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국주의에 반대한 사회주의자였지만, 자유주의 성향 때문에 마르크시즘에도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던, 괄목할만한 생의 철학자 미키 기요시 - 후일 미키 기요시는 <역사철학>(1936)을 저술하면서 하이데거가 나치스에 가담한 사실을 두고 자신의 스승이었던 하이데거를 비판하고 동시에 나치즘을 비판한다. 그의 이런 비판은 결국 일본의 파시즘을 비판한 것이고, 일본에서도 자신의 스승인 니시다 기타로를 비판한 것이 된다. 그러나 미키 기요시가 스승 니시다 기타로의 생명철학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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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기요시 ( 三木淸. 1897-1945, 일본 ) - 평생의 철학적 주제는 생(生)의 문제

 

 


 

미키 기요시 (三木淸)

 

 

 

친구에게 밥 한 그릇과 옷 한 벌을 준 죄로 감옥에서 죽은 철학자

 

미키 기요시를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6학년 무렵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미키 기요시의 <철학노트>이던가, <인생론 노우트>란 책을 통해서였다.(예전엔 노트를 '노우트'라고도 표기했다.) 그 당시 그의 책을 읽게 되기까지 사실 무슨 소리인지 그 내용을 알고서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하다가 반전론자 (군국주의 일본에서는 반전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자동적으로 천황에 대한 불경이자 민족반역자로 몰리는 일이었다. 어째 우리나라의 유신시절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헌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헌법개정을 논의하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가야했으니)로 몰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했는데도 감옥에서 풀려나오질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당시 일본인은 모두 맹목적으로 일본 천황과 군국주의에 찬동한 줄만 알았던 나에겐 작은 감동이었다.

  

그후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그에 대해 좀더 알아보리라 마음만 먹고 있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다가 요사이 일본에 대해서 공부 좀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서서 찬찬히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미키 기요시가 태어날 무렵의 일본

 

미키 기요시 1897년 1월 5일 일본의 관서지방 효고(兵庫)현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농사도 짓고 미곡상이기도 했던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자산가였다. 이 무렵의 일본은 이미 존왕양이(尊王攘夷)파들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바쿠후(막부) 지지자들이 벌였던 마지막 반란도 진압되어 확실한 천황 국가가 성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일본의 국내 정세는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정한론(征韓論)을 바탕으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陸盛), 이타카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등이 조선을 침략하려다 구미를 순방하고 돌아온 이와쿠라와 이토 히로부미 등의 내치우선론에 밀려 조선침략이 좌절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기도 했다. 1890년 메이지(明治) 천황은 천황의 이름으로 국회 개설을 약속하고, 이런 일련의 헌법 논쟁의 와중에서 이토오 히로부미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미키 기요시는 이런 정세 속에서 태어났다. 미키가 독서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무렵 <국어>교사의 영향을 받으면서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이르러서는 습작을 시도할 만큼 그는 대단한 문학소년이 되었지만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중학교 마지막해에 하나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세기말적인 회의와 퇴폐'를 벗어나 '건강한 것, 자유로운 것, 생명적인 것'을 찾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문학지망에서 철학 지망으로 자신의 전공을 바꾸고 1914년 동경제국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첫번째 관문이랄 수 있는 제1고등학교에 입학한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되었지만 이것은 국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헌법이 아니라 천황에 의해 하사된 '흠정헌법(欽定憲法)'이었고 천황은 모든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뿐인 국회는 다만 예산권 심의만이 가능한 정도로 존재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그 팽창의 속도가 더욱 빨라져 급기야 1910년에 조선을 병탄하고 만다.(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가  일본은 영토를 넓힘으로써 영혼을 개탄했다고 탄식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정한론을 논의하는 일본의 정치지도자들

 

 

 

철학의 스승. 니시다 기타로를 만나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지만 일본은 전쟁에 참전했음에도 오히려 전쟁 특수를 입어 번영을 누렸다. 그래서 이 무렵은 문화적으로 이른바 "교양"이 풍미하는 시기가 되었다. 미키 기요시 역시 그런 분위기에서 많은 독서를 했는데 이때 그가 만난 책이 니시다 기타로의 <선(善)의 연구>였다.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동한 미키 기요시는 입신양명이 보장된 동경제국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니시다가 교수로 있는 교토제국대학 철학과에 진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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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일본에서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불리우는 시기로 메이지 시대의 숨가쁜 부국강병책(실상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 시기는 서구 열강들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해체하고 일본이 서구에 대해서도 평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성장했던 시기이다.

 

이 당시 일본은 '극동의 헌병'이라고 불렸다.)에 의해 사회적 안정을 찾고, 자본주의도 어느 정도 정착하여 시민계급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짧은 시기 동안 일본의 정치가와 학자들, 시민 계급은 천황제와 민주주의라는 이질적인 두 요소를 합리적으로 규정하고 조화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현인신(現人神)이라는 천황제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지만 군국주의로 나가는 일본으로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거기에 제동을 걸만큼 시민계급이 성숙하지도 못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숨질 무렵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을 이끌었던 원로(겐로, 元老)들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정치가들이 정치 일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본의 총리 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만고의 원수로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일찍이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주창했던 정한론에 반대하는 등 국제 정세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위의 사진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하기 직전의 사진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당시 정한론에 반대했던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내치를 우선 안정시키자는 취지에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조선 민족의 안위를 위해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 옳은 일이라면 우리는 무슨 근거로 일본 민족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안중근 의사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세계적 정치인의 죽음은 전세계에 일본의 압제에 저항하는 조선 민족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과거의 이런 경험을 통해 현재의 팔레스타인들과 독립을 희망하는 다른 민족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같은 경험을 한 베트남에 대해서 아직까지 사과를 하지 못하고 있다. "미안합니다. 베트남!")
 
이럴 때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미키 기요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본의 특수성만 역설하려고 노력해 온 종래의 일본 정신론은 중대한 한계에 달했으며 일본 정신이 있다면 중국 정신도 있을 테니까 양자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양자를 넘어선 것이어야 한다고. 우리가 우리 민족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민족주의를 주장한다면 우리는 교과서를 왜곡하고픈 일본의 우익과 다를 바가 없다. 백범 김구 선생이 꿈꿨던 민족주의는 분명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때 니시다 기타로는 <선의 연구>라는 저서를 통해 인생에 대하여 방황하고 있던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미키 기요시 역시 이 책을 읽고 '전인격적인 만족'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1917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동경제국대학이라는 상식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교토대학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교토에서 니시다 기타로를 비롯한 여러 뛰어난 교수들을 만나 이때 일본 철학계를 풍미하던 신칸트학파 철학 공부에 몰두했다. 교토는 당시 교토학파라고 불리울만큼 학문적인 활기와 열정이 가득했으며 그 한 가운데 니시다 기타로가 자리하고 있었다. 미키 기요시는 그런 니시다 교수의 애제자 중 하나였다. 미키 기요시는 그런 니시다를 따랐고 후일 그가 '책보다 인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한 배경에도 역시 니시다 기타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때 니시다 기타로와 함께 미키 기요시에게 영향을 준 철학자는 하다노(波多野精一)라는 종교 철학자였다. 미키는 그에 의하여 역사연구의 중요성을 배웠고, 그의 이런 경향은 니시다 기타로에게도 자극을 주어 니시다 기타로가 생명철학에서 역사철학으로 나가는데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미키 기요시는 그에 의하여 역사연구의 중요성을 배웠으며 서양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연구가 불가결하다는 것도 배웠다. 그외 교수들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철학에서는 칸트, 예술에서는 괴테를 스승으로 생각했다고 그는 자신의 학창시절을 회상했다.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 -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사상적 감화를 준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 그는 생명철학에서 역사철학으로 나아가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 인물로 비판받는다. 그의 책 <선의 연구>는 국내에서는 범우사에서 출판되었다.

 

 

 

미키 기요시의 독일 유학. 하이데거를 만나다

 

그는 1920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했고, 그의 졸업논문은 "비판철학과 역사철학"이었다. 그것은 영원한 이념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가, 보편타당한 가치가 어떻게 개성에서 실현되는가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논문이었다.

 

미키는 1922년에 교토대학교 개교 이래의 수재라는 칭송을 들으며 독일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신칸트학파의 하인리히 리케르트 교수 밑에서 공부하고 마르부르크에서는 하이데거 밑에서 공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생의 철학'이나 실존철학에 경도되었다. 1924년 프랑스 파리로 떠나온 그는 앙리 베르그송 등의 철학과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을 탐독하다가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크게 감동한다. 그의 첫번째 저술 <파스칼에서의 인간연구>(1926)이 쓰여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리고 그는 29세 때 고국 일본으로 돌아온다.

  

미키 기요시를 사로잡았던 평생의 철학적 주제는 생(生)의 문제였던 것 같다. 생명의 철학을 주창했던 니시다 기타로를 비롯해서 그가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던 대개의 인물들에서 그는 생의 문제를 보았던 것 같다. 1927년 미키 기요시는 자신이 원했던 교토 대학의 교수 직위를 얻지 못했다. 그는 동경 호세이(法政) 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되었다.

 

미키 기요시는 이 무렵 사상적으로 마르크시즘에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활동 역시 학자로서의 것보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에 가까와졌다. 이것은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가 강화되는 조짐과 맞물린 것이었다. 1928년 그는 영향력있는 평론지 <신흥 과학의 깃발 아래>를 발간하며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를 널리 보급하려고 했으며 활발한 저작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이 무렵 그가 펴낸 책들은 마르크스주의가 필연적으로 다른 철학을 압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인해 그를 따르는 많은 젊은이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미키 기요시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과학협회라는 일본의 공산주의자 모임에서 축출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 과학협회에서 축출(1930년)된 뒤에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의 수감생활을 한다. 이 무렵의 일본은 짧았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기가 지나고, 군국주의 길로 급속히 진입해 가고 있었다.

 

미키 기요시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사회 혁신을 주장했지만 이미 일본은 군국주의와 세계 대전이라는 암울한 미래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그가 유럽에서 학문을 쌓고 있을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은 전후 처리 문제에 골몰해 있던 시기였다. 이때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세계 피압박민족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런 소비에트 혁명의 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윌슨주의라는 14개조를 내세웠고, 아시아에서는 이런 흐름에 부응하여 중국은 <5.4운동>을, 우리나라는 <3.1운동>을 일으켰다.

 

 


 

 
일본의 젊은이들이라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즐긴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전장에서 싸워서 얻어낸 이득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한줌의 소득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은 군국주의로 급격히 우경화되어가는 일본이라는 국가체제에 브레이크를 걸 만한 세력이 없었다.
 
 
 

군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는 일본인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측으로 참여하여 얻은 실익은 사실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병탄,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축적된 자신감을 통해 군비팽창의 길로 나서길 원했다. 그러나 이는 세계적 흐름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유럽과 미국은 1922년의 워싱턴 회의, 1930년의 런던회의 등을 통해 일본의 이런 팽창욕구를 견제했다.

 

이러한 군축체제는 일본의 군부에 불만을 누적시켰고, 그러한 불만은 가상적국 제1순위를 소련에서 미국과 유럽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미국은 당시 점증하고 있던 일본이민을 통제하고(Japanese Exclusion Act, 일본인 이민 규제법), 일본 이민들이 주로 거주하던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의 일본인 배척과 인종주의적 경계심은 일본의 미국에 대한 반미감정을 거들었다.

  

이상한 우연이겠지만 미키 기요시의 양대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니시다 기타로는 일본 군국주의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는 역사철학자로,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는 독일 나치즘을 긍정한 혹은 나치즘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 철학자로서 미키 기요시의 스승이었다.  

 

후일 미키 기요시는 <역사철학>(1936)을 저술하면서 하이데거가 나치스에 가담한 사실을 두고 자신의 스승이었던 하이데거를 비판하고 동시에 나치즘을 비판한다. 그의 이런 비판은 결국 일본의 파시즘을 비판한 것이고, 일본에서도 자신의 스승인 니시다 기타로를 비판한 것이 된다. 그러나 미키 기요시가 스승 니시다 기타로의 생명철학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요미우리 신문> 등 여러 매체의 기고를 통해 일본 군국주의에 대해 저항했고, 1936년에는 '쇼와(昭和)연구회'에 참여하여 일본의 극우 천황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일본의 특수성만 역설하려고 노력해 온 종래의 일본 정신론"은 중대한 한계에 달했으며 일본 정신이 있다면 중국 정신도 있을 테니까 "양자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양자를 넘어선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대공황을 통해 드러난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와 서구에 대한 경멸을 합리화했다. 그들은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라고 비난했으며 이에 대비해 동양이 순수성과 윤리성을 지녔으며 그 중에서도 일본이 그 정수(精髓)임을 자인했다.

  

그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울을 통해 일본은 서구에 의해 지난 1세기 동안 자행된 유색인에 대한 박해와 멸시를 되갚아주자고 주장한 것이다.(물론 예전에 자신들이 서구에게 배워서 조선을 병탄한 것과 극동의 헌병으로 군림했던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러나 이런 대동아공영권 발상 자체는 순수한 의도로 나온 것이기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온 허울에 불과했다.

 

이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울에 현혹되어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 중 많은 수가 민족주의를 버리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논리에 봉사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하긴 최근에도 이문열 씨 같은 이들이 대동아공영권에 대해 다시 평가해봐야 한다고 하면서 아쉽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으니 그 무렵의 이광수 같은 이들에게는 얼마나 매혹적인 논리였겠는가!)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대공황을 통해 드러난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와 서구에 대한 경멸을 합리화했다. 그들은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라고 비난했으며 이에 대비해 동양이 순수성과 윤리성을 지녔으며 그 중에서도 일본이 그 정수(精髓)임을 자인했다. 그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울을 통해 일본은 서구에 의해 지난 1세기 동안 자행된 유색인에 대한 박해와 멸시를 되갚아주자고 주장한 것이다.(물론 예전에 자신들이 서구에게 배워서 조선을 병탄한 것과 극동의 헌병으로 군림했던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러나 이런 대동아공영권 발상 자체는 순수한 의도로 나온 것이기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온 허울에 불과했다. - 위의 사진은 일본이 추축국 방공(防共)동맹을 맺은 것을 기념하여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들의 깃발을 거리에 내건 것이다.
 
 
 

미키 기요시의 철학과 죽음

 

점차 강화되는 일본의 군국주의는 1937년 <국체의 본의>를 배포하면서 국수주의를 고취하고, 이런 일본 군국주의의 핵심에는 언제나 천황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반체제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을 탄압했고, 독일, 이탈리아 등과 함께 파시즘에 기반한 추축국 동맹을 맺는다. 미키 기요시는 이런 당대의 현실을 피할 수 없는 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전개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노력은 한쪽에서는 전쟁협력자라는 비판을, 다른 한쪽으로부터는 전쟁 비협력자라는 비판을 받는 식의 박쥐 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이런 비판에 직면하여 결국 인생론으로 침잠해 들어가게 된다. 그의 이런 사유의 결과물이 <인생론 노트>(1938년)였다. 그는 사회적 비판을 할 수 없게되자 <지식철학>, <기술철학>(1942년), <구성력의 논리(미완성)> 등과 함께 철학입문을 저술하였다.

 

지식의 윤리라는 문제는 인식의 밑바닥에는 의지가 깔려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인식은 판단이라는 설과 연관이 있다. 그것에 따르면 본래의 뜻에서는 지식이란 표상이 아니라 판단이다. 판단만이 본래의 뜻에서 참 또는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판단은 표상이 아니라 표상의 결합이다. 그러나 판단은 표상의 결합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는 긍정과 부정 또는 승인과 부인이 있으며 이것이 판단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철학입문』, 지식의 윤리 중에서>

 

지식의 주체도 조작적인 것이므로 행위적으로 볼 수가 있고 또한 지식에 대해서도 지식의 윤리가 있다. 더욱이 예술과 같은 것도 단지 감상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제작하는 입장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술의 주체도 제작자이므로 행위적으로 볼 수 있고 예술에 대해서도 제작의 윤리가 요청될 것이다.

 

이처럼 사물을 행위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사물을 역사적 세계에 놓고 보는 것이다. 역사적 세계는 행위의 세계이다. 따라서 드로이젠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적 세계는 도덕적 세계이다. 물론 지식, 예술과 도덕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지식의 근본 문제는 진리이고 도덕의 경우는 선이고 예술의 경우는 미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별해서 파악함과 동시에 통일해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철학입문』, 도덕적 행위 중에서>

  

미키 기요시는 니시다 기타로의 생의 철학을 통해 인간에 대한 관심을 얻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했다. 그는 공산당 동조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기도 했으나 결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는 되지 못한 듯 하다.

 

오히려 그는 로고스(Logos)적인 것과 파토스(Pathos)적인 것을 통일하는 이론을 심화함(이게 무슨 말인지는 각자 알아서 공부하세요.)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멀리하고 니시다 철학에 접근하였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미키 기요시는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 반대했지만 1942년에는 군사력 증강에 반대한 그조차도 육군에 징집되어 1년간 필리핀에서 복무하게 된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침묵했다. 그러나 1945년 3월 28일 일본의 패망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지만 도조 히데키 내각은 본토대결전을 주장하며 마지막 발악의 극을 달리며 미키 기요시를 체포한다. 그가 체포된 이유는 경시청에서 탈주한 친구에게 밥 한 그릇과 옷 한 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미키 기요시는 체포되어 도요타마(豊多摩)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영양실조와 피부병, 급성 신장염으로 감옥 안에서 죽는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40일 뒤의 일(1945년 9월 26일)이었다.

 

 

출처 : Windshoes Federation Asy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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