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탄생의 ‘보이지 않은 손’은 영국인 마약·무기 밀매업자였다[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국제유태자본론의 인드라가 최초로 제기하고, 아로가 훨씬 더 내용을 보강한지 거의 8여년이 지나고 나온 뻔한 내용이라 식상하긴 하지만... 이런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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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현 야마구치현) 출신 5인의 영국 유학생. 왼쪽부터 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야마오 요조, 이토 히로부미 [출처 야마구치현 관광연맹]





19세기 중·후반 영국의 아편 밀매업자들이 청 왕조를 와해시키고 일본에 진출하여 ‘죽음의 상인’으로 불리는 무기 중개상 역할을 하면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동아시아 역사가 있다. 이들은 존왕양이와 막부 타도를 기치로 내건 소장파 혁명가들에게 함선과 최신 무기를 공급하여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메이지정권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번 회에서는 영국인 밀매업자들이 주일영국공사와 교감하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혁명을 지원한 배경과 내막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아편전쟁 원인 제공자, 자딘 메디슨 상회

영국 식민지 진출의 첨병인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로 근무하던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 윌리엄 자딘과 무역업자 제임스 메디슨은 1832년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거점을 마련하여 청나라를 상대로 인도산 아편 밀매업을 시작했다. 회사 이름은 각자의 이름을 따서 ‘자딘 메디슨 상회’라고 지었다.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막대한 양의 아편을 비밀창고에 쌓아두고 무장 쾌속선을 띄워 중국 해안으로 운반한 뒤 중국인 밀수업자들에게 팔아넘겼다. 이로 인해 1840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아편전쟁이 촉발된다. 자딘 메디슨 상회는 아편 밀매를 기반으로 19세기 중반 동아시아 최대 기업으로 떠오른다.

메이지 신정부군과 도쿠가와 구막부군 사이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 도바후시미 전투
[출처 야후재팬 화상]


유망 청년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미래 인맥 구축

도쿠가와 막부는 1858년에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며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 조약에 근거해서 막부는 이듬해인 1859년에 요코하마, 나가사키, 하코다테를 차례로 개항했다. 이에 자딘 메디슨 상회 본사는 중국 상하이지점에서 근무하던 토머스 글로버를 나가사키에 파견하여 일본 시장 공략의 임무를 맡겼다. 그가 입국한 1860년대 초반의 일본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조슈번 출신을 중심으로 한 개국 반대파들은 전면에 존왕양이를 기치로 내세우며 조약 반대 투쟁에 나섰고, 그 선두에는 고메이 천황이 섰다. 막부와의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국론은 반으로 갈라졌고, 외국인에 대한 테러도 빈발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글로버는 일본 진출 초기 일본 차를 매입하는 등 몇 가지 사업을 시도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결국 회사에서 독립하여 ‘글로버상회’를 설립하고 함선과 무기 중개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나가사키에서 무기 중개상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특히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의 지도급 인사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아나갔다. 그는 유망한 청년들을 발굴해 영국으로 유학시키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1863년 자딘 메디슨 상회 본사의 협조를 얻어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출신 청년 5명을 영국으로 밀항시켜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대학(UCL)으로 유학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놀랍게도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은 불과 몇 개월 전 에도(현 도쿄)에 있는 영국공사관에 뛰어들어 화약에 불을 붙여서 건물을 전소시킨 극렬 테러리스트 방화범들이었다.

1865년에는 고다이 도모아쓰를 비롯한 사쓰마번 청년 지사 19명도 같은 방식으로 영국으로 보내 편의를 봐줬다. 이러한 글로버의 배후에는 영국까지의 도항과 유학 알선 그리고 체제 비용을 아낌없이 지원한 자딘 메디슨 상회가 있었다. 이들 유학생 중 한 명인 이토 히로부미는 훗날 메이지 신정부의 초대 총리가 되자 자신의 영국 유학 경험을 살려서 일본의 헌법 체제를 영국식 모델로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제1호 영국 장학생’이라고 부를 만하다. 또한 해외 인맥을 길러내기 위해 대영제국이 기울인 노력과 저력이 돋보인다.

영국공사의 사쓰마번 공식 방문

글로버는 1866년 7월 영국 공사 파크스가 사쓰마번을 공식적으로 방문하도록 주선하고 그 일행을 수행했다. 막부 측과 힘겨루기를 벌이던 사쓰마번에 일국을 대표하는 영국 공사가 공식 방문한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로, 영국이 암묵적으로 반막부 세력을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 파장은 컸다.

파크스 공사는 체류 기간 동안 사쓰마번의 맹주 시마즈 히사미츠와 그의 최측근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을 계기로 사쓰마와 영국의 관계는 한층 긴밀해졌다. 글로버는 훗날 “만약 그때 파크스가 사쓰마와 조슈 편에 서지 않았더라면 왕정복고에 차질이 생겨 내란 수습이 조기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08년 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메이지 정부로부터 훈2등 욱일중광장을 수여받는다.

메이지유신 탄생에 기여한 나가사키의 무기상인 글로버 [출처 야후재팬 화상]


무기 거래의 막후 큰 손, 자딘 메디슨상회

그동안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던 막부와 사쓰마번 사이가 틀어진 결정적인 계기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변심이었다. 사쓰마번의 맹주 시마즈 히사미츠는 천황과 막부가 함께 참여하는 체제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조건부로 막부를 지원해 왔으나 막부 측이 이를 뒤집고 권력을 독점하려고 하자 심한 배신감을 느껴 도쿠가와 막부 타도로 방침을 바꾸게 된다.

조슈번은 이틈을 노려 사쓰마번에 접근해 사쓰마 명의로 무기와 함선을 구매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뒤이어 조슈번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직접 사쓰마를 방문했다. 사쓰마번은 조슈번으로부터 쌀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무기를 조달해 주기로 약속했다. 이로 인해 그동안 반목하던 양측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때 무기를 공급했던 인물이 바로 글로버였다. 사쓰마번의 요청을 받은 그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년)이 종결되면서 중국 상하이 시장으로 흘러들어온 미국의 최신식 소총 약 7천 정과 군함을 조슈번에 판매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막부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 때 사용한 무기 탄약 함선의 70%는 글로버가 조달한 것이었다. 막후에서 이 거래에 개입한 큰 손은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자딘 메디슨 상회였고 글로버는 그의 하수인이었다.

사쓰마번의 무기 공급을 계기로 상호 신뢰가 굳어지자 조슈번은 기도 다카요시를 대표로 교토의 사쓰마 관저에 파견했다. 그는 사쓰마번 측의 대표 고마쓰 다테와키와 회담을 갖고 도쿠가와 막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자는데 합의했는데 이것이 바로 ‘삿초동맹(薩長同盟)이다.

이때부터 막부는 급격하게 힘을 잃었고, 결국 쇼군 요시노부는 모든 관직을 내려놓겠다는 선언(대정봉환, 大政奉還)을 하면서 260여 년간의 도쿠가와 막부 체제는 막을 내렸다. 이로써 정국은 일거에 왕정복고와 메이지 정부 수립을 향해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일본의 메이지유신 탄생은 사쓰마번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어온 영국인 글로버의 무기 공급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글로버의 배후에서 ‘보이지 않은 손’으로 작용한 영국의 아편과 무기 밀매업자 자딘 메디슨 상회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번 회에서는 서구 열강의 관점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붕괴 원인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활약상만 부각되어 온 그동안의 일본식 역사와는 다른 해석이 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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