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보다 심상을 중요하게 여긴 관상학자 미즈노 남보쿠처럼, 예수 역시 그러하였다 /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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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요7:11-24 제목/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 초막절 핫 이슈(Hot Issue)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초막절을 지키시는 가운데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속에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의 결론은 2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 초막절에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옵니다. 초막절을 지키려고 모인 유대인들에게 이번 초막절의 관심사중 하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본문 11-13절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드러내놓고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표명할 수 없는 이유는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여 그들에게 예수님을 옹호하고, 따르는 자처럼 비쳐진다면 출교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염려를 요한복음 9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맹인을 예수님이 고쳐주신 일로 바리새인들에게 불려간 그의 부모들이 자신의 아들의 일로 인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요9:21-22)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예수님을 찾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하지만 드러내놓고 하지 못하는 이유가 종교지도자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 초막절 기간의 중간 즈음 지나 갈 때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유대인들은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그 의문이 무엇입니까? 본문 15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아마도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으로 일찍 죽은 요셉이란 목수의 아들로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다는 것과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12절 말씀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무리를 미혹한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랍비의 옷차림도 아닌 모습으로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그 가르침이 여느 랍비 같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게 여기면서 ‘배우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의문을 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생활용어로 바벨론의 언어인 ‘아람어’를 썼습니다. BC586년에 유대가 바벨론에 멸망하면서 지배를 받고, 70년의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자국 언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게 되면서, 예수님 시대 때에는 아람어를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하였고, 히브리어는 랍비 같은 학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만이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의 목수 아들이며, 랍비 교육을 받지도 않았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읽고, 쓸 뿐만 아니라, 진의(眞意)를 말씀하시니 무리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유대인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초막절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추론해 보면 ‘율법’에 대해 가르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안식일을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랍비들은 수많은 규칙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규칙에 가장 큰 규칙은 일하지 않는 겁니다.
지금도 율법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의 모든 층이 서도록 되어 있고, 주유소에서는 셀프 주유를 하게 되어 있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 중에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데, 일하는 종업원이 주문서에 음식을 적지 않고, 볼펜을 들고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만 끄덕이더랍니다. 왜 그러지 하면서 생각하는데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었답니다. 그래서 주문서를 건네받아 직접 음식 이름을 쓰고 주문을 하니까 그제야 종업원이 웃으면서 그 종이를 받아 가더랍니다. 종이에 주문하는 음식을 쓰는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랍니다.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면서도 식당 문을 열고 손님을 받고, 셀프 주유하고 돈은 받고, 엘리베이터는 하루 종일 움직이게 합니다.
▶ 본문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이와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은 괜찮다고 합니다. 본문22절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유대인들은 남자아기를 낳으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면 어떻게 됩니까? 할례를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할례를 합니다. 할례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 상위의 개념이기 때문이랍니다. 유대 랍비들은 인간의 몸을 248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서 어떤 한 부분이 지나치게 움직이거나 사용되는 것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할례를 할 수 없습니다. 할례를 하기 위해서는 칼을 사용해야 하고, 피를 봐야 하고, 상처를 싸매야 하는 일들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법보다 할례를 행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상위의 개념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 생각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3절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화를 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까지 했습니다. 19-21절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 진의(眞意)를 모르는 유대인
안식일과 연관하여 23절의 말씀처럼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한 사건이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입니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의 병을 예수님이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5:9-10)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박해할 뿐만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9-10, 16-18)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할례 하는 것은 괜찮고, 사람의 병을 고쳐 주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19절에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미를 모른다는 겁니다. 모르니 제대로 지킬 수가 없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려고 했고, 그렇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도록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이면에는 자기 영광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과 나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18:11-12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6:1-2, 5절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 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려면 ‘모든 일을 항상 행해야만’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한 번의 실수도 없이 한 번의 착오도 없이 항상 지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로마서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너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야!’라는 것을 각인 시켜주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한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초등교사(개역-몽학선생)라고 불렀습니다. 갈라디아서3:23-25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 그런데 지금 ‘계시될 믿음의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계신 겁니다. 초막절의 실체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의 결론적인 말씀으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7:24)고 하십니다. 여기서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말씀은 ‘옳게, 바르게’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껍데기만 보지 말고, 알맹이를 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껍데기만 봅니다. 율법에 담긴 진의(眞意)를 모릅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므로 자신의 의로움만 드러내며, 나는 이렇게 율법을 지켰다고 하면서 자기영광으로 삼습니다.
● 우리는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이 딱 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미도 모른 체, 율법을 지키기에만 몰두합니다. 혹여 우리는 그렇지 않은지요?
성경에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씀의 진의도 모르고, 내가 편한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세상의 복만을 바라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래서 세상 것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세상의 물질과 돈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나타내려고 하지는 않는지요?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려고 하는 유대인들이나, 말씀의 진의도 모르고 세상의 복만을 추구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올곧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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