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지강헌

 

1. 개요[편집]

"이 바보들아! 나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어!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난 그동안 생각했단 말이야!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버렸단 말이야! 그런데도 결국 오늘 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노태우 대통령, 국민을 위한! 국민을 위한 노태우 대통령!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

"낭만적인 바람막이 하나 없이 이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너무나 살아갈 곳이 없었다"
"치안에 대해서 너무 불만이 많아. 어떻게 죄수가 판사, 검사를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야? 사람을 죽이고도 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안광술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 재소자 12명이 이송 중 교도관 흉기로 찌르고 탈주한 사건.

더 자세한 내용은 표창원의 사건추적 - “유전무죄, 무전유죄” 탈주범의 절규 편을 참고할 것.

2. 전개[편집]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1]에서 대전 공주교도소, 공주치료감호소[2]로 이송되던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탈주하여 서울시내로 잠입했다.[3]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이들은 본래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이었지만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제도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보호감호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560만 원 절도를 저지른 자신은 무려 17년을 살아야 되는데 알려진 것만 70여억 원을 횡령 전경환(전두환 막내동생)은 겨우 7년[4]을 선고받은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탈출했다. 나중에 탈출 과정에서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권총을 탈취하면서 흉악범이 되긴 했지만 맨 처음 교도소에 수감됐을 땐 흉악범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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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 중에서 최후까지 잡히지 않던 5명 중 4명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서울시에서 은신처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가 10월 15일 밤 9시 40분경 서대문구 북가좌동[6] 고모 씨의 집에 잠입해서 고 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로 생중계되었으며 인질극을 벌인 범인 4명은 다음과 같다.
  • 지강헌 (당시 34세, 1954년 2월 8일생): 사살
  • 안광술 (당시 22세, 1966년생): 자살
  • 강영일 (당시 21세, 1967년생): 생존
  • 한의철 (당시 20세, 1968년생): 자살

인질로 잡혀 있던 고 씨가 새벽 4시쯤에 탈출하여 인근 파출소에 신고했고 곧바로 경찰 병력 1천여 명이 집을 포위했다. 인질범들은 새벽 4시 40분부터 경찰과 대치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낮 12시경 강영일이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와 있을 때 한의철과 안광술이 지강헌이 가지고 있던 호송교도관 김○○ 교사(당시 54세, 1934년생), 김○○ 교사(당시 36세, 1952년생)[8]의 총을 빼앗아 각각 자살했고 지강헌은 경찰에게 비 지스 홀리데이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한 뒤 노래를 들으면서 창문을 깨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 시도 직후 경찰특공대원들이 집으로 진입해 인질로 잡혀 있던 가족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으며 지강헌은 깨진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 기도를 했는데 이를 지켜본 인질이 비명을 지르자 경찰특공대가 인질이 위험한 걸로 판단하여 즉각 무방비 상태의 지강헌에게 다리와 옆구리에 총을 발사하였으며 몇 시간 뒤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도 못받고 사망했다.#

당시 '홀리데이'를 요구한 지강헌의 요구에 경찰이 실수로 스콜피온스의 홀리데이를 전달했다가 급하게 비 지스의 홀리데이를 다시 전달했다는 소문도 있다. 일단 사건 당시 현장에서 지강헌이 들었던 노래는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맞다.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울려퍼질 때 지강헌이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당시의 방송 녹화테이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은 2006년 SBS의 영화프로그램 'TV박스오피스'의 '영화비하인드' 코너에서 확인되었고 관련 영상은 유튜브 등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9]

당시 검거되지 않았던 5명 중 인질극에 가담하지 않은 마지막 탈주범 김길호가 탈주한 지 1년 9개월 만인 1990년 7월 1일에 체포되면서 탈주극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10]

당시 인질 및 경찰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예상 밖으로 대단히 신사적이었으며 그들의 요구는 '방송'이었지 '탈주'가 아니었다. 사실 지강헌 일행은 숨어 살다가 집주인이 몰래 도망친 탓에 인질극을 벌인 것이고 그러다 보니 방송을 탔다. 지강헌의 노트 인질극을 벌이기는 했지만 범인들은 "죄송하다 조금만 참아달라", "금방 끝날테니 이해해달라." 면서 두려워하는 인질들을 달랬고 경찰들 앞에서 인질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고성을 지르면서도 인질에게 귓속말로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최대한 인질들을 배려하려고 했다.[11]

그런데 실제 영상을 보면 같이 탈주한 동료에게는 과격하게 대했는지 강영일에게는 위협 사격으로 권총을 한 발 쏘면서까지 자수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12]

다만 유념해야 할 점은 지강헌 일당이 무죄가 아니라는 것이며, 의도가 무엇이든 그 수단을 범죄로 삼았다는 것은 함부로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나름대로 억울할 만한 사연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89년 개정 이전의 사회보호법에서 보호감호 기간을 최대 10년으로 규정한 탓에 지강헌 일행은 잡범임에도 불구하고 흉악범죄자나 받을 수준의 10~20년 구속이라는 매우 과중한 형량이 내려졌다. 지강헌 일당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 또한 특혜를 받고 돈 없고 권력이 없으면 중형을 받는 대한민국의 불평등한 현실에 분노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이것을 그저 일개 범죄자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권력층이나 부자들에게는 지은 죄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거나 아예 무혐의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법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저하됨에 데 큰 일조를 했음을 상기하면 지강헌의 범죄와는 별개로 진지하게 고찰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탈주극 중에 사망한 사람을 뺀 9명 가운데 2014년 9월 기준으로 석방된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체포된 김길호와 지강헌 인질극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영일이다. 나머지는 출소 후 재범으로 인해 다시 구속되었다고 한다.

3.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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