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발 전쟁범죄: 간도 참변,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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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간도 참변[1] 또는 경신 참변[2]은 참변이 일어난 장소인 중국 옌볜(延边) 조선족 자치주 훈춘시[3]의 지명을 따서 훈춘 참변[4]이라고도 부른다.

2. 상세[편집]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군을 강제로 동원하여 토벌 작전을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맹부덕의 중국군이 먼저 독립군과 비밀리에 교섭해 버려 독립군은 1920년 8월부터 지린성으로 떠났다. 중국군은 빈 주둔지를 불태운 뒤 일본군에겐 이미 독립군이 도주해서 토벌에 실패했다고 변명했다.

중국의 손을 빌려 독립군을 토벌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일본은 아예 간도의 조선인들을 초토화시켜 버리기로 하고 8~9월에 계획을 수립해 25,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간도에 투입하였다. 마침 훈춘 사건이 발생하자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삼은 일본은 중국 측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간도를 자기네 앞마당인 것처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은 3개의 토벌 지역을 편성해 독립군 섬멸 작전을 펼쳤지만 이미 독립군은 피난한 상태였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이런 학살에 살인, 체포, 강간, 방화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준으로 약 3,016명[5]이 사망했고 한인 지역들은 초토화됐다.

여담으로 청산리 전투는 이 간도 참변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기에 벌어졌다. 북로 군정서군은 위의 중국군과의 교섭에 따라 근거지를 이동하여서 청산리에 집결했고 추격해 온 일본군과 교전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 청산리 전투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군들의 추적을 피한 독립군들은 밀산부 한흥동에 모여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했다.[6]

간도 참변을 취재하기 위해 만주로 향한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는 취재 도중 실종되어 버렸다. 당연하게도 일제가 그를 암살하고 암매장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82년작 한국 영화 <일송정 푸른 솔>에서도 언급되는데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으나 학살당하는 한인들을 작두로 목을 친다든지 마을을 불태운다.

영화 암살에서 짤막하게 언급된다. 영화 설정상 현직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카와구치 마모루가 간도 참변 당시 학살을 주도한 일본군 17사단의 지휘관이었기 때문. 주인공인 안옥윤이 회상 장면에서 간도참변 때 자신의 어머니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언급하는데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차라리 권총으로 살해하는 게 나아 보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7]

간도에서 학살이 발생하기 전에 연해주에서도 연해주 4월 참변이 발생해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3. 관련 문서[편집]

 

 

 

 

 

일본의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

일본군의 전략폭격은 서구 중심의 공중폭격 역사 서술에서 번번히 제외되거나 망각되었으나 1937년 게르니카 폭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전략폭격이 같은 해 중국 대륙의 주요 도시들에서 진행되었다……2차대전기 일본인은 결코 무고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1937년 일본군의 대규모 전략폭격은 잔혹한 대량학살의 최악의 본보기 중 하나다.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47쪽

1. 개요2. 중일전쟁 이전
2.1. 1914년 칭다오2.2. 간도참변2.3. 만주사변 중 진저우 폭격(錦州爆撃)
3. 중일전쟁
3.1. 당시 역대 최고의 공군폭격 동원3.2. 난징3.3. 난타오3.4. 국제연맹 총회의 결의안3.5. 중국 대륙 폭격의 정점 충칭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일본군이 중국대륙에 벌인 무차별 폭격을 다루고 있다. 일본 대중들은 일본 본토 공습이나 도쿄 대공습만을 기억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일본은 도쿄 대공습을 당하기전부터 중국에게 충칭 대공습 같은 무차별 전략 폭격을 가했었다.

일본은 폭격으로 중국의 항전의지를 꺾을 수 있다 자신했지만...

2. 중일전쟁 이전[편집]

2.1. 1914년 칭다오[편집]

일본군은 1914년 9월 칭다오 공략전을 하면서 도심을 향해 폭탄을 쏟아부었다. 일본 해군기는 1914년 9월 5일부터 11월 7일까지 폭격을 49회 수행했고 육군기들은 9월 27부터 11월 7일까지 15회에 걸쳐 폭탄을 떨어뜨렸다.[1]

일본군은 칭다오 도심 폭격을 벌인 이유를 다음같이 설명한다.
시가지 폭격으로 후방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통괄 지휘 계통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가 유효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48쪽; 요시다 도시히로, 공습 (인류가 하늘을 날면서 공습은 시작되었다), 145~146쪽 에서 재인용

2.2. 간도참변[편집]

1920년, 일본군은 간도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했는데 이때도 폭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폭격의 효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비행기를 보지 못했던 선지인에게 많은 효과가 있었다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48쪽; 요시다 도시히로, 공습 (인류가 하늘을 날면서 공습은 시작되었다), 157~159쪽 에서 재인용
선지인은 조인과 나인(중국인)을 멸시하는 비하명칭이다.

2.3. 만주사변 중 진저우 폭격(錦州爆撃)[편집]

1931년 10월 8일, 관동군의 폭격기 12대가 이시하라 간지 중령의 지도 하에 장쉐량이 이동중이던 랴오닝성 진저우를 공습했다. 각기에 25kg 폭탄을 5,6 발 싣고 총 75개를 투하하였다.

3. 중일전쟁[편집]

3.1. 당시 역대 최고의 공군폭격 동원[편집]

미쯔비시중공업 등에서 생산된 각종 신형 폭격기들은 1937년 중일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시점부터 다음 해 10월 27일 우한 점령에 이르기까지 16개월 동안 일본 해군 항공대(육군항공대 제외)만 무려 1만대의 비행기를 참전시켰고, 약 3만 5000발의 폭탄과 32만발의 지상 총격용 총탄을 소비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그 이전 시기 동서양을 통틀어 어떤 공중폭격 양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공군력의 발현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전긍긍한 남경시민, 공습 후 침묵의 일야」, 「비행대는 적 후방시설 폭격. 상해전선 공육군 활약」같은 화려한 제목의 신문기사들이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일본군의 공군력을 찬양하고 있었다.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49쪽

중국 민간인들에게 이 폭격은 지옥이었다. 난징, 광둥, 충칭 같은 도시들은 일본군의 소이탄 폭격을 계속 당해야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 최강의 열강국가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진행한 전략폭격들의 엄청난 규모 때문에 종종 간과되는데 이 공습들은 1937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전까지 국가간 전쟁에서 공습으로 투하한 최대 규모의 폭격은 나치 독일의 게르니카 공습이었으며 이때 투하한 폭탄은 30톤도 되지 않았다. 반면 일본군은 35,000발 이상, 무게로 따지면 1만 톤에 육박하는 폭탄을 퍼부었다. 이것은 1940년대로 접어들며 독일과 영국의 항공전이 벌어지고 미국이 B-29라는 괴물을 뽑아내기 이전까지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격이었다.

3.2. 난징[편집]

당시 난징에 있던 영국 맨체스터 가디언 기자는 이렇게 보고했다.
청난구 및 신주택구를 포함해 300곳 이상의 지점에 매일 평균 두세발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49쪽 에서 재인용

3.3. 난타오[편집]

1937년 8월 26일 일본군 폭격기가 난차오의 기차역을 공격했다. 중국 민간인 수백명뿐만 아니라 영국 대사 H. K-Hugessen도 부상당했다. 영국 외무부는 일본군의 폭격을 국제법과 인류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2]

3.4. 국제연맹 총회의 결의안[편집]

1937년 9월 2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총회에서는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의 비인도성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일본은 4년 전 국제연맹을 탈퇴했기 때문에 씹었다.[3]

일본군은 당시 이렇게 주장했다.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50쪽 에서 재인용

3.5. 중국 대륙 폭격의 정점 충칭[편집]

일본군 전략폭격의 정점은 1938년 말부터 시작된 충칭폭격이었다. 충칭은 1938년부터 45년까지 중국 국민당정부의 임시수도로서 전쟁 기간 동안 많은 공장과 대학이 이동해왔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1940년 8월부터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충칭은 양쯔강 상류의 삐죽삐죽한 험준한 산악지형과 수많은 부실한 통나무 다리들로 악명이 높은 최고의 천연 요새 같은 도시였다. 일본군은 난징과 우한을 점령하며 국민당군대를 지속적으로 추격했지만, 지상군을 충칭으로 진입시키는데는 커다란 곤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군은 지상군 점령이 추후 진행된 난징이나 상하이 공중폭격과는 달리, 충칭에 대해서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공중폭격만으로 적을 굴복시킬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 충칭 폭격은 다량의 소이탄을 활용한, 말 그대로 무차별폭격으로 진행되었다.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50쪽

중국 측 사료를 따르면 1938년 10월부터 1943년 8월까지 일본군은 약 5년동안 218회의 공습을 하여 2만 1593발의 폭탄을 퍼부었고 사망자 1만 1889명, 부상자 1만 4100명이 발생했다.[4]

폭격의 반복은 지속됐다. 충칭 폭격의 수많은 사례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공습은 1939년 5월 3일과 4일 사이에 전개됐다. 이틀간 72대의 폭격기가 약 600톤의 소이탄과 파편폭탄 (fragmentation bomd)을 약 70만명의 인구밀집 시가지에 퍼부어서 4400명의 사망자와 수천명의 부상자를 만들었다.

당시 충칭에 있던 타임의 통신원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White)는 소이탄 공격을 받은 시민들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전력선이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시내 중심가를 관통하는 충칭의 급수시설도 마찬가지였다. 불길 외에는 어떤 빛도 없었고, 불길을 잠재울 물도 없었다. 불은 충칭 구시가를 오르내리며 확산되고 있었다. 불이 대나무를 태우면서 대나무 마디가 팡팡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소음으로 꽉 차 있었다. 여자는 통곡하고, 남자는 고함치고, 아기는 울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땅바닥에 앉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울부짖었다. 나는 뒷골목에서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언덕 작은 길에서 큰길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옷은 불길에 타올랐고, 이내 그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뒹굴고 또 뒹굴었다.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51쪽 에서 재인용
수많은 민간인들이 소이탄에 타죽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충칭 대공습 문서를 참조.

[1]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48쪽[2]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49쪽[3]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49쪽[4]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50쪽; 요시다 도시히로, 공습 (인류가 하늘을 날면서 공습은 시작되었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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