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와 프라우다(pravda - 사랑을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 / 농노를 해방하고, 자신의 재산을 빈자들에게 분배하려고 했던 레프 톨스토이나 이반 투르게네프의 사회주의적 또는 아나키즘적 신념은 아리시마 타케오 등의 시라카바 운동과 맞닿아 있다

 톨스토이

  • 톨스토이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로 그가 여인숙에 머물고 있을 때 소녀가 톨스토이의 가방을 보고 그 가방을 갖고 싶다고 하자 그는 일이 있어서 나중에 가방을 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그 여인숙을 나왔다. 나중에 그 여인숙을 찾아왔더니 그 소녀는 그사이 병으로 이 세상에 없었으며, 그는 여인숙 딸의 무덤에 가서 그 가방을 걸어 주었고 그 뒤 어느 사람이 그 무덤에 돌가방을 조각해 돌십자가에 건 다음 프라우다(pravda - 사랑을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라는 글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목가적 정신이 담긴 소설 작품들이나 소설책 표지나 속표지에서 볼 수 있는 수염이 성성한 푸근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15] 할아버지와도 같은 인상과는 달리, 청년기는 매우 이기적이며 성적으로 난잡하기로 유명했다.[16] 이와 같은 그의 정신적 사상과 행동간의 괴리는 톨스토이를 연구할 때 관심있게 보는 주제 중 하나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의 돌아온 탕자. 그러나 노년기에 처절한 참회를 거쳐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도 위선적이라는 이야기와[17] 그의 극단적인 기독교적 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인격파탄자라는 비난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위선자였다거나, 극단적인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인한 인격파탄자이기만 했다면 마하트마 간디가 그의 사상에 깊이 감화돼 평생 그를 본받아 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6] 34세에 결혼한 이후 혼외정사를 삼갔다. 젊은 시절의 방탕한 생활도 대부분 톨스토이 자신의 고백과 일기에 근거한다.[17] 예를 들어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부자가 인정있는 척 하는 것보다 가증스럽고 역겨운 일은 없다. 부자가 정말로 인정이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넉넉하게 먹고 살만한 재산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으면서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만, 아내의 거센 반발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이 크다. 결국 아내와 이 문제로 크게 다퉈 자신의 소신을 실현하려 가출했다가 죽은 것을 볼 때 부당하고 가혹한 비난이다. 



    아리시마 타케오
    1910년 동인지 『시라카바(白樺)』 창간에 참가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많은 소설과 평론을 발표해 시라카바 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3]

    1916년에 아내 야스코가 폐결핵으로 죽고[4], 아버지마저 죽자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해서 <카인의 후예>, <태어나는 고통>, <미로> 등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작가로서의 양심 선언이라 할 만한 <선언 하나>라는 글을 발표함과 동시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당시 홋카이도 니세코에 있던 아버지의 농장을 토지 공동 소유 형태로 소작인들에게 무상 증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이런 농원이 반드시 자본가에 의해 탕진되고 말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런 행위에 대해서도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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