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89년에 송태종은 일본 천황의 황조가 여태까지 바뀐 적이 없고 벼슬도 세습됨을 감탄했다; 이미 일본 열도는 그 때부터 갈라파고스화되어 있었던 것; 호사카 유지의 견해에 따르면, 일본 천황가의 역사는 짧게 잡아도 무려 1,500년이다; 아베 신조가 자랑했듯이, 영국 왕가보다도 그 역사가 훨씬 길고, 전세계 어떤 왕가보다도 역사가 길다; 다만, 음모론자 인드라는 일본 천황의 족보를 남북조시대 (1336년~1392년) 이후 개족보로 보고 메이지 덴노 대역설을 믿긴 하지만; 최익현과 안중근도 메이지 덴노 대역설을 믿고 그 책임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린 바 있다
- 상이 그 국왕이 하나의 성으로 전해 이어지고[38]신하도 모두 세습함을 듣고 (이것으로) 밀마암아 탄식하며 재상[39]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들은 섬오랑캐일 뿐인데 도리어 임금의 자리가 세습됨이 멀고 오래며 그 신하도 또한 이어지며 세습되니 끊어지지 않으니 이것은 아마도 옛날의 도요. 중국은 당나라 끝의 난부터 천하가 분열되고 후량과 후주를 비롯한 오대도 존속 기간이 오히려 짧았고 대신도 대대로 녹을 세습하는 후손이 이어질 수 있음이 드물었소. 짐이 비록 덕이 지나간 성인에게 부끄럽지만 늘 밤낮으로 고마하고 두려워하며 다스림의 근본을 조사하여 구하고 조널이 게으르게 굴지 않고 무궁한 업을 세워 오래 갈 수 있는 법을 드리우고 또한 자손의 계책으로 삼게 하고 대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녹봉과 벼슬을 세습하도록 하리니[40] 이것이 짐의 마음이오."
(上 聞 其國王 一姓傳繼 臣下 皆世官 因歎息 謂 宰相 曰 "此島夷耳 乃世祚遐久 其臣 亦 繼襲不絶 此蓋古之道也. 中國 自唐季之亂 宇縣分裂 梁·周 五代 享歷尤促 大臣世胄 鮮能嗣續. 朕 雖德慚往聖 常夙夜寅畏 講求治本 不敢暇逸 建無窮之業 垂可久之範 亦以爲子孫之計 使大臣之後世襲祿位 此朕之心焉.")『송사』, 권491, 열전 제250, 외국7, 일본국2차대전 패전 이후 학자들로부터 바뀐 적이 있다며 여러 설을 내놓기는 하지만 모두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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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메이 천황은 1867년 1월 30일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에는 온갖 의혹이 뒤따랐다. 고메이 천황의 죽음에 대해서는 도쿠가와 막부 측의 독살설과 이와쿠라 도모미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메이지 천황 대역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와쿠라 토모미가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고메이 천황을 독살했다고 본다. 심지어는 고메이 천황을 변소에서 창으로 아래에서 찔러 죽였다는 음모론도 나돌았다.[1]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고메이 천황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무쓰히토 황태자가 즉위한 것이 메이지 천황이지만, 음모론자들은 고메이 천황과 유약하고 퇴폐향락적인 무쓰히토 황태자를 이와쿠라 도모미를 주축으로 한 유신 지사들이 암살해버리고 다른 이를 즉위시킨 것이 메이지 천황이라고 주장한다.
음모론자들이 메이지 천황 대역설의 근거로 제기하는 주장들은
이를 근거로 음모론자들은 진짜 무쓰히토 황태자는 암살되었으며, 이와쿠라 도모미가 조슈에 있던 남조의 후예인 오무로(大室) 가문의 오무로 도라노스케(大室寅之祐)를 메이지 천황으로 내세웠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메이지 유신은 단순한 일본 근대화가 아니라 북조가 남조로 바뀌는 왕조 교체이고, 지금의 일본 황실은 남조의 후예들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이를 100% 믿을 수는 없다. 일부에서는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낸 루머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메이지 천황이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했다는 점.(자세한 내용은 남북조정윤론 항목 참고)당대 조선에서는 메이지 천황 대역설 보다는 고메이 천황 독살설이 더 널리 알려졌는데, 고메이 천황을 독살하고 메이지 천황을 바꿔치기한 인물이 이와쿠라 도모미가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로 알려졌다. 한편으로 몸이 약해졌다는 메이지 천황이 진행해야 할 의무를 대신하였던 카게무샤(影武者)로 불리는 오무로 도라노스케(내정), 미쓰쿠리 게이고(외교)로 대용하였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이건 가능성이 희박하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연고였던 조슈 번은 조적(조정의 적)이라서 교토에 출입할 수 없었고 삿초 동맹과 조슈 정벌의 방비로 군비 확충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튼 고메이 천황 독살설은 꽤 널리 알려져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대한 공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 15가지'로 언급하는 것 중에도 고메이 천황 독살설이 들어 있고, 최익현의 격문에서도 '자기 나라 임금을 죽이고 다른 나라 임금까지 침범한 이토 히로부미는 마땅히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토벌해야 할 역적이다.' 라며 독살설을 주장했다.[1] 굳이 변소 아래에서인 이유는 시신에 외상이 없었다는 사실과 끼워맞추기 위해서다. 흉기가 항문을 통해 들어가 안에서 찔렀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외상이 없도록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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