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호손과 허먼 멜빌의 관포지교의 우정; 유럽계 미국인으로 매우 드물게 미국 법치제도의 위선과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병폐를 고발했던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도 떠오르고..
멜빌은 31세가 되던 해인 1850년 매사추세츠의 모뉴먼트 마운틴(Monument Mountain)에서 열린 작가 및 출판인들의 회합에서 그의 문학 인생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준 한 인물과 만난다. 바로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이었다. 이 모임에서 친해진 그들은 함께 샴페인에 흠뻑 취하고, 함께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나는 우연을 겪은 후 15살 차이의 두 사람은 서로 인품과 문학적 열정과 재능에 매료되었다. 사실 두 사람은 성장환경이나 성향에서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출신의 호손은 신중하고 교양이 넘치는 내향적인 인물로 멜빌은 그를 일러 ‘어두운 천사(dark angel)’라고 불렀다. 반면 멜빌은 다듬어지지 않고, 입담 좋으며, 로맨틱한 분위기의 뉴욕 상인 집안 출신의 인물이었다. 두 사람 간의 우정은 더욱 깊어져서 멜빌은 가족을 데리고 호손의 집 근처로 이사를 하고(애로우헤드), 여기서 그의 예술성의 절정이자 기념비적인 작품 모비 딕을 집필했다. 멜빌은 호손에게 ‘모비딕’의 초고(草稿)를 보여줬는데, 호손은 “그대 심장은 내 가슴 안에서 뛰고, 내 심장은 그대의 가슴 안에서 뛴다. 우리 둘의 심장은 신의 가슴속에서 뛴다.”라며 열광적인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멜빌은 호손의 천재성에 대한 헌사와 함께 ‘모비딕’을 호손에게 헌정했다.
너대니얼 호손의 천재(성)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이 책을 그에게 헌정한다(In token of My for his genius. This book is inscribed to Nathaniel Hawthorne.)
이 책은 1840년에 '최후의 지옥선'이라는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멜빌 자신이 포경선을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였던 시절을 바탕으로 썼다. 멜빌은 고래잡이로 일하면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 중국인, 인도인, 중남미인 같은 그야말로 각양각색 인종과 친구나 동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영미권 소설에선 정말 보기 드물게 모비 딕에선 마오리족인 퀴퀘그(콰이퀘그라고 부르기도 하는 듯?)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그밖에 다른 각양각색 인종들, 아메리카 원주민, 인도인, 중국인, 조로아스터교도, 에이허브 선장의 시종인 흑인소년 핍같이 포경일을 하다가 사고로 죽을뻔하여 실성해버린 비참한 경우도 다룬다. 모비딕은 포경선 피쿼드호에 승선한 청년 이스마엘,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흰고래 모비딕에 대한 증오와 광기에 사로잡힌 에이허브 선장, 합리적 기독교도인 일등항해사 스타벅, 이민족이지만 통찰력을 지닌 퀴퀘크 등이 흰고래 모비딕을 쫓는 과정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이 소설은 고래잡이에 관한 박물학 서적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래의 생태와 활동, 포경 기술, 포획한 고래의 처리 및 가공에 많은 설명을 할애했다. 해서 한동안 <모비딕>은 서점의 문학 코너가 아니라 수산업 코너에 꽂혀 있었다. 이 소설의 초판은 1851년 10월 영국 런던의 Richard Bentley 출판사에서 『고래(The Whale)』라는 제목으로 먼저 나왔고, 다음 달 뉴욕 하퍼(Harpers) 출판사에서 모비딕(Moby-Dick)으로 제목을 고쳐 미국판을 출판했다. 이 미국판에서는 영국판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에필로그’가 실려 있었는데, 이 에필로그는 이슈메일의 극적인 생존과 이 위대한 고래 이야기가 어떻게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모비딕은 멜빌이 심혈을 다해 써서 출판한 야심작이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1856년 그는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이 세계(문단)에서 박멸되기로 많이 작정 해버린 상태입니다.”라고 절망적으로 썼다. 대중은 실험적이고 철학적인 경향을 띤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이 작품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고작 556.37달러에 불과했다.
멜빌의 말년은 비참했다. 식구가 많은 데다 출판사가 파산해 인세도 못받고 빚은 늘어났다. 작품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1866년 이후 뉴욕 세관 감독관 자리를 얻어 20여년 근무했다. 1867년 성실한 청년으로 성장한 첫째 아들 말콤이 18살에 권총으로 자살했고, 자택이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다. 1886년 방랑벽이 있는 둘째 아들 스탠윅스는 캘리포니아 어디에선가 35살로 객사하는 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멜빌은 은퇴한다. 작가로서 멜빌은 잊혀지다시피 했다. 1891년 9월 28일 새벽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을 때 그를 문학계 인사로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1891년 멜빌이 사망했을 당시 부고 기사에는 '문단 활동을 했던 한 시민'이라고만 돼 있었고 이름은 헨리 멜빌, 대표작은 'Mobie Dick'이라고 엉뚱한 철자로 그의 부고를 전했다. 멜빌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때 둘째 딸인 프린세스 멜빌(1855~1938)만 살아서 뒤늦은 아버지의 재평가를 볼 수 있었다. 첫째인 엘리자베스(1853~1908)도 이미 고인이었기 때문.
허먼 멜빌의 묘지[3] |
멜빌의 재평가는 20세기 들어 이뤄졌다. 탄생 100주년인 1919년에야 연구자들이 멜빌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하며 멜빌 부흥(Melville revival) 운동이 일어난다. 비록 살아서는 난해한 작품 성향 때문에 작가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1920년대 이후로 재평가받아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멜빌과 그의 작품이 세상의 관심을 다시 얻게 된 데에는 레이먼드 멜보른 위버(Raymond. M. Weaver 1888~1948)의 활약이 컸다.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이자 작가, 저명한 평론가이기도 했던 위버는 1920년대에 거의 최초로 멜빌의 삶과 문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착수했다. 그가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멜빌이 죽은 지 이미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상태였고, 문단과 학계에서 그의 작품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위버의 노력의 결과, 멜빌 최초의 전기(biography)이자 통틀어 멜빌에 관한 최초의 저작물인 『Herman Melville: Mariner and Mystic(1921)』이 출간된다. 위버가 쓴 이 책의 출판은 멜빌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에 불을 붙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른바 ‘멜빌의 부활(Melville revival)’을 불러온 촉매 역할을 한다.
그러고 보면 멜빌이 미국 문학사의 위대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그의 걸작 ‘모비딕’이 세계적인 위대한 소설이 된 데에는 위버의 공로가 크다. 위버가 멜빌을 세상으로 다시 불러낸 지 불과 2년 후인 1923년 『아들과 연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영국 작가 D. H. 로런스가 그의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라는 평론집에서 에드가 앨런 포, 너새니얼 호손, 월트 휘트먼의 작품과 함께 멜빌의 『모비딕』에 대한 평론을 포함시킨 걸로 보아 멜빌은 그 사라짐과 잊힘 만큼이나 그 부활도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영국 대문호인 서머싯 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10명을 꼽을때 멜빌을 넣고 모비 딕을 영국에서 알리는데 열심히 나섰다.
단편 소설 작가로도 이름이 높은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필경사 바틀비'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단편 소설로 평가받는다.
1819년 8월 1일 미국 뉴욕시에서 멜빌은 부유한 무역상 집안에서 8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보스턴 차 사건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멜빌의 친외조부는 모두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이었고 양가 모두 명문가문으로 멜빌은 유년시절을 비교적 풍족하게 지냈다. 직물 수입상인 아버지 앨런 멜빌은 다정다감하고 문예를 좋아하여 유복한 가정을 꾸렸으나 그의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잇따른 죽음으로 멜빌 가족은 경제적 위기에 빠지게 된다. 멜빌은 은행점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시골학교에서 교사일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1837년 경제공황 이후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1839년에 20살에 상선 세인트 로렌스호를 타고 영국의 리버풀로 항해하며 선원으로 최초의 경험을 쌓는다.
그후 그는 서부에서 직업을 찾는데 실패하고 1841년 포경업의 중심이던 뉴베드포드에서 남태평양행 포경선인 애쉬쿠넷 호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그는 이 배가 마퀴사스 군도의 누쿠히바 섬에 정착했을때 토비 그린이라는 선원과 함께 탈주하여 타이피라는 부족과 함께 한달을 지낸다. 그후 그는 호주의 포경선인 루씨앤호를 타고 타히티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복무거부 때문에 투옥되고 루씨앤호가 떠난 후 탈옥하여 근처 에이미오 섬의 해안가에서 약 2주간 부랑자 생활을 한다. 이후 그는 다시 낸터킷의 포경선인 찰즈 앤드 헨리 호에 승선해서 라하이나 섬으로 가고 호놀룰루에서 몇달간 체류한 후 미국 군함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호를 타고 약 1년간의 항해 끝에 1844년 10월 보스턴으로 귀환한다.
귀향한 멜빌은 누쿠히바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최초의 소설이자 출세작인 타이피(Typee, 1846)를 출판한다. 사실성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긴 했지만 타이피는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멜빌은 타히티와 에이미오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두번째 소설인 오무(Omoo, 1847)를 쓰고 이 역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 작품들은 탈식민주의 문학의 선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멜빌은 매사추세츠 대법원 판사이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러뮤엘 쇼의 딸 엘리자베스 쇼와 결혼해 뉴욕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당시 '청년 미국 Young America'이라 불리는 문학운동 집단과 친교를 맺는다.
작가로서의 멜빌의 첫 위기는 세번째 소설인 마디(Mardi, 1849)에서 비롯된다. 마디는 이전의 두 작품과 같이 모험소설로 시작하지만 멜빌은 자신이 읽은 많은 철학서적과 1848년에 발생한 유럽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내용과 유럽과 미국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풍자를 첨가하여 작품의 성격을 크게 바꾼다. 모험소설을 기대하던 독자와 평자들이 실망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대중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디는 멜빌이 기존의 모험소설의 틀을 벗어나 특유의 문학세계를 탐구한 중요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마디의 실패 후에 멜빌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두 권의 해양소설을 집필한다. 그 중 첫번째인 레드번(Redburn, 1849)은 10년 전 리버풀로의 항해에 기초한 것이고, 두번째 작품인 화이트재킷(White-jacket, 1850)은 미국 군함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두 작품은 멜빌의 대중적 인기를 회복해주었지만, 멜빌은 편지에서 이 작품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쓴 "두 일거리"일 뿐이며 자신이 쓰고 싶은 책은 대중적으로 실패하는 종류의 책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중성과 자신의 예술성 사이의 갈등을 토로한다.
멜빌은 31세가 되던 해인 1850년 매사추세츠의 모뉴먼트 마운틴(Monument Mountain)에서 열린 작가 및 출판인들의 회합에서 그의 문학 인생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준 한 인물과 만난다. 바로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이었다. 이 모임에서 친해진 그들은 함께 샴페인에 흠뻑 취하고, 함께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나는 우연을 겪은 후 15살 차이의 두 사람은 서로 인품과 문학적 열정과 재능에 매료되었다. 사실 두 사람은 성장환경이나 성향에서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출신의 호손은 신중하고 교양이 넘치는 내향적인 인물로 멜빌은 그를 일러 ‘어두운 천사(dark angel)’라고 불렀다. 반면 멜빌은 다듬어지지 않고, 입담 좋으며, 로맨틱한 분위기의 뉴욕 상인 집안 출신의 인물이었다. 두 사람 간의 우정은 더욱 깊어져서 멜빌은 가족을 데리고 호손의 집 근처로 이사를 하고(애로우헤드), 여기서 그의 예술성의 절정이자 기념비적인 작품 모비 딕을 집필했다. 멜빌은 호손에게 ‘모비딕’의 초고(草稿)를 보여줬는데, 호손은 “그대 심장은 내 가슴 안에서 뛰고, 내 심장은 그대의 가슴 안에서 뛴다. 우리 둘의 심장은 신의 가슴속에서 뛴다.”라며 열광적인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멜빌은 호손의 천재성에 대한 헌사와 함께 ‘모비딕’을 호손에게 헌정했다.
그후 그는 서부에서 직업을 찾는데 실패하고 1841년 포경업의 중심이던 뉴베드포드에서 남태평양행 포경선인 애쉬쿠넷 호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그는 이 배가 마퀴사스 군도의 누쿠히바 섬에 정착했을때 토비 그린이라는 선원과 함께 탈주하여 타이피라는 부족과 함께 한달을 지낸다. 그후 그는 호주의 포경선인 루씨앤호를 타고 타히티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복무거부 때문에 투옥되고 루씨앤호가 떠난 후 탈옥하여 근처 에이미오 섬의 해안가에서 약 2주간 부랑자 생활을 한다. 이후 그는 다시 낸터킷의 포경선인 찰즈 앤드 헨리 호에 승선해서 라하이나 섬으로 가고 호놀룰루에서 몇달간 체류한 후 미국 군함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호를 타고 약 1년간의 항해 끝에 1844년 10월 보스턴으로 귀환한다.
귀향한 멜빌은 누쿠히바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최초의 소설이자 출세작인 타이피(Typee, 1846)를 출판한다. 사실성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긴 했지만 타이피는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멜빌은 타히티와 에이미오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두번째 소설인 오무(Omoo, 1847)를 쓰고 이 역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 작품들은 탈식민주의 문학의 선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멜빌은 매사추세츠 대법원 판사이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러뮤엘 쇼의 딸 엘리자베스 쇼와 결혼해 뉴욕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당시 '청년 미국 Young America'이라 불리는 문학운동 집단과 친교를 맺는다.
작가로서의 멜빌의 첫 위기는 세번째 소설인 마디(Mardi, 1849)에서 비롯된다. 마디는 이전의 두 작품과 같이 모험소설로 시작하지만 멜빌은 자신이 읽은 많은 철학서적과 1848년에 발생한 유럽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내용과 유럽과 미국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풍자를 첨가하여 작품의 성격을 크게 바꾼다. 모험소설을 기대하던 독자와 평자들이 실망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대중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디는 멜빌이 기존의 모험소설의 틀을 벗어나 특유의 문학세계를 탐구한 중요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마디의 실패 후에 멜빌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두 권의 해양소설을 집필한다. 그 중 첫번째인 레드번(Redburn, 1849)은 10년 전 리버풀로의 항해에 기초한 것이고, 두번째 작품인 화이트재킷(White-jacket, 1850)은 미국 군함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두 작품은 멜빌의 대중적 인기를 회복해주었지만, 멜빌은 편지에서 이 작품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쓴 "두 일거리"일 뿐이며 자신이 쓰고 싶은 책은 대중적으로 실패하는 종류의 책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중성과 자신의 예술성 사이의 갈등을 토로한다.
멜빌은 31세가 되던 해인 1850년 매사추세츠의 모뉴먼트 마운틴(Monument Mountain)에서 열린 작가 및 출판인들의 회합에서 그의 문학 인생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준 한 인물과 만난다. 바로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이었다. 이 모임에서 친해진 그들은 함께 샴페인에 흠뻑 취하고, 함께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나는 우연을 겪은 후 15살 차이의 두 사람은 서로 인품과 문학적 열정과 재능에 매료되었다. 사실 두 사람은 성장환경이나 성향에서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출신의 호손은 신중하고 교양이 넘치는 내향적인 인물로 멜빌은 그를 일러 ‘어두운 천사(dark angel)’라고 불렀다. 반면 멜빌은 다듬어지지 않고, 입담 좋으며, 로맨틱한 분위기의 뉴욕 상인 집안 출신의 인물이었다. 두 사람 간의 우정은 더욱 깊어져서 멜빌은 가족을 데리고 호손의 집 근처로 이사를 하고(애로우헤드), 여기서 그의 예술성의 절정이자 기념비적인 작품 모비 딕을 집필했다. 멜빌은 호손에게 ‘모비딕’의 초고(草稿)를 보여줬는데, 호손은 “그대 심장은 내 가슴 안에서 뛰고, 내 심장은 그대의 가슴 안에서 뛴다. 우리 둘의 심장은 신의 가슴속에서 뛴다.”라며 열광적인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멜빌은 호손의 천재성에 대한 헌사와 함께 ‘모비딕’을 호손에게 헌정했다.
너대니얼 호손의 천재(성)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이 책을 그에게 헌정한다(In token of My for his genius. This book is inscribed to Nathaniel Hawthorne.)
이 책은 1840년에 '최후의 지옥선'이라는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멜빌 자신이 포경선을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였던 시절을 바탕으로 썼다. 멜빌은 고래잡이로 일하면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 중국인, 인도인, 중남미인 같은 그야말로 각양각색 인종과 친구나 동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영미권 소설에선 정말 보기 드물게 모비 딕에선 마오리족인 퀴퀘그(콰이퀘그라고 부르기도 하는 듯?)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그밖에 다른 각양각색 인종들, 아메리카 원주민, 인도인, 중국인, 조로아스터교도, 에이허브 선장의 시종인 흑인소년 핍같이 포경일을 하다가 사고로 죽을뻔하여 실성해버린 비참한 경우도 다룬다. 모비딕은 포경선 피쿼드호에 승선한 청년 이스마엘,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흰고래 모비딕에 대한 증오와 광기에 사로잡힌 에이허브 선장, 합리적 기독교도인 일등항해사 스타벅, 이민족이지만 통찰력을 지닌 퀴퀘크 등이 흰고래 모비딕을 쫓는 과정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이 소설은 고래잡이에 관한 박물학 서적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래의 생태와 활동, 포경 기술, 포획한 고래의 처리 및 가공에 많은 설명을 할애했다. 해서 한동안 <모비딕>은 서점의 문학 코너가 아니라 수산업 코너에 꽂혀 있었다. 이 소설의 초판은 1851년 10월 영국 런던의 Richard Bentley 출판사에서 『고래(The Whale)』라는 제목으로 먼저 나왔고, 다음 달 뉴욕 하퍼(Harpers) 출판사에서 모비딕(Moby-Dick)으로 제목을 고쳐 미국판을 출판했다. 이 미국판에서는 영국판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에필로그’가 실려 있었는데, 이 에필로그는 이슈메일의 극적인 생존과 이 위대한 고래 이야기가 어떻게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모비딕은 멜빌이 심혈을 다해 써서 출판한 야심작이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1856년 그는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이 세계(문단)에서 박멸되기로 많이 작정 해버린 상태입니다.”라고 절망적으로 썼다. 대중은 실험적이고 철학적인 경향을 띤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이 작품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고작 556.37달러에 불과했다.
멜빌의 말년은 비참했다. 식구가 많은 데다 출판사가 파산해 인세도 못받고 빚은 늘어났다. 작품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1866년 이후 뉴욕 세관 감독관 자리를 얻어 20여년 근무했다. 1867년 성실한 청년으로 성장한 첫째 아들 말콤이 18살에 권총으로 자살했고, 자택이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다. 1886년 방랑벽이 있는 둘째 아들 스탠윅스는 캘리포니아 어디에선가 35살로 객사하는 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멜빌은 은퇴한다. 작가로서 멜빌은 잊혀지다시피 했다. 1891년 9월 28일 새벽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을 때 그를 문학계 인사로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1891년 멜빌이 사망했을 당시 부고 기사에는 '문단 활동을 했던 한 시민'이라고만 돼 있었고 이름은 헨리 멜빌, 대표작은 'Mobie Dick'이라고 엉뚱한 철자로 그의 부고를 전했다. 멜빌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때 둘째 딸인 프린세스 멜빌(1855~1938)만 살아서 뒤늦은 아버지의 재평가를 볼 수 있었다. 첫째인 엘리자베스(1853~1908)도 이미 고인이었기 때문.
허먼 멜빌의 묘지[3] |
멜빌의 재평가는 20세기 들어 이뤄졌다. 탄생 100주년인 1919년에야 연구자들이 멜빌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하며 멜빌 부흥(Melville revival) 운동이 일어난다. 비록 살아서는 난해한 작품 성향 때문에 작가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1920년대 이후로 재평가받아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멜빌과 그의 작품이 세상의 관심을 다시 얻게 된 데에는 레이먼드 멜보른 위버(Raymond. M. Weaver 1888~1948)의 활약이 컸다.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이자 작가, 저명한 평론가이기도 했던 위버는 1920년대에 거의 최초로 멜빌의 삶과 문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착수했다. 그가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멜빌이 죽은 지 이미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상태였고, 문단과 학계에서 그의 작품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위버의 노력의 결과, 멜빌 최초의 전기(biography)이자 통틀어 멜빌에 관한 최초의 저작물인 『Herman Melville: Mariner and Mystic(1921)』이 출간된다. 위버가 쓴 이 책의 출판은 멜빌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에 불을 붙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른바 ‘멜빌의 부활(Melville revival)’을 불러온 촉매 역할을 한다.
그러고 보면 멜빌이 미국 문학사의 위대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그의 걸작 ‘모비딕’이 세계적인 위대한 소설이 된 데에는 위버의 공로가 크다. 위버가 멜빌을 세상으로 다시 불러낸 지 불과 2년 후인 1923년 『아들과 연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영국 작가 D. H. 로런스가 그의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라는 평론집에서 에드가 앨런 포, 너새니얼 호손, 월트 휘트먼의 작품과 함께 멜빌의 『모비딕』에 대한 평론을 포함시킨 걸로 보아 멜빌은 그 사라짐과 잊힘 만큼이나 그 부활도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영국 대문호인 서머싯 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10명을 꼽을때 멜빌을 넣고 모비 딕을 영국에서 알리는데 열심히 나섰다.
단편 소설 작가로도 이름이 높은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필경사 바틀비'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단편 소설로 평가받는다.
19세기 인물임에도 매우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멜빌의 소설 '타이피', '오무'에선 오세아니아 섬으로 들이닥쳐 개신교를 전도하면서 섬사람들의 고유 문화를 파괴하며 제국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선교사들을 악랄하게 묘사했다. 그래서 미국 개신교계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음에도 멜빌은 이것이 현실이라면서 이를 인정하고, 타협하지 않았던, 당시 유럽계 미국인으로서는 상당히 드물게 인종주의, 백인우월주의에 얽매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멜빌의 특징을 여러 관점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라 볼 수 있다. 멜빌이 성장하던 시기에 미국은 모든 국민이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지닌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민주적 계몽주의 프로젝트를 학교 같은 제도교육에서뿐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 협회 및 토론회 등을 통해서 실현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환경에서 멜빌은 청소년기에 왕성하게 토론회에 참여하였으며, 지식의 잔파와 계몽이라는 시대의 사회적 소명은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따라서 여러 직업을 전전한 후 작가의 길을 선택했을 때, 그가 생각한 글쓰기는 단순히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행위가 아닌, 진리의 전달이라는 민주적 계몽주의의 이상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멜빌의 신념은 제국주의, 노예제, 빈부 격차 등으로 점철된 미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의 작품 타이피와 오무는 (남)태평양의 군도에서의 경험에 토대를 두었으며, 따라서 그곳의 주민들과 문화에 대한 사실보도적인 색채가 매우 짙은 작품들이다. 멜빌은 야만인으로 여겨지는 원주민들의 사회에서 모든 악의 근원인 돈, 공개처형 및 감금의 처벌문화, 그리고 온갖 형태의 분쟁과 그 결과인 정신적 질병 등의 문명사회의 해악으로부터 자유로운 유토피아적인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미국을 포함한 서구 문명국들이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제국주의적 만행을 목격하고 고발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멜빌의 비판은 곧 미국사회에 대한 멜빌의 비판적 통찰이 마디라는 가상세계의 여행을 통해서 드러나는 매우 철학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의 말미를 장식하는, 미국을 상징하는 비벤자(Vivenza)라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동시대 미국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민주주의 이상의 실현에 대한 회의를 보여준다.
여기서 미국에 대한 비판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와 그에 수반되는 폭력, 경제적 불균등 등 다양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노예제에 대한 비판이다. 비벤자 남쪽 지역에서 피땀을 흘리며 착취당하고 있는 하모족들-즉 흑인들-의 모습은 만인의 주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 아닐 수 없다. 노예제에 대한 비판은 노예제를 승인하는 미국 헌법에 대한 비판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 미국 헌벙의 4조 2항은 타인에게 노동의 의무를 지고있는 자가 도망했을 때 그를 주인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노예제를 법적으로 공인하고 있었다. 멜빌은 비벤자의 입구에 있는 아치에 "이-공-화-국-에서는-만-민-이-자유롭고-평등하게-태어났다"는 독립선언문의 일절을 분절된 상태의 난해한 상형문자로 새김으로써 민주주의의 이념이 왜곡되고 변절되었음을 비판한다. 더구나 이 상형문자 가장자리에 "하모-족-은-제외하고"라는 뜻의 또다른 상형문자가 새겨져있다는 사실은 노예제에 대한 미국의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다음 작품인 '레드번'에서 멜빌은 미국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후 염원해온 새로운 낙원이 실현될 역사적 장으로 보면서도 미국이 독립선언문의 원칙을 실현할 의무를 다른 나라에 넘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화이트재킷'에서도 멜빌은 미국민이 선택된 국민으로서 자유의 성궤를 지는 정치적 메시아라고 선언하지만, 미국 군함에서 자행되는 선원에 대한 채찍질은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인권유린이라고 고발한다. 멜빌은 법을 위반한 장교는 처벌되지 않고 일반 선원의 사소한 위법에 대해서는 엄한 태형이 가해지는 미군함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이런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법 집행에 저항하는 반란행위를 자연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은 멜빌의 단편 및 중편 소설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필경사 바틀비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월스트리트에서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한 필경사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가 낳은 계급적 분열과 인간상호간의 물리적 정신적벽의 문제를 예리하게 묘사하면서 민주주의적 평등의 이상이 얼마나 훼손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베니토 세레노는 스페인 노예선에서 발생한 노예반란으로 인해 흑인 노예와 백인 주인의 위치가 전복된 사실을 모르는 미국인 선장 앞에서 노예와 주인이 실제와 다른 역할을 연출해야 하는 연극적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노예제가 자연스런 질서가 아니라 만들어지고 연출되어야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임을 극화한다. 동시에 이 작품은 노예반란이 물리적으로 진압되고 백인의 법의 집행을 통해서 흑인노예들의 처형이 정당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백인사회가 흑인의 인권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마지막 작품인 빌리 버드에서도 멜빌은 천사와 같이 순수한 빌리 버드가 순간적이고 비의도적으로 저지른 살인행위에 대한 대가로 법의 이름으로 처형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기본적 권리가 어떻게 사회제도에 의해 훼손되는가를 보여주고, 과연 정의가 사회제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지의 문제를 깊이있게 탐구한다.
이렇듯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토대로 멜빌은 그의 작품 전체에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미국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심도있게 파헤친다. 그러나 미국사회에 대한 멜빌의 가장 깊이있는 분석은 모비딕, 피에르 그리고 사기꾼에서 나타난다. 특히 멜빌은 이 세 작품에서 각기 미국사회의 다른 영역을 집중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모비딕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장에 대한 상징적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면, 피에르는 미국의 가정과 상업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사기꾼은 미국의 경제활동의 장으로서의 시민사회애 대한 패러디로 볼 수 있다. 멜빌은 이 세 작품을 통해서 미국의 국가, 시민사회, 가정의 전영역을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모비 딕이 워낙 걸작으로 유명해서 그렇지 중, 단편도 상당히 잘 쓰는 작가다. 그 중에서 필경사 바틀비, 베니토 세레노, 빌리버드는 미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중, 단편들 중 하나다.[4]
멜빌의 특징을 여러 관점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라 볼 수 있다. 멜빌이 성장하던 시기에 미국은 모든 국민이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지닌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민주적 계몽주의 프로젝트를 학교 같은 제도교육에서뿐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 협회 및 토론회 등을 통해서 실현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환경에서 멜빌은 청소년기에 왕성하게 토론회에 참여하였으며, 지식의 잔파와 계몽이라는 시대의 사회적 소명은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따라서 여러 직업을 전전한 후 작가의 길을 선택했을 때, 그가 생각한 글쓰기는 단순히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행위가 아닌, 진리의 전달이라는 민주적 계몽주의의 이상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멜빌의 신념은 제국주의, 노예제, 빈부 격차 등으로 점철된 미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의 작품 타이피와 오무는 (남)태평양의 군도에서의 경험에 토대를 두었으며, 따라서 그곳의 주민들과 문화에 대한 사실보도적인 색채가 매우 짙은 작품들이다. 멜빌은 야만인으로 여겨지는 원주민들의 사회에서 모든 악의 근원인 돈, 공개처형 및 감금의 처벌문화, 그리고 온갖 형태의 분쟁과 그 결과인 정신적 질병 등의 문명사회의 해악으로부터 자유로운 유토피아적인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미국을 포함한 서구 문명국들이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제국주의적 만행을 목격하고 고발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멜빌의 비판은 곧 미국사회에 대한 멜빌의 비판적 통찰이 마디라는 가상세계의 여행을 통해서 드러나는 매우 철학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의 말미를 장식하는, 미국을 상징하는 비벤자(Vivenza)라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동시대 미국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민주주의 이상의 실현에 대한 회의를 보여준다.
여기서 미국에 대한 비판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와 그에 수반되는 폭력, 경제적 불균등 등 다양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노예제에 대한 비판이다. 비벤자 남쪽 지역에서 피땀을 흘리며 착취당하고 있는 하모족들-즉 흑인들-의 모습은 만인의 주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 아닐 수 없다. 노예제에 대한 비판은 노예제를 승인하는 미국 헌법에 대한 비판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 미국 헌벙의 4조 2항은 타인에게 노동의 의무를 지고있는 자가 도망했을 때 그를 주인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노예제를 법적으로 공인하고 있었다. 멜빌은 비벤자의 입구에 있는 아치에 "이-공-화-국-에서는-만-민-이-자유롭고-평등하게-태어났다"는 독립선언문의 일절을 분절된 상태의 난해한 상형문자로 새김으로써 민주주의의 이념이 왜곡되고 변절되었음을 비판한다. 더구나 이 상형문자 가장자리에 "하모-족-은-제외하고"라는 뜻의 또다른 상형문자가 새겨져있다는 사실은 노예제에 대한 미국의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다음 작품인 '레드번'에서 멜빌은 미국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후 염원해온 새로운 낙원이 실현될 역사적 장으로 보면서도 미국이 독립선언문의 원칙을 실현할 의무를 다른 나라에 넘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화이트재킷'에서도 멜빌은 미국민이 선택된 국민으로서 자유의 성궤를 지는 정치적 메시아라고 선언하지만, 미국 군함에서 자행되는 선원에 대한 채찍질은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인권유린이라고 고발한다. 멜빌은 법을 위반한 장교는 처벌되지 않고 일반 선원의 사소한 위법에 대해서는 엄한 태형이 가해지는 미군함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이런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법 집행에 저항하는 반란행위를 자연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은 멜빌의 단편 및 중편 소설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필경사 바틀비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월스트리트에서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한 필경사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가 낳은 계급적 분열과 인간상호간의 물리적 정신적벽의 문제를 예리하게 묘사하면서 민주주의적 평등의 이상이 얼마나 훼손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베니토 세레노는 스페인 노예선에서 발생한 노예반란으로 인해 흑인 노예와 백인 주인의 위치가 전복된 사실을 모르는 미국인 선장 앞에서 노예와 주인이 실제와 다른 역할을 연출해야 하는 연극적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노예제가 자연스런 질서가 아니라 만들어지고 연출되어야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임을 극화한다. 동시에 이 작품은 노예반란이 물리적으로 진압되고 백인의 법의 집행을 통해서 흑인노예들의 처형이 정당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백인사회가 흑인의 인권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마지막 작품인 빌리 버드에서도 멜빌은 천사와 같이 순수한 빌리 버드가 순간적이고 비의도적으로 저지른 살인행위에 대한 대가로 법의 이름으로 처형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기본적 권리가 어떻게 사회제도에 의해 훼손되는가를 보여주고, 과연 정의가 사회제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지의 문제를 깊이있게 탐구한다.
이렇듯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토대로 멜빌은 그의 작품 전체에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미국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심도있게 파헤친다. 그러나 미국사회에 대한 멜빌의 가장 깊이있는 분석은 모비딕, 피에르 그리고 사기꾼에서 나타난다. 특히 멜빌은 이 세 작품에서 각기 미국사회의 다른 영역을 집중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모비딕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장에 대한 상징적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면, 피에르는 미국의 가정과 상업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사기꾼은 미국의 경제활동의 장으로서의 시민사회애 대한 패러디로 볼 수 있다. 멜빌은 이 세 작품을 통해서 미국의 국가, 시민사회, 가정의 전영역을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모비 딕이 워낙 걸작으로 유명해서 그렇지 중, 단편도 상당히 잘 쓰는 작가다. 그 중에서 필경사 바틀비, 베니토 세레노, 빌리버드는 미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중, 단편들 중 하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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