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투기자본과 윈스턴 처칠, 영국 금본위제: 할애비가 프리메이슨이자 아버지, 어머니대부터 로스차일드 가문과 친하게 지냈던 윈스턴 처칠은 재무부장관 시절이던 1925년, 영국을 제1차 세계대전 시기 폐지했던 금본위제로 다시 복귀시켰는데, 이는 그 자신이 인정하듯 타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로 윌슨과 레이건의 금융정책이 타의에 의해 이루어졌듯이); 바로 시티 오브 런던 금융가들 (그 대표가 로스차일드), (훗날 나치를 지원했던) 영란은행 총재 몬태규 노먼, 고전적 경제학자들, 국제 금융 세력 등이 금본위제를 ‘영국의 명예’로 간주하며 압박했던 것이다; 처칠은 영국 재무부의 정치적 책임자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금융 엘리트의 입장을 수용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그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고, 주변 조언에 의존한 결정을 내렸다고 뒤늦게 고백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윈스턴 처칠의 책략 역시 비슷한 것이었다. 1911년 영국 해군대신에 임명된 처칠은 필사적으로 미국을 영국 동맹군으로 참전시키려 했다. 1914년 처칠은 영국 상선들에게 모든 공격 경고를 무시하고 상선이 무장되어 있을 경우 응전하도록 명령했다. 이 때문에 독일 U보트 지휘자들은 방어를 위해 잠수해 있는 동안 어뢰를 발사할 수밖에 없었다. 처칠은 또 선체에서 선박 이름을 지우고, 항구에 정박할 때는 중립국 깃발을 달도록 했다. 처칠은 이런 조치들이 다른 국가들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책략이었다고 거리낌 없이 밝히고 "잠수 상태의 U보트는 수중 공격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중립국 선박을 영국 선박으로 오인해 배를 격침시키고 승무원들을 수몰시킬 위험이 커졌다. 결국 독일은 다른 강대국과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1915년 5월 7일, 영국 정부의 '조언'에 입각하여, 루시태니아 호가 당시 독일군 점령중이던 해역에 고의적으로 보내진다. 2,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배와 함께 가라앉았고 여기엔 미국인 128명도 포함돼 있었다. 이 일로 미국 전역에 반독일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로스차일드, 록펠러, 모건이 지배하는 언론이 이를 부채질 한 건 말할 나위가 없다. 로스차일드 가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런던에 기반을 둔 로이터 국제 뉴스 에이전시(Reuters International News Agency)를 소유하고 있었고, 1차 세계 대전 때는 프랑스의 하바스(Havas), 독일의 울프(Wolff)를 움직여 각국의 여론을 전쟁에 찬동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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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1940년 5월부터 나치 독일에 유화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이 물러가고, 로스차일드 가의 총아인 윈스턴 처칠이 총리로 취임하여 본격적인 반독 정책을 펼친다.
처칠의 어머니는 제니 제로미(Jennie Jerome)라고 하는 로스차일드 가의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레오나드 제로미(Leonard Jerome)라는 금융가로 미국에서 로스차일드가를 대표하는 대리인 중 한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에 깊게 관여했던 로스차일드의 빅커스 다 코스타(Vickers da Costa) 사는 윈스턴 처칠의 형인 J. S. S. 처칠에게 일부 지분을 매각했다.
로스차일드 가는 윈스턴 처칠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빅터 로스차일드의 할아버지인 네티 로스차일드 때부터 처칠은 그의 집에 자주 초대되었다. 로스차일드 가의 방명록에는 그의 이름이 1890년부터 1930년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삼촌인 월터 로스차일드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처칠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을 세워야 한다는 월터 로스차일드의 주장에 시종일관 지지 입장을 표명했고, 바로 이 점에 따라 로스차일드 가의 든든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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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 대전의 배후는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세계 최대의 군수산업 회사였던 빅커스(Vickers)에 대해 알아야 한다. 빅커스는 1828년 밀러 에드워드 빅커스와 그의 장인인 조지 네이어가 만든 기업이었으나 1867년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1897년 어네스트 카셀 경(Sir Ernest Cassel)의 주도 다양한 회사들이 합병되어 빅커스, 선스 & 맥심(Vickers, Sons & Maxim)가 된다. 카셀 경은 영국왕 에드워드 7세(재위: 1901~1910)의 은행가였고,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였던 랜돌프, 그리고 나다니엘 로스차일드의 친한 친구였다. 에드워드 7세의 고문단에는 레오포드 드 로스차일드, 알프레드 드 로스차일드,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이 아편전쟁 때 후원했던 사순 일족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897년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 회사의 최대주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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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를 죽인 범인이 누구냐는 것은 수많은 음모론의 주제였으나, 영국 첩보부 출신의 정보원 존 콜먼은 그 범인을 로스차일드의 지배 하에 있떤 MI6로 단정한다(당대 미국 CIA는 MI6 지도를 받는, 사실상 MI6 미국 지부였다. 헌데, 1956년부터 1968년까지 MI6 수장이었던 딕 화이트가 빅터 로스차일드의 심복이었다). 그에 따르면, 케네디 제거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은 영국 정보부 MI-6의 북미 책임자 윌리엄 스티븐슨 경이었다. 1938년 윈스턴 처칠의 대리인 자격으로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났던 사람이 바로 이 스티븐슨이었다. 케네디 암살사건에서 오즈왈드는 대리역에 불과했다.
✅ 1. 처칠은 금본위제에 찬성했는가, 폐지를 지지했는가?
→ 처칠은 금본위제에 "찬성"했으며, 오히려 이를 복귀시키는 주역이었습니다.
📌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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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금본위제를 중단했고, 전후 경제 혼란 속에서 복귀 여부가 논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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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 보수당 정부는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통해 파운드화의 신뢰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 처칠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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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은 1924~1929년 사이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으로 재직했으며,
1925년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를 주도했습니다. -
이때 파운드화를 **전쟁 전 가치(£1 = 약 4.86달러)**에 고정시키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실질적인 과대평가(overvaluation)였습니다.
📌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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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정은 영국의 수출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실업률을 증가시켰으며,
훗날 대공황이 닥치면서 금본위제는 1931년에 다시 폐지됩니다. -
많은 경제학자들—특히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처칠의 금본위제 복귀 결정을 **"치명적인 경제정책 실수"**라고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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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본인도 훗날 이 결정에 대해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 2. 처칠은 금본위제 통제를 재무부에 두어야 한다고 믿었는가?
→ 처칠은 금본위제를 재무부(즉, 정부)와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의 정책적 통제 아래 두는 것을 원했지만,
그 실제 정책결정은 **당시 영란은행과 고전적 자유주의적 조언자들(특히 몽터규 노먼 총재)**의 입김에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 관련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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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처칠은 재무장관으로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몽터규 노먼(Montagu Norman)**이라는 영란은행 총재의 강한 권고에 따라 금본위제 복귀를 승인했습니다. -
또한, 시티 오브 런던 금융가들, 고전적 경제학자, 국제 금융 세력 등도 금본위제를 ‘영국의 명예’로 간주하며 압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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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은 재무부의 정치적 책임자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금융 엘리트의 입장을 수용하는 입장에 가까웠습니다.
✅ 결론 요약
질문 | 처칠의 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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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금본위제에 대한 입장 | 찬성 (1925년 복귀 주도) |
금본위제 복귀에 대한 책임 | 처칠이 결정했지만, 영란은행과 금융 엘리트의 영향 큼 |
금본위제 통제권이 재무부에 있어야 한다는 입장 |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았음, 오히려 영란은행 의견 수용 |
💬 참고 발언 (처칠의 후회)
“I was assured by the highest experts… that our gold standard restoration would be successful. I did not myself have any deep knowledge of economics... I acted on the advice of others.”
– 처칠, 자서전 중
➡️ 그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고, 주변 조언에 의존한 결정을 내렸다고 뒤늦게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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