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부국의 조건에 대한 단상 1

 


1. 국가 경제 개발의 성패는 지도자 및 사회구조에 달려 있다

 

한국인들은 지들 스스로의 머리로, 힘으로,

또는 시위 같은 곳에 나가서,

정치판이 바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별로 그렇지 않다.


사회를 바꾸는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지도자다.

지도자가 어떤 사회구조를 만드느냐 나름이다.

 

필리핀, 인도네시아보다 가난했던 1960년대의 한국이

오늘날 잘 살게된 것은 박정희 정부의 지도력 때문이지,

한국인들이 잘 나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덩샤오핑이 만든 중국의 경제성장도, 리콴유가 이끈 싱가포르의 번영도 마찬가지다.

마오쩌둥이나 사인방 같은 애들이 집권했으면 오늘날 중국의 경제성장은 없었고,

리콴유가 아닌 다른 사람이 싱가포르를 통치했다면 오늘날 아시아 최고의 부국인 싱가포르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인들이 가발공장 같은 곳에서 근면성실 열심히 일했다고 경제가 성장했다고 개소리는 말 그대로 개소리일 뿐이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안해서 몰락하고,

한국인들만 열심히 해서 경제개발에 성공했단 말인가?


그보다는 박정희 정부가 미래를 내다보고

재벌 주도의 수출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서 그런 것이다. 

지금이야 한국경제가 수출을 해서 먹고 사는 구조가 너무 당연하게 보이지만,

1960년대 말~1970년대 초반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1970년 미국은 포항제철 건설을 반대했고,

미국의 유력한 경제학자들이나 세계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심지어 한국의 경제부총리도 한국의 중화학 정책에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나 정주영, 박태준 같은 인간들의 선견지명과 무대뽀, 불도저 정신으로 말미암아 개혁은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경제의 성공 신화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하여, 프레이저 보고서도

제4차 경제개발 계획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은 독자적인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인정한 것이다.


미국의 지원으로 한국 경제가 급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박정희 정부가 다른 독재 국가의 지도자들에 비해 덜 부패했고,

(* 박정희가 국내외 기업으로부터 검은 돈을 받았으면 20%를 자기가 (선거자금용 등으로) 착복하고, 나머지 80%는 국가 경제개발에 쏟았다면,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같은 무능한 병싄색희들은 100% 자기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경제개발을 하더라도 재벌 주도의 중화학 육성정책 및 수출모델을 고안한 점,

새마을운동으로 도농간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던 점,

또 박정희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조건으로 미국의 경제, 군사 지원을 '전략적', '외교적'으로 얻어낸 점 등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무뇌아들처럼 단순히 박정희가 미국 지원으로 경제개발에 성공했다느니, 중화학 육성정책은 장면 정부 때부터 기획한 것이니 박정희는 한 게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식의 논리는 멍청하기 짝이 없다.




2. 자원이 많은 국가라고 경제부국이 되는 것은 아니며, 사회가 부패할수록 성장동력은 떨어진다


로마

로마의 난파선 숫자는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약 BC 27년경)
급격히 감소한다.


대기 중 납성분 역시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 감소한다.

납성분은 화폐유통이 얼마나 활발했나 측정하는 지표.
산업혁명 시대가 되어서야 납성분은 로마시절 전성기와 같은 수준으로 올라온다.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치세 때,
어떤 장인이 기존 유리의 단점을 극복한 잘 깨지지 않는 유리를 개발하자, 티베리우스는 그 장인을 살해해 신기술을 묻어버렸다.
황제가 보유했던 금과 은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것.

황제정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며,

대중들로 하여금 정치 참여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가면무도회: 서로 다른 사회적 계층이 함께 즐겼다.


코멘다 계약: 원거리 무역에서 귀족들이 상인들에 투자함.
귀족과 상인이 함께 부를 축적하는 구조.

13세기부터 콘스탄티토플, 크레타섬까지 확대된 베네치아 공화국.

 

1286년 베네치아의 정치구조에 변동이 일어난다.
4년 동안 의원을 지내면 자동으로 영구 의원이 되는 정치 구조가 만들어졌고,
대평의회 의원을 세습할 수 있게 되었다.

대평의회 봉쇄는 몇몇 가문에 공화국 정치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낳았고,
여기에 이름을 못 올린 가문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베네치아 경제의 몰락이 시작된다.


스페인 제국
이사벨 1세 시기인 1503년, 세비야 상무청을 설립함.

왕실이 식민지 무역을 독점함. (동인도회사로 민간에 위탁했던 네덜란드, 영국과 대비되는 부분.)
높은 세금 무역 몰리고, 무역거래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

 

스페인 추방령과 폐쇄적인 스페인 제국


단기적으로 보자면 가톨릭 단일신앙으로 국가 대통합을 이루고 국내 안정, 영토 확장과 자금 확보 등을 이룬 셈이나 장기적으론 유대인의 제거가 스페인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고도 본다. 국내 금융업이 통째로 날아갔으니 이걸 다른 자들이 커버했어야 하는데, 곧 신대륙 황금뽕을 빨게 되면서 굳이 대처를 안 하게 되었다. 쫒겨나간 금융업 전문가 유대인들은 스페인에 감정이 좋을 리 없었고, 그 상태로 증손자 펠리페 2세의 치세 시기까지 와버리면서 해외 영토가 급격히 발견되고, 이로 인해 유럽 각국은 전쟁과 파산이 줄지어 일어나면서 금융에 서툴렀던 나라들은 점차 그야말로 빚에 깔리게 된다.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게 된 손자인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겸임하면서 낭비가 극심했고, 엄청난 빚을 졌다. 증손자 펠리페 2세는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최전성기의 호시절을 누렸지만, 그때까지도 아메리카를 통해 확보한 그 엄청난 보유량에 비해 금과 은의 정밀한 제련법 등은 발달하지 않아 스페인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매우 투박하게 굴러갔다. 치러야 할 전쟁과 빚은 더 불어났고 펠리페 2세는 파산도 네 번이나 겪었다.[17] 그리고 당시 스페인 내에서 무어인 등 무슬림들은 농업과 제조업에 주로 종사했는데, 이사벨이 완료한 레콩키스타를 기조로 삼아 펠리페 2세 때까지도 끊임없이 이들을 탄압하고 쫓아내고 북아프리카 쪽의 혼란을 방조하면서 이후 결과적으로는 스페인 반도 내에선 농업-식량확보도 망하게 됐다. 당대엔 식민지로부터 풍부한 수입에 의존할 수 있었으나, 식민지를 잃었을 때의 본국엔 발전된 인프라가 부족하게 된다. 이사벨이 얻어낸 아메리카 등 머나먼 해외 식민지에 눈이 돌아간 이 후세들은, 가까운 지중해 근방의 이슬람 세력과는 영영 멀어졌고, 독실한 카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스페인의 이러한 통일성은 '유럽 최강자', '카톨릭 진영의 군주'로서의 자긍심에 힘입어 문화적 보수성, 폐쇄성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쉽게 요약해서 이사벨은 나라를 완성하고 부강하게 만들어 대제국의 기틀을 세웠지만, 동시에 나라의 근본적인 동력을 약화시키는 불씨를 남긴 왕이라는 모순적인 유산을 남긴 것이다. 한마디로 달도 차면 이지러지듯이, 그녀가 이룬 성공을 기반으로 오만해진 후세들이 영광은 영광대로 누리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 보완하지는 못해 그 영광의 이면이었던 단점도 그대로 끌고 가버린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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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 시기, 왕실의 탐욕에 의한 끊임없는 전쟁


1544년 스페인 vs 프랑스
1554년 프랑스
1566년 네덜란드
1571년 투르크 레판토해전
1588년 영국 무적함대


재정악화로 세금 걷었다.

펠리페 2세 4번의 파산선언
1557년, 1560년, 1575년, 15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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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내란과 대외전쟁으로 인하여 국고 탕진. 그러나 부왕에 비해 공격적인 침략전을 더 많이 수행하며 실속을 못 건졌다는 건 틀린 평가다. 펠리페 2세 시절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던 네덜란드 전역은 펠리페와 스페인 입장에서 보면 개신교 이단들이 적법한 군주의 통치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 진압 작전이었다. 도덕적인 평가는 어찌 보든간에 세상에 자국 반란 진압을 "침략전"으로 분류할 순 없다. 잉글랜드와의 전쟁도 본질은 잉글랜드 자체에 대한 침략이 아니라 네덜란드 반란을 적극 지원하는 적성 후원 세력 상대로 전쟁 벌인 거고, 실제 현장에선 정식 선전포고 하기 전 이미 네덜란드 현지에 잉글랜드군 수천이 돌아다니는 마당에 스페인이 선빵 때렸다고 볼 수 없다. 펠리페 2세 시기 스페인의 전쟁 중[24] 스페인이 전적으로 '침략'했다 할 수 있는 건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인데, 이것도 번짓수 맞지도 않는 현대 국민 국가의 관점이 아니라 당시 통용되는 유럽 왕실의 논리로는 정당히 본인이 계승한 왕위를 적성 세력들의 후원을 받는 경쟁 왕위 후보자 상대로 '수호'한 것이라 현대적인 관점에서 침략 전쟁이라 분류하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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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행정과 재정 문제에서도 펠리페 2세는 카톨릭 스페인을 폭정의 결정체로 묘사한 적국의 프로파간다와는 반대로 오히려 대단히 유연하면서도 실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애초에 당시 큰 시대적 배경 자체가 화약 무기와 성형 요새가 상징하는 근세의 군사혁명이 한창 물이 오르던 시절이었고, 그 와중 스페인은 네덜란드에서 지중해까지 전쟁이 끊이지 않다 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군비 폭등이 일어났는데, 뭐 크게 보면 제위 중 파산을 4번이나 했으니 애초에 못 메꾼거라고 할수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제대로 군비를 지불할 때 이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한 건 신대륙에서 나온 금은보화도 아니고, 바로 카스티야 내부 지자체들의 세금에서 나왔다. 그러나 카스티야 자체로 보면 예나 지금이나 척박한 토질과 각 지방을 연결해주는 적절한 강줄기의 부재로 인해 결코 부유하다고 보기 힘든 지방이었는데[41] 여기서 무슨 수로 그리 많은 세금을 확보했느냐 하니, 바로 기존 봉건 영주들과 도시에게 종속된 마을들에게 세금을 추가로 걷는 대신 기존 영주, 중심 도시에서 벗어나 지방 자치를 집행할 자치권을 매각하면서 마련한 세수이다.

18세기 합스부르크->보르본 왕조 교체기쯤 되면 나머지 스페인 제국 전반의 국운이 약해지면서 이 제도도 더 이상 잘라먹을 땅도, 이를 뒷받침할 인구도 안 남은 상태에서 행정 적체만 일으켜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이건 먼 훗날의 얘기고, 동시대로 보면 펠리페의 정책은 국가 재정도 충당하면서 부왕인 카를로스 시절땐 대규모 반란으로 왕권을 위협했던 대귀족, 대도시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약화시키고, 카스티야 농민들에겐 "자유를 주신 국왕폐하"께 감사하는 근왕 정서를 심어넣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았다. 이런 펠리페 시기의 각종 성공적인 행정 개혁 덕분에 16-17세기 카스티야는 유럽 전체를 들어 농민의 조세 분담률이 가장 심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1520년 코뮤네로 반란 이후로는 애초에 문제의 종류 자체가 다른 모리스코 반란 빼곤 큰 반란 한번 안 겪으며 안정적인 내치를 유지했다.

이 당시 스페인의 방대한 국력을 주적으로 맞서 싸웠던 잉글랜드인들의 인상이 그랬고, 후대에서도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왕권이 강력했던 나라로 착각하는데, 실상은 오히려 스페인은 프랑스, 잉글랜드와는 비교도 못 하고, 옆나라 포르투갈에 비해서도 전통적으로 왕권이 약한 편에 속했다. 이베리아 왕실 통합과 스페인 제국 성립 바로 전 시대인 카톨릭 공동왕 이전 15세기 카스티야 군주들은 애초에 각종 반란과 암살 시도, 위협에 바람 잘 날이 없는 약한 군주들이었고, 이사벨 여왕 시절 급격히 커진 왕권은 이를 뒷받침할 이사벨 개인의 카리스마가 사라지고 왕실 교체란 정치적 혼란이 터지자 일시적으로나마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왕위를 얻자마자 상실하게 할 뻔 했던 코뮤네로 반란이란 거대한 위기를 초래했다. 반란을 주도한 자치도시민들과 처음엔 방관하고 있었던 대귀족들 사이의 분열이란 의도하지 않았던 호재 덕분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겨우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정치 개혁 없이는 이런 불안 요소는 결코 사라질 수 없었는데 막상 그 반란을 초래한 카를로스 1세는 치세 내내 대외원정 다니느라 이를 해결하지 못했다. 프랑스, 잉글랜드와 달리 스페인에선 만지면 병이 낫는다니 뭐니 하는 왕의 손 같은 민간의 국왕 숭배적 전통도 없었고, 사회계약론과 저항권 담론의 이른 등장이 보여주듯 국왕의 권위는 법치를 통한 다양한 정파, 사회적 집단간의 이해관계 조절이란 역할에서 나왔지, 왕권 자체를 숭상하는 전통은 전무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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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영미권과 종교는 같아도 스페인의 적이란 건 매한가지였던 프랑스 학자들이 주도했던 전통적인 서양 사학계에서는 펠리페 2세를 스페인 제국의 몰락의 시초로 보았으나, 현대에 와서 이러한 관점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현대 학계에서는 '스페인의 몰락'이란 테제 자체가 도전을 받고 있고, 국제 열강이란 측면에 한정해서 '몰락'이란 모델을 계속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기점은 펠리페 2세보다 한두 세대 더 뒤로 본다. 제정적인 측면에서 펠리페 2세의 치세가 스페인의 약점을 부각시켰다 하더라도, 당장의 국력과 국제적 영향력으로 17세기 초반의 스페인은 100년 전보다 훨씬 강하면 강했지, 꿀릴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 자체가 군사혁명으로 인해 하루가 멀다고 폭등하는 전비와 루터파보다 한층 더 과격한 칼뱅주의가 대두하면서 유럽 전체의 정치 지형이 재편되어 가는 와중에 카를 5세 시절의 두루뭉술한 중세적 보편군주와 특정한 지정학적 기반 없이 전적인 동군연합만으로 운영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 제국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실제로 펠리페 2세 사후 계승한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카를로스 2세 같은 후기 합스부르크조 왕들은 아무리 봐도 능력상 영 좀 떨어지는[9] 군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 시절 마련된 전문화된 관료집단 중심 행정, 통치 체계는 한번도 붕괴한 적이 없다. 즉, 무능한 국왕들이 즉위했지만 통치시스템의 효율화로 강국으로써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10] 16-17세기 전성기 스페인 제국이 대내외적으로 전쟁과 적, 불만세력들이 끊임없었는데도 불구하고 2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서유럽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건 펠리페 2세 시절 완성된 거대한 세계제국을 통치할수 있는 행정체계의 역할이 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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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가 보는 스페인 제국 몰락의 원인

1. 왕실이 무역을 독점

2. 왕 (펠리페 2세)이 모든 행정 업무를 독점

3. 신대륙에서 오는 금, 은화는 물가상승만 부추기고, 실제 서민들을 위해 쓰여지지는 않음.

4. 과도한 전쟁과 채무. 유태인추방령으로 인해 돈을 빌릴만한 마땅한 구석도 없었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제치고 세계최대 경제대국이 되었던 것.


멕시코
멕시코는 석유생산량 7위, 은 1위, 형석 2위, 아연 8위의 자원대국.
그러나 공무원 뇌물 수수와 부패가 심각해, 청렴성이 OECD 최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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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텔멕스 민영화 후 카를로스 슬림이 인수.

가격은 비싸지고, 공중전화 보다 핸드폰 통화요금이 비싸졌다.

 

오늘날 멕시코의 통신설비 투자는 OECD 최하로

자주 끊겨지는 등 품질이 엉망이지만,
통신요금은 가장 비싸다.

 

멕시코 GDP 5-6% 이상 장악한 카를로스 슬림.
카를로스 슬림의 통신회사가 1~5위 통신회사들을 모두 장악.

 

베네수엘라 

3당이 힘을 합해 권력분배 및 견제를 약속. 이것이 폰토피호 체제.

그러나 점차 이해집단으로 변질.
석유 산업도 폰토피호 정당이 독점.
폰토히호 협약은 결국 AD와 COPEI 두 당만을 위했던 것.
두 당은 5년마다 번갈아가며 집권하도록 서로 약속.

1980년대 원유 가격 하락함.
세계 최고 수준의 원유 매장량에도 불구하고 부채 못 갚아 쩔쩔맨 베네수엘라.
170억 달러가 국외유출되고, 민중들 분노.
1989년 카라카소 민중봉기가 일어남.

군대 투입에 3000명의 시민이 사망.

무상의료, 무상주택, 석유 국영화의 포퓰리즘을 내걸고 대통령이 된 차베스.

지출은 늘렸으나, 세원은 급격히 감소해 베네수엘라 국가위기를 초래.


독일

29개 대기업과 360만개 중소기업이 공존.
1958년 설치된 카르텔청이 독과점을 강력하게 규제.

 

싱가포르
1960년대에 부패가 만연했던 싱가포르.

 

"부패방지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생존의 문제이다.
반부패정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굴복시켜야 한다."
- 리콴유


부패행위조사국 (CPIB)은 혐의가 있을 경우 영장없이 체포
모든 재산 몰수 가능.

뇌물받으면 징역형.
부패공직자 전재산 몰수함.

리콴유의 오른팔이었던 태 치앙완
2400만원 뇌물혐의로
자살.

그대신 싱가포르 공직자의 급여는 상당히 높은 편

(북한, 멕시코와 다르게 공직자의 급여가 높으니 부패가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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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큐의 내용 상당 부분은 개소리다.

 

싱가포는 리콴유 일가가 관리하는 독재국가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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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언론탄압과 인터넷 검열[편집]

싱가포르의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당한다.

정부가 무상으로 보급하는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되고 있으며, 리콴유 일가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게시물과 댓글이 올라오면 바로 조사나온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조사만 나오면 모르겠는데, 싱가포르의 많은 기업이 이 일가 소유이기 때문에, 만약 이 일가를 나쁘게 말했다가 찍히면, 본인 일자리를 잃거나 혹은 허위사실 유포 또는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한다.

여기에 언론기관에 대한 통제도 심해서 형식상 언론의 자유가 있으나 실제로는 없다. 예전 한국 군사독재 정권들과 북한, 중국처럼 무식하게 자기 욕했다고 잡아가서 때리고 고문하는 게 아니라, 명예훼손으로 고소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쓴다. 여기에 독재국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사법부의 독립성은 말뿐이며, 대부분 정부에 유리한 판결을 내기 때문에 거의 100% 패소한다. 그러니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란 실제로는 없는 셈이다.

패소한 자가 돈 안내고 배쨀까봐, 아예 언론사들은 미리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해 두고, 만약 정부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승소하면 그대로 이 보증금은 날아가고 다시 거액의 보증금을 채워야 한다. 안넣고 배째면 등록 취소. 또 사실 많은 언론기관이 국영 투자업체 테마섹 홀딩스가 대주주라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적 보도를 걸러낼 수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싱가포르의 언론자유지수는 2023년 기준으로 약 180여개 국 중에서 129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잘 사는 선진국치고는 꽤나 낮은 수치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렇게 리콴유 일가가 지배하는 싱가포르를 잘사는 북한이라고 혹평, 비난하기도 한다.

외부사이트 접속자체가 불가능한 북한이나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같은 대중적인 인터넷 사이트, 서비스도 거침없이 차단하는 중국과 달리 싱가포르에선 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언론매체에서도 외국의 민주화운동 관련 뉴스가 자주 보도되는 편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소국인데다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서방과 같이 행동을 하므로, 서방은 중국, 베트남, 북한과는 달리 싱가포르의 정치 체제나 반민주적인 행태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중국, 북한과 달리 유튜브나 트위터를 막지 않는다. 그러니까..

1) 서방권 전반은 싱가포르의 정치 체제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딱히 외부 인터넷이 위험하지 않다.

2) 반정부적인 주장을 올려봤자 나라가 좁기 때문에 금방 추적되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싱가포르에서는 중국, 북한 등과는 달리 구글, 유튜브를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싱가포르인들은 이런 데다가 정부 비판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극히 조심스러워 한다.

이렇게 싱가포르 국내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통제와 각종 소송 등을 통해서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국의 언론까지 교묘하게 입을 막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명예훼손은 자국 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전가의 보도로 쓰인다.

아니나 다를까 싱가포르에서 리콴유 사후 독재자라고 비판한 동영상을 올린 학생이 바로 체포되었다. 링크 그는 이 일로 2015년 5월에 4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출감 후 또 다시 리콴유를 비방하는 동영상을 올려 2016년 9월에 이번엔 6주 징역형과 2,000 싱가포르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출감 후 2017년 미국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해 받아들여졌다. 링크[62]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콴유가 수없이 많은 여러가지를 금지시키고 못하게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막아내지 못한 것도 있었는데... 다름아닌 마작이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어지간한 것들은 강요하고 금지할 수 있어도 마작은 금지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63]

T.S.J. 조지가 쓴 리콴유 전기에 의하면, 리콴유 시기에 싱가포르의 라디오, TV 뉴스는 교육 계획을 다룬 별개의 코너가 있던 것 외에는 항상 정부의 발표를 인용한 것만 방송할 수 있었으며, 싱가포르의 모든 언론사와 언론인은 매년 정부로부터 받는 면허를 갱신해야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치안판사에게는 신문사에 직접 들어가 조사를 할 수 있다는 특별 권한이 주어졌다.[64] 심지어 리콴유의 출판 담당 비서가 편집자들에게 직접 어떤 책을 출판할 수 있는가 없는가 여부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법에 의하면 검열을 받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출판물은 '초대장이나 명함, 계산서 서두나 편지지 서두'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리콴유는 지방 신문 기자들이 자신의 공개 연설을 취재할 수 없게 하는 등 자신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까지 통제를 가했으며, 외신 특파원들은 리콴유에게 호의적인 성향의 기자들만 선발되어 싱가포르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심지어 한 뉴욕 타임즈와 이코노미스트 소속 미국인 특파원은 원래 리콴유 정권에 호의적이었음에도 상술한 영국인 엠네스티 조사관 추방 문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거주지가 도청되고 언론인들의 모임에서 쫓겨난 후 싱가포르에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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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경제 성장의 허와 실[편집]

'싱가포르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아주 부자가 아닌 이상, 70살 먹은 노인들도 알바에 나서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는 식의 얘기가 나올 만큼 싱가포르는 복지 제도가 아주 미약하다. 다만 주택제도만큼은 거의 사회주의에 가깝게 장기임대를 보장하고 있다.

싱가포르에는 CPF(중앙연금준비기금)제도라는게 존재하는데 자신의 소득중 일정비율을 의무적으로 저축하는 개념이다. 즉 일종의 국민연금 제도로,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돈으로 노후를 편하게 보내도록 하자는게 기본 취지이고 싱가포르 정부에서는 이 CPF로 조성된 재원을 운용하여 매년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하지만 내 돈을 내 마음대로 못쓰게 하니 반발이 없을 수 가 없다.

이를 바탕으로 연금보험/의료보험으로 전용한다. 문제는 정말 싱가포르는 집/연금/의료 빼고는 어떠한 복지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저 세개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이고 뿐만아니라 사회적인 안전망 측면에서는 부실한 것이 맞다.

하지만 이는 싱가포르 내에는 사회적 안전망이 얼마나 사람들을 도태시키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고 리콴유가 특히나 이런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복지가 개선되길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철저한 엘리트주의로 상위 10%들의 능력에게 모든걸 투자해서 성장해온 나라가 싱가포르다. 따라서 계층 간 소득격차가 극심하기 때문에 지니계수는 칠레, 멕시코와 비슷한 수준으로 심각하고 빈곤율도 자그마치 28%나 된다.

그런데, 싱가포르도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한 나라이다보니 싱가포르인들은 연금재원이 장래에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고 그에 대한 비판여론도 존재한다. 이 저출산이 심한 이유 중의 하나는 큰 빈부격차로서, 이를 통해 보면 싱가포르의 문제는 2010년대의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50]

그렇지만 오늘날 싱가포르는 관광/물류 위주가 아닌 2차 산업 기반의 견고하고 건전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 20위 내에 드는 1인당 GDP, 2000년대 중후반까지 7%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했던 행정적 역량 등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아울러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공기업 역량과, 아시아 최대의 공업단지인 주롱공업단지, 싱가포르를 관광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국가주도하에 조성된 다양한 테마시설과 국가차원의 마케팅능력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말레이시아 역시 규모만 놓고보면 작은 나라가 아닌데 인도양을 걸쳐 물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토 최남단에 있는 테마섹(싱가포르)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옳았다. 말레이시아 전체가 못살아서 그렇지 축출 당시에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도시중 하나였다. 하지만 싱가포르 축출 이후 말레이시아에서는 탄중팔레파스를 주요 거점 항구로 키웠고 한국으로 치면 부산과 같은 위치로 만들었다.

물론 싱가포르의 경제력이 증가하면서 싱가포르에 인접하면서 동시에 탄중팔레파스와의 거리도 가까운 조호르바루가 부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수많은 인도네시아의 항구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가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큰 것은 그 나라의 인프라가 만든 힘이고 그 인프라를 만든 노력은 리콴유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국내의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은 "가난한 어촌을 세계적 선진국으로 키웠다"면서 리콴유의 독재를 옹호하는 면이 있는데,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우선 싱가포르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말라카 해협의 끝자락에 있기 때문에 중개무역에 최적화된 위치에 있으며, 물류수송로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상술했듯이 말레이시아 연방이 형성될 당시에도 다른 말레이 지역에 비해 부유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영제국은 집요하게 이곳을 노렸고, 결국 식민지로 먹어 삼킨 뒤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중개무역항이자 군항으로 집중개발하였다. 당장 2차대전 시기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영국의 이권을 수호하던 영국해군 동양함대의 근거지가 바로 싱가포르였으며 2차대전 시기 동남아시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본군 남방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싱가포르 점령이었다. 싱가포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패배하자 윈스턴 처칠 수상은 영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배라면서 한탄했다. 그만큼 싱가포르는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리콴유의 집권 훨씬 이전부터 중요했고, 번영하던 도시였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전술한 것처럼 리콴유의 집권 직후인 196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428$(2023년 환율로 4,439$)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대 아시아에서 잘 살았다고 잘못 알려진 필리핀[51]보다도 훨씬 높고 한창 성장가도를 달리던 일본[52]과도 별로 차이가 없었으며 홍콩[53]과도 사실상 완전히 똑같다. 게다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1960년 세계은행이 추산한 세계 1인당 GDP 평균[54]과 비교해도 그렇게까지 낮지는 않았고, 심지어 스페인[55] 포르투갈[56]보다도 높았다! 즉 싱가포르는 당대에도 이스라엘[57],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는 가장 잘 사는 국가 중 하나였던 셈이며, 세계 평균에 대입해 보면 오늘날 기준으로는 아르헨티나, 말레이시아, 멕시코급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58]

3.3. 우생학에 기반한 인구 정책[편집]

우리는 한 달에 200달러도 못 벌고 많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시킬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두 명 이상을 갖지 말라고 격려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우리 사회를 육체적, 지적, 문화적으로 빈혈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추세를 바로잡기 위한 첫 번째 잠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후회할 것이다.

리콴유가 1969년에 남긴 말.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높은 출산율이 개발도상국 경제에 부작용을 줄 것이라며 저출산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정책은 우생학 성향을 갖고 있었다.[59]

리콴유는 1970년부터 'Stop at Two' 캠페인을 개최해 둘째를 낳은 여성에게 불임 수술을 받을 것을 권유했고, 셋째와 넷째 자녀는 교육 과정에서도 차별을 받았으며, 자녀가 셋 이상인 부모도 혜택이 준 데다가 둘째 이상을 출사한 공무원들에게는 출산 휴가를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고, 아이를 많이 낳을수록 병원에서 청구하는 비용도 의도적으로 상승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리콴유는 불임 수술을 받은 여성들에게는 1만 달러의 보조금을 주는 나름의 당근 전략도 내세웠다.

불임 수술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행해졌는데, 리콴유는 이 정책들이 '무책임한 사회적 불량자들'이 더 많은 자녀를 낳으면 정부가 제공하는 더 많은 사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이 정책으로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972년의 3.04에서 1975년의 2.07로 대폭 낮아졌지만, 이후에도 리콴유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결혼하고 출산할 가능성이 낮다'는 추세를 더 심각하게 여기고 '대졸 남성이 교육 수준이 낮은 아내를 선호한다'는 것을 우려한 리콴유는[60] 1983년부터 '남자들이 결혼을 하더라도 자기보다 지적인 여성들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싱가포르 남성들에게 대졸 여성들과 결혼할 것을 장려했고, 리콴유 본인도, 그리고 아들인 리셴룽 총리도 굉장한 엘리트와 결혼했다. 또한 대졸 여성에게 자녀를 3~4명 이상을 낳을 것을 권장하며 이 기준을 충족하면 주거와 교육에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의 지성을 교육으로 극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어렵다는 사고에 근거해 결국 유전자를 잘 만나야한다는 이론에 입각하여 진행한 것이었으나, 이 정책이 싱가포르 내에서도 큰 비판을 받자 1985년에 이 정책에서 특히 논란이 된 부분들은 폐기되거나 수정되었고, 1986년에 이 캠페인은 취소되었다.[61]

이 정책은 훗날 저출산의 요인으로 평가받는 교육열을 건드리기 보다는 오히려 장려하는 정책이었기에 인적자원 투자의 효용성은 높인 대신 저출산 해결 정책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었던 데다가 정부가 가정이 해야 할 일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가족주의적 철학을 동아시아가 서구에 앞선 부분으로 평가하여 가정의 부담을 정부가 제대로 덜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는 한계점이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이 제도는 전술한 것처럼 오히려 대졸 이상의 여성, 다자녀를 둔 고학력 어머니들 사이에서 반발을 일으켰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들은 리콴유 재임 당시 꽤나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아시아에서 엘리트들의 집약도로만 놓고 보면 손꼽을 만한 나라가 된 배경에는 이러한 리콴유의 정책을 무시할 수 없다.

이후 바로 다음 해인 1987년에 리콴유는 'Have Three or More(당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캠페인을 실시하며 세번째 자녀를 둔 부모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셋째 아이의 병원비도 낮추는 등 규제를 완화하며 출산율을 늘리고자 했고, 이에 따라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986년의 1.43에서 1988년의 1.96으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이후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낮아져 2019년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14에 불과하다. 싱가포르 출산율에 대한 참고자료
 

 



미국

다큐에서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반트러스트법과, 윌리엄 태프트 시절 더 강력해진 반트러스트법, 그리고 우드로 윌슨의 '독점과의 전쟁'을 독점규제의 성공사례로 말하나, 이는 뭘 모르고 떠드는 소리다.

오늘날까지 미국 워싱턴 정계의 법안들은 대다수가 로비자금에 의존하고 있고,

반트러스트법 이후 록펠러의 석유회사는 오히려 주가가 급등해 록펠러 가문은 더욱 더 많은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다.

무엇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나 윌리엄 태프트는 로스차일드-모건 재벌의 하수인이었고, 우드로 윌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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