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1세가 '블러디 메리'라는 오명으로 불리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게 된 경위와 비슷하다; 즉, 역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후대의 해석, 평가, 창작에 의존한다
메리 1세는 개신교에 대한 박해 때문에 전통적으로 '블러디 메리'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 설명에 의하면, 메리가 국교를 가톨릭으로 되돌린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스른 것이며, 또한 펠리페 2세와의 부부동군연합은 스페인의 광신적 신앙에 잉글랜드를 무방비로 노출시켰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해석은 전통적으로 영국 사학계를 지배한 휘그 사관(Whig history)에 기반해있다. 휘그 사관은 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를 위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영국 역사를 바라보며 이의 원동력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로 해석한다. 스페인이 종교적 광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 메리 1세가 종교를 이유로 사형시킨 개신교 신자의 숫자(284명 처형, 34명 옥사)가 1534~1680년 사이에 종교를 이유로 사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숫자보다 많다는 점 정도가 그 근거로 제시될 수 있겠다. 휘그 사관에 기반한 메리 1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예로 들면 헨리 8세를 악당으로, 엘리자베스 1세를 운이 좋은 군주 정도로 평가한 찰스 디킨스마저 메리 1세를 폭군으로 평가했다. 1970년대에 쓰인 폴 존슨(Paul Johnson)의 명저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메리 여왕의 의지는 반가톨릭적 국민정서에 부딪혀 무너지고 말았다."
고 하였다.
4.2. 현대의 평가[편집]
The total import of the evidence of both rebellion and will-making is that Mary's Catholicism attracted more spontaneous support from the English than Edwardian Protestantism or that of the early reign of Elizabeth.
전체적인 반란과 유언서들의 증거들을 종합해볼때 메리의 가톨릭 신앙은 에드워드의 개신교 신앙이나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의 그것보다 더욱 자발적인 지원을 잉글랜드인들로부터 이끌어내었다.[36]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Ronald Hutton
the overall conclusion must still be that it was Mary’s Catholic Church that was the most popular among the English as a whole, and that had she reigned for even half as long as Elizabeth did – let alone had she ruled for as long, and produced a Catholic heir – then England would have been a Roman Catholic nation ever since.
전체적인 결론은, 잉글랜드인에게 전체적으로 가장 인기 있던 건 메리의 가톨릭 교회라는 것이며, 만약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절반 기간만 다스렸어도 ㅡ 그녀가 치세 동안 가톨릭 상속자를 낳았을지를 논외로 하더라도 ㅡ 잉글랜드는 계속해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남았으리라는 것이다.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Ronald Hutton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에서 메리 1세에 대한 휘그 사관적 해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의 기반이 된 휘그 사관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련의 비판으로 사실상 학계에서 퇴출되었으며, 현재 학계에서 결정론적 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까지 쓰이는 실정이다. 물론 학계를 벗어난다면 메리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폴 존슨은 대중 역사가이지 역사학자가 아니며, 소설가 찰스 디킨스 역시도 역사학자는 아니다.
학자들은 각자의 문화적 편견을 부지불식간에 객관화하여 잉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승리는 불가피했고, 1550년대에 반전을 꾀한 메리 튜더의 시도는 역사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치는, 실패하기 마련인 시도였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메리의 치세에 장기적으로 가톨릭교회를 되살릴 토대가 놓였다는 주장, 잉글랜드가 훗날 신교 국가가 된 것은 잉글랜드인의 종교적 DNA가 아니라 여왕의 때 이른 죽음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피터 마셜, 《종교개혁》中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었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메리를 역사 앞의 반동으로 보는 시각은 근래의 사학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Susan Doran&Thomas S. Freeman가 공동으로 편집하고 여러 학자들이[37] 공동으로 저술한 《Mary Tudor: Old and New Perspectives》의 소개글에서도 Bloody Mary는 신화임을 명시하고 있다.
Mary Tudor, England's first sovereign queen, is arguably also England's most vilified and misrepresented monarch. For centuries, she has been branded in popular and academic works as a vicious failure and superstitious tyrant. Infamous for burning hundreds of her subjects at the stake in a futile attempt to undo the English Reformation and restore Catholicism in England, she is widely remembered today as 'Bloody Mary'. In this volume, an outstanding team of international scholars trace and analyse the growth of the Bloody Mary myth, from the time of Elizabeth I through to the present day. Detailing the political, religious and gender assumptions on which the myth is based, they also attempt to recover the 'real' Mary - an educated, pragmatic and resourceful queen - underneath the myth of the villainous tyrant. Based on the very latest research, this book offers a truly revisionist and uniquely balanced portrait of Mary Tudor.
잉글랜드의 첫 여왕 메리 튜더는 또한 확실히 가장 비난받고 잘못 표현되는 잉글랜드 군주일 것이다. 지난 수세기동안, 그녀는 대중 서적에서도 학술 서적에서도 사악한 실패와 미신적 폭군으로 낙인찍혔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철회하고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앙을 복구하려는 헛된 시도에서 수백의 신민을 화형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은 그녀는 '블러디 메리'로 오늘날 널리 기억된다. 이 책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훌륭한 언어로 블러디 메리 신화의 성장을 추적하고 분석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이 신화가 근거하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성(gender)적 억측을 설명하면서, 그들(학자들)은 악랄한 폭군 이면에 있는 교양 있고 실리적이며 영리한 여왕인 "진짜 메리"를 복구하려 시도한다. 최신 연구에 근거하여, 이 책은 진실로 재평가되고 전례없이 균형잡힌 메리 튜더의 그림을 제공한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 때는 곧바로 개신교화를 추구할 만큼 개신교의 기반이 튼튼하지가 않았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메리 1세가 즉위했을 때, 잉글랜드에서 스스로를 프로테스탄트라고 여기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 프로테스탄트 비율이 가장 높은 런던과 남부 잉글랜드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메리 1세 치세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따라서 메리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 초의 종파 국가(confessional state)는 본질적으로 한 국가에서 두 종파가 공존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고,[38] 엘리자베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프로테스탄트화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엘리자베스 즉위 이후, 메리 1세가 임명한 신학 교수들과 각 사목구 사제들을 점차 프로테스탄트로 교체했는데, 이것 자체가 장기적인 프로테스탄트화 정책이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해 대중들의 최초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Peter Cunich 교수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수도원 폐쇄 및 옛 전례의 변화[39]는 대중들에게 상당한 상실감을 남겼다. 이 영적 공허감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대체하기까지는 수십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1,000년 가까이 믿어온 종교를 하루아침에 바꾸라고 한다면 그게 그 시대에 될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가 다소 온건한 방향으로 종교정책을 세운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특별히 그가 관용적인 성격이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온건한 방향'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즉위 초창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재위 10년쯤이 넘었을 때, 가톨릭 세력이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대대적인 학살로 답했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그 지역 민중들에게까지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700명 이상이 처형당했고, 당시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교수형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메리보다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덜 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학살의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주장이다(K. Kesserling, 《Northern Rebellion》, 2007). 또한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척장분지형을 허가하고, 가톨릭 사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요크의 가톨릭 신자 여성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등[40] 처형의 잔인성 면에서는 메리 시대의 화형보다 하등 나을 게 없었다. 블러디 엘리자베스
메리 1세의 종교 정책의 '잔인성'이나, 당대 잉글랜드인들이 불만을 가졌다는 후대 개신교 사가들의 서술이 크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제프리 파커 교수를 비롯한 많은 현대 학자들은 메리 1세의 가톨릭 부흥책은 많은 호응을 받은 정책이었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실패한 것은 오로지 여왕의 때이른 죽음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종교 다툼을 넘어 반역행위는 왕이 명군이나 성군이었어도 반역자에게는 가혹하게 다루었으며, 반역자에 대한 가혹한 숙청행위는 꼭 메리 1세만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헨리 8세 시대에도 수도원 해체에 반발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도 반가톨릭 정책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지만, 대신 많은 개신교도들이 대륙(유럽)으로 망명을 했는데 헨리 8세 시절 정치적으로만 헨리 8세를 인정하면 그다지 이견이 없었던 가톨릭교회와는 대비된다(물론 헨리 8세 이후에는 에드워드 6세나 엘리자베스 1세가 강경한 개신교 노선을 취하면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대륙으로 망명해야 했다).
또한 눈에 띄는 치적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우선 재정 확대를 위해 교역을 장려했으며, 화폐 개혁 정책을 입안했다(짧은 치세로 인해 그녀의 죽음 이전에 시행되지는 못했다). 흔히 영국이 세계 곳곳에 탐험가들을 보내 교역로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 엘리자베스 1세 때로 알려져 있으나, 이 역시 메리 1세 때 시작된 정책이었다. 또한 헨리 8세 이후로 자금 부족으로 인해 쇠락해가던 잉글랜드 해군을 재건한 것도 메리 1세의 업적이다. 제프리 파커 교수에 따르면, 이 정책은 부군이던 펠리페 2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
또한 잉글랜드가 이후 개신교 국가가 된 탓에,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저지른 대량 학살(특히 아일랜드에서의)이 메리의 처형보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마을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지는 사적 제재와, 군대를 동원한 대규모 학살[41]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도 억지다.
현대 역사학계는 메리 1세에 대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중립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Susan Doran and Thomas S. Freeman (eds.) 《Mary Tudor: Old and New Perspectives》 (London, 2011)와 같은 책들에서 메리 1세에 대한 최근 역사학계의 관점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메리 1세에 대해 현대 역사학자들은, "흔히 생각하던 것보다 덜 광신적이었고, 더 유능한 군주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메리는 신하나 시녀들, 인민(people, 라틴어로는 Populus)들에게 매우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즉위할 당시만 해도 살해 위협을 피해 런던에서 도망쳤다가 다시 민중의 지지로 런던으로 재입성한 걸 보면, 일반 대중들의 충성도도 엄청나게 높았다. 즉위 이후 다시 터진 반란 때도 펠리페 2세와의 결혼 문제로 냉담했던 런던 시민들 앞에서 호소하여 수비대를 구축해 반란을 진압하는 등 민심이 그녀를 외면하지는 않았고,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보수적 성공회 신자들(반쯤은 가톨릭 신자)은 그녀에게 최소한 미온적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윌리엄 세실을 비롯한 소수의 극렬 개신교도들만이 메리를 적극적으로 비토했으나, 그 세력도 미약해서 반란은 계속 진압되었다. 이는 메리가 헨리 8세의 적장녀이자 모계 역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트라스타마라 왕가 출신으로, 헨리 8세의 자식들 중 가장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라서 정통성이 강했던 점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당시 메리를 제외하면 더 나은 왕위계승 후보도 없었다. 메리가 아니면 다음 순위 계승자로 엘리자베스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머니 앤 불린이 (누명이나마) 간통죄를 짓고 사형당했다는 정통성 문제가 있었다.
전왕 헨리 8세나, 후임 엘리자베스 1세나 당시 가톨릭 vs 개신교 양극화의 구도로 치닫는 유럽의 국제 관계에서 로마와 스페인, 독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국익을 챙긴 반면, 그 사이에 낀 메리 혼자 가톨릭으로 돌아서 친가톨릭의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이 점이 후대 역사학자들과 개신교인들에게는 영국 외교사의 '정상적' 흐름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여져 까였다. 이것은 20세기 초반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휘그 사관의 영향인데, 이 관점은 영국의 개신교화를 역사의 정상적인 흐름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에서 이런 결정론적 사관은 통하지 않고, 이 휘그 사관의 극복이 메리 1세 치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열었다.
메리 1세는 그렇게 나쁜 군주도 아니었고, 정치적으로도 외교적인 측면만 제외하면 딱히 처참하게 실패한 것도 아니다. '블러디 메리'라고 할 만큼 잔학하고 사람을 많이 죽인 무시무시한 폭군은 확실히 아니었으며, 보수적이었던 가톨릭을 따르긴 했지만 그렇게 비평받아 마땅한 인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의 국왕 치고는 너그러웠으며 백성들에게도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했다. '찬탈자' 제인 그레이를 살려주려고 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형에 소극적인 편이었으며, 고문을 많이 활용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처럼 고문이 횡행했거나 귀족들이 음모에 말려 희생되는 일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백성에게 관대했던 면모는 동생이자 후계자인 엘리자베스 1세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마 메리 1세의 이런 통치 면모를 보고 배웠을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제인 그레이는 불과 16세의 어린 소녀였고, 메리 자신의 가까운 친척이었으며(5촌 조카), 권력에 눈이 먼 막장 부모에게 이용당해 강제로 왕으로 옹립된 입장이었다.[42] 메리 역시 막장 아버지 헨리 그레이 때문에 불행한 시절을 보냈던 만큼 제인에게 동정심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메리는 제인을 살려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는데,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주겠다"고 권하거나 임산부를 처형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법을 이용해 보려고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종 제안은 신실한 개신교도였던 제인 자신이 거절했고, 남편과 사이가 나빴는데다 오랫동안 따로 수감되어 있었던 만큼 임신한 상태도 아니었으며, '살려두면 반란의 불씨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결국은 제인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처지가 안쓰러웠던지라, 메리가 제인의 처형을 감독하도록 보낸 신하들마저 제인을 안타깝게 여겼다고.[43]
역사적 연구 성과들이 보다 축적되면서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의 위상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표면적으로 강력해 보이는 왕권은 항구적인 재정적 기반이나 인적 기반이 허약했고,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무모하거나 과잉 반응으로 전란 및 재정 소모를 자초했다는 비판들이다.
메리의 숙청을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자행된 한풀이'라고 보는 견해는 16~17세기의 유럽 정치역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17세기까지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반란 세력과 국가 양쪽 모두에게 이용된, 막강한 것이었고, 종교적 탄압은 정치에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메리 1세의 여왕 즉위 당시 아일랜드는 가톨릭, 잉글랜드와 런던은 성공회로 칼같이 나뉘지 않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메리 1세 즉위시 잉글랜드 인구는 여전히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인구는 가장 강성한 런던에서도 대략 3분의 1로 추정되며[44], 켄트 지역에서도 개신교의 위치는 잘해야 상당한 규모의 소수파(significant minority)였다. 아직 성공회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헨리 8세가 국가 재정 마련을 위해 매각한 수도원 토지를 구입한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국가교회인 성공회를 지지했지만, 인클로저 운동의 고급기술인 섬유산업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발전하면서 양모 생산을 위한 토지로 용도가 변경되는 산업 변화의 진행[45]으로 농사를 짓던 땅을 잃고 수도원으로부터 구빈 등의 혜택을 받던 민중들 입장[46]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메리 1세 즉위 당시의 잉글랜드는 가톨릭 국가였다는게 현 학계의 중론이라는 점이다. 헨리 8세 말년에 벌어진 '은총의 순례' 같은 대규모 반란은 당시 전반적인 민심이 헨리 8세의 개혁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최근의 연구들은 중세 말 잉글랜드의 가톨릭교회가 필연적인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만큼 부패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47].
그리고 블러디 메리론을 미는 쪽에서는 종교를 이유로 처형당한 숫자가 엘리자베스쪽이 훨씬 적다면서 옹호하는데, 당대 잉글랜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평가이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신자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다만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신교도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보다는 '반역죄'를 공식적인 처형 이유로 들곤 했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 中[48]
즉 공식적으로 이단 혐의에 의해 처형받은 숫자를 가지고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고 보는 것은 말도 안되는 혐의이다. 이 논리를 똑같이 적용시킨다면, Ronald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49] 즉 '공식적인' 이단혐의로 몇명이 처형받았는지, '공식적인' 종교 슬로건으로 몇건의 반란이 일어났는지를 거론하며,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실질적으로 군주들의 신앙에 의해 몇명이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는지는 여러 논란이 있으나,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근거는 없다. 오히러 Hutton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처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지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음을 지적한다.[50]
The regimes of Henry VIII, Edward VI, Elizabeth and James I all put Protestants to death as well, for beliefs that were more radical than those permitted by the established Church of the time. In addition, Elizabeth executed almost 200 Catholics, in theory for treason but actually just for attempting to practise their religion. The executions that followed the rebellion of the northern earls add another couple of hundred to that figure. In the following century, the government of Charles II engaged in spurts of persecution in which anybody who met to worship outside the Church of England could be imprisoned. Over 400 Quakers, let alone Presbyterians, Baptists, Independents and other kinds of Protestant dissenter died in confinement, most because of the conditions in which they were held. It is a matter for personal taste whether readers would prefer this squalid and lingering end to a few minutes of agony in the middle of a bonfire; to those who do, it is Charles, the so-called Merry Monarch, who should perhaps be remembered as the greatest religious persecutor in English history.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또한 개신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당대 국교회가 허용하던 것보다 더 급진적인 믿음을 이유로.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2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이론상으론 반역죄이지만 실제로는 단지 가톨릭 신심 행위를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별개로 북부 백작들의 반란에 이어 일어난 처형 건수 수백명이 있다. 이후의 세기에, 찰스 2세의 정부는 누구든지 잉글랜드 국교회 외부의 예배에 참석하면 구금했다. 장로교회, 침례교회, 독립교회, 기타 개신교 내부의 [국교회] 반대자를 논외로 하더라도 400명을 넘는 퀘이커 신자들이 옥사했다. 주로 그들이 구금된 환경 때문이었다. 독자들이 더럽고 질질 끄는 최후가 모닥불에서의 몇분보다 더 괜찮다고 여길지는 선호의 문제다. 그렇다는 사람들에게는, 소위 'Merry Monarch'라 불리는 찰스 2세야말로 아마도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박해자로 기억될 것이다.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Ronald Hutton
제프리 파커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메리 1세와 펠리페 2세의 가톨릭 부흥 계획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메리 1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잉글랜드는 확고히 가톨릭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보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 이후 가톨릭에 대해 잔혹한 탄압을 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주장은 헨리 8세 시기와 엘리자베스 시기 종교개혁으로 순식간에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에서 벗어난 근거가 되기도 한다. Peter Cunich는 [51] 대중들이 느낀 상실감과 옛 전례에 대한 향수, 영적 공허감이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교리와 예정설 등으로 채워지기까지는 수십 년 세월이 걸렸음을 지적한다. 잉글랜드의 개신교화는 대단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메리는 단명하고 엘리자베스는 장수한 것이 잉글랜드가 성공회 국가가 된 주요 요인이다.
종교 외의 영역에서 메리의 가장 큰 업적은 헨리 8세 말년과 에드워드 6세 시대를 거치면서 엉망진창이 된 재정의 건전성을 회복한 것이다. 헨리 8세의 경우 수도원을 털어서 자금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이를 대외전쟁에서 탕진했고, 에드워드 6세 치세에 서머셋 공작은 이러한 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메리는 재정기구의 간소화를 실시하여, 헨리 8세가 남겨놓은 정부 부처들을 통합하고 재조직했다. 잉글랜드 왕실의 재정기구는 장미전쟁 당시 만들어진 임시 체제의 상설화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메리는 이 상황을 종식시켰고, 관세를 올려 수입원을 얻었으며 의회의 동의까지 얻어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늘어난 수입과 개선된 신용을 물려주는데 성공했다.
또한 부부 동군연합에 대한 무지 때문에 마치 메리가 펠리페를 위해 국익이고 뭐고 다 포기했다는 식으로 인식되고는 하지만, 메리의 결혼협상은 오히려 철저히 잉글랜드에 유리한 쪽으로 마무리되었다[52].
또한 메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런던 시민들은 횃불을 들고 나와 축제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메리 사후 잉글랜드인들은
"저 양반이 잉글랜드에 자주 오지 않는 바람에, 폐하께서 상심하여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다."
라며 펠리페 2세를 원망하기도 했다. 메리 역시도 현실을 살아간 정치가이고, 지지자와 비판자가 모두 있었다. 단편적인 일화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짜깁기를 한다면, 1603년 엘리자베스의 사망 당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53] 등만 짜깁기해도 '블러디 메리' 이야기와 비슷하게 '블러디 엘리자베스'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또한 메리의 시대에 스페인의 신앙이 광신적이었다는 말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반박이 가능하다.
Helen Rawlings T...
여기서는 Helen Rawlings의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표를 인용했다. <1540~1700 종교재판 통계>를 보면, 루터교, 이슬람교, 유대교, 유혹, 중혼, 교사죄, 미신 등등 다 합쳐서 1,604명이 종교재판으로 죽었고, 그 중 778명이 인형이었으며 826명이 사람이었다. 물론 스페인 종교재판이 처음에는 중구난방이었고 그래서 사형 건수가 상당히 발생했으며, Rawlings는 같은 저서에서 (재판이 처음 시작된 1481년부터) 1530년까지 사망자를 많게 잡아 2,000명이라고 추산했다. 그리고 사망자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유대인 출신 개종자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이 체계화된 시기, 그러니까 표에서 보는 통계의 시기이다. 그러나 최소한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시대의 에스파냐가 "그 나라 군주와 부부동군연합을 맺으면 광신도가 되는 나라"로 취급될 이유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가 아니라 대중역사가이긴 하지만, 폴 존슨(Paul Johnson)의 《기독교의 역사》에 의하면 1590년부터 90년간 스코틀랜드에서 마녀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사람은 4,400명으로 에스파냐보다 훨씬 심했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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