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백낙청과 브루스 커밍스는 반미/친북적인 성향을 내비치며 한반도 분단고착화에 기여하게 된걸까? 이것 자체가 일종의 '한반도 분단고착화'를 위해 CIA가 준 미션이 아니었을까 아로는 의심하는 편이다; 자신은 '남침유도설' 주장한적 없다고 했지만, 교묘하게 동조하는 서술을 했던 CIA 스파이이자 시카고 대학교 교수였던 브루스 커밍스
출신 배경
큰아버지가 백병원 창립자. 종로 1000평 부지의 백인제 자택. 재벌 가문.
경기고 이후 미국 유학 가 브라운 대학 입학. 수석졸업. 하버드대 영문학 석박사. 서울대 교수로 서울대 인문대를 꽉 쥐고 지내다 2003년 퇴임.
아로가 백낙청을 미국 (국제투기자본) 간첩으로 의심하는 이유
1. 1950년대의 미국 유학파
2. 부친과 큰아버지가 납북되었고, 뉴욕에서 열린 고교생 토론대회에서는 한국 대표로 나가 유엔의 공산주의 국가 중국 가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력을 볼 때, 처음부터 공산주의 성향이 있으리라고 볼 순 없음. 오히려 그의 반미/친북 성향은 일종의 작위적인 미션 같은 느낌이 듬.
3. 1970년대에는 박정희 정부에 저항한 대표적인 출판사가 창비. 당시 박정희 저항의 가장 큰 축은 미국 CIA.
4. 창비 통해 민족문학론을 외치며, 민족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문학을 주장. 소나기 황순원, 미당 서정주 등 순수문학 지양. 한국 문학을 좌경화시키는 역할. 하여, 김지하가 "깡통"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
5. 1980년대 북한 간첩들-운동권 세력의 교두보 역할을 함.
6. 김대중 정부 이후 여러차례 방북. 김대중평화센터 고문 역임.
7. 서울대 교수 퇴임한 2003년 이후 정치권에 많이 개입. 노무현을 적극 변호한 백낙청.
8. 한미FTA, MD 반대운동. MD는 적국의 미사일 발사를 막는 방어용도로 공격과는 무관하나, MD를 보유하면 적이 더 많이 공격할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댐.
9. 2012년 야권연대 모임에서 한명숙, 이정희, 유시민이 참석. 민주당과의 교섭 통해 통진당 국회의원 13명 배출한 것은 백낙청 작품.
10. 원탁회의의 좌장으로 한완상과 함께 문재인의 비공식 국사. 문재인의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라는 표현은 백낙청 작품.
11. 박원순 장례위원장 역임.
12. 이재명을 김대중 이후 최고 지도자로 추켜세우며 지지.
13. 진보진영의 윤석열 탄핵 여론을 윤석열 퇴진운동으로 바꿈. 조국 등이 백낙청 눈치를 보는 듯.
14. 저서에서 남한은 비판해도, 북한 체제는 비판을 안 함. 인생이 일관되게 반미/친북 흐름
15. 중앙일보 홍석현과의 유사성 있음. 홍은 친일파 후손/스탠퍼드 박사/국제투기자본 소속 단체 (삼극위원회) 부위원장 출신으로 노무현, 문재인과 커넥션이 많고 통일 이야기 자주 함. 백낙청의 부친은 홍씨 집안처럼 원불교 신도. 원불교 여성회 대표 출신.
16. 브루스 커밍스와의 유사성. 엘리트 대학 출신 (컬럼비아 대학교), 엘리트 대학 (시카고 대학) 교수 역임했고, CIA 요원으로 의심받는 사람으로 80년대 운동권의 '미국의 남침유도설'에 영향을 끼침.
17. 기타 북한에 대한 찬양적 태도들: 북한을 높은 자립도를 보이는 나라라고 표현. 한국의 IMF사태는 자업자득이라 표현. 금강산 피살 사건 때는 남북 모두의 잘못이라 말함. 천안함은 북한 책임이 아니고, 한국 정부 발표는 엉터리고 은폐라 말함. 북한에 사과도 해야한다고 말함. 박근혜 탄핵은 정당한 것이라 말함. 북핵은 미국 책임이라 말함.
'반일' 문재인이 실제로는 '친일'이었듯이, '반미' 백낙청이 사실은 '친미' 수괴일지도.
친일파 문재인
- 트위터에 일본 근친상간 야동 사진 올려
- 딸 문다혜는 극우 고쿠시칸 대학 출신
- 백낙청 부친 백붕제는 일제 고위관료 역임한 친일파.
- 문재인 뽑아준 홍석현도 친가, 외가 모두 친일파.
- 문재인 외교특보 문정인은 일본 극우재단 이사장.
- 박영선 도쿄 미나토구 아카사카에 고급 맨션 소유 했었음.
- 박원순: 렉서스 애용하며, 도요타재단으로부터 6억 받음.
- 문재인의 탈원전, 반일 선동 불매운동 (일본 정부의 한국 반도체 규제로 이어짐), 지소미아 폐기 역시 일본과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키워주기 위한 가능성. 한국광물자원공사의 니켈 코발트 매각. 전기차 경쟁력 약화. 중국산 공세에 태양광 셀 국산 점유율 20%대로 하락. 여의도 하늘 드론택시의 반전..국산 아닌 3억짜리 중국산.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이 2018년 10월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 피고 기업이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을 내리자 이에 반발해 2019년 7월 한국에 대한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인 불화수소·불화폴리이미드·포토레지스트의 수출 규제에 나섰다가 1년 전 해제했습니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3/10/08/4OAADIJX4RAQDPSOTL6XVMZY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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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 이후로 이재명 후보만한 정치인을 우리가 만난 적이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썩 잘한 분은 아니었다고 봐요. 문재인 대통령은 아주 착한 분이죠. 잘해보려고 열심히 애쓴 건 사실이지만, 그 분은 정치지도자라고 보기는 좀 어려운 면이 있어요.” (2022년 3월 16일·유튜브방송 <오마이TV> ‘오연호가 묻다’)
“나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론보다는 퇴진론이 더 합리적이라고 봐요. 탄핵해서 퇴진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퇴진을 권고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퇴진은 (대통령 본인의) 자발적인 하야(下野)를 포함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퇴진을 권고하는 게 더 합리적인 수순일 것 같습니다.” (2022년 10월 11일·<오마이TV> ‘오연호가 묻다’)
“박근혜 시대로 치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이루어지는 4차 연도에 해당하는 것이 2026년입니다. 그런데 1년 차부터 퇴진을 부르짖다가 3년차까지도 성공을 못했는데 4년차에 들어서 이제 곧 물러날 사람을 향한 퇴진 운동이 불붙기는 어렵겠지요.” (2023년 신년칼럼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작년 대선 직후부터 “이재명 중심 윤석열 퇴진” 외쳐
작년 3월 대통령 선거 직후부터 이같은 발언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백낙청(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입니다. 그는 평북 정주(定州)의 부자(富者) 집안 출신으로 경기고와 미국 브라운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63년부터 34년간(1974~79년은 해직)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지내고 2003년 정년퇴임했습니다. 백낙청은 28세이던 1966년 1월 계간 문예지 <창작과비평>(이하 창비로 약칭)을 세워 2015년 말까지 50년동안 ‘편집인’을 맡았고 지금도 창비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갖고 있습니다.
올해 85세인 그는 온화한 표정에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정치·사회·시민 운동에 대한 훈수(訓手)를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백낙청은 ‘한국 좌파의 숨은 신(神)’이자 ‘철옹성의 문화 권력자’, ‘한국 사회 좌경화(左傾化)의 원점(原點)’으로 불립니다. 왜 이렇게 됐고, 그의 지향점은 무엇일까요?
◇①민족·민중문화 운동...한국 지식계 좌경화
백낙청은 자신의 분신(分身) 같은 존재인 ‘창비’ 창간호 권두논문에서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말대로 1970년대에 창비는 유신 체제에 맞선 ‘저항의 본산’이었습니다. <신동엽 전집> <8억인과의 대화> 같은 단행본이 판매금지를 당하면서 권위와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그는 창비를 지렛대로 한국 문단의 주류(主流) 세력을 교체했습니다. 미당 서정주, 김동리, 황순원, 평론가 백철 같은 자유주의 순수 문인들을 밀어내고 ‘민족문학·민중문학’ 세상을 만든 것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창비가 주도한 ‘민족·민중문학’ 운동은 분단 시대에 문학은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민족 통일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 만드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목적론에 입각해 있습니다. 그는 “순수문학은 지배 계급의 오락(娛樂)과 실리에 이바지하는 도구”라고 격하했습니다.
1974년 말 백낙청과 시인 고은이 함께 세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매개로 창비는 1980~90년대에 무섭게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1987년 ‘민족문학 작가 회의’로 확대개편한 이 단체는 2007년엔 ‘한국 작가 회의’로 명칭을 바꾸며 문화예술계의 주인 자리를 꿰찼습니다.
창비의 문단 장악이 성공하면서, 민족·민중문화 운동의 불길은 영화·미술·출판·공연 등 전(全) 예술 분야로 번졌습니다. 1988년 결성한 좌파 성향의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은 기존 본산이던 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을 압도했습니다. 문화평론가 조우석은 “창비는 국사학·정치학·철학·사회학 등 인문사회과학까지 마르크시즘의 좌파 학풍으로 물들게 만든 뿌리이자 자궁(子宮)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지금 한국 문학계에서 ‘金日成 만세’ ‘껍데기는 가라’ ‘만인보(萬人譜)’ 같은 반(反)이승만·반(反)자유주의에 ‘우리민족끼리’식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작품을 각각 쓴 김수영·고은·신동엽 같은 문인들만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한국 영화계도 ‘변호인’ ‘남영동1985′ ‘화려한 휴가’ ‘웰컴 투 동막골’ ‘공동경비구역 JSA’ ‘밀정’ 같은 좌파 작품들의 독무대가 됐습니다.
◇“한국 문학에 무식(無識)...한류 문예 부흥 막아”
백낙청식(式) 평론이 득세한 결과, 한국 문단은 “문학은 사라지고 앙상한 이론만 남았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황폐해졌습니다. 백낙청은 그럼에도 성(性) 추문을 저지른 고은(高銀)의 과오에 눈감고,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을 옹호하며 ‘제식구’를 감쌌습니다.
저항시인 김지하(金芝河)는 2012년 말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라는 ‘백낙청’이 한류(韓流)-르네상스의 분출을 가로막고 있는 쑥부쟁이다”라며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백낙청은 한국 문학의 전통에 전혀 무식하다. 그저 그런 시기에 ‘창비’라는 잡지를 장악해 전통적인 민족문학 발표를 독점했을 뿐이다. 그는 한류-르네상스의 핵심인 시(詩) 낭송의 기본조차 전혀 모른 채 북한 깡통들의 ‘신파조’를 제일로 떠받들고 있다. (중략) 백낙청은 우선 정치관부터 바로 세워라. 내가 ‘깡통 빨갱이’라고 매도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라!”
◇②2000년대 들어 한국 좌파의 ‘수뇌’ 노릇
백낙청의 진면목(眞面目)은 2000년대 들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가 정치 활동의 전면에 등장해서입니다. 그 분수령은 2000년 6월 15일 북한 평양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간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6·15 공동 선언입니다.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 때 그의 큰형인 백낙환이 특별수행원으로 평양에 간 이후, 백낙청은 2007년 노무현-김정일 간의 2차 남북 정상회담과 문재인-김정은 간의 2018년 3차 남북정상회담 때에는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북한을 찾았습니다.
2005년엔 6·15 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이듬해엔 북핵(北核) 문제와 관련해 ‘미국 책임론’을 주창했습니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때 범(汎)여권 후보 단일화 운동을 벌였고 2010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좌파 진영 후보 단일화에 적극 개입해 곽노현 후보로 단일화를 성사시켰습니다. 그해 3월 26일 벌어진 천안함 폭침에 대해선 ‘음모론’을 적극 제기했습니다.
백낙청은 2012년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희망2013·승리2012 원탁회의’라는 좌파 진영의 콘트롤타워 격인 최고 지휘부를 만들어 좌장(座長)이 됐습니다. 그는 같은 해 4월 총선에서 13명의 통진당(통합진보당) 소속 인사들을 국회에 진출시키는데 역할 했습니다. 통진당은 우리나라 헌정 사상 최초로 2013년 11월 5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違憲) 정당으로 규정돼 해산 판정을 받은 종북(從北)좌파 집단입니다.
백낙청은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교육부 장관 후보로,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국무총리 하마평에 오르내렸습니다. 이후에도 눈에 띄는 공직(公職)은 맡지 않았어도 그는 좌파 진영의 지존(至尊)으로 꼽힙니다. 70년 한국 현대 좌파 역사에서 서울대 교수로 평생 재직한 하버드대 박사 백낙청의 높은 상징성 때문입니다.
2020년 7월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이 자살하자, 그는 시민대표로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2022년 대통령 선거 때에는 이재명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군림(君臨)하돼 통치(統治)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는 막후(幕後) 보스로서 좌파 진영을 지금도 총지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좌파 진영은 백낙청이 10년 전부터 내놓은 “지금까지와 다른 세상을 한반도에서 만들자”는 담론과 세부 방법론을 교시(敎示) 받들듯 그대로 따라 실천하고 있습니다. 2012년 출간한 단행본 <2013년 체제 만들기>에서 그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사회가 일대 전환을 이룬 것을 ‘87년 체제’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듯이, 2013년 이후의 세상도 별개의 ‘체제’라 일컬을 정도로 크게 바꿔보자”(16쪽)고 했습니다.
◇③반공·反북한의 ‘이면(裏面) 헌법’ 폐기 요구
백낙청의 ‘2013년 체제’ 수립 구상은 2012년 대선 패배로 좌절됐습니다. 그는 그러나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을 몰아낸 촛불시위(자신은 촛불혁명으로 표기)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합니다.
“일러도 2018년에나 가능하다고 본 이 숙제를 촛불혁명이 단숨에 해낸 것이다. 아직 완수된 것은 아니지만 촛불혁명으로 현 정부와 여당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창비 2017년 봄호,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촛불시위를 중심으로 전개된 촛불대항쟁이 촛불혁명의 제1기에 해당한다고 파악한다면, 한반도의 남북을 아우르는 분단체제에 발본적(拔本的)인 변화를 여는 한층 혁명적이고 ‘거족적’인 변화를 달성할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창비 2019년 여름호,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여기서 그가 말하는 ‘발본적인 변화’란 대한민국의 현 체제를 뿌리째 뽑고 그 자리에 자신들이 꿈꿔온 새로운 체제를 심겠다는 뜻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한반도의 ‘어변성룡(魚變成龍·물고기가 용이 됨)’입니다.
‘2013년 체제’와 ‘발본적 변화’는 2017년 5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로 현실 정치에 살아났습니다. 백낙청은 더 나아가 발본적 변화를 위해 반공(反共) 체제를 허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창비’ 2017년 봄호에서 그는 “대한민국에는 공포된 성문헌법 이외에 일종의 이면(裏面) 헌법이 존재한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질서는 ‘북한이라는 반(反)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운용된다. 그 명시적인 표현이 국가보안법이지만, 더 넓게는 ‘빨갱이로 몰린 자에게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관습헌법이 작동해온 것이다.”
그는 이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개헌(改憲)이라면 이 이면헌법의 폐기”라며 북한을 더 이상 반국가단체 또는 주적(主敵)으로 보지 않는 국민의식 변화와 시민들의 응징을 통한 이면헌법 무력화 같은 달성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반공·반(反)북한이 제거된 한국 사회의 본질적 변화, 전면적 전환으로 나가자는 큰 그림입니다.
이면헌법 폐기는 2년 뒤인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입을 통해 구체화됐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빨갱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 언급하면서 “’빨갱이’는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 잔재이다. 이런 색깔론을 넘어서야 새로운 100년이 열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앞으로 ‘빨갱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그런 의식 자체를 지워버리자는 자유민주체제 포기 선언(抛棄 宣言)이었습니다. 어쩌면 문재인 정부가 임기말까지 집요하게 추진했던 종전(終戰) 선언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2018년 9·19 군사합의 등은 ‘북한을 더 이상 우리의 주적(主敵)으로 여기지 않는’ 새로운 체제 수립이란 백낙청의 ‘지침’ 실현을 위한 몸부림 아니었을까요?
◇④제2기 촛불정부로 ‘민중이 다스리는 세상’
궁금한 것은 백낙청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의 말입니다.
“(대한민국에선) 반(反)민주적 수구 세력이 계속 위세를 떨쳐왔고 국가나 사회의 유리한 고지들을 오늘날까지도 점령하고 있다. (한국은) 굉장히 불안한 국가이고 어떻게 보면 결손(缺損) 상태의 국가이다. (중략) 한편으로는 민주국가를 표방하지만 항상 그 내부에 공안(公安) 국가로 치달을 경향성을 온존하고 있다.”(<2013년 체제 만들기>, 143~145쪽)
그는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서구식 대의제(代議制) 같은 민주적 절차 보다 민중이 직접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강변합니다. 이는 중국·북한 등의 인민(人民)민주주의론과 흡사한 논리입니다. 백낙청은 이렇게 썼습니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중의 자치(自治)이다. 민중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게 민주주의지, 남의 다스림을 받는데 그 절차를 만들어서 거기에 따라 진행한다고 참된 의미의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어느정도 잘먹고 잘사는 것도 민주주의의 본질은 아니다. (중략)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노래한 촛불 군중도 그 밑바닥에는 민중이 스스로 다스리는 세상,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세상에 대한 꿈이 있다.” (<2013년 체제 만들기>, 155쪽)
그는 이런 세상을 만들려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다시 거리에 나서 행동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촛불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촛불시민이 원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는 실력과 의지, 투철한 역사인식을 가진 2기 촛불정부가 들어서야 한다.”(2021년 11월 23일 기자회견)
백낙청은 촛불시위의 시원(始原)을 19세기 중엽 동학(東學)과 후천 개벽(後天 開闢) 사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의 육성(肉聲)입니다.
“조선왕조 몰락기에 동학이라는 사상이 나와서 이땅의 후천개벽 운동을 출범시켰고, 1894년의 동학혁명이 비록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패배했으나 민중의 각성과 헌신을 보여주었으며, 식민지 아래서의 3·1혁명 같은 변혁 노력이 분단시대에도 지속되어 드디어 남한에서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만 성취의 역사가 있다.” (백낙청, 2023년 신년칼럼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윤석열 정부 출범 2개월 만인 2022년 7월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윤 대통령 ‘탄핵’을 경고했습니다. 윤 정부 출범후 5개월 동안 좌파 진영은 ‘윤석열 퇴진’ 촛불 대행진을 10차례 벌였습니다.
헌법과 법률을 중대하게 위반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특정 정파가 촛불의 상징을 독점해 시위를 벌이는 형국입니다.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이른바 ‘촛불 정권’을 참칭한 문재인 정부는 나라를 ‘좌파 귀족들’의 부패와 위선의 소굴로 만들었다. 탄핵을 노리는 제2의 촛불은 민생을 파탄 내는 망상이자, 국가의 자멸(自滅)로 가는 전주곡”이라고 했습니다.
◇⑤집요한 反대한민국 노선...‘공산화 통일’?
백낙청의 논문·책·강연 등을 여럿 읽고 들어봐도 북한 유일 수령(首領)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언급은 볼 수 없습니다. 대신 ‘결손 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과 비판, 회의적(懷疑的)인 시각은 넘쳐납니다. 그는 그러면서 “한반도 (남·북한이 각기 존재하는) 2국(國) 체제는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이다. 통일이 빠진 평화와 번영은 무의미하다”며 ‘통일 지상주의(至上主義)’를 외칩니다.
무엇이 통일이냐를 놓고 다투지 말고 남북 간 교류를 진행해 나가다가 상호 교류와 통합이 충분히 진척되었을 때, 남북이 만나 통일됐다고 선포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우리식(式) 통일’이라는 주장입니다. 백낙청은 “모든 통일은 선(善)이다”며 남북한 간의 적대적인 국가 이념을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해선 철저하게 침묵합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대 사회대 교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미국과 캐나다처럼 지금 세계엔 1민족 2국가가 더 많다. 한국인들에게 적화(赤化)통일은 끔직한 악몽(惡夢)이다. 무조건 통일하자는 백낙청의 주장은 너무 위험천만한 기획이자, 5000만명의 목숨을 건 대도박”이라고 했습니다.
백낙청이 동학과 후천 개벽 사상의 적용 대상에서 북한을 빼놓는 것도 큰 결함입니다. 김미영 VON뉴스 대표는 “김일성 주체교의 폭정(暴政)을 무너뜨리는 게 진짜 후천 개벽이다. 북한 주민들이 자유와 인권을 누리는데 무관심한 백낙청식 통일은 한국을 해체하고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자는 정신 나간 발상으로 북한의 선동 논리와 다를 게 없다”고 했습니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체제’ 옹호·수호 증명해 보여야
종합해 보면 백낙청은 2021년 기준 GDP 규모 세계 10위, 제조업 세계 5위, 국방력 세계 6위로 발전한 대한민국을 하루빨리 청산해야할 저주(咀呪)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7개 뿐인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에 진입한 한국인들의 노력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은 찾기 힘듭니다.
백낙청은 1970~80년대 반독재·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랬던 그가 최근 20여년 동안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사실상 부인(否認)하면서 그 존재와 질서를 해체하려는 반(反)대한민국 노선(路線)에 강고하게 서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듭니다. 그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체제’를 사랑하고, 옹호·수호하면서 북한 동포들에게도 확산하려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야만, 이런 의구심이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한 자료 (출간연도 순)
백낙청 <민족문학의 새 단계>(1990년 초판/2022년 개정판),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1994년/2021년), <주체적 인문학을 위하여>(2011년), <2013년 체제 만들기>(2012년), <백년의 변혁 : 3·1에서 촛불까지>(2020년), <서양의 개벽사상가 D.H. 로렌스>(2020년),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2021년) 조우석 <좌파 문화권력 3인방-백낙청·리영희·조정래 비판>(2019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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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스의 업적은 당시 주류 이론이었던 전통주의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당시 냉전에 대한 인식과 6.25 전쟁에 대한 인식은 전통주의적 시각이 주류였다. 전통주의적 시각이란 냉전과 6.25 전쟁의 원인이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전지구화의 공산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야욕에 미국이 나머지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대응한 것이 바로 냉전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6.25 전쟁은 당시 냉전의 격화 속에서 미국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전초전, 대리전적 성격을 띠었다고 보았다.
이에 반대하는 수정주의는 1960년대에 등장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윌리엄 A. 윌리엄스가 있고, 그는 저서인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에서 국제사회의 문제를 잘못된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보았다.
커밍스는 한국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6.25 전쟁의 원인이 외부적 요인이나 김일성이나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개인적인 야망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내부적 사회 모순에 의해 촉발됐다고 보았다. 그의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 1편은 식민지 시대 한국사회의 계급, 사회적 모순을 실증적으로 분석했으며, 당시 공개된 미국의 기밀문서를 통해 분석의 신뢰도를 높였다. 2편에서는 과도한 해석, 해주 진공설이나 미국이나 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을 차용해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1편은 상당히 높은 분석을 기반으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전통주의적 시각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식민지 한국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체계적이었기에 이후 박명림 등 대한민국의 6.25 전쟁 학자들은 이러한 커밍스의 연구를 많이 부정하면서도 그 담론에는 상당히 따르고 있다.[3] 물론 외국의 경우 대표적으로 웨더스비를 비롯, 스툭 등 커밍스의 분석을 평가절하하고 국제사회에서의 힘의 역학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커밍스의 연구는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조선 사회를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또한 소위 자유 진영에서 북한을 '악의 무리'나 '공산주의 괴뢰 집단'이 아닌 진지한 담론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도 커밍스가 처음이었다. 북한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제자인 찰스 암스트롱이 이어갔으나, 이후 연구 표절로 인해 학계에서 매장당했다.[4] 이때 커밍스도 수제자 암스트롱이 표절한 게 아니라고 실드를 치다가 암스트롱이 표절한 게 맞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망신 좀 당했었다.
한때 6.25 전쟁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내전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주장한 내전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한반도는 이미 1945년 해방 당시부터 사실상 내전 상태였다는 것이다. 기존 학계에서는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8일으로 한정해 과연 6월 25일 누가 먼저 침공했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커밍스 교수는 해방 직후부터 좌익vs우익, 농민vs지주, 노동자vs자본가, 식민체제 협력자vs독립운동가, 소련vs미국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모순들이 겹치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광범위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한반도 북부에서 일어난 각종 반공/반소 의거(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 대표적)와 남부에 벌어진 대구 10.1 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4.3 사건, 지리산 빨치산 투쟁은 물론이고, 토지개혁을 둘러싼 농민과 지주의 충돌 등으로 해방 이후 조선은 전국적 혼란 상태였다. 거기에 1948년 남북 양쪽 정권 수립 이후에는 1950년 6월 25일 직전까지 38선 전역에서 산발적인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5] 즉 커밍스는 이 모든 것을 감안해 봤을 때 한반도 전역이 사실상 이미 내전 상태였고 6월 25일에 누가 먼저 선제 공격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초판 이후 개정판에선 견해가 어느 정도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전쟁의 기원' 초판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1949년까지의 한반도 내부의 혼란상을 강조하고 있다. 6월 25일의 상황은 북의 조선인민군이 보다 큰 규모의 국지전을 시도하다가 전면전, 총력전으로 확대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에 나온 여러 정황 자료상 남침설이 근거가 적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내전 확전설 혹은 남침유도설 등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북침설, 음모론적 남침유도설을 주장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본인은 이에 대해 반발하는 모양이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를 보면 어쩌다 만나게 된 대한민국 정부 고위 인사가 "이제는 더 이상 북침설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죠?"라고 물어서 그를 당황하게 만든 일도 있다고 한다. 커밍스가 이런 평가를 받은 데는 이유가 있는데, 당시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을 대학가의 필독서로 만들었던 전대협, 한총련 인사들이 이 책을 근거로 들어 남침유도설을 주장했고, 더 나아가 6.25 이전의 사건을 들어 북침을 주장해 북한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걸 읽었든 읽지 않았든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커밍스가 남침유도설을 주장한다고 생각했다. 1980~1990년대 운동권 출신자와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 중에서는 "6월 25일이란 전면남침 날짜가 의미 없다" 내지 "적어도 북한은 우발적으로 방어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배운 책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리고 커밍스 본인도 교묘하게 책에서 말장난을 많이 쳤으며[6]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하진 않으면서 동조하는 서술을 많이 남겼다. 또한, 김일성이 정말 남침을 하고 싶었다면 겨울에 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뇌피셜로 남침설을 부정하기도 했고, 조선인민군에 복무하면서 전쟁 계획 작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전쟁이 준비되었음을 증언하자 사기꾼이라고 불필요하게 공격적으로 비난하는 등 자신이 역으로 비판당할 건덕지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7] 또한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학자들을 무례하게 비난해서 적을 많이 만들었는데 커밍스로부터 터무니없는 연구를 했다고 매도를 당했던 한국의 원로 정치학자 신복룡은 커밍스가 대한민국 사회에 분열만 가져온 간사한 인간이라고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또한, 문제는 이러한 남침 유도설은 미국이나 서방에서 이미 진즉에 깨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남침 유도설 중 하나인 해주 진공설은 1960년대 굽타에 의해서 제시됐고, 콜코 부부는 남한과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연히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도 타당하지 않았다. 흔히들 소련의 기밀자료가 풀려서 남침 유도설이 거짓이라고 밝혀졌다고 하지만 소련의 기밀자료가 나오기 전부터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것은 명백했다. 커밍스의 저서도 그러한 점에서 초판 당시에도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이미 1980년대에도 북한이 침공했다는 사실, 소련이 전쟁을 지원한 사실은 넘치고도 넘쳤다. 참고로 소련 기밀문서의 경우 러시아 정부가 선별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신뢰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 커밍스도 캐서린 웨더스비가 소련 문서를 바탕으로 커밍스의 이론에 대한 전면적인 반박을 시작하자 방어 차원에서 소련 기밀문서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물론 웨더스비가 이 논쟁에서 압승했다. 기본적으로 증거가 너무 차고 넘쳤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해 북한의 침공이 확실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여, 한국전쟁의 기원 개정판에선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다. 자신의 생각보다 소련의 지원이나 남침이 훨씬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다고 소견을 밝히면서 기존의 의견을 수정했다. 하지만 2010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6.25 전쟁의 성격을 '국제적 세력이 개입된 내전'이라고 정의하며 내전의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
물론 남한의 경우는 좀 다른데, 남한의 경우 6.25 전쟁을 금기시 해왔다. 1980년대 남한 현대사학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그 논의를 그 논의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다고 박명림 교수가 말했지만, 사실 남한은 1987년까지 6.25 전쟁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었다. 1987년 민주화 바람 속에서 6.25 전쟁에 대한 연구가 가능했던 것이고, 그 연구의 기반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있었던 것이다. "6.25는 스탈린이 독단으로 일으켰다"는 기존의 관념에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냉전에서 있어서 특히 6.25 전쟁에 있어서 수정주의적 사조를 만들었고, 그 틀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6.25 전쟁에 대한 시각은 총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통주의적 시각으로 한국전쟁의 기원이 소련과 중국의 팽창정책에서 찾는다. 두 번째는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사회내부의 모순에 따라 전쟁이 일어났다고 본다. 물론 혹자는 3가지라고 해서 북한이 주장한 북침설도 넣기는 하는데, 이미 학문적으로 증명이 끝난 부분이다. #
6.25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1980년대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초판, 1988년에 박세길이 쓴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1권에도 남침유도설 같은 수정주의 관점의 견해들이 대거 수록되었으나, 동시에 당시 대학원생이던 박명림의 "6.25 전쟁사 쟁점"도 같이 수록되었다. 특히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가 1995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출판하면서 6.25 전쟁이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3자 합의에 의한 명백하고 계획적인 남침이란 것을 풍부한 사료를 통해서 증명하여, 커밍스의 남침유도설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수정주의적 사조는 박명림도 따르고 있다.
원래부터 커밍스의 방법론은 철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미국식 실증주의이다. 미국인으로서 수천건의 한국어 사료를 섭렵하여 연구한 것은 대단하다. 당시 한국학자 중에서도 그만큼 자료를 수집해서 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엄청난 사료를 섭렵해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어쨌든 많이 인용되는 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한국어 사료에 집중한 것도 나름 그의 연구에 한계를 가져왔는데, 그가 주목한 한국어 사료들은 주로 6.25 전쟁 중에 노획된 북한 문서들, 특히 강원도당의 지방 문서고들인데, 이런 문서에는 스탈린이 지시했다는 내용 따위 들어있을 리 없고 이러한 문서만 봐서는 북한이 매우 자주적인 건설을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90년대까진 커밍스를 비롯해 노획된 북한 문서를 많이 본 학자들은 북한이 소련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오해석을 내놓곤 했지만 소련 문서고가 해금되면서 북한 정권 건설 독자성의 결정판으로 여겨졌던 토지개혁조차도 스탈린이 조만식의 지지기반인 중농과 부농을 조지기 위해 실행한 것임이 드러나면서 북한 자주론의 위상은 많이 박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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