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민 한국외대 교수: 잃어버린 30년의 오해; 2016년 아베노믹스는 총수요정책에서 총공급정책으로 선회, 기시다 정권도 총공급에 방점을 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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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불과 2년 만에 많이 달라졌다. 올해는 일본의 경제성장률 이후 25년 만에 우리를 추월할 것이라는 소식에 다시 '한일 역전'이 화제다. 사실 2021년엔 우리의 경제 순위가 상승했다기보다 일본의 순위가 하락한데 따른 일종의 착시에 가까웠다. 경제 규모 면에선 여전히 격차가 크고, 본격적인 경제 협력으로 우리 기업들에 돌아갈 기회가 적잖다.
비극적인 과거사가 있고, 갈등 요인이 상존하는 인접국 일본에 대해 우리는 항상 경쟁의식이 강했고, 최근엔 근거가 약한 우월의식에 빠질 때도 있다. 일본에 대한 정치, 사회, 문화, 경제에 대해 겹겹이 쌓인 오해와 편견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제 한일관계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기가 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관계 개선에 따른 실익도 잘 챙길 수 있다. 국내 최고의 일본 전문가 중 한명인 이창민 한국외국어대학교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를 만나 일본의 성공과 실패 등 진면목과 우리가 정면교사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이창민 한국외대 교수 /사진자료=EBS |
· 아베노믹스와 저온호황
· 코로나19發 역대급 경제 충격을 극복한 뒤 부는 훈풍
· 물가와 임금이 오르기 시작하다
· 디지털을 각성하다
· 한미일의 약한 고리 한일
· 한국 경제가 더 잘나가니 일본과 협력할 필요 없다?
· 한일 두 부자 나라를 합친 어마어마한 시장
· 일본은 우리의 교과서다
우리가 일본 경제를 이야기할 때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건 레토릭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기를 세세하게 나눠서 볼 필요가 있어요. 30년을 세 개로 쪼개면 가운데 10년이야말로 정말 처절하게 잃어버린 10년이고, 앞에 10년은 자산시장 거품이 꺼졌지만 생각보다 실물경제에 큰 타격은 없었고, 뒤에 10년은 아베노믹스와 같은 실험도 하고, 구조조정과 회복의 기간이었습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시간을 30년까지 확장하는 것은 아베노믹스로 인해 고용, 투자, 소비 등 민간 부문에서 전혀 좋아진 것이 없다는 얘기인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이 때가 지난 20~30년 동안의 일본경제의 체질이 바뀌는 기간이었다고 봅니다.
저명한 경제학자였던 고(故) 아오키 마사히코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는 일본 경제의 1990년대는 1940년대에 만들어진 일본식 경영의 폐해가 완전히 드러나 생명을 다한 시기라고 했습니다. △장기 고용 △연공서열 △기업별 노조 △특정 은행과 장기적 거래 관계를 유지하는 메인 뱅크 시스템 △순환출자 및 지분 소유를 통한 '게이레츠'(系列·계열) 지배구조 등과 같은 경영방식이 1970~198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리다 1990년대부터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본 경제가 실질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2000년대 들어서입니다. 1990년대는 자산가치가 폭락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경제위기는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1991년에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고 1997년까지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5%로 지금보다 좋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기업들이 고용을 유지했는데 2000년대부터는 '리스토라'(구조조정의 일본식 표현)가 본격화됐고, 취업 빙하기가 시작됐습니다. 일본 전후(戰後) 실업률이 높은 두 시기가 2002~2003년과 2009~2010년으로 그 시기입니다.
일본 경제의 정말 잃어버린 시기는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부터 2011년 동일본대지진 전후까지입니다. 레토릭이 아니라 정말 디플레이션이 발생했던 시기였습니다. 일본정부는 공식적으로 2001년과 2009년에 디플레이션을 인정했었죠.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도 전인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10여년의 기간동안 수요와 공급 모두 충격을 겪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고이즈미 이후 6년간 6명의 총리가 바뀌는 암흑기였습니다.
2010년대 들어서는 도시바 분식회계, 미쓰비시 자동차 연비 조작 등 기업의 모럴 헤저드(도덕적 해이) 문제가 잇달았습니다. 오랜 역사의 기업들이 도쿄대학교 등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만 뽑아서 기업을 운영했는데, 문제를 알고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조직문화의 폐해가 심했죠. 반면 비슷한 시기에 토요타, 소니, 히타치와 같은 기업들은 세대교체를 하거나 주력사업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리더십과 조직문화가 바뀌면서 기업이 탈바꿈했습니다.
아오키 교수는 낡은 구조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려면 한 세대, 즉 30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이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2010년대에 구조조정에 성공한 기업들은 2020년대 들어 성과가 나오고 있고, 성공하지 못한 기업들은 계속 도태되고 있습니다. 완전히 체질 개선에 성공한 소니나 히타치 같은 기업들의 실적 향상이 지금 일본 경제의 회복을 이끌고 있습니다.
=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일 (현지시간) 도쿄 자민당 당사에서 총재 3연임에 성공한 뒤 축하를 받고 있다. (C) AFP=뉴스1 |
아베노믹스는 2012년 12월 26일부터 2020년 9월 16일까지 7년 8개월여 지속된 제2~4차 아베 신조 내각의 경제정책이었습니다. △대담한 금융정책 △기동적인 재정정책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성장전략이라는 세 개의 화살을 제시했죠. 앞에 두 가지는 총수요 정책이고 뒤에 한 가지가 총공급 정책입니다.
일본 내에서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선 일본 경제의 문제는 총수요의 부족이라는 것입니다. 디플레이션 기대가 일본 경제를 이른바 '디플레이션 함정'에 빠뜨렸기 때문에 양적완화를 통해 디플레이션 기대를 타파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총요소생산성(TFP)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총공급 측면의 주장도 강했습니다.
아베노믹스 초기 2년 동안엔 총수요 정책, 특히 양적완화가 메인이었습니다. 2년이 지나고 나서 평가해 보니 소비자물가상승률 2%, 명목경제성장률 3%, 실질경제성장률 2%의 정책 목표를 딱 절반만 달성을 한 거예요. 그래서 2016년부터는 총수요 정책에서 총공급 정책으로 아베노믹스의 중심축이 바뀝니다. 양적완화의 성격도 방어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시기의 총공급 정책이 제대로 성과를 냈는지, '일하는 방식 개혁'과 같은 정책이 효과가 있었는지 확실히 말하기는 힘듭니다만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아베노믹스 후반부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총공급 정책에 더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아베노믹스 기간은 구조조정과 체질개선으로 부활한 기업들도 있기 때문에 '잃어버렸다'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베 총리가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된 것은 비록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아베노믹스 경기가 몰고 온 온기를 꽤 많은 일본 기업과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실질경제성장률이 1%대라고는 하지만 명확하게 경기가 좋다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황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저온호황'(weak boom)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저온호황은 기업은 호황인데 가계는 불황인 상황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엔고로 수출이 불리해진 기업들이 해외로 나갔고, 현지생산 현지판매를 했습니다. 아베노믹스 때 엔저가 됐지만 아직도 일본은 자본수익률이 너무 낮고 환차익까지 고려하면 여전히 해외가 나았습니다. 기업의 영업이익은 늘어났지만 리쇼어링도 안되고 국내투자도 안되다 보니 임금상승과 소비 향상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아베노믹스는 결국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막을 내렸습니다.
(도쿄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현지시간) 도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참석해 2월 말까지 코로나19 백신 3차 접종을 2배로 끌어올려 하루 100만 회 접종을 시행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C) AFP=뉴스1 |
2020년, 일본의 2분기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7.9%를 기록합니다. 일본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컸던 경제충격 중에 하나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락다운이나 도시봉쇄를 하지 않고 최소한의 경제적인 활동을 영위해 회복을 해나가면서 사망자와 중환자를 관리하는 일본 모델은 당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 긴급사태 및 중점조치를 지난해 모두 끝내면서 일본 경제가 회복세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수습 국면인 2021년 10월에 취임한 기시다 총리는 경제 정책을 총공급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Modern Supply-Side Economics'(MSSE·현대공급중시경제학)라는 새로운 공급경제학의 정책들과 많이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의 양육비 부담을 덜어줘 그들이 노동 공급을 늘릴 수 있게 만들거나 첨단산업과 연관된 SOC(사회간접자본) 인프라 투자를 늘리는 등 정부가 적극적인 산업 정책을 통해 총공급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입니다. 최근 경제 지표가 좋아진 것도 이 총공급 관련 정책의 효과가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미중 패권경쟁의 반사이익을 누리면서 국내 투자로 연결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반도체도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가 40나노미터급 범용 제품밖에 생산을 못했는데, 대만 TSMC를 유치해 20나노, 10나노 반도체를 만들고, 10나노 이하의 최첨단 반도체는 대기업 연합이 설립한 라피더스가 미국 IBM과 유럽의 업체들로부터 기술 공여를 받아서 개발 중입니다.
일본은 반도체 분야 외에도 우주 산업, 탈탄소 산업 등 최첨단 분야에 예산 5000억엔(약 4조5000억원)을 집행했습니다. 경제안보 전략으로 리쇼어링(re-shoring, 해외진출 기업의 자국 복귀)과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 우호국이나 동맹국들과 공급망 구축)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실시하면서 국내 투자가 늘어난 부분이 확실히 좀 있습니다.
특히 2010년대에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첨단산업 분야에서 완전히 환골탈태한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호황 국면이 과거의 이자나미 경기(2002년 2월∼2008년 2월)이나 아베노믹스 경기(2012년 11월∼2018년 10월)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최근 기업 관련된 지표는 전반적으로 다 좋아진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증시가 버블붕괴 이후 30년 만에 최고입니다. 지난해 일본 기업의 경상이익은 총 93조엔(약 840조원)입니다. 토요타는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이 일본 기업 최초로 1조엔(약 9조원)을 돌파했습니다.
주로 수출대기업들, 특히 해외에 생산거점을 둔 기업들을 중심으로 매출이 증가하고 영업이익이 개선되고 있습니다. 엔저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기업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일본의 경제 구조는 해외에 진출한 기업들이 밖에서 벌어서 밖에서 재투자하고, 안으로 갖고 오지 않는 구조이고, 달러를 엔으로 바꿔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엔저 상황이 쉽사리 개선되지도 않습니다.
기업들은 현지에서 생산하고 현지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국내 설비 투자는 잘 늘리지 않는데 최근 민간 기업의 설비 투자 규모가 늘고 있다는 게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올해 100조엔(약 90조원)이 넘을 걸로 예상이 되는데 1991년 이후 32년 만에 최대 규모입니다. 또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이 기업들에 임금 인상을 독려하고 있는데, 올해 춘투 타결 인상률은 3.58%로 지난 1993년의 3.9% 이후 최고치입니다. 그동안 기업들의 설비 투자, 임금 인상이 없어 왔는데 이 부분에 변화가 보이는 점이 굉장히 주목할 만합니다.
지금까지 일본 국민들은 금리가 없는 세상, 물가가 오르지 않는 세상에 익숙했습니다. 일본 유명 외식업체 요시노야의 규동과 맥도날드의 빅맥 가격이 30년 동안 오르지 않았는데 최근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젊은이들은 처음 겪는 굉장히 생경한 상황입니다.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올해 계속 3%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물가상승률은 일본에서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물론 2022년 말부터 2023년 초까지의 물가 상승은 수입 원자재 비용 상승 요인이 컸습니다. 다만 최근들어 조금씩 수요와 임금 상승이 물가를 견인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업들이 전반적으로 임금 인상을 하고 있고, 이에 소득과 소비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코로나 충격에서의 회복이 2년 지연된 착시 효과도 있는 게 한계입니다.
지금 회복 수준은 2019년 GDP수준을 겨우 회복한 것입니다. 코로나 충격에서 벗어나는데 4년이 걸린 셈입니다. 2분기 경제성장률도 예비치 1.5%에서 속보치 1.2%로 하향 조정됐는데,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수는 늘었지만 내수는 줄었습니다. 민간의 설비 투자와 소비 모두 감소했습니다.
해외에 생산거점이 있는 수출대기업들은 엔저로 이득을 봤지만 내수 중심의 중소기업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임금 상승도 대기업은 4% 가까이 되는데 일본 전체 고용의 7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3% 수준으로 온도차가 있습니다. 부동산 가격도 전문직 고소득층이나 대기업 고연봉자가 선호하는 도쿄 신축 맨션이 최근 60% 정도 올랐는데, 지방에까지는 아직 온기가 전달되기 어려운 상황으로 보입니다.
일본 경제의 추세 전망은 3분기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3분기에 민간 소비와 설비 투자가 증가하면 장기불황 탈출의 전망이 나올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2000년대 들어 좋았던 두 번의 경기, 즉 이자나미 경기와 아베노믹스 경기 형태의 경기순환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국내 시장의 내수가 축소되고 자본수익률이 하락해서 해외로 나갔습니다. 결국 성장이 안돼서 나간 것이라 국내에서 설비 투자를 늘리거나 임금을 인상하기는 어려운 태생적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 유럽, 중국, 인도, 남미에 나가 있는 공장들을 다 리쇼어링하기는 이제 어렵죠. 이러한 한계 때문에 저성장 기소 속에서 저온호황을 반복하는데 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국내 시장 축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관건인데, 본질적인 해결책은 사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인구를 늘리기란 굉장히 힘듭니다. 일본이 1989년부터 '엔젤플랜'이라는 저출산 대책을 시행해 합계출산율 1.8을 목표로 30년 이상 돈을 쏟아부었지만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1.3 밑으로 떨어졌다.
일본 사람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때 전염병 공포와 경제적 어려움 외에 또 충격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디지털 전환입니다. 전문가들은 2025년에 디지털 절벽이 온다고 계속 지적했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 때 아날로그한 확진자 집계나 백신 접종, 지원금 지급 방식이 전 세계적으로 실시간 비교가 되면서 사람들이 그제서야 일본이 얼마나 디지털 전환에 뒤처져 있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코로나 때 그런 충격을 받고 많은 일본 사람들은 각성을 했습니다. 공공 부문 뿐만 아니라 민간 부문도 처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 기업들은 디지털화에 뒤처지면 도태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일본이 디지털 후진국이라며 비웃었던 것은 모두 공공 부문이었습니다. 기업을 포함해서 민간 부문은 디지털화의 격차는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디지털화에 정말 뒤쳐져 있구나'라고 인지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질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정말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우리가 웃고 있지만 각성한 일본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반도체 기술·산업은 벌써 경기 회복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은 반도체의 설계부터 생산, 후공정까지 모든 것을 국산화하겠다는 '올 재팬'(All Japan)'에 집착했습니다. 기술 유출을 우려한 전략이기도 했지만 결국 1990년대에 일본 반도체가 몰락한 배경이 됐습니다. 반도체 생산이 세계적으로 분업화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고립됐고 생산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다만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면서 강점이 있던 소재·부품 ·장비 부분은 경쟁력을 유지했습니다.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미국 인텔, IBM, 마이크론과 대만 TSMC를 유치했습니다. 올 재팬을 버리고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들과 첨단산업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는 프렌드 쇼어링을 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일본에 첨단 반도체 연구시설을 만든다고 하는데, 기술개발 조차도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동맹국들과 함께 하겠다는 뜻입니다. 한국 기업에 기술 유출을 우려하는게 아니라 협업을 한다는 것으로 예전의 일본에선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우리가 7대 우주 강국이라고 하지만 일본의 우주 산업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1972년 아폴로 17호의 마지막 달 착륙 이후 50여년 만인 2025년까지 달에 다시 유인 착륙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르테미스 프로젝트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우주 관련 기관과 기업들이 연계하는 국제 프로젝트인데요. 일본의 항공우주연구개발기구(JAXA), 토요타, 미츠비시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토요타는 이 프로젝트에서 달의 표면을 다닐 수 있는 월면차 루나 크루저를 만든다는 건데요. 토요타는 첨단 분야인 전기차 개발에 취약해 미래가 어둡다고 보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 토요타는 수소 쪽으로 무게중심을 두고, 자동차 산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차세대 산업인 우주 산업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로봇 산업은 이미 최강국이죠. 전 세계 10대 산업용 로봇 기업엔 세계 1위 시장점유율의 화낙을 비롯해 야스카와, 가와사키, 미츠비시, 나치, 덴소 등 일본 기업들이 즐비합니다.
일본이 지난해 첨단기술 육성 및 보호를 핵심으로 하는 경제안전보장추진법(경제안보법)을 제정한 것은 큰 정부의 귀환을 뜻합니다. 지금까지는 작은 정부의 시대였습니다. 기업들이 WTO(세계무역기구) 자유시장경제 체제 하에 글로벌 밸류체인을 만들어 비즈니스를 확대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는 통상백서를 통해, 이제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많은 큰 정부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정부 주도로 산업을 재편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장에 맡겨야 될 때 정부가 과도한 개입을 하면서 문제가 된 적도 많았지만 정부의 역할이 필요할 때도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현재 일본 정부가 첨단산업과 산업정책을 연계해 기업을 지원하고, 기업들이 그 모티베이션에 부합하는 비즈니스를 확대해가는 모습은 상당히 주목할 만 합니다.
(서울=뉴스1) 오대일 기자 =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인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2023.8.18/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그동안 한미일 3국의 정상들이 다자회의에 참여해서 별도로 회담을 가진 적은 많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3자가 단독으로 회담을 한 것은 최초입니다. 저는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입장에선 이제 한국이 선진국으로 대우를 받았다는 의미이거든요.
내용 면에서도 높게 평가할 만합니다. 이전까지는 한미일 회의의 기본 의제가 북한 문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평화였습니다. 이번 의제는 인도·태평양이에요. 중국 이야기만 한 게 아니고 경제안보를 위해 기술 협력, 인적 교류 등은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광범위한 논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 전략을 짜는 데 있어서 이제 미국, 일본과 함께 대등하게 논의할 수 있는 상대가 됐다는 것이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합니다. 안 좋게 보는 분들은 미국과 일본은 얻어낸 게 많지만 한국은 손해만 봤다고 하는데 일단 평가해야 하는 부분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앞으로 정상회의와 고위급 회담을 정례화하겠다고 했듯이 지금 틀,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인데 이 자체를 진영논리에서 비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것이죠.
한국, 중국, 러시아 이렇게 협력체를 하는 건 말이 안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한일이 굉장히 약한 고리거든요. 이게 미국 입장에서도 많이 불안했을 겁니다. 정권에 따라서 왔다갔다하니 정말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가 맞나 싶었을 겁니다.
앞으로 프렌드 쇼어링은 분명히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북중러 블록도 당연히 더 강화되겠죠. 이것이 우리에겐 잠재적으로 가장 큰 불안요소입니다. 우리가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내년 미국 대선도 관건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연임하면 한미일 공조가 더 공고한 형태를 갖추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에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장기적으로는 한국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날 경우 원점으로 또다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게 일본이고요.
윤석열 정부도 이 부분을 신경쓰는 것 같습니다. 일본이 요구하고 미국도 주목하는 이른바 불가역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사실 그게 쉽지는 않겠습니다. 이 방향성이 맞다고 여긴다면 빠른 시일 내에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정착시켜야 될 것입니다. 윤 대통령의 임기 중에는 어느 정도 시스템화돼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은 대통령이 바뀌면 당연히 정책도 뒤집히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일본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입니다. 일본의 자민당 장기집권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정책의 일관성 또는 예측가능성이 높은 편입니다. 심지어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돼도 큰 틀에서의 변화는 없어요. 우리가 대일본 전략을 짤 때 항상 고려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예전에는 구체적인 효과나 근거가 없더라도 협력하는 게 좋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 2021년에 '한일역전'이 화제가 되면서 일본과 굳이 경제협력을 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얘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먼저 한일역전에 대해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1인당 GDP, IMD 국가경쟁력 등 역전된 지표들은 대부분 우리 순위가 올라간 게 아니라 일본 순위가 떨어진 경우입니다.
우리가 매우 잘해서 역전했으면 자랑스럽게 얘기해도 되겠지만 사실 이 얘기가 처음 나온 건 일본이었습니다. 경제 관료 출신의 저명 경제학자인 노구치 유키오 히토츠바시대 명예교수가 이대로가면 일본은 한국에 G7 자리를 뺏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자국에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에 편승해서 일본 경제를 역전했으니 협력할 필요도 없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거죠.
한일 간 교역이 줄었기 때문에 협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2012년부터 직접 교역 규모가 감소하는 지표를 근거로 그런 주장이 나오는데 데이터를 잘못 읽은 겁니다. 예전엔 일본이 한국에 재료나 부품을 수출하고, 우리는 그것을 가공해 수출하는 수직적 분업 관계였기 때문에 직접 교역 규모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 산업 구조가 비슷해져 직접 교역이 줄었습니다. 대신 글로벌 밸류체인 안에서 교역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국에 진출한 토요타에 자동차 강판을 포스코가 공급합니다. 즉 강판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국을 경유해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제3국에서 연결될 일이 훨씬 많은 거죠. 그래서 단순히 직접 교역 규모가 감소했기 때문에 일본과 협력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글로벌 밸류체인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기업들 간의 협력은 정부가 하는 것도 아니고 국민들이 국민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기업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기업들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생리이지만 서로 협력해야 할 지점이 생기기도 합니다. 현대자동차와 토요타는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포스코와 토요타는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정부가 정해주는 게 아닙니다. 국민이 협력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기업이 판단해야 되는 겁니다.
따라서 정부는 기업의 모티베이션이나 인센티브를 고려해 정부정책을 만들고 추진해야 합니다. 경제안보도 기업의 모티베이션과 일치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이 지난해 만든 경제안보법과 관련한 부속 문서에는 기업의 인센티브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기업에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으면 정책이 실패한다는 것을 일본 정부는 그동안의 많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정부도 한미일 협력 체계에서 경제안보 정책을 펼칠 때 방점은 기업에 찍어야 하고, 기업의 모티베이션에 맞춰서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미국과 일본도 분명 그럴 것입니다.
(도쿄=뉴스1) 유승관 기자 = 일본 도쿄 신주쿠 신오쿠보역 인근 한인타운 |
물론 정부가 할 역할도 많습니다. 시장이 실패하는 영역이 있잖아요. 그냥 놔두면 기업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리스크가 큰 분야가 특히 그렇죠. 대표적인 게 희귀광물입니다. 위험성이 높고 전문성이 필요한 희귀광물의 탐사·발굴에 기업이 선뜻 나서기가 어려울 수 있죠.
일본은 일본에너지금속광물자원기구(JOGMEC)가 상사(商社)들과 힘을 합쳐 전 세계에서 희귀광물을 탐사·발굴해 국내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2010년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수출중단 보복 조치를 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공기업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확보전략을 마련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걸 해야 합니다. 일본과 협력해서 하면 더 좋습니다. 우리와 일본은 전 세계에서 대표적인 자원부족 국가입니다. 희토류도 없습니다. 서로 이해가 상충할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해가 일치합니다. 함께 개발해 함께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원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정부가 하루빨리 이런 일을 찾아 해내야 하는데, 자원 개발은 이명박 정부 이후로 낙인이 찍혀서 굉장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관련 기구들이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있을 겁니다.
이처럼 일본과 서로 니즈가 일치하는 협력 분야를 찾아보면 많을 것입니다. 서비스 산업도 앞으로 협력하기 좋죠. 특히 양국의 젊은이들이 서로의 문화를 매우 좋아하는데 편견도 없고 열등감도 없이 문화 콘텐츠를 향유합니다. 문화를 통한 큰 기회의 창이 열려 있습니다. 두 나라는 또 노인대국이죠. 우리보다 고령화를 훨씬 일찍 경험한 일본의 실버산업은 엄청나게 발달해 있습니다. 우리가 벤치마킹할 것이 많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입니다. 두 부자 나라의 엄청난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들이 있는 어마어마한 시장을 열 수 있습니다. 기업들엔 정말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산업·비즈니스 교류 기회와 아이디어가 엄청나게 많을텐데 아직까진 다 놓치고 있습니다.
(서울=뉴스1) 오대일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 바라트 만다팜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 홈페이지) 2023.9.10/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전 세계에 어느 나라를 봐도 일본만큼 우리와 비슷한 나라가 없죠. 산업 구조, 인구 구조, 경제 구조가 상당히 비슷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린 매우 좋은 교과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스스로 겪은 게 교과서가 되죠. 아시아에서 산업혁명을 경험했고, 고도경제성장이라는 말도 만들어 냈습니다. 버블 붕괴를 비롯해 장기불황으로 가는 '재패니피케이션'(Japanification·일본화)도 다 일본이 만든 교과서 단어입니다.
일본은 모르고 당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이라는 교과서가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행운입니까. 버블 붕괴의 충격을 잘 알기 때문에 금리 조정을 급격하게 하지 않죠. 부동산에서 공급이 수요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일본을 보고 잘 알고 있습니다. 수요 억제 정책으로는 집값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도요.
반면교사, 정면교사 교과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유리합니다. 인구 감소, 고령화, 연금 개혁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은데 일본이라는 교과서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처럼 지뢰를 밟지 않고 잘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본이라는 교과서를 잘 활용하려면 일본이라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정치 구조는 어떤지 정확하고 세세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일본과 대화하고 일본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다른 나라를 배워야 할 때 주로 언어와 문화를 배웠습니다. 그 나라에 가서 비즈니스를 하거나 취업을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진국이 된 이제는 그 나라를 잘 알려면 그 나라의 지역학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지역학은 선진국에만 있습니다. 중동학이나 일본학 같은 게 제일 발달돼 있는 곳이 미국이잖아요. 지역학이 잘 돼 있는 곳은 미국, 유럽, 일본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계 전략을 짜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대(對) 중동 전략, 남미 전략, 아프리카 전략들을 다 짜야 하잖아요. 우리는 그동안 전략을 배우는 게 아니라 언어를 배웠던 거예요. 물론 우리는 이제 선진국이 됐으니 지금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중국어를 배운다기보다 중국 그 자체를 연구해야 중국에 대한 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협력 체계를 미국, 일본과 같이 하는 위치에서 함께 의제를 논의하는데 우리 스스로도 의제를 만들어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계 전략이 없으면 의제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일본 총리의 말 한마디나 일본은행의 정책변경이 전 세계 뉴스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나 한국은행의 정책이 세계적인 파급 효과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의 발언, 중앙은행의 정책, 기업의 움직임을 세계가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선진국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제는 대(對)세계 전략을 세워야 할 때가 됐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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