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들이 만든 6805권의 팔만대장경도 대단하지만, 청나라 건륭제 시대 발행된 사고전서는 훨씬 더 거대한 스케일이다; 역사상 최대의 총서로 세계사적으로도 유례 없는 방대한 분량인 7만 9377권; '지대물박'이라 호언했던 건륭제의 말도 마냥 허풍만은 아닌 게, 사고전서만 봐도 중국의 스케일을 알 수 있다

 

6. 의의[편집]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보통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데,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팔만대장경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으로 1514종 6569권이다. 이들을 책으로 엮으면 자그만치 6805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이 되는데 날마다 한 권씩 읽는다고 가정해도 18년이 넘도록 읽어야 끝을 볼 수 있으니, 그 규모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고려대장경은 당시 어느 한역장경보다도 수록범위의 규모가 가장 큰 불전이므로, 그 내용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팔만대장경은 역대의 모든 대장경 중 가장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당시 개태사의 승통 수기(守其)를 비롯하여 여러 교정승이 동원되어 교정작업을 실행했는데, 초조본, 북송본, 거란본과의 대조는 물론 각종 문서들을 섭렵하여 본문의 오자, 탈자를 바로잡고 누락된 부분을 논증하여 보수하였으며, 이런 대장경 전반에 걸쳐 교정한 내용과 이유를 소상하게 기록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서른 권을 엮어 새로 추가하였다.

대반열반경 남본(南本)처럼 당대 대장경 목록에서 보이지 않고, 팔만대장경에만 수록된 불경도 있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은 수천만 개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와 탈자가 거의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등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불교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해인사가 '법보사찰'로 불리는 까닭도 팔만대장경 때문이다.
 
 
 

1. 개요[편집]

사고전서 四庫全書

중국 역사에서 자료와 서적들을 모아서 만든 유서(類書)이며, 역사상 최대의 총서로 세계사적으로도 유례 없는 방대한 분량이다.

2. 편찬 과정[편집]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역대 왕조마다 시행하였다. 당나라 때 명관료이자 학자이기도 했던 구양순의 예문유취를 비롯하여 송나라 때는 책부원귀, 태평광기, 태평어람, 문원영화 등 대규모 유서 4종(이른바 송사대서)이 나오기도 했다. 명나라 때에 이르러 영락제의 명령으로 방대한 영락대전이 편찬되었다.[1]

청나라도 이런 전통을 이어 강희제강희자전, 옹정제 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고금도서집성이 방대하긴 하나 전문을 다 싣지 않고 일부만 인용함에 아쉬움을 느끼고 아예 책과 자료의 전문을 통째로 싣는 총서 편찬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사고전서이다.

건륭제는 즉위 초반인 1741년부터 이미 이런 구상을 시작해 서적과 자료의 수집을 시작했고 1772년에는 유서를 교정하고자 각 지방관에게 자료의 전문을 수집해 오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듬해인 1773년에 모아진 자료와 서적에 해제를 붙이고 사고전서관을 설치한 후 본격적인 편찬작업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1782년에 사고전서 전체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최종적으로 편찬완료된 사고전서는 전체를 경(經)·사(史)·자(子)·집(集) 등 네 가지(사부四部)로 분류되어 3503부 7만 9377권[2]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이 되었다. 이것을 편찬하는 데 동원된 학자들만 해도 무려 1만 4백여 명에 달했으며 필사에 동원된 인원은 4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인력동원 규모 면에서도 엄청났다. 전근대 사회에서 이 정도 전문인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저작물을 완성할 수 있는 행정력을 가졌음은 엄청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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