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운동 (1958-1962)으로 2000~4500만명을 죽이고, 문화대혁명 (1966-1976)으로 100만~2000만명 이상을 죽였으며, 1964년 일본 측 국회의원에게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 감사를 표했으며, 1972년 9월, 데이비드 록펠러, 버트런트 러셀 지시를 받고 중일수교를 단행하며 일본과의 배상금 문제를 자진해서 포기한 친일파 매국노 '인간도살자'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미개한 짱개들은 답이 없다; 저희들을 철저하게 죽이고, 굶주리고, 세뇌시켜도 그저 국부라고 칭송하는 얼간이 병신들; 일왕, 푸틴, 네타냐후, 하마스, 김정은, 이승만, 박정희, 노무현, 문재인, 윤석열 빠는 병신들도 비슷해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는데 당시의 주석인 마오쩌둥은 호기롭게 "우린 승전국이니 배상 따위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에선 중국에 배상금으로 최소 500억 달러는 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본 총리가 중국에 방문하고 배상금 문제까지 땡처리했단 뉴스를 들은 온 중국이 경악에 휩싸였고 특히 난징은 온 도시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울음바다가 되어 항의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지만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공에서 통할 리가 있나.

 


7.1. 일본 관련 어록[편집]

일제의 침략은 중국공산당에 큰 이익이 됐고, 중국 인민에게 권리를 되찾아줬다. 일제 황군의 힘이 없었다면 공산당이 집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4년 사사키 고조 일본 사회당 의원이 중국을 찾았을 때 한 말이다.[24]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 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당에 대한 대응에, 나머지 10%를 항일에 사용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일본의 대륙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는 국공합작을 결성하고, 발전하고, 최후의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데, 내가 보건대 일본의 침략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일본에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이 점은 마오쩌둥의 친일 성향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의 근거 중 하나로 쓰이는데, 이 점은 일본의 물리/사회학자 엔도 호마레가 2015년에 쓴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에서 다루어졌으며 한국에선 2019년 언론인 박상후가 번역해서 출간되었다.(월간조선)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4.4. 전략적 허세[편집]

어떤 이는 미래의 세계대전으로 절반 이상이 죽고 나머지 절반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정말 미친 자다.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루마니아 공산당 대표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마오쩌둥을 겨냥해서 쏟아낸 비판.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일화.
1957년 11월 러시아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왔을 때 니키타 흐루쇼프의 도취감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최초의 ICBM스푸트니크 위성이 막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 새로운 지도자를 싫어했고 탈스탈린주의에 대해 반대했지만, 이 감동적인 기술의 위업은 '객관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의를 진전시켰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동풍이 이제 서풍을 압도하고 있다"는 선언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무한한 인력과 제3세계에서 솟아나는 혁명적 조류와 합쳐질 때 소련 군사력의 이 새로운 조짐은 "사회주의의 힘이 제국주의의 힘을 압도할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며 모인 동지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원자탄과 미사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재래전이든 핵 전쟁이든, 어떠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마 3억 명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전쟁은 전쟁이다.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아기들을 낳으며 일할 것이다."

단, 이것은 좀 더 당시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이 상황을 잘 모르면 뭔 대륙의 기상 내지 중2병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말은 전략적인 계산하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을 한 1950년대 후반은 중국은 핵무기가 없었지만 양대 핵 강국인 미국소련 모두 적대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핵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양 강대국이 유사시 중국에 핵 공격을 하려 할 때 한 번쯤 재고하도록 허풍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저런 대외 발언을 마오쩌둥의 성격이라고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건 무리다.

마오가 저런 말을 하면서 핵무기가 쓸모 없다고 주장했지만, 뒤로는 핵 개발을 시도했다는 것은 저 말이 전략적인 처지를 고려한 허세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2차례의 대만 해협 위기와 소련의 중국 지원 중단 이후 중국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개발을 시작한 지 2년만인 1964년에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해에 사정거리 800km짜리 둥팡 로켓에 핵 탄두를 장착하여 발사하는 핵 실험을 실시했다. 참고로 이렇게 직접 미사일에 달아 핵 실험을 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할 만큼 위험한 실험이었다.

이런 허세나 비이성을 내세우는 전략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하며, 국제 정치학 용어로 자리잡을 만큼 유명한 전략이다. 미국도 냉전 중 공군참모총장이나 전략공군사령관 등 핵무기 사용권에 가까운 자리에 강경파 또라이인 커티스 르메이 등을 기용해서 미치광이 전략으로 사용했다. 상호확증파괴가 국제 정세의 지배적인 논리로 군림하던 시절에, 마오쩌둥은 핵무기에 의한 완전한 파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미 - 소 양국과 나름 대등한 수준의 협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심리적 우위로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희귀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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