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두 갈래: 말콤 X vs. 마틴 루터 킹 / W. E. B. 듀보이스 vs. 부커 T. 워싱턴 / 무장 독립운동 (김좌진의 청산리대첩, 안중근, 3.1운동, 이봉창, 김구, 의열단) vs. 애국 계몽운동 (이승훈, 안창호, 여운형)

 

과연 어느 누가 부커 T. 워싱턴이나 말콤 X의 (폭력을 동반한) 급진주의가 W. E. B. 듀보이스나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주의적 방법론에 비해 열등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말콤 X보다는 마틴 루터 킹이 인지도도 훨씬 높고, 역사적으로도 더 높은 평가를 받으나, 사실 흑인들이 폭력을 동반하지 않은 인권 운동만 했다면, 2023년 현재 시점에서 지금만큼의 권리를 인정받았을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겉보기에는 미국의 태평양 전쟁 승리가 한국이 (피동적으로나마) 독립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였지만, 역사 속에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는 각종 사건사고들(ex. 청산리 대첩,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3,1 운동, 이봉창의 폭탄투척)이 없었다면, UN이나 서구 열강, 또는 소비에트가 남한과 북한에 자치정부를 허용하지 않고 대놓고 식민화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남미나 아프리카에서는 20세기 후반까지 독립을 못한 국가가 많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행동없이 계속 항의만 하면 (비폭력 운동을 하면), 좆밥 취급을 당해 더더욱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말콤의 말처럼,  "권력은 결코 뒷걸음질을 하지 않는다. 오직 더 큰 권력으로 향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 역사를 검토해보면, 폭력을 동반한 독립 운동이 꼭 좋은 결실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압제자의 탄압이 더욱 심해졌기에... ('단기'적 효과와, '장기'적 효과를 구분해야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기에 어느 방법론을 절대시하기가 참 애매하다.

 

이하 발췌.

 

...

 

말콤 X의 흑인운동 선배 격이었던, 당대에는 과격하다고 평가받은 이상주의자 W. E. B. Du Bois와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부커 T. 워싱턴이 연상되는 부분이 많다. 실제로 그 둘도 매우 대립하는 사이였다. 사실 사상적인 측면으로 보면 생애 후반부로 갈수록 공유하는 점이 더 많아졌던 킹-엑스 보다 저 한세대 전의 흑인 계몽운동 지도자 둘은 본격적인 사상적 갈등도 심했다. 부커 워싱턴의 경우 소위 '실력 개량주의'의 전형이라 할 만큼 상업과 교육을 통한 흑인들의 '실력 양성'을 추구했고 정치적 평등운동은 배격했던 반면, 두보이스[12] 같은 경우 말콤 엑스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사상적 대부라 부를 만큼 정치적, 민권 평등 투쟁 자체에 적극적이었으며, 사회주의를 비롯한 당대의 급진 좌파, 세계적 반제국주의 운동과도 연관이 깊었다.

두 사람은 묘한 부분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이기도 하는데, 엑스는 사생활이 깨끗했던 데 비해서 마틴 루터 킹은 간음 등 여자 관계에 대한 루머가 좀 있었던 편이다. 그래서 스파이크 리 감독영화 <말콤 X>에서는 엑스와 그 아내의 통화 내용을 도청하던 FBI 요원들이 킹 목사에 비하면 성인군자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부분이 있다. 마틴 루터 킹은 측근 및 자서전의 저자조차도 실드 쳐주지 못할 만큼 난잡한 성생활 및 불륜이 약점으로 지적되는 반면에 말콤 엑스는 평생 아내만을 사랑하였으며 불륜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환경에 있었음에도 단 한 차례의 추문에도 휩싸인 적이 없었다.

이런 부분 말고도 서로가 대상으로 했던 흑인 내부 집단 또한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킹 목사는 전통적인 대규모 농업 중심으로 먹고 살고, 노골적으로 같은 화장실, 식수대, 버스 좌석도 못 쓰게 하던 인종 차별 법안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남부의 흑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했으며, 그에 따라 그가 선택한 방식도 자연스럽게 여전히 남부에서 인종을 초월하여 짙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였다.

반면 말콤 X는 소수라지만 한창 미국의 공업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수 많은 흑인들을 끌어 모으며, 그중에서 적게나마 교육받은 중산층도 존재했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하긴 했지만 남부처럼 대놓고 같은 화장실도 못 쓰게 법으로 해놓지는 않았던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 북부의 도시 노동자 흑인들을 대상으로 당시 전 세계를 휩쓸던 좌파 혁명론과 접목된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사실 이렇기 때문에 양적인 면만 두고 킹 목사가 더 중요했다, 엑스가 더 중요했다 갑론을박하는 거 자체가 무의미한 게, 엑스가 기반으로 두고 활동한 세속화된 도시 프롤레타리아도 물론 중요한 사회 집단이긴 하지만 숫적으로 보면 흑인 대이동을 겪었어도 예나 지금이나 미국 흑인들이 많은 지방은 복음주의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남부이기 때문이다.

말콤 X와 마틴 루터 킹 비교 분석한 서적으로는 제임스 콘이라는 미국의 신학자가 지은 <말콤 엑스 VS 마틴 루터 킹>(원제: Martin & Malcolm & America)이 읽어볼 만하다. 킹과 말콤의 일생과 인권 운동을 함께 서술한 평전이라서 킹 목사와 엑스의 일생과 사상, 미국 흑인인권운동 이해에 도움이 된다.

또한 소설 뿌리의 작가이자 말콤 X의 자서전을 구술한 알렉스 헤일리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흥미있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당시 헤일리는 엑스의 측근으로 간주될 정도로 그와 가까운 사이였고, 인권 운동 관련 사안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만날 기회도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킹 목사는 헤일리를 만날 때마다 '말콤 형제가 나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고 물어보았다고 하며, 엑스 역시 헤일리가 킹 목사를 만나고 돌아오면 항상 '킹 목사가 나에 대해서 뭔가 한 이야기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알렉스 헤일리에 의하면 활동 후반기의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고 받고 있음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양 쪽 모두 상대방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킹 목사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에서 말콤 엑스에 대해서 그의 폭력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철학적 전제조건을 재평가하고 비폭력운동과 일반적인 백인들에 대한 경직적인 태도를 개선하던 중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고 끝내 유능한 지도자를 잃었다고 상당히 아쉽다는 표현을 했다.

둘은 죽음조차 3년의 차이는 있지만 암살로 같았다. 말콤이 4살이 더 많기에 둘 다 40세가 되기 직전에 죽었다.

일반적으로 마틴 루터킹은 비폭력적이고, 말콤 엑스는 폭력적이란 인식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틴 루터 킹은 유복한 집안에서 모범적인 성장기를 보냈으나 흑인민권운동에 뛰어든 후부터 독방에 투옥되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은 반면, 말콤 엑스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며 유년시절 감옥에 밥먹듯이 드나들었으나 흑인민권운동에 뛰어든 후부턴 단 한번도 투옥 혹은 체포된 적이 없었다.

 

 

....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암살되자 이에 대해 "자업자득"이란 식으로 발언했다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9][10] 논란이 되자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 일라이자 무하마드는 엑스에게 근신처분을 내렸고 이듬해 1964년 엑스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9]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 역사를 통틀어도 몇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대통령으로 흑인들의 사회 진출 허용도 대부분 그의 임기동안 이루어졌다. 말콤 X 눈에는 그냥 백인 대통령 A로 보였을지 모르나, 객관적으로 보면 거한 자책골이었던 셈이다.[10] 케네디 대통령은 아일랜드계로 아일랜드계의 이민사도 흑인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비참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만 하인인 계약제 하인의 형태로 비슷하게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WASP에게 하얀 흑인취급받으면서 천대받고 살았다. 이런 경솔한 발언은 서로 연합할 여지가 있는 집단과 대립하는 꼴이 된 것이다.

 

사실 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이고 엑스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 것에 대해서는 1. 무하마드가 엑스의 명성과 능력을 시기했다는 것과 2. 네이션 오브 이슬람이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무하마드가 탐탁치 않게 여겼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3. 무하마드의 도덕적 이중성, 특히 성적 문란 의혹에 대해 엑스가 실망했던 것 등 여러 원인이 겹쳐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무하마드의 아들 워리스 딘 모하메드(Warith Deen Mohammed, 1933–2008)가 엑스에게 그런 말을 했고, 무하마드 역시 공개석상에서 부하들에게 금욕을 강조하면서 뒤에서는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11]

탈퇴 후 말콤 엑스는 이슬람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중동 지역으로 메카 성지순례 여행을 떠났다. 성지순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자 종교적으로는 '성지의 수호자'인)이던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제다에서 만나 잠시 대담을 가지기도 했다. 파이살 왕 측에서 말콤을 국빈으로 지정했다고 하는데, 나세르바트당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범아랍 민족주의에 맞서 (사우디를 중심으로 하는) 범이슬람주의의 기치를 세우고자 했던 파이살 왕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어찌됐든 말콤은 이 여행으로 인해 종교신앙과 인권운동노선이 크게 바뀌었다. 사실 이전까지 그가 몸담고 있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이슬람교의 용어만 차용해 왔을 뿐 교리는 이슬람과는 큰 연관이 없었다. 종교보다는 차라리 SF 소설과의 연관점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으며, 흑인 우월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니파 정통 이슬람교'를 접하고 말콤 엑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스파이크 리의 영화에서 독백 형식으로 나오는 메카에서 쓴 편지에 따르면 평생 인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미국에서 살다가 정통 무슬림들이 종교, 언어, 인종을 넘어 같은 영적 체험을 나누는 메카에서 미국에서 봤던 어떤 백인 못지 않게 파란 눈, 하얀 피부를 가진 보스니아, 알바니아 등에서 온 유럽계 백인 무슬림들과 같이 식사하고 순례하며 인종 그 자체도 절대적이지 않고, 비록 무겁긴 하지만 인종의 굴레를 넘은 공통적인 인류애란 걸 제대로 느낀 모양. 백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이 섞인 무슬림과 함께 성지 메카를 여행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주장했던 '백인은 악마'라는 사상의 한계를 인정했다. 성지순례를 계기로 무슬림식 이름인 엘하지 말리크 엘샤바즈로 개명하고,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떠나 수니파 무슬림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말콤 엑스의 가족들은 '샤바즈'를 성으로 쓰고 있다.

다른 인권운동 단체와의 연대를 꾀했으며 도시 흑인 빈민들의 주택, 교육 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도 눈을 돌렸다. 또한 흑인들의 단결을 위해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결기구(OAAU)를 창설했으며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흑인의 동포애와 인종간 평화를 역설했고 백인의 박해로부터 적극적인 자기 방어를 주장했다. 킹 목사와 선거권 문제에서 연대하면서 그 유명한 "투표권 아니면 총알이다!"를 외친 것도 이 때이다.

그러나 말콤 엑스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비판에 그쳤을 뿐,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해 결과적으로 흑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총체적이고 대국적인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물론 흑인이슬람주의 운동의 순수성에 집착한 것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과격한 흑인우월주의의 씨앗은 말콤 엑스가 뿌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실 그의 인생 후반기에는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연대론과 포용론을 주창하기 시작하는 등 인권운동 노선에 변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그의 남은 생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거기에다가 말콤 엑스가 급진적인 운동을 전개한 이유도 흑인과의 공생을 거부하고 대화조차 차단하던 당시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 탓도 컸다. '평등하지만 다르게' 란 명목으로 미국 사회는 백인 사회와 흑인 사회를 오랜 시간동안 격리하고 분리시켰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사상과 인물들이 희박했던 탓에 결국 말콤 엑스의 폭력적이고 흑인우월주의적인 '혁명론'보다는 평화주의적이고 인종주의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에 집중했던 마틴 루터 킹의 '인권운동론'에 더 기울였다.

 

...

 

 

"I don't see any American dream, I see an American nightmare."
"나는 그 어떤 아메리칸 드림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메리칸 악몽만을 보았습니다."

킹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와 대비되는 "나는 오늘도 악몽을 꿉니다" 발언

 

 "Nobody can give you freedom. Nobody can give you equality or justice or anything. If you're a man, you take it."
"여러분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평등과 정의, 그 외 어떤 것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간이라면, 스스로 쟁취해야만 합니다."

 

 "기독교가 미국에서 이룬 가장 위대한 기적은 흑인들을 전혀 폭력적으로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2,300만의 흑인들이 압제자에 맞서 분연히 궐기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미친 생각이다. 지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원수 사랑을 실천하는 백인은 본 적이 없었다. 백인은 단지 마틴 루터 킹을 이용해서 백인 사회가 아닌, 흑인 사회에 비폭력을 조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지 말라.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라."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갑인공방(갑인미디어)/ 182쪽

 

 

"자신에게 굴욕을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주된 목표인 사람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또한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지 않는 자는 사람일 수가 없다. 흑인에게 스스로를 방어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지도자는 종족의 반역자이고, 흑인의 적인 백인의 도구가 틀림없다."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갑인공방(갑인미디어)/ 183~184쪽

 

 

"예수가 지금 여기 미국에 있었더라면 백인으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 백인은 압제자입니다. 그는 탄압받는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그는 비천한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그는 하찮은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무시받고 경멸 받는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이른바 미국의 흑인으로 왔을 것입니다!"

 

 

"나는 누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 비인간적인 대접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범죄라고 믿고 있다. 만일 기독교 철학이 그렇게 해석되고 간디의 철학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바라면, 나는 그것들을 범죄의 철학이라고 부르겠다."

 

The Ballot or the Bullet!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17]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또 하루를 빌렸구나 하고 생각한다. ...(중략)나는 아마도 '이슬람'의 일원에게, 또는 어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게, 아니면 그들에게 고용된 무지한 흑인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 나는 지금 매일 하루의 목숨을 빌리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백인들은 그들의 언론에서 나를 '증오'의 상징으로 이용했던 것처럼, 죽은 나를 이용할 것이다. 두고 보라. 나는 잘해야 '무책임한' 흑인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다. 하지만 백인들이 '책임감 있다'고 치는 '흑인지도자' 치고 흑인을 위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자는 없다. 나는 백인들이 나를 적대시하고 더 세차게 공격할 때마다 내가 미국의 흑인을 위해 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신념을 더욱 더 확고히 느낀다. 만일 내가 미국이라는 몸에서 '인종차별주의'라는 악성 종양을 도려내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죽을 수 있다면, 미약하나마 진리의 빛을 드러내고 죽을 수 있다면, 그때 모든 공로는 알라에게 돌려져야 하고, 오직 과오만이 나의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며 남긴 말.
(흑인 민권 운동에 같이 참여할 만한 백인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 혹시 존 브라운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몰라도."
(흑인에 도움된 백인이 정말 없냐는 질문에) "굳이 말하면 두 사람이 있는데, 히틀러스탈린이다."

이들이 벌인 제2차 세계 대전냉전에 의해 울며 겨자먹기로 백인들이 방위산업, 특히 사무직전문직에 흑인을 고용했다는 냉소이다. 할렘가의 식당주인, 하숙집 주인조차 백인이던 시절이었다.
"백인이 흑인에게 "나를 증오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강간범이 강간당한 사람에게, 또는 늑대에게 "나를 증오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우리의 선조가 못된 에게 물렸고 나 자신도 사악한 뱀에게 물려서 내 아이에게 뱀에게 물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데, 바로 그 뱀이란 놈이 나더러 증오를 가르치는 자라고 비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예 시절의 우리 선조들이 이른바 "흑백통합"을 주장했다면 아마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흑백분리"를 주장하자 백인들은 우리를 증오를 가르치는 파시스트라고 비난한다.

 

 

"오늘날 엉클 톰[19]은 머리에 터번을 두르지 않았다. 이 현대적인 20세기 엉클 톰은 이제 실크햇[20]을 쓰고 있다. 그는 옷도 잘 입고 교육도 많이 받았다. 세련된 교양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때때로 예일이나 하버드 악센트로 말을 한다. 교수님, 박사님, 판사님, 목사님이거나 무슨무슨 주교님에 박사님을 더할 수도 있다.[21] 그들은 흑인 몸뚱이에 백인 머리를 달아 놓은 친구들이다."

마틴 루터 킹 같은 중산층 흑인들 중심의 민권운동을 비판한 말이다.
"우리는 당신보다 더 단호하게 '격리'를 거부한다. '분리'와 '격리'는 명백히 다르다. '격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어디든 가는 곳마다 온통 '민권운동의 진전'이란 말을 떠들고 있다. 백인은 흑인들이 '할렐루야!'하고 소리쳐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400년 동안이나 백인은 우리의 등에 1피트 짜리 칼을 꽂아두었다가 이제 그 칼을 6인치 정도 빼내어 흔들어대고 있다.[22] 우리더러 감지덕지하라고? 어림없는 소리! 칼을 다 뽑아 낸다고 해도 상처가 남을 것인데!"
“I can’t turn around without hearing about some ‘civil rights advance’! White people seem to think the black ought to be shouting ‘hallelujah’! Four hundred years the white man has had his foot-long knife in the black man’s back – and now the white man starts to wiggle the knife out, maybe six inches! The black man’s supposed to be grateful? Why, if the white man jerked the knife out, it’s still going to leave a scar!”

 

 

 

"나는 과거 '양심적인 백인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대답한 것을 후회한다. 흑인 조직에 가담하고 싶어하는 백인들은 현실 도피로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면 안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양심을 증명해야 하는 곳은 흑인 사이에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에 사로잡힌 동료 백인 사회 속이다. 나는 양심적인 백인들에게 말한다. 우리 함께 일하자; 각자가 자신의 인종 속에서..." # 출처들
"나는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 왜냐하면 중국어는 장차 정치 세계에서 가장 유용한 언어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23]

 말콤 엑스가 살아서 활동했던 1960년대에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사회 전반이 완전히 마비되어 경제가 파탄 상태였다. 그런 상황의 중국을 보고서 장차 중국의 부흥을 미리 예견했으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식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간은 오늘날 피압박자의 편에 있다. 시간은 압박자를 반대한다. 진실은 오늘날 피압박자 쪽에 있다. 진실은 압박하는 자를 반대한다. 그 밖에 어느 것도 필요치 않다."
"식물이 무성해지려는 데에는 정글이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토양은 기름지고 기후도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정한 계절뿐만 아니라 일년 내내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권력은 결코 뒷걸음질을 하지 않는다. -오직 더 큰 권력으로 향할 뿐이다."
"태평하라, 예의바르라, 법을 준수하라,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 그러나, 누군가 너에게 손을 대거든 그를 무덤으로 보내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