지에서 대규모 구리광산들이 개발되면서 구리가 일본의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잡았다. 사타케 가문이 지배하던 쿠보타(아키타) 번의 인나이 광산이 오랬동안 일본 최대의 구리광산이었는데 막부와 쿠보타 번은 수출용 구리 물량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을 했다.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서 수출하기 위한 구리는 일본 각지의 구리 산지에서 일차 가공을 한 뒤에 모두 오사카로 운반하여 오사카의 구리 제련업자들이 독점적으로 제련을 했는데 막부는 수출용 구리의 가공 및 유통을 오사카로 집중시킴으로써 구리의 생산을 통제하고 세수를 확보하려고 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 3대 재벌이던 스미토모 재벌이 바로 에도시대 오사카의 구리제련업자 가문에서 비롯했다. 스미토모 가문은 오사카 구리 제련업자 조합의 주식 8주 중 3주를 보유한 일본 최대의 구리제련업자였다. 오사카 제련업자들의 구리제련기술 독점은 무려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쿠보타 번을 비롯해서 구리광산을 보유하고 있던 여러 번들이 점차 구리제련기술을 확보하기 시작하고 구리제련업자들 또한 직접 구리 광산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다.
매해 수백만 관의 구리를 해외로 수출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세계적인 구리 생산지역이었기 때문에 에도시대 일본은 상업과 화폐경제 발달이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였다. 윗 문단에서 언급한 스미토모와 함께 일본 3대 재벌인 미쓰이 그룹 역시 1673년 교토의 포목상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에도 시대에서 쌓여진 경제와 국력은 훗날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에 큰 기반이 되었다.
"너무 배부르면 농사일을 싫어하게 되고, 농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곤궁해지면 흩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님께서는 향촌의 농민들이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도록 주의해서 쌀을 잘 바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에도시대의 저서 '승평야화(昇平夜話)' 중에서
16세기경 일본의 더 높은 토지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농민들은 조선의 농민들보다 더 나은 삶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일본의 농민들은 60%의 생산량을 세금으로 바쳐야 했고, 이는 조선의 농민과 비교 불가한 수준이다.- 언제, 어떻게 일본은 한국을 따라잡았는가 중에서
나라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높았고, 괄목할 만한 경제적 발전이 있었으나 그 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했고 농민들이 농노마냥 착취당했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평민들의 생활수준이 국가의 경제력에 비해 열악했다. 일례로 에도 시대에는 〈무명이외는 입어서는 안 된다〉·〈아침부터 밤까지 일할 것〉·〈술이나 차는 마시지 말 것〉 등의 엄격한 룰로 막부에서 농민들을 심하게 통제했었다. 심지어는 〈농민과 깨는 짜면 짤수록 나온다〉는 막부 관리의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장인과, 상인, 무사계급이 살던 도시와는 딴 세상인 것. 거기다 무사들은 농촌에 기거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농민은 사회를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존재이기에 농민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는 법까지 등장했다(....).
실제로 위의 그래프에서 보는거와 같이 에도시대의 성인의 평균 신장은 남성이 150센티대 중반대로, 여성은 그것보다 10센티 정도 더 작았으며 조선시대 남성들에 비하면 왜소한 수준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모든 시대 중에서 일본인들의 몸집이 가장 작았던 시기가 바로 이 에도 시대이다. 이는 영양상태가 나쁜 데다가 좁은 연립 주택 등에 밀집해 생활한 스트레스의 영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즉, 극빈한 생활고로 인한 발육부진으로 키가 이전 시대보다도 더 작아졌다는 것이다.에도시대- 출토된 인골로 본 영양상태 실제로 그 당시 영양상태의 간접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는 신장에서의 비교만 봐도 동시대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약 6cm 정도 더 컸다고 한다. 출처 현재 한국인과 일본인의 키 차이가 대략 3cm 정도이니 오히려 전근대에 한일간의 키 차이가 2배 가량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하의 연구들은 주로 학술적 논문으로, 전문적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 가능한 정도지만, 요약하면 일본은 그 당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이 높은 세율로 착취당해서 농본주의 사회였던 조선과 중국의 일반적인 농민들보다 삶의 수준이 더 높았다고 단정짓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이 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시사한다. 특히 인두세를 피하기 위해 신생아를 죽이던 마비키 풍습은 뭘 어떻게 해석해도 일본 농민들의 삶이 고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심한 착취를 당했다는 것이 피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 마비키 말고도 일본 농민들이 극심한 세금 착취와 가난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여자아이를 유녀(매춘부)로 팔아넘기는 일이었다. 특히 일본 동부의 에치고 출신 여성들이 다른 지방의 여성들보다 20% 정도 더 많이 유녀(매춘부)로 팔렸는데, 피부가 부드럽고 인내심이 강한 점 때문에 선호되었다고 한다. # 이렇게 팔려나간 유녀(매춘부)들의 비참한 삶은 요시와라 유곽 문서와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문서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아울러 가난 때문에 농촌의 여자들을 유녀(매춘부)로 파는 일본의 풍습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이들을 가라유키상이라고 부른다. 1920년까지 약 30만 명의 일본인 여성들이 가라유키상이라는 이름으로 해외 각지에 매춘부로 팔려나가야만 하였다. #, #
그외 자료로는 나카무라 사토루와 박섭의 저서인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의 본문에서도 에도 막부의 공식적 수취율은 21%였다고 서술하고 있다.[16] 또한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에서 밝히기를 에도 시대의 공식적 세율은 조선의 6배,청의 11배였다고 한다. 그외 경제사학자 이헌창은 조선 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2010)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의 1인당 소득이 조선보다 높았지만 조세 부담률은 조선보다 월등히 높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외 런던정경대 경제사학과 교수인 스티븐 브로드웨이는 1990년의 미국 달러로 환산한 1800년의 일본과 청, 인도의 구매력 지수는 일본 876 달러, 청 639 달러, 인도 569 달러 이후 1850년 일본 933 달러, 청 600 달러, 인도 556 달러로 추산한다. 더하여 근세 일본의 일인당 소득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으며[17] 자료 일본의 평균 수명 또한 중국과 인도보다 10년 이상 높았다. 자료 [18] 다만 18세기 이후로는 평균수명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만큼 인구가 더 늘지는 않았는데 이는 고율의 세금으로 인해 일본 농노들의 삶이 발전된 상업수준에 비해서 팍팍했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한 마비키의 영향 때문이었다. 링크
그러나 수취의 정황 만을 놓고 당시의 삶의 질을 평가하기에는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반론도 일부 있다. 첫 문단에서 언급된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돼있다.
1870년의 일본은 일인당 연간 1.76석(이중 실제 쌀은 1.14석)을 생산하고 있었다. 조선의 경우 1910년의 농업생산량은 개항기 동안 도입된 일본의 다수확 품종 벼, 일본이라는 대규모 쌀 수출 시장의 등장과 미가 상승으로 인한 동기부여에 의해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상당량 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전 수치는 잘 알 수 없으므로 일단 이 수치를 통하여 비교해보기로 한다. 1910년의 조선 인구는 164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2682만석이므로 인구 1명당 생산량은 1.63석으로 이는 kg 단위로 환산하여 234kg이며 이 중 실제 쌀은 96kg이다.[19]
오히려 일본인의 곡물 생산량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 박섭 교수는 해당 저서에서는 1910년 조선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이 96kg(0.64석) 수준이라 서술하였지만 정작 박섭 교수의 또 다른 연구저서[20]를 보면 1911년 일인당 미곡생산량은 0.72석이라 서술하였다. 이렇게 박섭 교수 스스로의 연구에서도 꽤나 상반된 통계가 나온 만큼 적어도 두 통계중에서 하나는 본인의 연구 결과에도 어긋나는 주장으로 보여진다.
또한 일인당 미곡 생산량/소비량의 격차발생은 근세의 것이라기 보다는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농업이 근대화 됨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심지어는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농업의 근대화가 일본 정부의 주도로 대대적으로 시작된 이후의 일본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과 일본 만큼 농업의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한일강제병탄 직후 조선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을 비교하면 그다지 큰 차이가 존재한다 보기 힘들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조선의 농촌에서 농업에 관하여 동시대 일본 만큼의 근대화가 제대로 진행되기 이전인 1911년 조선의 1인당 미곡생산량은 약 0.72석, 총 곡물 생산량은 약 1.65석으로 추정되며[21], 그외 허수열 교수의 추계를 인용하면 1910년 조선의 1인당 미곡생산량은 약 0.84석에 이른다. 일본측의 1인당 생산량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0년을 기준으로 했을시에는 일본의 일인당 연간 총 곡물 생산량은 약 1.76석(이중 실제 쌀은 약 1.14석)으로 추정된다.[22] 하지만 또 다른 자료인 1881년 일본 통계연보중 미곡생산량 값만을 바탕으로 구한 1881년 일본의 1인당 미곡생산량을 살펴보면 약 0.81석 수준이었다. 즉, 일본과 조선 사이의 미곡생산량 차이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간적인 차이를 생각했을 때 생각보다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인 것이다.
"일본 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에 일에 불구하다."- 조선통신사 원중거, 승사록 중에서
"일본 시골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아로 들어가고 풍년이 들어도 콩 반쪽도 잇기 어려워 스스로 처자를 팔아먹기 까지 한다. 빈부가 균등치 않음은 다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조선통신사 신유한, 해유록 중에서[23]
물론 "일본의 공식적 공조율은 21%"라 논하였던 나카무라 교수가 조선의 공식적 공조율에 관해서는 "3.7%"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그리고 에도시대에 일본을 방문하였던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 사실상 농노화가 된 일본 농민들의 심각한 빈곤상태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등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마비키를 포함한 실제로 존재했던 풍속들을 보면, 적어도 극심한 빈부격차, 혹은 생활격차가 존재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거기다 당대 일본은 육식금지령으로 인해 육류섭취 또한 불가능했다. 실제로 18세기 이후로는 에도 시대 일본의 인구가 계속해서 비정상적으로 일정하게 2700만명 선으로만 유지(정체)되었고 다음 자료에서 보듯이 일본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노들에 대한 식사량 제한과 이 부족한 식사량 그리고 과중한 세금 부담 때문에 마비키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 등을 보면 에도 시대 일반 백성들의 삶의 질이 전혀 저하되지 않았다고 보기 힘든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다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경제사학자 이헌창은 <조선 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2010)에서 일본의 일인당 소득이 조선보다 높았지만 조세 부담률은 조선보다 높았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수취 정황만으로 당시의 삶의 질을 평가하기에는 일부 무리가 있다. 가령 19세기 초 호남지역의 농가호수의 비율에 대해 丁若鏞은 호의 비율로 살펴볼 때 전체 호수 가운데 지주는 5%, 자작농은 25%, 소작농은 70%라고 보았다. 병작반수제, 지주의 전정을 소작농에게 부담시키는 행위, 변질되어버린 잡세, 환곡, 군정 등으로 그 부담이 매우 커진 까닭이다. 배향섭 교수의 저서 임술 민란과 19세기 동아시아 민중 운동에서는 조선 후기 농민들이 일년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물로는 소작료와 환곡을 감당하기도 힘들었으며 기타 각종 잡세의 부담은 직포를 짜서 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직포업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으나 가장 기본적인 생산물인 곡물은 지주와 국가에 수취 되어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가내 수공업에 의지하였는데 이마저도 군역으로 수취 되었던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정약용 또한 생활고에 못 이겨 소작농들이 자신의 처자를 노비로 매매하는 행위와 군역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거세를 하는 행위를 보고 개탄 하기도 하였다. 한길사 한국사에서는 조선 후기 일반적인 지대와 세금은 수확량의 70~80% 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결국 수취의 정황(일본의 높은 세율) 만을 놓고 조선의 생활이 일본이 그것보다 나았다고 보기에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어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더하여 조선은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자 18세기 중반까지 인구의 3할을 차지했던 노비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일본은 농노 비율이 80%였으며[24] 조선의 노비 비율은 18세기 영조 시대 이후로는 10% 미만으로 떨어졌고 그로인해 영조 이후 조선후기에는 노비제가 사실상 해체되었음은 조선사에 비판적인 이영훈 교수와 그 이영훈과 노비제도 문제로 대립했던 미국의 제임스 팔레 교수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므로 이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애초에 일본의 마비키 풍습 만큼 자기 자식들을 지속적으로 죽여야 할 만큼 노비들의 생활이 매우 처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25]
무엇보다 그 노비들을 제외한 조선의 소작농들의 경우 최초의 주장대로 반작법을 적용해 소작을 한다 해도 소작에 적용되는 반작법은 국가에 원천징수되는 세금의 개념이 아니며 지주가 전세를 대신 내주거나 반작법임에도 수확물의 1/3을 받는 등의 소작농과 지주 사이의 자율적인 계약조건의 사전 합의가 있었으며, 링크 그렇기에 조세와 상관없이 추가 수확을 위한 땅을 임대하는 자율적인 계약조건으로 보아야하며 추가 수확량에 따라 소작인들이 자영농으로 변환되거나 하는 경제논리적 사항일 뿐이었다. 즉, 강제적으로 원천 징수되는 당대 일본의 세금과는 전제 자체가 아예 다르다는 것이다. 거기다 조선에서는 순수하게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만 부담하는 순수 자영농과 다수의 외거노비로 경작하는 지주계층이 일제의 수탈이 시작되던 시기의 자료로 비교해도 링크 이미 20%를 넘겼지만 당대 일본의 농노들은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줘서 징세권을 나눠가진 '기생지주'들에게 내야하는 몫이 기본 세금 부담에 추가로 더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 세금 부담은 일본 농민들이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외에 에도시대 당시의 생활상을 참조 할 자료로는 다음의 기사가 있다. "도시=개미지옥"이었다... 에도 시대로부터 본 일본의 인구 감퇴기에 일어났던 것들 이 기사는 에도 시대의 인구 변동에 대해 시즈오카 현립대학(静岡県立大学)의 학장인 키토 히로시(鬼頭 宏) 역사인구학(歴史人口学) 교수가 에도시대 당시의 생활상에 대하여 해설한 것이다.
위의 기사는 여러가지로 참고할 내용이 많이 있는 기사로 해당 기사에서 키토 히로시 교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던 17세기에는 여성이 한 사람당 5~6명은 낳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여러 지역에서 4명에 못 미치게 되었다. 수유 기간을 늘려 임신을 막는다거나 낙태나 솎아내기 등의 수단을 통해 출생 억제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생률을 낮췄다는 것은 '출생억제'뿐만이 아니다. 각지에서 여성의 만혼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이 늦어졌다라고해도 고작 3년 정도이지만, 자녀 수를 1명 정도는 적게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중략... 토지에 의존하고 사실상의 쇄국으로 인해 자원을 국외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 없다는 조건하에 인구 3천만 명의 도쿠가와 일본은 8대 장군 요시무네 시대에 성장의 한계를 맞았던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일본의 인구 정체에 대하여 경제적인 요인에 의한 마비키와 낙태 등의 수단이 인구 정체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키토 히로시 교수는 "에도 시대는 시장 경제화가 진행된 농경 사회이다. 당연히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도시 인구도 전국 인구의 정체에 보조를 맞추도록 한계점에 도달했다. 사이토 세이지 씨의 조사에 따르면, 도시 인구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크게 증가했지만, 이후 19; 세기 중반까지는 감소하고있다. 그동안 농촌 인구는 17세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꾸준히 증가했다. (사이토 세이지 「에도 시대의 도시 인구」). 중략... 도시의 규모별 분포의 변화를 보면 1750년부터 1850년까지 기존의 대도시에서는 인구가 정체했지만 1 만명 미만의 지방 도시에서는 도시 발전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하며 인구 정체가 농촌 뿐만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설명하였다.
에도시대 후반에 일어난 도시 인구의 정체에는 주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는 도시 환경이다. 도시=묘장설, 혹은 도시=개미지옥설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존재했다. 도시의 위생환경이 농촌보다 현격히 나빠 정상적인 해에도 농촌부보다 사망률이 높았다. 천연두, 홍역, 결핵, 독감, 설사·장염, 매독 등이 만연하기 쉽고, 막부 말기에는 콜레라가 여러 번 덮쳤다. 과밀한 거주 환경과 함께, 소독되지 않은 수도가 감염증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또 현재와 마찬가지로, 도시에서는 가족을 가지는 것이 곤란하고, 출생률은 농촌보다 낮았다. 종종 사망률은 출생률보다 높았고 20세기에 가까워질 때까지 도시 지역에서는 자율적으로 인구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도시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농촌부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도시의 존재는 지역 인구를 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즉, 요약해보자면 에도시대 당시 대도시 지역의 주민들은 생각과 달리 열악한 환경 탓에 위생환경이 농촌보다도 더욱 나빠서 정상적인 해에도 농촌부보다 사망률이 더 높았고 인구정체가 마비키 등의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농촌과 대도시 모두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 당시 일반 일본 평민들의 평균적인 삶은 번화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서 일본 농업의 생산성이 기후의 영향으로 조선보다 비교적 높았음에도[26] 조선의 농민들에 비해 생활수준이 특별히 나았다고 결론내리기는 어려운 점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칠공삼민[27]으로 대표되는 과중한 세금 부담은 일본 농민(농노)들에게는 크나큰 부담이었으며 이는 마비키라는 영유아 살해 문화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28] 즉, 전체적인 경제력은 조선에 비해서 앞서나가기는 했지만 세율 문제 때문에 일반 평민들의 삶이 당대 조선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결론내리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29]
그외 2010년에 발간되었던 매디슨 프로젝트에선 1820년 일본의 소득은 669달러, 조선은 600달러로 큰 차이가 나진 않았다고 추정했었다. 하지만 이후의 2018년 1월 발간된 매디슨 프로젝트(출처)를 확인해보면 16세기 이후 일본의 1인당 경제력은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남한과 북한의 데이터는 1820년부터 제시되어 있는데,[30] 지역별 성장 비교에 알맞은 소득으로 1800년의 일본은 1009 달러, 1820년의 남한과 북한은 465달러와 245달러, 남북한을 포함한 조선은 411달러로 나타나 있으나, 이것이 빈부 격차를 감안한 수치인지는 불명이다. 다만, 전근대 조선시대의 1인당 GDP에 대해서는 아직 신뢰할만한 추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유념해야 한다.[31]
한편 2007년에 이헌창 교수와 쿄지 후카오 교수가 공동저술한 논문 'When and how did Japan catch up with korea'에 따르면 1800년의 조선의 1인당 gdp는 600달러, 일본의 1인당 gdp는 700달러였다고 추정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16~18세기에 일본이 조선의 1인당 gdp를 따라잡았고 19세기에 양국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졌다고 추정했다. 정확히는 16세기만 해도 일본 국민은 고세율 때문에 조선보다 삶의 질이 낮았지만, 생산력의 차이로 점점 오르기 시작해 에도시대 말기 쯤 일본 국민의 삶의 질이 조선 국민의 삶의 질을 추월했다고 한다. #
에도 시대 이전에는 일본의 각지마다 다양한 지역 화폐가 쓰였지만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는 화폐발행권을 독점하고 금은동 3종 동전을 기반으로한 통화양식으로 전국적으로 통일한다. 이 동전들은 서로 교환할 수 있었고 교환 비율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교호의 개혁이라던가 간세이의 개혁이라던가 주로 금 화폐를 조정재정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금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서 바뀌었다.
예를들어 소액 거래에 쓰이는 일반 동전은 전(錢) 또는 몬(文) 이라고 불렸고 1,000 전이 1 칸몬(貫文), 금 1냥과의 교환비율 대체로 전4칸몬, 4000 전이 금화 1냥이었다. 즉 에도시대 초기에는 금(金) 1냥(両) = 은60 몸 (匁 , 돈 = 3.75 그램, 60몸=약225그램) =전4칸몬 (4,000文). 고정 비율은 아니고 시세에 따른 변동제여서 정책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인플레가 심해져 동전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다.[32]
금화(金貨)로는 코반 (小判, Koban) 금화가 1냥(両)으로 가장 널리 쓰인 대표적인 금화였고 다른 화폐의 기준이 되었다. 약간 길고 둥근 타원 형태로 일본 사극 등 시대물 에 흔히 등장한다. 무게는 금 15그램 가량. 에도시대 당시 1냥의 가치는 쌀 3~4 고쿠(石, 1석 = 한 사람의 1년분 식량, 약 150 kg )으로 4석을 기준으로 무게로 약 600 kg 분량, 20 kg 쌀 포대로는 30포대 분량이었다. 1,000달러 가치 이상의 매우 고액권인 셈이다.
오오반(大判, Ōban) 금화[33]는 그 10배인 10냥(両)으로 초기에는 재산축적이나 고액 거래에만 한정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막부의 재정 정책에 따라 자금이 필요할 때에는 금의 비율을 적게 조절해 많이 유통시키거나, 긴축을 실시할 때에는 금의 비율을 올리는 식으로 화폐 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냥의 1/4 인 1 분(分) 화폐는 금 또는 은으로 만들어졌다. 1냥의 1/16 인 1주(朱)라는 단위도 있었다.
에도시대 금화 1냥의 가치는 오늘날에는 약 12-17만 엔 정도로 본다. 1700년 당시 음식 소바 250 그릇 값. 일급 은화 5문 4분인 목수가 금화 1냥을 벌려면 12일간 일을 해야 했다. 1전은 현대의 4엔 가량이니 한화로 40원 정도.
금화(金貨)로는 코반 (小判, Koban) 금화가 1냥(両)으로 가장 널리 쓰인 대표적인 금화였고 다른 화폐의 기준이 되었다. 약간 길고 둥근 타원 형태로 일본 사극 등 시대물 에 흔히 등장한다. 무게는 금 15그램 가량. 에도시대 당시 1냥의 가치는 쌀 3~4 고쿠(石, 1석 = 한 사람의 1년분 식량, 약 150 kg )으로 4석을 기준으로 무게로 약 600 kg 분량, 20 kg 쌀 포대로는 30포대 분량이었다. 1,000달러 가치 이상의 매우 고액권인 셈이다.
오오반(大判, Ōban) 금화[33]는 그 10배인 10냥(両)으로 초기에는 재산축적이나 고액 거래에만 한정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막부의 재정 정책에 따라 자금이 필요할 때에는 금의 비율을 적게 조절해 많이 유통시키거나, 긴축을 실시할 때에는 금의 비율을 올리는 식으로 화폐 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냥의 1/4 인 1 분(分) 화폐는 금 또는 은으로 만들어졌다. 1냥의 1/16 인 1주(朱)라는 단위도 있었다.
에도시대 금화 1냥의 가치는 오늘날에는 약 12-17만 엔 정도로 본다. 1700년 당시 음식 소바 250 그릇 값. 일급 은화 5문 4분인 목수가 금화 1냥을 벌려면 12일간 일을 해야 했다. 1전은 현대의 4엔 가량이니 한화로 40원 정도.
과거 유신지사들은 메이지 유신과 개국의 공로를 과장하기 위해 에도시대가 유럽과 비교해 후진적인 체제였다는 관점을 주장했으나 현대에는 수정되었으며, 이에 대해 재반박이 이루어지는 등 논쟁이 있는 편이다. 실제로 일본의 근대화 시기는 러시아나 스페인,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의 국가들에 비해선 다소 늦지만 착실히 뒤따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며, 메이지 유신을 실시 할 당시에 지식인들은 필요이상의 급박감을 느껴 서양문물을 많이 들여왔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제기획청의 보고서에서는 1830년대에 산업혁명을 마무리한 영국과 같은 국가에 비교하면 일본은 굉장히 뒤쳐져 있었으나 일본은 이미 해로와 육로로 도로를 만들어서 운송의 기본 시스템을 확보하고 있었고, 쌀 선물거래와 같은 유사 주식시장 같은 시스템을 구축했다. 교육면에서는 테라코야나 다이묘들이 설립한 학교들이 200개가 넘었다. 또한 일본의 수출이 1600년대에서 1740년까지 100년사이 4배로 급확대하고있음을 보아 선대제수공업(공장수공업의 전단계)이 확립되어있었음을 알수있다.
실제 메이지시대 초기 수학률은 남자 43% 여자10% 정도로 나타나며, 이는 이미 이전의 세대가 테라코야나 다이묘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기초적인 학문을 배워서 적응하던 인수가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한다. 다만 테라코야의 절대적인 수는 조선의 서당보다 적었으며 일부 농촌 지역에는 편지글을 읽고 쓰는 비율이 10%이하로 나오는 등 당시 서양에 비해 부족했다 볼 여지가 크다. 흔히 말하는 식자율 70%는 이름만 읽고 쓰는 비율이다.
에도시대의 일본이 타국과 비교해서[34] 나았던 국가적 인프라와 교육, 경제적 여유가 메이지 유신에 공헌한 정도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일본으로 하여금 개국을 하고서도 다른나라에 식민지가 되는 일 없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는데에 공헌했다는 해석도 있으며 반대로 메이지 유신이 에도시대의 폐쇄성과 후진성을 극복함으로서 현재의 일본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의견도 있다.#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 성공 원인을 단순히 에도 시대의 내재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만은 없다.
일본의 경제기획청의 보고서에서는 1830년대에 산업혁명을 마무리한 영국과 같은 국가에 비교하면 일본은 굉장히 뒤쳐져 있었으나 일본은 이미 해로와 육로로 도로를 만들어서 운송의 기본 시스템을 확보하고 있었고, 쌀 선물거래와 같은 유사 주식시장 같은 시스템을 구축했다. 교육면에서는 테라코야나 다이묘들이 설립한 학교들이 200개가 넘었다. 또한 일본의 수출이 1600년대에서 1740년까지 100년사이 4배로 급확대하고있음을 보아 선대제수공업(공장수공업의 전단계)이 확립되어있었음을 알수있다.
실제 메이지시대 초기 수학률은 남자 43% 여자10% 정도로 나타나며, 이는 이미 이전의 세대가 테라코야나 다이묘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기초적인 학문을 배워서 적응하던 인수가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한다. 다만 테라코야의 절대적인 수는 조선의 서당보다 적었으며 일부 농촌 지역에는 편지글을 읽고 쓰는 비율이 10%이하로 나오는 등 당시 서양에 비해 부족했다 볼 여지가 크다. 흔히 말하는 식자율 70%는 이름만 읽고 쓰는 비율이다.
에도시대의 일본이 타국과 비교해서[34] 나았던 국가적 인프라와 교육, 경제적 여유가 메이지 유신에 공헌한 정도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일본으로 하여금 개국을 하고서도 다른나라에 식민지가 되는 일 없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는데에 공헌했다는 해석도 있으며 반대로 메이지 유신이 에도시대의 폐쇄성과 후진성을 극복함으로서 현재의 일본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의견도 있다.#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 성공 원인을 단순히 에도 시대의 내재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만은 없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를 비롯한 대도시들은 빠른 발전을 거듭하였고 이들 도시에는 대규모 공사가 매일같이 진행되는 등 한밑천 잡아낼 건덕지가 많았기 때문에 전국에서 청년들이 꿈을 가지고 상경하였고 한편으로는 독신생활을 하고 있는 하급 사무라이들도 대도시에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이처럼 에도 시대 대도시에는 독신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현대의 패스트푸드와 비슷한 요식업이 전례없이 발전하였는데, 17세기 에도에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전문점이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에도 시대 일본의 대도시들은 노점 음식의 천국이기도 하였다. 노점에서는 텐푸라, 장어꼬치, 스시, 오뎅, 우동, 소바, 모치, 단고, 오징어구이 등을 취급하였다. 이 중 텐푸라는 노점에서만 먹을 수 있었는데, 이는 에도 막부가 화재 예방책의 일환으로 텐푸라를 실내에서 튀기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노점의 음식은 대개 정규 음식점의 음식에 비해 질적 수준이 낮았지만 이러한 특권(?)도 있었다는 것.
현재 일식의 얼굴마담인 스시도 에도 시대에 현재와 비슷한 꼴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에도 시대 일본에서 즐겨먹던 스시는 오늘날의 스시와는 모양새나 만드는 방식이 다른 육면체의 하코즈시(箱寿司)였다.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스시'는 니기리즈시인데, 니기리즈시는 에도 시대 막부실세 저택 앞에 한 스시 명인이 점포를 차려 가장 맛있는 생선부위를 활용해 만든 고급 스시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시가 대중들의 식탁에 올라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자 어업과 어패류 교역업도 활기를 띄었는데, 오늘날 세계 최대의 수산물시장인 츠키지 시장은 이 시기에 에도에서 형성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것이다.
다도 또한 에도 시대에 이르러 더 발전하였고, 류큐를 통해 설탕이 대규모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다도의 필수요소인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도 오늘날의 그것과 가까운 형태로 진보하였다.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 특히 유럽과의 교역으로 새로운 요리기법들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포르투갈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빵 문화가 들어왔으며, 오늘날 동아시아권에 잘 알려진 빵인 카스테라(カステラ)는 이 때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빵이다. 상기에 언급한 텐푸라도 유럽식 튀김법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이다.
단, 이 자료에서 보듯이 에도시대 일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노들은 거의 대부분 일즙일채(一汁一菜)의 식사만 하는 등[35], 식사량과 음식 반찬에까지 상당한 제한을 당해서 다양한 요리들을 맛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에도 시대 대도시에는 독신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현대의 패스트푸드와 비슷한 요식업이 전례없이 발전하였는데, 17세기 에도에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전문점이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에도 시대 일본의 대도시들은 노점 음식의 천국이기도 하였다. 노점에서는 텐푸라, 장어꼬치, 스시, 오뎅, 우동, 소바, 모치, 단고, 오징어구이 등을 취급하였다. 이 중 텐푸라는 노점에서만 먹을 수 있었는데, 이는 에도 막부가 화재 예방책의 일환으로 텐푸라를 실내에서 튀기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노점의 음식은 대개 정규 음식점의 음식에 비해 질적 수준이 낮았지만 이러한 특권(?)도 있었다는 것.
현재 일식의 얼굴마담인 스시도 에도 시대에 현재와 비슷한 꼴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에도 시대 일본에서 즐겨먹던 스시는 오늘날의 스시와는 모양새나 만드는 방식이 다른 육면체의 하코즈시(箱寿司)였다.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스시'는 니기리즈시인데, 니기리즈시는 에도 시대 막부실세 저택 앞에 한 스시 명인이 점포를 차려 가장 맛있는 생선부위를 활용해 만든 고급 스시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시가 대중들의 식탁에 올라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자 어업과 어패류 교역업도 활기를 띄었는데, 오늘날 세계 최대의 수산물시장인 츠키지 시장은 이 시기에 에도에서 형성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것이다.
다도 또한 에도 시대에 이르러 더 발전하였고, 류큐를 통해 설탕이 대규모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다도의 필수요소인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도 오늘날의 그것과 가까운 형태로 진보하였다.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 특히 유럽과의 교역으로 새로운 요리기법들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포르투갈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빵 문화가 들어왔으며, 오늘날 동아시아권에 잘 알려진 빵인 카스테라(カステラ)는 이 때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빵이다. 상기에 언급한 텐푸라도 유럽식 튀김법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이다.
단, 이 자료에서 보듯이 에도시대 일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노들은 거의 대부분 일즙일채(一汁一菜)의 식사만 하는 등[35], 식사량과 음식 반찬에까지 상당한 제한을 당해서 다양한 요리들을 맛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에도 시대의 초등 서민교육은 테라코야(寺子屋)에 의해 수행되었다. 중세 사원의 교육원에 유래를 두고 있는 테라코야는 입학생들에게 문자의 해독과 쓰기, 계산 등 간단한 산수, 도덕, 그리고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 등을 가르쳤다. 테라코야의 교사는 주로 학식있는 평민들이었고, 전체교사의 10% 가량이 여성이다. 테라코야는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는데 10명 가량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부터 100명 이상의 학생이 수학하는 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테라코야는 남녀공학이었다.
상위 학교로는 번교(藩校)와 사숙(私塾)이 있었다. 학교는 서민용 교육기관이었으며, 사숙은 민간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 번교는 각 번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일반적인 번교는 재지 사무라이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나, 개중에는 서민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도 있으며 일반적인 사족학교들 중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수가 일반 평민에게도 입학을 허용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생도들은 번교에 대개 7~8세에 입학하여 교육적 성취도에 따라 13세에서 2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에 졸업하였다.
대부분의 번교는 유교(특히 성리학) 위주의 교육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었으나 소수의 일부는 국학이나 난학, 의학 등을 메인으로 삼기도 하였다. 번교는 사무라이 학교인만큼 검술과 궁술 등의 무예도 중시하였으며, 번교생들은 각종 기예에 대한 수행도 겸하였다.
유교 이외의 학문을 중히 여기는 학교의 비중은 번교보다 사숙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사숙으로는 일본 개화기를 주도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들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사숙에는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입학할 수 있었고, 유교 위주의 번교 교육에 염증을 느낀 학구열이 높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번교에서 이탈하여 사숙에 몸을 담기도 하였다.
상위 학교로는 번교(藩校)와 사숙(私塾)이 있었다. 학교는 서민용 교육기관이었으며, 사숙은 민간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 번교는 각 번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일반적인 번교는 재지 사무라이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나, 개중에는 서민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도 있으며 일반적인 사족학교들 중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수가 일반 평민에게도 입학을 허용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생도들은 번교에 대개 7~8세에 입학하여 교육적 성취도에 따라 13세에서 2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에 졸업하였다.
대부분의 번교는 유교(특히 성리학) 위주의 교육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었으나 소수의 일부는 국학이나 난학, 의학 등을 메인으로 삼기도 하였다. 번교는 사무라이 학교인만큼 검술과 궁술 등의 무예도 중시하였으며, 번교생들은 각종 기예에 대한 수행도 겸하였다.
유교 이외의 학문을 중히 여기는 학교의 비중은 번교보다 사숙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사숙으로는 일본 개화기를 주도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들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사숙에는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입학할 수 있었고, 유교 위주의 번교 교육에 염증을 느낀 학구열이 높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번교에서 이탈하여 사숙에 몸을 담기도 하였다.
- 료마가 간다 (1968): 사카모토 료마를 다룬 작품.
- 전나무가 남았다 (1970): 하라다 무네스케를 다룬 작품.
- 카츠 카이슈 (1974): 가쓰 가이슈를 다룬 작품.
- 겐로쿠 태평기 (1975): 악역으로 그려진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시점에서 추신구라 사건을 다룬 작품.
- 화신 (1977): 에도 막부 말기를 다양한 인물들을 주인공을 해 다뤘으며, 조슈 번을 중심으로 다룬 작품이다.
- 사자의 시대 (1980): 가공의 인물 아이즈 번 무사인 스가와라와 사쓰마 번 무사 가토 두 사람을 주인공 해 다룬 작품.
- 고개의 군상 (1982): 추신구라 사건을 현대의 관점에서 다룬 작품.
- 카스가노츠보네 (1989): 카스가노츠보네를 다룬 작품.
- 겐로쿠 요란 (1999): 추신구라 사건을 다시 재해석해 다룬 작품.
- 베라보 ~츠타쥬 영화의 꿈 이야기~ (2025)
[1] 도중의 개혁노선에서는 조선의 영의정격인 로쥬(老中)에게 실권이 쏠렸다.[2] 현재는 러시아령인 가라후토(남사할린)과 치시마 열도(쿠릴 열도) 역시 막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왔다.[3] 단 에도시대까지는 여전히 긴키의 위세 역시 무시할 수 없었으며 실제 막부 말기의 정국은 에도가 아닌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간토가 일본의 유일한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가 제국의 수도가 된 1869년 이후의 일이다.[4] 에도 시대가 막을 내린 메이지 유신 초의 일본 인구가 3,200만에 달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초는 중앙집권이 다시 확립되어 질서와 안정을 되찾았기에 인구 증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전에는 인구가 2,600만~2,700만을 계속 유지했다.[5] 카부나카마(株仲間) 는 현대에서 말하는 합명회사로,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나타나는 가장 원초적인 회사의 형태이다. 물론 현재 한국어에서 쓰이는 주주(株主),주식(株式)등의 용어는 이 카부나카마에서 유래한다.[6] 막부와 영지에 의한 새로운 논밭의 개척을 말한다.[7]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인플레이션은 쌀 가격을 올리는게 아닌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쌀은 화폐와 비슷하게 취급되어 다른 작물과 교환할 수있었다. 따라서 쌀이 아닌 다른 작물이나 상품을 구매케함으로서 상대적으로 쌀에대한 수요를 낮추는 방식으로 쌀 가격을 낮추었다[8] 물론 다이묘들의 독자적인 교역을 막았기 때문이다.[9] 현재는 천연자원이 없어 대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하며 사람이 자원 운운의 원조인 일본을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의 일본에서는 광물 자원이 매우 풍부했으며 특히 은과 구리 생산량은 한 때 세계적 기준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게다가 전근대 기준에서 필요한 희소광물의 대부분이 일본 국내에서 나왔고, 금과 마찬가지로 귀중했던 설탕도 재배되었다.[10] 다이묘들이 통행세를 비싸게 뜯어내다보니 상업발전의 걸림돌이었다.[11] 명은 일조편법, 청은 지정은제로 은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은을 수입해다 썼는데 상당수가 일본산 은이다. 대항해시대2에도 일본의 특산물 중 하나가 은으로 매우 싸다. 일례로 오늘날 "일본의 명동"으로 불리는 긴자 지역의 이름은 과거에 이곳에 은 주조소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12] 당시 나가사키를 통한 국제무역은 일본의 상류층들에게 각종 사치품을 공급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리고 막부의 중요한 세입원이었다.[13]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들은 260만명 정도였는데, 이들에게 일일히 다 녹봉을 주어야했으니 당연히 세금을 많이 거둬들일수밖에 없었다. 물론 녹봉 액수는 하급 사무라이들은 딱 먹고살 정도였다.[14] 거기에 수도인 에도는 품위유지 명목으로 세금을 더 거둬들였기에 무려 80%에 육박하기도 했다.[15] 에도 시대의 정치 <江戶時代の政治> (키워드로 여는 일본의 향, 2009. 3. 26. 김용안 저)[16] 일본의 에도시대는 총생산량으로 볼 대, 중앙정부인 막부가 전국의 약 4분의 1(700~750만 석)을 영유했고, 게다가 그중 대부분을 직속가신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막부 직할령은 약 420만석이었다. (중략) 1871년의 전국 공조액은 1,225만석이었으며, 정부가 파악한 공식적인 수확량이 3,220만 석이었으므로 공식적인 공조율은 39%였다. 실제 수확고가 4,681만석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이 역시 과소평가된 것으로 판단되어 대략적인 수확고는 6천만석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면 공조율은 약 21%가 된다. 1870년의 일본 인구는 3,440만 명이니, 1인당 공조액은 0.365석이다.[17] In particular, Japan had very low levels of per capita GDP at the start of the second millennium, then experienced modest but steady growth at 0.06% per annum through to the mid-nineteenth century. Japan’s more dynamic growth after the Meiji Restoration of 1868 thus built on this earlier progress. China’s per capita GDP, by contrast, was on a downward trajectory from its high-point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On these estimates, Japan overtook China during the seventeenth century. India. shared in the Chinese pattern of declining per capita GDP from 1600, at the height of the Mughal Empire under Akbar. However, Japan was already slightly ahead of India by the time the Indian series starts in 1600.-<Asia's little divergence>[18] 위 논문의 30p 참고[19] 조선의 생산량은 박섭의 연구가 출처이다. 다시 말해 같은 시기 조선과 일본의 곡물 생산량은 이것보다 더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20] 박섭, “식민지기 미곡 생산량 통계의 수정에 대하여”, 『경제학연구』 제44집 제1호[21] 이는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에서 박섭이 제시한 1910년의 추계치가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연구 저서인 “식민지기 미곡 생산량 통계의 수정에 대하여”에 나오는 별개의 추계치이다.[22] 나카무라 사토루와 박섭의 저서인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에 나오는 추계치이다.[23] 이러한 신유한의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링크에 적힌 것처럼 가난 때문에 농촌의 여자들을 매춘부로 팔아넘긴다는 내용에서 확인된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 시대에서도 시골에서는 인신 매매를 맡은 노파가 12세 전후의 아이들을 샀고, 특히 여자 아이들은 5~6엔으로 팔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링크[24] 자료[25] 애초에 조선은 충효를 중요시하는 유교국가이고 당연히 천륜을 중요시해서 부모가 자식을 죽였다는 얘기는 기록에 남길만한 대사건이다. 하다못해 워낙에 굶주림이 극심해서 각지에서 일어나는 패륜사건을 제대로 처벌하지는 못하던 경신대기근에서도 일어난 사건 자체는 기록했다.[26] 한반도의 기후는 비슷한 위도의 중국 화북 지역과 비슷하고 삼남 정도가 화중 지역까지 비슷하지만 일본은 구로시오 난류와 비교적 낮은 위도의 영향으로 한참 남쪽의 강남지역(단 아열대지역인 광동성 광서성은 제외)과 기후가 비슷하다.[27] 에도 시대의 연 세율 중 하나. 한해 수확물 중 7할을 다이묘에게 세금으로 바치고 남은 3할을 농민이 가지는 제도였다.[28] 특히 에도시대 일본 인구의 80% 이상이 농노 즉, 농민들이었다. 자료[29] 이 때문에 일부 일뽕진영에서 이루어지는 조선에 대한 비하를 반박하는 근거로 자주 사용되는 편[30] 물론 조선 시대에는 현대의 남북한 구분이 없었으니 현대의 휴전선을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나눈 것이다.[31] 식민지근대화론의 쟁점, 2007, vol., no.41, pp. 227-250 (24 pages), 허수열[32] 참고로 에도시대 초기에 막부에서 정한 금은 교환비는 1:10. 당연히 명목상 환율이고, 1859년(안세이 6년)은 금은 교환비는 1:4.65이며, 서양의 교환비는 1:15.3 정도. 막부에서 정한 교환비를 알 수 있는 게 막부가 주조한 코반 (小判, Koban) 금화가 1냥(両)은 약 15그램, 상인들이 주조한 조긴 은화 1냥은 약150그램이었다. 코반의 무게가 조긴의 10분의1인 이유는 기존 조긴 은화를 교환할 목적도 있었다.[33] 오방이라고도 하는데, 오방떡할 때의 그 오방이다. 참고로 포켓몬스터에서 나옹의 이마에 붙어있는 것도 오방이다.[34] 주로 비교대상은 단숨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베트남, 영국에게 많은 상처를 입은 청나라, 조선이다. 다만 조선은 에도 시대 일본보다 다른 부분은 뒤쳐졌으나 농업 부분과 교육부분에서는 일본에 버금갈 만한 요소가 있다고 평가받는다.[35] 한국식으로 말하면 밥, 국, 김치가 전부 였던 셈이다.[36] 에도벤의 영향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37] 겐페이 합전, 센고쿠 시대.
메이지 유신/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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