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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인들이 미개하고 하나의 정답만을 추종하는 경향이 강한 것은 단순히 그릇된 주입식 교육의 영향 뿐 아니라, 성리학의 핵심개념인 ‘리’와 ‘기’의 결정론적/도덕지향적 세계관의 영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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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 기조 (Kizo Ogura,おぐら きぞう,小倉 紀藏)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1959~ )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 독일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광고회사에 근무하다가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로 유학을 와서 8년 동안 한국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교토 대학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제이앤씨, 2015), 『새로 읽는 논어』(교유서가, 2016),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리(理)와 기(氣)로 해석한 한국사회』(모시는사람들, 2017)를 비롯해 『입문 주자학과 양명학』(2012), 『주자학화하는 일본 근대』(2012), 『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2020), 『한국의 행동원리』(2021) 등이 있다.  

책 속으로

한국은 ‘도덕 지향성 국가’이다. 한국은 확실히 도덕 지향적인 나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한국인이 언제나 모두 도덕적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 지향성’과 ‘도덕적’은 다른 것이다. ‘도덕 지향성’은 사람들의 모든 언동을 도덕으로 환원하여 평가한다. 즉 그것은 ‘도덕 환원주의’와 표리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현대의 일본은 ‘도덕 지향성’ 국가가 아니다. 이것이 한국과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이 도덕적이고 일본인이 부도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우리야말로 도덕적인 민족이고 일본인은 부도덕적인 민족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인이 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 지향적이기 때문인 것이다. --- p.13

일본의 TV드라마에서는 연인들이 달밤에 공원에서 “왠지 당신하고는 더 이상 안될 것 같아.” 이렇게 고백하고 헤어진다. 한국의 드라마에서는 연인들이 사람들 앞에서 “당신은 이런 이유로 도덕적으로 잘못됐어. 이렇게 부도덕한 당신과 사귀는 것은 나의 도덕성을 심히 손상시키는 일이야. 그래서 나는 당신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어!”라는 논리를 펼치고 헤어진다.
즉 한국의 드라마에서 연인들은 도덕을 외치고 있다. 이것이 도덕 지향성이다. 한국 드라마의 등장인물은 “지금 당신을 틀렸어. 이렇게 해야 맞아.”라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일방적으로 단정해 버린다. 또 “사랑은 이러한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라며 사랑의 당위적 정의를 상대방에게 먼저 설교한 뒤에, 그 사람과 교제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전개되는 것은 ‘주체성 쟁탈전’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누가 도덕적 주체성을 장악할 수 있는가 하는 격렬한 싸움의 기록이다.
일본의 드라마는 감각의 예정조화적인 논리 전개로 이루어져 있고, 한국의 드라마는 논리로 무장된 감정의 격돌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의 드라마는 늘어지고 지루하다. 거기에는 세계관의 대립이나 주체 간의 투쟁이 전혀 없다. 그에 비해 한국의 드라마는 숨 쉴 틈 없는 말싸움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드라마’인 것이다. --- p. 14

일본의 젊은이는 더 이상 젊지 않지만 한국의 젊은이는 아직 한창 젊다. 일본의 젊은이가 생기 없이 늙어 가고, 관리되어 손질될 대로 손질된 분재 소나무인 데에 반해, 한국의 젊은이는 쭉 뻗은 새파란 대나무 같다. 한국 사회에 끼친 유교의 영향이라고 한다면 “아랫사람은 윗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지 않는다”와 같은 형식적인 측면만이 일본에서는 강조된다. 그 오해의 근원에는 “유교는 형식주의이다”라는 근본적인 무지가 가로놓여 있다. --- p. 16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철학 그 자체가 영토·사람·주권으로 응결된 것이 한국이다. 여기에서 철학이란 ‘리’를 말한다. 주자학에 의한 국가 통치 이후, 이 반도를 지배해 온 것은 오로지 ‘리’였다. 항상 ‘하나임’(一個性)을 주장하는 ‘리’였던 것이다. ‘리’란 무엇인가? 보편적 원리이다. 그것은 ‘천(天)’,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사회의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절대적인 규범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도덕 지향성은 이 전통적인 ‘리’ 지향성의 연장이다. --- p.20쪽

조선 철학은 독창성에서는 중국 철학보다 현격하게 떨어지지만, 인간의 마음이나 사회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를 둘러싼 바늘구멍 같은 세밀한 이론이 강력한 폭탄이 되어 권력 중추를 위협한다는 과격함은 중국보다 철저하였다. 오늘날 일본의 대학교수들이 행하는 이른바 ‘철학학(哲學學)’으로는 이와 같은 극도의 팽팽한 긴장감은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다소 틀린 학설을 주장한다 해도 기껏해야 대학에서 쫓겨날까 말까 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으로 먹고사는 자로서 다행일까 불행일까? 조선에서는 철학논문에서 ‘성(性)’을 ‘심(心)’으로 글자 하나만 바꾸려 해도, 곧바로 ‘사문난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엄청난 고통과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고 권력을 잃었다. 오늘날의 철학자에게 철학은 먹고사는 수단이지만, 조선에서는 먹고사는 원천이었던 것이다. --- p. 23

(한국에는 음악이나 바둑이나 스포츠 분야에서 천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음악이나 바둑이나 스포츠는 규칙으로서의 ‘리’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다. 구조나 세계관으로서의 ‘리’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리’(定理=정해진 리)의 아름다운 질서와 완벽하게 합일될 수 있는 재능이다. 이 정해진 규칙으로서의 정리(定理)에서 해방될 때 한국에서는 과학 등의 분야에서도 천재가 출현할 것이다.
--- p.115

출판사 리뷰

한국이 유교적인 사회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유교적인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 물음에 명쾌하게 답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이었는데, 성리학의 특징은 ‘리’와 ‘기’라는 두 개념으로 인간과 사회와 우주를 통일적으로 설명한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서 ‘리’가 도덕과 이념을 의미한다면 ‘기’는 욕망과 현실을 나타낸다. 성리학에서는 현실이 이념에 따르고 욕망이 도덕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리와 기 중에서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여 한국 사회를 분석하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에 의하면 한국인에게는 도덕과 이념을 중시하는 ‘리’적인 측면과, 변화와 현실을 ‘기’적인 측면이 모두 들어 있고, 이 양면성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이 책은 현대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틀로서 리와 기라는 내재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방법론과는 선을 긋고 있다. 종래에 한국을 분석하는 이른바 ‘과학적인’ 방법들은 대개 서양의 사회과학 이론이나 철학적 담론과 같은 외부의 시각에 의존해 왔는데, 그 이유는 현대 한국을 분석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른바 서양에서 훈련받은 해외 ‘유학파’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학적 지식을 현대 한국을 분석하는 데에 사용하기보다는, 조선시대 유학을 설명하는 데에 주로 사용해 왔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원형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의 한국에 관심이 적고, 지금의 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국의 원형에 어두웠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한국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저자와 같은 내재적인 방법론이 나오지 못했던 이유이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국문화가 지니는 독특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 독특성의 원인을 한국인의 ‘리’ 지향성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서 ‘리’는 ‘도덕’의 다른 말로, 한국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도덕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인들의 도덕지향성을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사고방식 속에서 하나하나 증명해 나감으로써 일본인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고 있다.
 

 

1. 어떻게 외국인이 이렇게까지 한국을 깊게 파헤칠 수 있었는가 하는 감탄이 나온다. 내용과 상관없이 저자가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이란 나라를 포착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것이 책 전체를 타고 느껴진다. 일본인은 정말 관찰과 기록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한국인보다도 한국을 더 잘 알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상당 부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2. 언어는 구성원들의 문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에서 언어를 전적으로 문화의 하위 대상으로 환원하는 것이 적절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우리는 '안녕하세요'를 인사로써 사용하지 글자 그대로 상대방의 안녕을 바라거나 묻는 의미로 사용하진 않는다. 어떤 단어들은 단어 본연의 뜻보다 발화의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생각을 무시한다면 너무 사태를 복잡하게 본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때때로 저자가 한국어를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3. 내가 잘 아는 분야(한의학과 한의대 관련 P. 89~90)에 대해서는 조금 내용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의학의 명칭에 대하여: 저자는 한국인들이 전통의학을 漢의학이 아니라 韓의학이라고 표기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애당초 韓이든 漢이든 근대 시기 서양의학의 전래와 더불어 창제된 표현이며 그전까지는 단순히 '의학'이었음을 주지해야 한다. 일본이 근대 시기 漢의학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고 이것이 일제 시대를 거쳐 한국에 유입되었다. 몇몇 한의사들이 주장하듯, 나 또한 韓의학이라는 명칭을 굳이 고수해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대다수의 한의사들은 韓이든 漢이든 동양의학이든 이런 기호학적 문제 자체에 큰 관심이 없을 것이다), 사상의학이나 침법 등 韓의학만이 강조하는 고유한 특징이 있음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漢의학이라는 명칭이 엄밀히 말하면 국제 표준 용어가 아니며, 일본 고유의 전통의학을 지칭한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각국의 동양의학에 대해 중국은 中의학을, 한국은 韓의학이라고 표기한다. 다시 말해 漢의학이라는 표기를 고수하는 것은 일본밖에 없다. 그밖에 和의학이라는 말도 자주 쓰는데 이것은 漢의학에 비해서는 조금 내부적인 표현이며, 화한의학(和漢医学)이라는 표현이 보이기도 한다. 이따금 중국의 TCM을 본떠 TJM 등의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즉슨, 漢이 아니라 韓을 쓴다고 해서 그것이 논리적으로 부정합한 것은 아니며 굳이 漢을 따라야 하는 당위성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 일본 한의학 고유의 특성에 대하여: 한의학의 기본적인 진단 체계를 변증시치라고 하는데 일본은 한국 중국과 다른 독특한 기혈수 이론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변증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한국의 사상의학처럼 중국과 다른 일본만의 독자적인 진단 이론이다(일본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오사카 대학 의학과의 자료를 참조).


http://www.med.osaka-u.ac.jp/pub/kanpou/kampo/diagnosis.html


그 외에도 일본의 많은 대학병원(일본은 한국과 달리 의사가 한약을 처방하고 연구를 하는 일원화 체계이다)의 한방내과나 한방외래 자료를 검색하면 이러한 일본 漢의학 고유의 특징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미국의 현대의학과 유럽의 현대의학이 조금씩 다른 방향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의철학의 개념과 이해> 참조) 한국 일본 중국의 동양의학도 조금씩 그 학문적 강조점이 다를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면에서는 한국보다 일본이 더 '제도적으로' 한의학에 친화적이며 융합적인 면이 있다. 한국의 의료 사회는 대단히 보수적이며 한의과와 의과의 갈등은 의료계의 갈등 중 아주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것은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리'에는 '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상대방에게는 리를 따르는 '기'가 부족하다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 결과 갈등은 반지성적이고 퇴행적이며 소모적이다. 더 큰 문제는 나날이 그 골이 깊어지기만 한다는데 있다. 반면 일본은 한의사와 의사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밖에, 한방 제약회사가 거의 없고 규모도 작은 한국과 달리 일본은 한약만으로 시가 1조 원 가량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 제약회사인 츠무라 제약회사가 있다. 그리고 일본의 한약은 탕약 위주의 처방을 하는 한국과 달리 제제와 제형이 훨씬 다양하고 현대적이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은 <일본 한방의학을 말하다>(조기호)와 <일본에서의 한방의학(漢方醫學)에 대한 국비 지원 연구 동향과 그 함의>(정창운 외)를 참조할 것.


4. 1998년에 이러한 책이 쓰여졌다는게 아주 신기하다. 왜 이 책이 지금에 와서야 출간되었던 것일까? 안타까운 점은, 이 책의 내용 중 많은 것들이 아직까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지적한 '일제 단맥설'이라든가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나 도덕과 민족 중심의 역사관 등은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그중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정과 관련된 저자의 항변이었다. 도덕적 논쟁을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정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 리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리와 일본의 리는 다를 뿐이며 여기에 도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것을 "한국형 사회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형 정이 없을 뿐"(P. 233)이라고 일축한다.


 안타까운 것은 마지막 말이다. "지금까지 한국 혹은 조선을 제대로 성실하게 인식한 일본인은 적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마침내 피폐하고 야위고 고독하고 초연한 모습으로 황야에 서성거리는 것을 나는 보아 왔다."(P. 258) <제국의 위안부>와 <대화를 위해서>에 따르면 오늘날 일본의 많은 지한파 지식인들이 한국에 커다란 벽을 느끼고 더 이상 관여하길 포기하게 되었다는 서술이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한 사태가 계속될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연속성이 사라지고 단절의 벽만 남는다면 관계는 밑을 향해 내려갈 수밖에 없다.

 

 

 


조선조 이래로 우리는 도덕성에 미쳐 있는 국가가 된 것일까?

아니면 유학이 전래된 이래 조선에서 꽃을 피워 오늘날 이렇게 도덕에 미쳐 있는 나라가 된 것일까?

같은 말이지 뭐.

여하튼 철학의 나라 조선이 끼친 영향은 우리 대한민국에도 많이 미쳤다.

정치와 도덕을 하나로 묶어 무릇 지도자라면 청빈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조금의 흠도 없어야 하는데 우리는 발견하기만 하면 서로 끌어내리려고 하니... 근데 오구라 기조는 어떻게 해서 우리의 이런 면까지 바라보게 되었을까?

한국인의 철학을 그것도 외국인의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https://www.sankei.com/article/20170125-ZQCZWJ4VWFKOFPE656HKRXO7EU/

고쿠라 기조 교토대 교수
고쿠라 기조 교토대 교수

 무죄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으로 ​​판결 내용도 박 교수 측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유죄가 인정되면 한국에 의한 민주주의의 '자기파괴'를 맞이하는 곳이었다.

 판결이 인정한 대로 박씨의 저서는 전 위안부 개인의 비방 중상을 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주장에 맞서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에 의한 통치가 복잡하고 교묘한 구조를 갖고 있던 것을 위안부라는 소재를 통해 학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것을 한국 측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단순한 이항 대립의 스토리로 삼는 이유는 지배된 측으로 역사를 직시하는 데 한국인이 공포심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에 의한 재택기소에는 위안부 문제를 성역으로 삼아 국론에서 벗어난 의견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한국사회가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한국인이 전후 오랜 시간을 들여 피를 흘려 쌓아 올린 오늘의 민주화와 완전히 역행한다. 이번 문제의 경과에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온 많은 지한파 일본인들도 갈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앞으로도 이어 전위안부를 이용하는 세력에 의해 네거티브 캠페인이 이루어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을 본 위안부 합의까지 뒤집히는 것이 있다면 일본에서는 '혐한'을 넘어 무관심이 펼쳐진다. 결코 한국을 위해서는 안 되고, 한국 미디어, 여론의 냉정한 판단을 요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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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참고)과 같은 할머니들의 증언들을 통해, 위안부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의 이미지처럼 일본 순사나 군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여성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평균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식민지의 가난한 여성)안에서 가난을 극복하고자 조선인 업자나 지인의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 간 여성이 더욱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충분히 '합법적(가부장적, 남성 중심적, 자본중심적)'으로 성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을 폭력으로 강제 연행할 이유도 근거도 없다."라는 말도 한다. 또, 한국군 위안부나 양공주 문제를 거론하기도 한다. 일본 정부에는 분명 위안부 책임이 있지만, 그것은 폭력을 행사했다는 책임보다는 식민지배라는 구조적 문제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고노담화와 동아시아 평화기금을 거론하며 일본 정부는 이미 사과를 했다는 주장을 한다. 동아시아 평화기금이란 1997~2000년까지 위안부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한 것. 일본 총리의 편지도 동봉되어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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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옹호론[편집]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검찰 기소에 2015년 11월 26일 일본의 지식인 54명이 성명을 발표했다. 주도한 사람은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전 아사히(朝日)신문 주필, 페미니스트 사회학자인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도쿄대 명예교수)이며 1993년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담화를 발표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중의원 의장, 199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 등이 ‘성명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일본의 현대 한국학 개척자인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대 명예교수 등 ‘지한파’로 알려진 문화계 학계 인사도 이름을 올려 총 성명인은 54명이었다.
"성명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식민지 지배를 통해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제국 일본의 근원적인 책임을 날카롭게 지적했을 뿐”이라며 “위안부 문제로부터 등을 돌리고자 하는 일본의 일부 논조에 가담하는 책이 결코 아니다”고 주장했다 -『제국의위안부』의 저자인 박유하 교수를 서울동부검찰청이「명예훼손죄」로 기소한 것에 대해 우리들은 커다란 놀라움과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작년 11월 일본에서도 간행된『제국의위안부』에는「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면적인 인식을 넘어 다양성을 제시함으로써, 사태의 복잡성과 배경의 깊이를 포착하여 진정한 해결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검찰 기소에…日인사들 항의성명 - 동아닷컴
한국에서도 2015년 12월 2일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고종석 작가,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등 지식인 191명이 박유하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검찰 측이 문제삼은 "자발적 매춘부", "동지적 관계" 등의 표현이 책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며 "검찰이 과연 문제의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기소 결정이 과연 공정한 검토와 숙의의 결과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 이들은 이 책의 주장에 논란의 소지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한 학자가 내놓은 주장의 옳고 그름을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발상은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라며 검찰의 기소 취하를 요구했다.

위안부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제국의 위안부' 오독을 그만두고 차분하고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는 아래와 같은 의견들도 있다.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제국의 위안부』 읽기 1 정승원
여는이야기: 착종된 한일 근/현대사를 새롭게 들여다보기

『제국의 위안부』 읽기 2 정승원
『제국의 위안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1)

『제국의 위안부』 읽기 3 정승원
식민지의 동원체제로서 위안부 문제

『제국의 위안부』 읽기 4 정승원
‘강제연행’이란 무엇인가?(1)
"‘민족주의+진보’의 폐해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가는 ‘디아스포라’에 천착하는 재일 지식인 서경식이 박유하 비판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과, 한국의 진보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단호한 계급적 관점을 고수해온 박노자가 이 논쟁에서만은 ‘탈계급적’ 태도로 일관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박유하의 견해가 일본 우익에 봉사한다는 식의 비난과도 선을 긋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견해가 사회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우려하는 건 필요한 일이나, 반대와 금지의 근거로 삼는 건 파시스트의 방식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공극우 세력의 주요한 탄압 논리는 ‘북한에 봉사한다’였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 - 경향신문
‘사죄’해야 하는 것은 일본제국 뿐만이 아니라 “한국(또 북한)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잊혀졌다. 왜일까. 식민지에서 살았던 사람은 때로는 본국민보다도 더 열렬히 그 종주국에 사랑과 충성과 협력을 맹세했다. 그것이 설령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은 잊혀져야 하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위안부’의 대체물로서 전장에 보내진 ‘조선인 위안부’에게 일본인 병사는 때로 (몸과 마음을 유린하는) 치떨리는 증오의 대상이고, 때로는 (똑같이 전장에서 ‘물건’으로 취급 받는) 동지일 수도 있었다. 그 모순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됐던 그들의 진실한 목소리는 일본과 한국 어느 쪽의 공적인 ‘기억’에서도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노예’는 성적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은폐해버리는 말이다. 위안부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측면만 주목해서 ‘피해자’로서 기억 이외를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된다. 그것은 위안부들에게서 스스로 기억의 ‘주인’이 될 권리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가 바라는 기억만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속을 강제하는 것이 된다.” 아사히신문, '제국의위안부' 서평 게재 - 한국일보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배웠던 그대로 한국군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과 자료도 현재 많이 확보되어 있는 상태다. 한국군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저 ‘도의적 책임’만을 논해야 한다. 그 속에서 묻혀버리는 수많은 전쟁 성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논란은 좀 더 진지하게 전개되며 승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북리뷰]‘논란’에서 사회적 ‘논의’로의 필요성 - 주간경향
박유하 교수는 정영환 부교수의 비판에 반박하는 글을 역사비평에 실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체제 - 정영환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에 답한다, 역사비평, 2015.8, 463-478 박유하 교수 페이스북에도 원문이 있다. 페이스북 링크

또 비판론에서 박유하가 정영환을 종북몰이 한다고 하는데 정영환은 유감스럽게도 조총련 계열의 학자로 조총련은 노골적인 북한의 대남 공작기지로 활동되어진 바 있으며 정영환은 북한에 여러번 방북하고 친북적인 행태로 인해 한국에 입국조차 거부된 바 있는 위험인물이다.기사 이런 제반 사정을 감안해봤을때 북한과 정영환의 연계를 의심하는건 매우 타당하며 밑도 끝도 없이 종북몰이 한다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유죄판결이 나온 지 2개월 후인 12월 7일에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유죄 판결을 비난하는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이 발족하였다. 대법원 상고심까지 박 교수를 지원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며 여기에 지지를 표한 사람들은 오에 겐자부로 MIT 교수이자 미국 내 좌파 지식인으로 유명한 놈 촘스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해 온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앤드루 고든 하버드대 교수 등이 있다. 관련 기사

옹호론자인 스기타 아츠시는 박유하를 옹호하며 이러한 주장을 내세웠다
한국은 '도덕적으로 우위'라는 정당성에 의한 '도덕적 오만'을 즐겨 왔다. '피해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인권을 둘러싼 의식구조에 안주해 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탈제국주의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지향성이 죄를 지은 가해자의 수치와 회개를 이해하려고 한 적은 없다. 오만은 상상력이 빈곤하다. 그리고 그런 오만과 규탄은 상대를 오히려 위축시킨다. 그런 도덕적 지향성이 상대방의 굴복 자체를 목표로 하는 지배욕망의 뒤틀린 형태가 된 적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천황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할 때까지 나는 용서할 수 없다"(『뉴스로닷컴』2011년12월13일자)고 하는 위안부의 말은 그런 심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굴복시키고 싶은 -- 꿇게 하고 싶은 욕망은 굴욕적인 굴복 체험의 트라우마에 의한 또 다른 강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대일본제국의 이인자로서 구미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역사를 상기하면, 그런 욕망이 새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다. 그것은 식민지화의 상처가 만든 뒤틀린 심리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99-300쪽)
스기타 아츠시 「근원은 가부장제 국민 국가 체제」(『제국의 위안부』서평) 『아사히 신문』, 2014년12월 7일자 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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