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관상가 백운학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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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백운학"은 "이종우 (1921~1979ㆍ58세)"로, 전설적인 관상 대가(觀相 大家)ㆍ20대 후반부터 서울 종로 5가(제일여관(1950~70년))에서 활동했다. 관상을 잘 본다고 이름이 알려져, 정ㆍ재계 고위 인사들도 그를 찾았다. "원조 백운학"은 따로 있는데, 구한말 "고종"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했다는 "박유붕 (朴有鵬ㆍ1806~1866ㆍ60세)"이며, 그를 따라 "백운학"이라 이름 붙인 "관상ㆍ작명가"가 여럿 나왔다.

 

1. 이종우 (1921~1979.01.01향년 58)

 출 생 :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사 망 : 서울 신설동             사 인 : 급사 (심장마비)              : 청산 (靑山)              : 주갑순 (미즈모아 산부인과 원장 (서울 광진구 소재))             자 녀 : 3             가 족 : 아버지- 이세기(李世基) 3 2녀 중 3            

 활 동 : 제일여관 (1950~70년대종로5)             경 력 : 서도여정(書道旅程) 30년에 명필의 칭호"고려정사"란 절 건립(오사카 근처)              스 승 : 한용운 (만해)             친 구 : 이갑성 (독립운동가)

정치ㆍ경제ㆍ종교 등 지도자들과 친분관계가 두텁고, 붓글씨에 능통하며, 민초들을 위한 선행을 많이 행하였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관상가들이 "청산 백운학"과의 친분관계를 내세울 정도로 "관상학"의 대가이다. 평소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 항상 집에 사람들이 들끓었으며, 밥해주기 바빠서, 유명한 것에 비하여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지나가는 어떤 물건 파는 사람의 것을 모두 산 적이 있는데, 왜 모두 샀냐고 묻자, 이 사람의 오늘 운이 좋아 보여, 모두 샀다고 하였다. (실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산 것임)

백운학(이종우)의 부모님이 충북 진천군에서 안성으로 이사를 와서, 구 군청자리에서 살다가, 금광면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백운학은 금광면에서 태어났다. 금광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용인 송정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집안의 소개로 주갑순(미즈모아 산부인과 원장)과 결혼하였고, 슬하에 3녀를 두었다.

여기저기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관상가가 하도 많아서, 1990년대 중반 정보기관에서 전국의 백운학이 과연 몇 명인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조사된 숫자가 2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광주에서는 3명의 백운학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웃지 못할 사실은 그 3명의 백운학이 모두 같은 빌딩에서 영업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로 자기가 진짜 백운학이라고 주장하였음은 물론이다.

2. 운명감정 입문계기

일찍이 부친으로부터 가학인 한학과 서예를 배우니, 재기가 출중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서울에서 중학교육을 받았으며, 일제의 식민정책에 불만을 품고, 만해 한용운 선생(독립운동가, 불교계 지도자)을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의 경과 선을 배우면서부터 관상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10대 후반부터 "마곡사ㆍ해인사ㆍ통도사" 등에 칩거하면서, 고승대덕들에게 영향을 받아, "인생의 운명론"에 몰입하였고, "주역ㆍ관상학"의 대가에 오른다.

그리고 20살이 되기 전에 해방을 맞아, 본격적으로 "운명감정"에 뛰어든다. 일제시대부터 미래를 내다보거나 관상을 보는 일에 탁월한 소질을 보여, 종로구에 사무실을 차리고 독립운동가 이갑성과 막역한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해방이후 반일감정이 들끓을 때, "일본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ㆍ일 친교회"를 만들어 초대회장 역임.(당시는 한ㆍ일 수교전이라 주위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예지능력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이 사이가 좋아질 것을 알고 추진한 것임) 친교회장을 맡으면서, 일본에 끌려가 한을 품고 죽은 한국인을 위해, 오사카 근처에 "고려정사"란 절을 건립하고, 후원으로 서예작품 3,000점 기증하였다.

3. 일화

 5ㆍ16쿠데타 관련

김종필이 5ㆍ16쿠데타 직전, 후배 "석정선"과 같이 점을 보러 갔을 때, "석정선"의 관상을 보다말고 문밖에서 기다리는 "김종필"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혁명하시누만" 김종필은 거의 반사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누굴 죽이려고 그러시오?"

"다 됐어요. 걱정 마시오. 혁명하겠다고 얼굴에 다 씌어져 있는데 뭘 그러시오. 내 관상은 볼 필요가 없어요. 그 친구나 잘 봐주시오" 백운학은 "석정선"을 쳐다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허, 그거 파쇼. 네발 달린 거 가지고 다니누만, 그게 사람 죽여요. 빨리 파시오.  옷은 이렇게 입고 왔지만, 당신네들 중령, 아니면 대령인데, 아직 관록(官祿)을 먹고 살 사람이니까 자동차 같은 거 손대지 마시오."

 5ㆍ16쿠데타 관련 : 김종필(JP)의 증언

• 왜 옛날에 백운학이라고 있지. 혁명 전 일요일, 석정선(JP와 육사8기 동기생으로 먼저 예편해, 택시운수업을 하다가 JP의 권유를 받고 5ㆍ16에 참여)이가 찾아왔기에 "야, 너 혁명 같이하자" 그랬더니, "난 못하겠다."고 해.  그래서 "알았다. 못해도 좋으니까 일절 말 내지 마라" 그랬지."

• 그런데 "석정선"씨가 왜 운수업을 관두고, 혁명에 참여하게 됐습니까?  "석정선이 자동차 사업 했는데, 무슨 사고가 자꾸 나서 그런지 "유명한 관상쟁이한테 물어봐야겠다."며 나를 끌고, 종로5가 제일여관을 빌려 쓰고 있는 어떤 집에 데려 가더만.

 관상쟁이가 백운학인지 누군지 난 몰랐지. 난 사복을 입고 갔고. 술집 여자들이 댓 명씩 앉아서 교대교대 관상을 보고 그러드만.  석정선 차례가 와서, 썩은 대청마루에 올라가 백운학 앞에 앉았고, 나는 관계없으니까 저쪽 복도에 앉아서 그냥 있었지.  근데 백운학이가 석정선은 안 보고,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됩니다!"하고 소리를 쳐.  내가 "뭐가 되느냐" 했더니, "허~" 웃는 거라.  "천하를 뒤집으려는데 됩니다."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니 여보, 사람 죽이지 말라"고 딱 잡아뗐어. 그래도 계속 "허허"하고 웃데.  그러곤 앞의 석정선이 한테 "당신, 그거 바퀴 달린 거 팔아. 이번엔 사람 죽여." 이러대.  내가 오싹했어. 딱 바퀴라고 하는 거야. 석정선이 운수사업 하는 걸 알았던 거지.  이번엔 쪼그만 사고, 그런 거 아니라 사람 죽인다고, 그런 말을 한 거야."

• 그런 일이 있었군요.  "혁명하고 내가 백운학을 데려다 저녁을 먹였는데, 이번에도 "가만히 보니까 88세는 사시겠어요." 그러는 거야." 

• 백운학이 그랬단 말입니까?  "그게 88세? 조금 넘기겠어요, 그러드만.  나는 "그러면 천수를 다하는 거지"하고 웃었던 기억이 나네.  그게 진짜라면 4년 남았는데. 하하하. 근데 백운학이는 일찍 죽었어."

 박정희 운명 관련

하루는 정보기관에서 찾아와 비분강개하며, 시국에 정치에 관하여 향후 전망을 하교하기를 바란다고 하자 "박정희 정권의 운이 다 되었다.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고 그의 말년 운명이 평탄치 못하다.  바둑으로 말하면, 유신은 자기 목을 조이는 악수를 둔 것과 같다"고 말해 정보기관에 끌려 간적이 있다. 이 때, 자신을 위장하여

"아이쿠 선생님. 미련하고 아둔한 곰 같은 이놈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간밤에도 반성하느라고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제가 무슨 실력이 있겠습니까?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 했는데, 저는 쥐꼬리만한 귀동냥 상식을 가지고, 남의 인생 상담과 감정을 해왔으니, 이 모두가 잘못된 일입니다." 라고 거짓행세를 하였는데, 이때 평소에 인연을 맺은 고객 중 고위급 간부가 있어 겨우 풀려난 적이 있다.

 기업 관련

삼성의 자문역할을 하여, "에버랜드" 위치를 잡을 때, 항공 촬영한 사진을 백운학에게 보여주어 확인을 받았다고 한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본명을 "태준"에서 "태수"로 바꾼 것, 세무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철강업에 뛰어든 것, 4남 "한근"의 이름에 사용한 한자를 "翰根"에서 "瀚根"으로 바꾼 것에는 백운학의 권고가 있었다.

 자유당 정권 관련

자유당 시절에 야당인 민주당의 편을 들어, 그 유명한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선거 구호를 지어냈다는 설이 있다. "신익희"에게 "서울을 떠나면 변을 당한다."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신익희는 "호남 유세"를 떠났다가, 열차 칸(충남~전북(기차 안))에서 급사(뇌일혈(또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4ㆍ19 직후, 이승만 박사가 다시 돌아온다고 예언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우려의 눈길로 보았는데 결국은 죽어서 다시 돌아 왔다.

 

 https://blog.naver.com/bchistory/223539192562?

이름이 널리 알려진 첫 번째 역술인 백운학은 흥성대원군 책사였던 박유붕입니다.1806년에 출생하고 1866년 사망했습니다. 두 번째 백운학으로 알려진 이종우는 1921년 출생, 1979년 1월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58세에 사망했지만 십대 후반부터 마곡사, 해인사, 통도사 등에 칩거하면서 만해 한용운을 스승으로 모시고, 주역과 관상학을 공부했으며 1950년경부터 1970년까지 서울 종로5가에서 ‘백운학 역학연구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종우는 미래를 내다보거나 관상을 보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5.16쿠데타 관련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내용 때문에 단연 압권으로 평가됩니다.

"백운학은 안방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지켜봤다. 백운학이 석정선은 보지 않고 자꾸 나를 쳐다보면서 대뜸 밑도 끝도 없이 " 됩니다!"라고 소리쳤고, 나는 백운학에게. 두 번 다시 그 얘기 하지 마쇼" 라고 주의를 주니까 백운학이 껄껄 웃기만 했다."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어. 돼, 다들 올 것이 왔다고 할 거야. 방해할 사람 없으니 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낌을 받았다고 김종필이 회고했으며, 5.16 군사혁명 이후에도, 김종필과 백운학의 두 번째 만남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울시청 뒤, 다옥동 요릿집에서 백운학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각하, 한 20년은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 했고, 그 다음엔 어떠하냐고 김종필이 물었을 때 백운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말한 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집권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백운학 역학연구소'를 찾아 간 적이 있습니다. 필자가 갔을 때도 술집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 손님 네 댓 명과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도 있었습니다.

김종필은 석정선 권유로 마지못해 백운학을 찾아갔다고 했지만, 5.16거사를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비장한 각오와 남다른 느낌을 풍기는 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고, 백운학이 그것을 꿰뚫어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필자가 백운학을 찾아 간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필자는 21세였습니다. 까닭 없이 아무나 붙들고 울고 싶을 만큼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세상만사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예비무당은 내림굿하기 직전 앓아 눕는다." 했는데 필자의 모습이 그 짝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낯 찌푸리지 말라는 소리를 많이들은 터라, 백운학이 필자를 보면서 "세상 걱정 근심 혼자 맡은 사람 같구나. 얼굴을 펴라" 했습니다.

첫 인상이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는 들으나 마나였습니다. 부모덕을 받지 못하고 가정에 불화가 잦을 거라는 말도 했습니다. 박복한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비감스런 나의 말에 그의 생각이 바뀌었는지 필자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한 다음 생년월일을 물었습니다.

태어난 연, 월, 일, 시, 네 간지를 필자가 보는 앞에서 적고, 그것을 보면서 그가 말했습니다.

"70이 넘어서부터 뭔가 보여“

"무엇이 보입니까?“

"출판 쪽이야."

필자가 반기면서," 출판 쪽이라니요? 출판사 사장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하면서 관심을 보이니까, "그건 나도 몰라. 그 때 가서 보면 알게 되겠지."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당시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출판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도 필자처럼 조용한 곳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고 합니다. 11세였을 때 가톨릭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의 신앙은 일반적인 가톨릭 신앙과 달랐다고 합니다.

신학보다는 수학, 자연과학, 법률학, 스콜라철학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서 실질적인 지식을 얻으려고 학교 밖으로 나갔으며, 다시는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32세가 되던 1628년 겨울,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 밑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존재론과 인식론 문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이는데, 《방법서설》을 출판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데카르트가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간 것처럼, 필자도 지식 담론에 목말라하다가 1996년 대우통신에서 판매한 삼보 컴퓨터를 구입하면서 인터넷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계천 중고서점을 드나들면서 의문과 궁금증에 목말라하다가 개명천지 만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후, '역사물'을 소재로 글을 쓰는 필자와 같은 작가에게 인터넷 검색은 <굽으로 땅을 치며 달리는 말 위에 오른 격>이었습니다.

백운학은 필자의 관상을 보면서 급변하는 시대를 감지했으며, "다들 올 것이 왔다고 할 거야. 방해할 사람 없으니 해" 하면서 예언을 했다고 봐야 하는 겁니다.

필자는 견문을 넓힐 수 있는 해외여행도 여러 번 했습니다. 67세에 일본 도쿄를 다녀왔고, 71세에 중국 장가계를 다녀왔습니다.

74세에 영국 런던, 로마, 바티칸시국, 스위스, 파리, 5개국 7박9일 여행을 다녀왔고, 중국 장백산 경유 백두산 등정도 했습니다.

그런 다음 77세에, 그리스와 터키 여행을 하려고 인천공항으로 가면서, 트로트 가수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흥얼거리기까지 했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 여행하기 딱 좋은 나인데."

인천공항에 도착하니까 여행사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가이드를 포함해서 23명이었습니다.

필자는 서유럽 5개국 7박9일 여행을 할 때 편도비행 12시간에도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장시간 버스로 이동할 때도 고단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려면 지치기 마련인데 필자는 작가적 소명의식과 창작 의욕이 왕성했기 때문에 노익장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서유럽 여행 후, 필자는 『발목 잡힌 르네상스』 그리고 『예수는 적그리스도』 두 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다시 그리스와 터키 여행을 나서기 전, 『몸젠과 기번, 틈새 로마사』 원고를 완성한 다음이라서 현지답사 한다는 심정으로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필자가 『몸젠과 기번, 틈새 로마사』 집필을 계획하게 된 동기는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이 우연이었습니다.

대형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중 몸젠과 기번의 책을 동시에 구입하면서였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서기98년 트라야누스 황제부터 서기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멸망까지 1300년 동안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가장 조직적이고 계몽적인 로마역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테오도어 몸젠의 『로마사』는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44년, 카이사르 사망까지의 로마역사를 기존의 신화로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고대 로마인의 삶과 로마의 흥망성쇠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고전입니다. 그런데 몸젠은 카이사르 이후의 역사를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멸망의 결정적 요인으로, 야만족의 침입을 우선시 했습니다. 다음으로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바람에 기번은 종교적 불경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몸젠은 기원전45년까지만 로마 역사를 썼고, 기번은 서기98년부터 로마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빠진 부분 143년은 잃어버린 세월이 되는 겁니다.

그 잃어버린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필자는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역사 탐구는 독보적이면서도 놀라운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논외로 하고,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평가는 기초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역사가들 평가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몸젠은 티베리우스야말로 위대한 행정가 중에 한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를 괴물 황제로 폄하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도 바보 황제로 평가절하 했습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네로가 대독한 추도사에서,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를 신중하고 사려 깊은 황제였다고 말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로마에서 사회 불안을 조성하면서 말썽을 피우던 유대인들 문제로 고심 하다가 서기45년 그리스의 고린도로 2만5천명을 이주시킨 일이 있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쪽 펠로몬네소스 반도를 말합니다.

반도의 서쪽 고린토 만과 동쪽 에게 해의 사로닉 만을 연결하는 운하가 건설되기 전이었습니다.

서기68년 네로 사망 이후 중단되었다가 그리스 왕 조지1세 때 재개했다가 또 다시 재정의 어려움으로 중단되었다가 서기1893년 완성되면서 반도였던 펠로폰네소스는 섬이 돼 버렸습니다.

이처럼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이주 시켰을 때,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기독교를 전파했고, 운하공사가 중단되는 바람에 유대인들이 소아시아 지역을 차지하면서 기독교가 만들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역사탐방의 기회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감각이 뛰어났던 백운학이 "다들 올 것이 왔다고 할 거야. 방해할 사람 없으니 주저 말고 해." 하면서 필자에게 용기를 줌과 동시에 시대 흐름에 반응하는 사람의 관상이야말로 숨겨진 비밀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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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1948년 8월7일 강원도 화진포 앞바다에서 김일성 주석이 김정숙 여성 빨치산 대원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아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화살표)의 어린 시절 모습,

그와 어깨동무 한 아이가 북한의 소련 군정 정치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의 아들 알렉산더 레베데프.

그 뒤쪽이 레베데프 소장부인, 그 왼쪽이 김정숙, 그 앞이 김정일 누이 김경희.

그리고 맨 좌측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이 김윤실.


1961년 5.16쿠데타 주역이었던 김종필(JP)의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인용하면서 관상의 대가 백운학이 두 번에 걸쳐서 천기누설을 한 바 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희망이 없겠느냐고 묻는 나에게, 70이 넘으면 출판 쪽에서 무언가가 보인다고 말했을 때도 그냥 해 본 소리가 아니었음을 최근에 와서 알게 되었다.

나는 감성보다는 이성(理性)이 발달하면서 절대자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지식과 정보 조각들을 적시적소에 배치하면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편집 능력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능력을 발휘하면서 절묘한 계책으로 『발목잡힌 르네상스』 책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책을 계속 발행할 생각이다.

고대 로마 역사에 등장하는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 실록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때문에 서기70년 예루살렘 멸망은, 자중지란을 일삼던 유대의 종파분자들이 자초한 파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을 괴롭히면서 멸망시켰다는 거짓말이 사실인양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6.25전쟁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기도 하려니와 풍비박산이 된 집안 이야기를 세상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 말기, 압록강 수풍댐 공사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을 상대로 기생을 부리는 요릿집을 운영하셨던 조부모는 부자였다.

그리고 두 딸이 올 때마다 일본군과 싸우는 광복군과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남몰래 주곤 했었다. 그런데도 해방이 되니까 친일파로 몰려 재물을 강탈당하고, 집은 방화로 소실되었다. 속수무책으로 화재 현장을 보고만 있던 조부모는 울화병으로 모두 돌아가셨다.

광복군 지대장으로 일본군과 싸우던 큰 고모부는 해방이 되기 직전 전사했고, 해방과 동시에 큰 고모와 자녀들은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 와서 국가 유공자가 되었다. 그리고 노환으로 고모가 사망했을 때, 고모부의 유품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에 합장되셨다.


김정숙 빨치산 대원으로 일본군과 싸우던 작은고모(김윤실)는 해방과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맹간부로 활동하면서 북한 고위간부와 결혼했다(1946).

이처럼 두 분 고모는 항일 투쟁을 한 보람이 있어서 한쪽은 남한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한 독립투사로, 다른 쪽은 위대하신 김일성 주석을 도운 1세대 빨치산으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부친(김윤선)은 이데올로기에 관심이 없었다. 시대와 환경 변화에 따라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면서 기술자로써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분이었다.

압록강 수력발전주식회사는 1937년 10월 당시 만주국(滿洲國)의 공동출자로 댐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943년 11월에 완공했다. 부친은 거기서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해방 이후 작은고모와 연락이 닿아, 1947년 평양시 ‘형제산 구역’의 영화촬영소 설립에 참여하여 책임자가 된 후, 외국에서 들여 온 영사기 필름을 집으로 가져오곤 해서, 나도 그 필름을 불빛에 비쳐보곤 했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기 얼마 전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숙부(김윤택)는 6.25 당시 육군 장교로 용산 육군본부에 근무했으며 남한으로 피난 온 부친과 남대문 시장에서 12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했었다.

그런데 형제가 만나고 나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숙부는 여동생이 북한 공산당 여맹 간부이고, 공산당 고위간부와 결혼했으며 아이도 출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낙담했었다.

가족이 남북으로 나뉘어 총질을 하게 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노량진 본동에서 살고 있는 우리 집을 두어 번 방문하고는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부친이 용산 육군본부를 찾아가서야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숙부는 포항 어느 부대에 가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권총으로 자살했고, 동생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연고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시신은 공동묘지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니까 친일파 취급을 당하면서 울화병으로 사망하신 양친과  여동생이 북한에서 인정하는 독립투사로 당 간부가 되었으며, 12년 만에 만난 남동생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처럼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일제강점기보다 더 나빠진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염세주의적 선택을 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부친도 숙부의 자살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양에 있을 때 UN군에 협력한 자신의 행적이 여동생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예전에는 마시지 않던 술을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자로 생을 마감했다.

 

내가 생각을 해 봐도 부친의 행적은 UN군에 협조한 것이 분명하고 작은고모는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6.25이후 전승가도를 달라지면서 낙동강까지 내려갔던 인민군은 UN군의 인천상육작전으로 역전되었고, 1950년 10월19일 UN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점령당하기 며칠 전, 야심한 시각에 비상라이트만 켠 트럭이 ‘형제산 구역’의 영화촬영소 관사로 왔다.

트럭에서 내린 작은고모가 중국 단동으로 피난을 가는 길이라면서 함께 가자고 했다.

이 때 고모와 부친이 나눈 대화를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날래, 타시라요.”

“내레 안 가갓어.”

“안 가갓으면 우리 집에 가주시라우요.”

“기케 하마.”


이것이 부친과 작은고모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였다.

다음 날, 우리는 고모 집으로 이사를 갔다.

영화촬영소는 평양시 북쪽 변두리 ‘형제산 구역’에 있었다.

고모는 평양시 ‘중구역’ 남산동 5번지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평안남도 도시자 관사였던 ‘중구역’ 남산동1번지는 김일성주석의 4호택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남산동5번지는 평양시청 광장 주변이라서 도심이었다.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2층집 정원에는 나무와 연못이 있었고, 일본인 고위 관료가 살던 집이 분명했다. 탁자가 놓인 거실은 크고 넓었다. 방마다 다다미가 깔려 있었고 주방과 정원의 연못에는 수도가 있었다.

이사한 다음 날, UN군과 국군이 평양에 들어왔다.

나는 UN군 병사들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포로들을 거리 행진 시키거나 소학교 운동장에 자주 데리고 왔기 때문에 돌팔매질 하면서 적대행위를 보인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평양을 점령한 UN군 병사들 모습은 딴판이었다. 씩씩하고 용감해보였다.

UN군이 평양에 온 다음 날, 정원에 있는 수도꼭지를 보시던 부친이 갑자기 소리쳤다.

‘바로 저거다!’

크게 소리치고 어디론가 달려 가셨다.

그리고 다음날이었던 10월 19일, 부친은 ‘조선중앙은행’ 금고에 있는 새 지폐를 싹쓸이해서 가마니에 담아 소달구지 3대에 실고 집으로 오셨다.

그 때 나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평양을 점령한 UN군 1군단장 밀번 소장은 평양시민의 안녕과 질서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래서 치안대를 조직하게 했다. 평양 시민이 자율적으로 질서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평양 시민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 중에 있었다.

평양시민에게 무턱대고 밀가루나 구호물자를 주면서 연명하게 할 수는 없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시장 경제가 자율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중앙은행’ 금고에는 엄청나게 많은 새 지폐가 있음을 밀번 소장은 알고 있었다.

북한이 남한을 점령한 다음, 한반도 전역에 걸쳐서 화폐개혁을 단행할 때 사용하려고 준비한 지폐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밀번 소장은 ‘조선중앙은행’ 폐쇄령을 내렸다.

은행에 있는 그 돈을 활용하면 시장 경제가 잘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법이 문제였다. 무턱대고 은행 문을 개방하고 돈을 나누어줄 수는 없었다. 명분이 있어야 했다.

바로 그 때, 평양에 철공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기술자들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다면서 능라도 정수장에서 수돗물을 평양시내로 보내는 능라도 수도다리 복구공사를 하겠다면 찾아 온 사람이 부친이었다.

일본 말을 할 수 있었던 밀번 소장은 통역관 없이 부친과 대화를 나누고 결단을 내렸다.

‘조선중앙은행’ 금고에 있는 돈을 가져가서 공사를 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물이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를 보고 부친은 능라도 정수장과 수도다리 복구공사를 생각해 냈던 것이고, 부친의 번뜩이는 기지와 평양 시민의 경제 활성화 방법을 모색하던 밀번 소장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군정청을 나온 부친은 소달구지꾼들에게 쌀가마니를 준비해서, ‘조선중앙은행’으로 오라고 했다.

쌀 대신 지폐가 가득 들어 있는 가마니를 실은 소달구지 세 대가 남산동5번지 우리 집으로 왔다. 총으로 무장한 치안대원들이 따라와서 한 사람은 현관 앞에 보초를 서고, 다른 사람들은 외곽을 경계했다. 밀번 소장은 ‘조선중앙은행’ 금고 대신 치안대원들로 하여금 우리 집을 지키게 했다.

치안대원들은 부친을 만날 때마다 거수경례를 붙였다. 우리 집 현관에는 00합명회사라는 간판이 세워졌다.

거리에 붙은 구인 대자보를 보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날 이후, 평양 모란봉 앞 능라도 다리 복구공사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이사를 온 나는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방마다 쌓여 있는 돈 가마니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삐죽이 나와 있는 돈다발 중에서 몇 장을 가지고 가셔 엿이나 과자를 사먹었다. 지폐가 너무 많아서 딱지를 만들면서 놀 때도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 되었다.


12월 4일 유엔군이 평양을 철수하면서 모든 것은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1950년 10월19일 UN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10월 29일 이승만 대통령 의 평양시민 환영대회가 있었다. 그리고 12월 4일 갑자기 UN군이 평양을 철수했다.

그러니까 UN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46일 만에 공산군에게 돌려주었다.

철수 당시, 부친은 유엔군 병사들이 탄 트럭에 앉아 있었다. 당신과 같은 기술자는 남한에 가서도 할 일이 만다면서 가자고 했다. 그런데도 부친은 선교리를 막 벗어날 때, 트럭에서 내려 무너진 대동강 철교 아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부친은 우리를 데리고 당신이 복구했다가 다시 파괴된 능라도 다리로 가서, 피난민 중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가교를 놓고, 피난민들이 무사히 대동강을 건널 수 있게 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조선중앙은행’ 금고에 있던 돈이 어떻게 우리 집에 오게 되었는지 설명이 된 셈이다.

그리고 피난을 갔다가 되돌아 온 고모가, ‘조선중앙은행’ 금고에 있어야 할 돈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돈을 제자리에 옮겨놓는 동안에 누군가가 부친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오빠가 UN군에 협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모와 고모부는 십중팔구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부친도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괴로운 나머지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니까 나 또한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느 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빛바랜 사진 속에 작은 고모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처음에는 반가웠으나 생각이 복잡해 지면서 세상사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능라도와 수도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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