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이라크전쟁 파병을 정당화하기 위해 초등학교 교사에게 병자호란과 최명길, 개화파와 김옥균, 그리고 김구의 단독정부수립 반대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냐고 물은 것은 실로 적절했다; 강대국이 시키면 약소국은 그걸 따라야하는데, 무현이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인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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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포인트

 

1. 조선시대 최고의 외교관

목숨걸고 조선을 살린 대가로 사대부들에게 욕만 평생 무쟈게 먹음. 

 

청국이 점차 기세를 떨칠 때, 청국과 우리의 강약이 대등하지 않다는 것을 누군들 알지 못했겠는가. -중략- 공은 6척도 채 안 되는 몸으로 몇 안 되는 시종을 거느리고 적군으로 달려가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수레가 그 틈을 타고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었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적의 노략질이 5도(道)를 휩쓸고 외로운 성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으며, 강도(江都 = 강화도)가 함락되자 중요한 곳이 먼저 무너졌는데, 이때 공은 군중(軍中)에 출입하며 이리저리 애써서 구설(口舌)로 칼날에 맞서고 유순함으로 강포함을 눌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복될 뻔한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위태로웠던 생민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또 누구의 공인가. -중략- 동토(東土)의 사람들(=조선 사람)이 침석(枕席)을 편안히 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도리어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그에게 힘입었으면서도 그를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박세당, 《지천집》[72] 서문[73]

2.

최명길은 성종의 5녀인 경순옹주의 5대손[10]으로, 최기남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인은 장만이었다. 매우 똑똑했으나 몸이 약하고 인물은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몸이 허약한 최명길을 장모는 평생 못미더워했다고 한다. 스승인 신흠도 최명길을 사위로 삼고자 생각했으나 몸이 약해 생각을 거두었던 바도 있다.

 키가 작고 인물이 볼품없었던 데다가 몸이 약했으나[87][88] 집안 사람들도 그를 무서워해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으며 영민해서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고 한다. "이귀는 큰 의논 내기를 좋아하지만 작은 일에는 엉성하고, 김류는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다. 밖의 사람들의 말로는 ‘성덕(聖德)은 지극한데 신하들이 제대로 받들어 행(行)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전하께서 보좌할 신하를 얻지 못한 까닭에 치도(治道)가 확립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고 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89]

 

 

3. 주역에 능함

 

 

4. 미개한 조센징들은 나라가 병합당하는 순간까지도 당파싸움 놀음

 

빠른 기동 작전으로 청나라군이 불광동까지 몰려온 상황에서 최명길은 "자신이 저들의 요구 사항을 물어보겠다"고 사신을 자청해 청나라군을 찾아가 시간을 끌어서 그 덕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시간을 벌었다. 그 후 남한산성이 청나라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을 하느냐?"와 "계속 전쟁을 하느냐?"를 놓고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파 대신들과 극렬하게 대립했다.[41]

그러나 당시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남한산성에는 전략 물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각지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지리멸렬하여 맥없이 무너졌으며 그나마 정예군이었던 북방군은 군 통수권을 쥐고 있었던 도원수 김자점이 눈치만 보고 전혀 움직이지 않아 유명무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명길은 사대부의 욕을 정말 세차게 얻어먹으면서도 굴욕적인 항복 문서를 직접 작성했고, 죽음을 무릅쓰며 청나라군의 진영에 찾아가 협상을 주도했다. 급한 상황에서 대간들이 "이게 다 최명길 때문이다!"를 외치면서 딴지를 계속 걸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잘났으면 니들이 청나라군 물리쳐보든가"라면서 상당히 까칠하게 나오기 시작한다.[42] 관료들이 "항서 내용이 굴욕적이니 지금 보내지 말자" 고 주장하자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건 그대들이 자그마한 곡절을 두고 이야기했기 때문이고 그대는 신(臣)이라는 글자의 가부만 논하면 되오! 글을 언제 보낼지는 내 책임이지 그대들 알 바가 아니란 말이오, 아시겠소이까?"[43]
라고 일갈(인조 15년 1월 18일 기사)하기도 했다. 척화파들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인조의 국서에 스스로를 '臣'이라 일컫는 부분 등 항복 형식과 관련되어 열을 내는 사이 최명길은 최악의 상황에서 모든 오명과 비방을 무릅쓰고 청나라와의 협상을 조금이라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오랑캐라 지칭하는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무릎을 꿇더라도 최대한 비극적인 면모를 보이지 않게 동분서주했다. 최종적으로 인조의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은 "오랑캐에 항복하는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자살을 시도했는데 최명길은 쌓인 게 많았는지 "가족들이 다 보는데서 하면 죽을 수나 있겠느냐''면서 진실성을 크게 의심하기도 했다.[44]

최명길의 주화론은 대명의리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호란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명의리를 위해 조선을 희생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사직과 백성이 대명의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현실주의자로 상황에 따라 대응을 달리할 수 있었다. 최명길은 《예기》를 해석한 후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여 사직을 보존하도록 설득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45][46]

 

2.6. 병자호란, 그 이후[편집]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패배(삼전도의 굴욕, 즉 정축하성)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후 국정을 주도하며 전란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호란 이후 태종 홍타이지가 고관의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내도록 요구하자 솔선하여 아들 최후량이 심양에 가게 되었다. 다른 고관들의 참여도 독려했으나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47]

대청 외교를 전담하여 사은사로 청나라로 가서 조선인 포로들을 속환해 데려오고, 복잡한 외교적 문제를 처리했으며, 특히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에 대해
"정조(절개)를 잃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고,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조정의 잘못이므로,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48] 역시나 입만 살아있는 사대부들한테 "자결도 못하고 돌아온 더러워진 환향녀를 옹호한다"고 대차게 까였다.[49] 여기에 대해 《인조실록》의 사관은 "삼한(三韓)을 오랑캐(夷)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가 없도다" 라고 극딜했는데, 덕분에 오늘날 이 구절은 사대부들의 전쟁 책임에 대한 무책임과 뻔뻔함, 그 와중에 빛나는 최명길의 실리주의와 인간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되어주고 있다.

이 시기의 그는 자신이 친청파가 아니라 진정한 현실주의자임을 보여주었는데, 우선 청나라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력을 요구하자 최명길은 영의정으로서 극렬히 반대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릴 수 없고, 나라가 피폐해졌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중요한 건 이걸 청나라로 찾아가서 숭덕제의 면전에 대고 말했다는 것이다.[50] 홍타이지는 처음에는 진노했으나 "최명길이 의리가 있다"면서 결국 풀어주었다.[51]

최명길은 임경업과 승려 독보(獨步)를 통해 명나라와도 비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한선(명나라 배)과 접촉해 외교 문서를 주고받고,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의 상황을 해명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군신 관계를 맺었지만 아직도 중원에는 명나라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중원의 상황이 어찌될지는 당시만 하더라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은 의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었기에, 비공식적으로나마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명장 홍승주가 최후의 결전인 송금 대전에서 참패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조선과 내통한 것을 실토했고, 이어 명나라 상선과 거래하다가 청나라에 걸린 선천부사 이계가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해 조선이 명나라와 비밀리에 연락한 것을 용골대에게 고자질해 버렸다. 이계는 "청나라의 신하가 되겠다"고 애걸했으나, 용골대는 그를 국가와 왕을 배반하는 자로 판단하며 "조선에서 알아서 처분하라"며 돌려보내 버렸다. 이계는 국경을 넘자마자 '나라와 정승을 팔아넘긴 놈!'이라며 분노한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았고[52] 법을 집행하러 간 관료들이 백성들한테 사정하다시피 해서 죽기 직전의 이계를 간신히 인수받아 참수형에 처했는데, 청나라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53][54] 이것을 이른바 횡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최명길은
"나와 임경업이 벌인 일이다."
라고 말하며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때 청나라 관리들이 누구 소행이냐고 심문하자
"간첩은 필요한 거 아니냐.[55] 근데 우리 임금은 그런 거 싫어해서 내가 혼자 한거고 신하들도 모른다. 임경업도 내 말만 들은거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니 벌을 줄거면 내게만 달라."
라고 말해서 청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 기개에 감탄했다고 한다.[56]

최명길이 심양에 끌려갔을 때, 김상헌은 평안도 의주에 있다가 심양으로 다시 끌려왔다. 최명길이 병자호란 당시 항복 문서를 쓰고 김상헌이 그것을 찢었던 때로부터 6년이 지났을 때였고, 두 사람은 심양 감옥의 옆방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친청파라고 생각했던 최명길이 왜 끌려와있는지 의아해 했을 김상헌은 결국 최명길과 서로의 마음을 알고 "그 동안 최 대감을 역적이고 매국노라 몰아붙인 것은 정말 미안하오. 당신이 얼마나 고국을 사랑한 지 이제야 이해했소."라 사과하며 화해하게 되었다. 김상헌은 최명길을 '대상공'이라며 우대했고, 최명길을 수발하던 최후량과도 친하게 지내며 많은 칭찬을 했다. 훗날 귀국 이후 헤어질 때도 김상헌은 최후량에게 시를 지어주었다.[57] 이 모습을 본 태종 홍타이지가 "청나라에도 없는 저런 충신이 조선같이 작은 나라에 있다는 것이 부럽다."고 하며 그들을 풀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58] 훗날 김•최 두 가문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기 이전까지 가까운 관계로 지냈으나, 후손인 김창협, 김창흡최석정은 결별하게 되었다.

이후 1645년 청나라가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인질들을 풀어주었다. 소현세자도 당시 귀국할 수 있었고 최명길도 돌아왔다. 이후에는 국가의 원로로서 정사에 참여했으나 이 시기는 인조가 급격히 막장화될 때였다. 인조가 맏아들 소현세자의 장례를 약식으로 치르려 하자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아니했고 며느리 강빈이 사사될 때도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역시 인조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1647년 5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0세였다. 당시 인조는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國事)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탄식하며 특히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사관은 그의 졸기에서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고 적고 있다.[59] 척화파가 칭송받으며 최명길이 비판받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김상헌이 굴복하지 않고 남문으로 나왔는데[60] 그것도 최명길이 열어준 문으로 나온거다는 등 칭찬하는 부분도 많다.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졸(卒)하였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氣敏)하고 권모 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協贊)하였는데 명길의 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 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小人)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上)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 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國事)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하였다.


사후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여, 1651년 (효종 2년) 이시백이 인조의 배향 공신으로 배향해야 한다고 논의하였지만 김육의 반대로 제외되었으며, 1676년 (숙종 2년)에도 정태화와 함께 추배 대상으로 거론되었으나 남인의 반대로 탈락했다.[61] 시호도 늦게 받았는데 사후 34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에야 받았다. 대립했던 김상헌이 사후 바로 받은 것과 대비된다. 1691년 최석정의 주도하에 신도비 건립이 추진되었고, 글을 스승인 남구만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최명길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갈렸고, 최석정의 설명에도 수정해주지 않아 남구만의 글은 신도비명으로 사용되지 않았다.[62] 최석정은 박세당에게 부탁하여 1702년 신도비가 완성된다. 박세당은 최석정의
'최명길의 행동이 의리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당당하고 떳떳한 충정의 행동이었다'
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한 박세당은 최명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현혹된 사람들이고, 남의 견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 언급하며, 최명길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신념을 "사소한 의리"(溝瀆之諒)라고 했다. 박세당 또한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언급이 가능했다.박세당이 쓴 묘비명 훗날 최석정이 작성한 가장을 바탕으로 이민서가 최명길의 행장을 작성했다.링크[63]

또한 송시열은 1671년에 지은 《삼학사전》(三學士傳)에서 최명길과 삼학사의 대립을 통해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결을 중점적으로 서술하면서, 최명길을 간교한 성품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공박했다. 그러나 1677년 남구만과 이민서의 사실 관계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여[64] 일부 내용을 수정하기도 했으나, 부기를 남기며 기존의 내용도 후대에 전했다.[65]

3. 평가[편집]

최명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양면 화친(명나라와의 사대를 저버리는 일)을 명분 중 하나로 내세운 인조반정의 핵심 인물임에도 정묘호란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의 선두주자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터지자 의주성과 안주성 등의 핵심 요충지가 맥없이 함락되고, 인조강화도로 몽진한 상황에서 후금과의 강화(화친 교섭)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이었음에도 소장파들은 오랑캐와의 협상 자체를 반대하고 중신들은 협상에 나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는데[66] 최명길은 이귀 및 강홍립[67]과 함께 인조에게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여 결국 후금과의 강화를 성사시켰다. 이 때문에 조선은 후금의 동생이 되었지만 그나마 피해를 줄이고 전쟁을 일단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강화를 주도하고, 특히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칭신(稱臣)도 가능하다고 한 것 때문에 전후 척화파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어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최명길은 호란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조선을 끝까지 지탱해낸 사람이었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발생한 국가의 위기에 직면하여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치론을 펴고 실행했으며, 그 바탕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이 있었다.[68] 현실주의자로서 국가를 보존하지 않으면 백성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치자는 자신의 수양에만 매몰되어 의리와 명분을 내세우는데 있지 않고 국가를 유지 및 보존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69] 신분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했고, 그에 반대하는 삼사의 공론정치[70]를 비판하며 관제병통론을 주장하여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대신 책임정치를 외쳤다. 그러나 최명길의 그러한 사상과 실천은 주류 지배층인 사대부의 입장과는 달랐기에 당시에도 훗날에도 매도당하며 조선 왕조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물론 이시백[71]박세당처럼 그의 공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다.
청국이 점차 기세를 떨칠 때, 청국과 우리의 강약이 대등하지 않다는 것을 누군들 알지 못했겠는가. -중략- 공은 6척도 채 안 되는 몸으로 몇 안 되는 시종을 거느리고 적군으로 달려가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수레가 그 틈을 타고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었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적의 노략질이 5도(道)를 휩쓸고 외로운 성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으며, 강도(江都 = 강화도)가 함락되자 중요한 곳이 먼저 무너졌는데, 이때 공은 군중(軍中)에 출입하며 이리저리 애써서 구설(口舌)로 칼날에 맞서고 유순함으로 강포함을 눌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복될 뻔한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위태로웠던 생민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또 누구의 공인가. -중략- 동토(東土)의 사람들(=조선 사람)이 침석(枕席)을 편안히 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도리어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그에게 힘입었으면서도 그를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박세당, 《지천집》[72] 서문[73]
완성(完城=완성부원군 최명길)의 사업에서 큰 것이 8가지이다.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나라를 바로잡아 부흥한 것이 첫째요, 예제(禮制)를 논하여 부자(父子)의 인륜을 밝힌 것이 둘째요, 단기로 적진에 나아가 그 예봉을 무디게 한 것이 셋째요, 비방을 무릅쓰고 화의를 주장하여 종사를 보존한 것이 넷째요, 군사의 징발을 극력 거부하면서 죽음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것이 다섯째요, 천조(天朝)에 글을 보내고 스스로 책임을 감당한 것이 여섯째요, 남의 골육을 잘 대한 것이 일곱째요, 붕당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여덟째이다.

이시백의 말, 박세당, <영의정완성부원군최공신도비명>의 일부
"문신으로서 외교에 미친 영향력이, 임진왜란 때 전시재상(戰時宰相)으로서 조선을 지탱했던 류성룡에 버금간다"며 사관이 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관들은 최명길을 깎아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주화파의 간판급 인물인 데다가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과 (환향녀라는 이유로) 이혼하는 것을 금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등 주류 인물들의 생각과 매우 달라서였다. 그런 사관들도 최명길이 외교로 나라와 종사(宗社)을 구한 일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주화론을 호란 시작부터 끝까지 격렬하게 깎아내린 사관들이, 최명길의 졸기에서는 그의 자질과 행보를 칭찬해주며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다. 최명길의 활약이 없었다면 조선이 진짜로 더욱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서 인조가 더 극악의 방법으로 고생해야 했을지도 모른다.[74]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 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군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5년 5월 17일 <완성부원군 최명길 졸기>
가히 고려서희, 원종[75]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외교관 중 한 명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한국사를 전공한 일부 서구권의 학자들은 최명길을 조선의 리슐리외 추기경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게 최명길과 리슐리외는 각 국가의 이후 외교 방침의 기초와 전략관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가 패권국으로 성장하며 세월이 지날수록 재평가를 받은 리슐리외와 달리 최명길은 병자호란의 패전에 대한 여론의 분풀이로 업적들이 격하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설사 최명길을 좋게 보더라도 한국사 최고의 협상가로 볼 정도로 그 업적이 아직도 격하된 상태이다.[76]
대내적으로 반정에서 출발하여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인조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 이후 조선 왕조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형성하고, 취약한 인조의 왕권을 확립하여 그 후손인 영조에 의해 <삼종혈맥론>이 제출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대외적으로 만주족의 성장으로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이들과의 화해를 통해 국가를 유지 및 보존하여 민을 보호하려고 했다.

참고 - 김용흠,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정치 활동과 유자(儒者)의 책임의식>

 

 

5. 극과 극은 통한다고...

 [8] 이거 하나만으로도 김상헌과 최명길의 차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둘 다 나라를 위했고, 책임있는 원칙을 보여줬다는 데서 어찌 보면 극과 극은 통한다의 긍정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그대 마음 굳은 바위 같아 끝까지 바뀌지 않거니와,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 믿는 바에 따르네.[8]
(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이긍익(李肯翊, 1736년 ~ 1806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심양옥에 갇힌 사람들>(瀋獄諸囚)

 

최명길이 심양에 끌려갔을 때, 김상헌은 평안도 의주에 있다가 심양으로 다시 끌려왔다. 최명길이 병자호란 당시 항복 문서를 쓰고 김상헌이 그것을 찢었던 때로부터 6년이 지났을 때였고, 두 사람은 심양 감옥의 옆방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친청파라고 생각했던 최명길이 왜 끌려와있는지 의아해 했을 김상헌은 결국 최명길과 서로의 마음을 알고 "그 동안 최 대감을 역적이고 매국노라 몰아붙인 것은 정말 미안하오. 당신이 얼마나 고국을 사랑한 지 이제야 이해했소."라 사과하며 화해하게 되었다. 김상헌은 최명길을 '대상공'이라며 우대했고, 최명길을 수발하던 최후량과도 친하게 지내며 많은 칭찬을 했다. 훗날 귀국 이후 헤어질 때도 김상헌은 최후량에게 시를 지어주었다.[57] 이 모습을 본 태종 홍타이지가 "청나라에도 없는 저런 충신이 조선같이 작은 나라에 있다는 것이 부럽다."고 하며 그들을 풀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58] 훗날 김•최 두 가문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기 이전까지 가까운 관계로 지냈으나, 후손인 김창협, 김창흡최석정은 결별하게 되었다.

 

 

6. 만력제 찬양

다만 우리는 이 조선 나라의 신하이므로, 나의 군부(君父)[5]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 조정만 위하는 것은 월진(越津)[6]의 혐의가 없지 아니합니다. 만력 황제재조시켜 준 은덕은 우리나라 군신 가운데 누가 감격하여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우리나라가 생사의 위기에 즈음하여 어찌 옛날에 중흥시켜준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나가야 합니까? 이야말로 조선을 위하는 신하로서는 반드시 명나라를 위하여 내 나라를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리로서 당당하여 실로 성현의 교훈에도 부합되는 것입니다.

장유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7]
그대 마음 굳은 바위 같아 끝까지 바뀌지 않거니와,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 믿는 바에 따르네.[8]
(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이긍익(李肯翊, 1736년 ~ 1806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심양옥에 갇힌 사람들>(瀋獄諸囚)


 

 

 

  • 많은 사안에 관해 딱딱하고 감성이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청음 김상헌이 자살 미수를 벌이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쇼로 의심했다든지[99] 인조의 부친 추숭 행위를 두고 그깟 왕위 따위 아무나 받으면 된다고 선비들의 불만을 무시했다든지,[100] 이괄이 역모에 연루되자 이귀만큼 추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여 바로 현실 대책부터 논의했던 점을 보면 최명길은 현실주의자 특유의 각박한 심리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환향녀 문제와[101] 기득권 철폐[102] 등에서 보여준 약자 보호의 마음까지 본다면 최명길은 '패도'와 '정의'의 양립을 추구했던 인물[103]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당대에 드물었던 진정한 의미의 현실주의자였다.
     
    [56] 하지만 인조를 위해서 이렇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녔건만, 인조는 최명길을 별로 믿지 않은 모양이다. 이 사건 당시 "최명길이 '난 죄 없어요'로 일관하면서 인조와 다른 신하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다"는 잘못된 정보가 올라왔는데, 인조는 병자호란정묘호란 때 자신을 위해 목숨걸고 뛰어다닌 신하를 조금도 믿어주지 않고 삭탈관직해버렸다.
      
     

  • 《주역》에 매우 능해서 인조반정의 거사일을 직접 점을 쳐서 정했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도 《주역》을 공부하는데 매우 힘썼다고 한다.[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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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에서 나오듯이 옥중에서 김상헌과 화해했다고 하는데, 주고받은 필담이 유명하다. 다음은 최명길의 필담 중 일부이다.[104]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진정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나니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 같은 물이요,
    털옷이나 삼베옷이나 옷 아닌 것 없네.
    일이 때에 따라 다를망정
    마음이야 어찌 정도를 벗어날까?
    그대 능히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말함도 침묵함도 각기 천기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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