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인들이 미개하고 하나의 정답만을 추종하는 경향이 강한 것은 단순히 그릇된 주입식 교육의 영향 뿐 아니라, 성리학의 핵심개념인 ‘리’와 ‘기’의 결정론적/도덕지향적 세계관의 영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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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ankei.com/article/20170125-ZQCZWJ4VWFKOFPE656HKRXO7EU/
무죄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으로 판결 내용도 박 교수 측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유죄가 인정되면 한국에 의한 민주주의의 '자기파괴'를 맞이하는 곳이었다.
판결이 인정한 대로 박씨의 저서는 전 위안부 개인의 비방 중상을 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주장에 맞서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에 의한 통치가 복잡하고 교묘한 구조를 갖고 있던 것을 위안부라는 소재를 통해 학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것을 한국 측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단순한 이항 대립의 스토리로 삼는 이유는 지배된 측으로 역사를 직시하는 데 한국인이 공포심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에 의한 재택기소에는 위안부 문제를 성역으로 삼아 국론에서 벗어난 의견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한국사회가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한국인이 전후 오랜 시간을 들여 피를 흘려 쌓아 올린 오늘의 민주화와 완전히 역행한다. 이번 문제의 경과에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온 많은 지한파 일본인들도 갈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앞으로도 이어 전위안부를 이용하는 세력에 의해 네거티브 캠페인이 이루어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을 본 위안부 합의까지 뒤집히는 것이 있다면 일본에서는 '혐한'을 넘어 무관심이 펼쳐진다. 결코 한국을 위해서는 안 되고, 한국 미디어, 여론의 냉정한 판단을 요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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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참고)과 같은 할머니들의 증언들을 통해, 위안부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의 이미지처럼 일본 순사나 군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여성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평균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식민지의 가난한 여성)안에서 가난을 극복하고자 조선인 업자나 지인의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 간 여성이 더욱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충분히 '합법적(가부장적, 남성 중심적, 자본중심적)'으로 성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을 폭력으로 강제 연행할 이유도 근거도 없다."라는 말도 한다. 또, 한국군 위안부나 양공주 문제를 거론하기도 한다. 일본 정부에는 분명 위안부 책임이 있지만, 그것은 폭력을 행사했다는 책임보다는 식민지배라는 구조적 문제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고노담화와 동아시아 평화기금을 거론하며 일본 정부는 이미 사과를 했다는 주장을 한다. 동아시아 평화기금이란 1997~2000년까지 위안부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한 것. 일본 총리의 편지도 동봉되어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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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옹호론[편집]
"성명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식민지 지배를 통해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제국 일본의 근원적인 책임을 날카롭게 지적했을 뿐”이라며 “위안부 문제로부터 등을 돌리고자 하는 일본의 일부 논조에 가담하는 책이 결코 아니다”고 주장했다 -『제국의위안부』의 저자인 박유하 교수를 서울동부검찰청이「명예훼손죄」로 기소한 것에 대해 우리들은 커다란 놀라움과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작년 11월 일본에서도 간행된『제국의위안부』에는「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면적인 인식을 넘어 다양성을 제시함으로써, 사태의 복잡성과 배경의 깊이를 포착하여 진정한 해결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검찰 기소에…日인사들 항의성명 - 동아닷컴
위안부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제국의 위안부' 오독을 그만두고 차분하고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는 아래와 같은 의견들도 있다.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제국의 위안부』 읽기 1 정승원
여는이야기: 착종된 한일 근/현대사를 새롭게 들여다보기
『제국의 위안부』 읽기 2 정승원
『제국의 위안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1)
『제국의 위안부』 읽기 3 정승원
식민지의 동원체제로서 위안부 문제
『제국의 위안부』 읽기 4 정승원
‘강제연행’이란 무엇인가?(1)
"‘민족주의+진보’의 폐해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가는 ‘디아스포라’에 천착하는 재일 지식인 서경식이 박유하 비판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과, 한국의 진보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단호한 계급적 관점을 고수해온 박노자가 이 논쟁에서만은 ‘탈계급적’ 태도로 일관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박유하의 견해가 일본 우익에 봉사한다는 식의 비난과도 선을 긋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견해가 사회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우려하는 건 필요한 일이나, 반대와 금지의 근거로 삼는 건 파시스트의 방식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공극우 세력의 주요한 탄압 논리는 ‘북한에 봉사한다’였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 - 경향신문
‘사죄’해야 하는 것은 일본제국 뿐만이 아니라 “한국(또 북한)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잊혀졌다. 왜일까. 식민지에서 살았던 사람은 때로는 본국민보다도 더 열렬히 그 종주국에 사랑과 충성과 협력을 맹세했다. 그것이 설령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은 잊혀져야 하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위안부’의 대체물로서 전장에 보내진 ‘조선인 위안부’에게 일본인 병사는 때로 (몸과 마음을 유린하는) 치떨리는 증오의 대상이고, 때로는 (똑같이 전장에서 ‘물건’으로 취급 받는) 동지일 수도 있었다. 그 모순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됐던 그들의 진실한 목소리는 일본과 한국 어느 쪽의 공적인 ‘기억’에서도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노예’는 성적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은폐해버리는 말이다. 위안부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측면만 주목해서 ‘피해자’로서 기억 이외를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된다. 그것은 위안부들에게서 스스로 기억의 ‘주인’이 될 권리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가 바라는 기억만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속을 강제하는 것이 된다.” 아사히신문, '제국의위안부' 서평 게재 - 한국일보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배웠던 그대로 한국군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과 자료도 현재 많이 확보되어 있는 상태다. 한국군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저 ‘도의적 책임’만을 논해야 한다. 그 속에서 묻혀버리는 수많은 전쟁 성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논란은 좀 더 진지하게 전개되며 승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북리뷰]‘논란’에서 사회적 ‘논의’로의 필요성 - 주간경향
또 비판론에서 박유하가 정영환을 종북몰이 한다고 하는데 정영환은 유감스럽게도 조총련 계열의 학자로 조총련은 노골적인 북한의 대남 공작기지로 활동되어진 바 있으며 정영환은 북한에 여러번 방북하고 친북적인 행태로 인해 한국에 입국조차 거부된 바 있는 위험인물이다.기사 이런 제반 사정을 감안해봤을때 북한과 정영환의 연계를 의심하는건 매우 타당하며 밑도 끝도 없이 종북몰이 한다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유죄판결이 나온 지 2개월 후인 12월 7일에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유죄 판결을 비난하는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이 발족하였다. 대법원 상고심까지 박 교수를 지원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며 여기에 지지를 표한 사람들은 오에 겐자부로와 MIT 교수이자 미국 내 좌파 지식인으로 유명한 놈 촘스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해 온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앤드루 고든 하버드대 교수 등이 있다. 관련 기사
옹호론자인 스기타 아츠시는 박유하를 옹호하며 이러한 주장을 내세웠다
한국은 '도덕적으로 우위'라는 정당성에 의한 '도덕적 오만'을 즐겨 왔다. '피해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인권을 둘러싼 의식구조에 안주해 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탈제국주의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지향성이 죄를 지은 가해자의 수치와 회개를 이해하려고 한 적은 없다. 오만은 상상력이 빈곤하다. 그리고 그런 오만과 규탄은 상대를 오히려 위축시킨다. 그런 도덕적 지향성이 상대방의 굴복 자체를 목표로 하는 지배욕망의 뒤틀린 형태가 된 적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천황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할 때까지 나는 용서할 수 없다"(『뉴스로닷컴』2011년12월13일자)고 하는 위안부의 말은 그런 심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굴복시키고 싶은 -- 꿇게 하고 싶은 욕망은 굴욕적인 굴복 체험의 트라우마에 의한 또 다른 강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대일본제국의 이인자로서 구미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역사를 상기하면, 그런 욕망이 새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다. 그것은 식민지화의 상처가 만든 뒤틀린 심리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99-300쪽)
스기타 아츠시 「근원은 가부장제 국민 국가 체제」(『제국의 위안부』서평) 『아사히 신문』, 2014년12월 7일자 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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