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에서 유일하게 천황에게 반기를 든, 일본 3대 원령으로 꼽히고, 중국-한국식 역성혁명을 외쳤던 타이라노 마사카도
일단 반역자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만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세력가였으니[21] 자연히 당시 사람들에게는 절세의 호걸로 여겨졌으며, 일본의 원령 사상과 결합되어 마사카도를 숭배하는 움직임이 생겨나 민간 신앙으로 발전했다. 특히 그가 기반했던 반도(坂東: 관동)는 옛날부터 수도로부터 촌구석, 미개지역 취급을 받던 곳이라 그 일대에서는 수도인 교토 조정의 횡포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떠받들렸다. 이런 영향력 때문에 훗날 그는 일본삼대원령 중 한 명으로 인식되게 된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일본 천황의 존재와 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역사, 사회에서 놓고 볼 때 이질적인 존재였다. 일본의 군주인 천황은 맹자의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유교적 정치문화 측면에서 보면 꽤나 이질적인 존재이다.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다른 왕조 국가들과 달리, 진승의 왕후장상이 어디 그 씨가 따로 있다더냐라는, 백성에 의한 혁명과 왕조 교체를 긍정하고 나아가서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질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는 그 유명한 말이나, "정치 똑바로 못하면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임금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맹자의 천명 사상과 역성혁명은 일본 현실 정치에서 좀처럼 통용되지 않았던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마사카도가 살았던 헤이안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천황과 쇼군의 권위가 말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던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입을 옷이 없어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즉위식은 고사하고 선제의 장례식 치를 돈도 없어 글씨를 팔아서 혹은 다이묘들의 성금을 받아서 연명하든 일본 안에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온갖 신분 세탁과 족보 위조를 통해서 자신은 겐페이토키쓰의 먼 친척이네 어쩌네 하면서 득세해서 권력을 잡고 자기 주군까지 쳐내는 하극상을 벌이며 등장한 그 많고 많은 유력 다이묘들이 "내가 천하를 쥐겠노라" 호언하면서도 정작 교토의 천황과 그 조정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끌어내리고 유명무실해진 무로마치 막부를 아예 박살내 버린 '마왕' 오다 노부나가조차도 천황은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무사정권 수립 이래로 실권을 잃고, 백 년에 걸쳐 거의 화석 내지 껍데기뿐인 존재로 전락한 천황이였음에도 일본의 그 수많은 무사들, 다이묘들이나 잇코잇키도 마사카도처럼 그 천황이 정점에 위치해 군림하는 기존의 일본 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로부터 이탈해 독립하려 들었던 역사가 손에 꼽을 정도로 없고,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글씨를 팔아서 연명하든 '천황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으로 신성불가침적 존재이며, 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유일무이한 ‘군주’이니, 하늘이 무너지고 집안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천황은 오직 천황의 일족 외에는 그 누구도 될 수 없다'라는 명제를 고정불변의 절대적 진리로 여기며 부정하지 않았던 일본 사회에서 그러한 일본의 지배 체제와 사회 구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인물은 일본 역사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 외에 그 어떤 인물도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차라리 전국시대는 실권이 없어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속되게 말해 "거저 줘도 안 하는 자리"라는 이유를 들어 넘겨 버릴 수 있더라도, 엄연히 천황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군주로써 군림하고 동시에 통치하던 헤이안 시대에 천황에 대한 '찬탈'을 노리는 이가 마사카도 이전, 그리고 이후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22] 같은 시대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역사의 다른 군주정 국가들과 비교해도 분명히 이질적인 특징이 틀림없다. 천황이 특별히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의 여느 군주들보다 선정을 펼쳐서 그랬을 리는 당연히 없고,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 역사와 일본 사회에서 어떤 위치이기에, 그리고 그 천황을 정점으로 세워진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회 구조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짚어보는 과정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존재는 분명히 이색적인 존재인 동시에 이단적인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봉기하면서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예로부터 힘 있는 자가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러했다. 바로 얼마 전에 발해도 거란에 멸망하지 않았던가. 내가 가진 이 무력도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니, 하늘로부터 받은 이 무력으로 내가 이 일본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다 한들 그것 역시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뿐이지 않느냐 말이다"라는 말은 마사카도가 자신이 동쪽에서 군사를 일으켜 관동 지방을 석권한 '모반 사건'의 대의명분을 '하늘'로부터 찾고 있으며, 마사카도 자신이 간토 지방을 차지할 수 있었던 '무력' 또한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맹자가 말했던 천명사상과도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성의 뜻으로 군사를 일으켰다"고는 운위하지 않았다 해도 자신의 군사력은 엄연히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것과 그것을 행사하여 자신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새로운 임금'이 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비추어 정당한 것이라는 논리는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에서야 지극히 당연한 사고방식이었지만 마사카도 이전이나 이후에 그 누구도 감히 입 밖에 꺼내기는 고사하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파천황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천명사상은 일본이 당나라로부터 율령제를 배워 올 때부터 수용된 것이었지만, "임금에게 덕이 없다면 하늘은 새로 덕이 있는 자를 찾아내 그에게 '천명'을 부여하며, 그로 하여금 왕조를 교체하게 한다"라는 사상은 일본서기에서 일본 신토의 최고위 신이자,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가 니니기에게 말한 이른바 '천양무궁의 신칙' 즉 "지상은 내 후손인 니니기와 그 자손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라는 천황에 대한 일본의 고대적인 관념과는 정면에서 상충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천황의 자리에는 오로지 천황의 일족만이 오를 수 있었고, '천양무궁의 신칙'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천황의 황권에 대해 그걸 '리콜'하거나 '회수'할 권리는 고사하고 이의를 제기할 존재는 일본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임금이라도 정치 똑바로 못하면 쫒겨난다는 맹자의 사고방식 자체는 일본에도 분명히 존재했고 긍정되었다.[23] 문제는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쫒겨난다"의 지목 대상에 어떤 경우에도 천황이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점이고, 이는 천황이 실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차이가 없었다. 맹자가 말한 "하늘과 백성을 거스르고 실정을 일삼는 군주는 그 덕이 쇠약해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덕이 있는 다른 자에게로 옮겨가 버릴 수도 있다"는, 동시에 마사카도가 말한 누구든 임금의 자리에 오를 만한 힘이 있는 자는[24] 누구든 그 자리를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다른 동아시아의 국가들과는 달리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봉기한 것과 시기를 같이 해서 대륙에서는 3백 년에 걸쳐 세계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일본이 한반도 국가들과 함께 국가 경영의 모범으로써 적극 모방했던 당나라가 멸망(907)했고, 일본 황실의 시작과 시기를 거의 비슷하게(어쩌면 더 앞서) 시작했던 신라도 발해(926)에 이어 멸망(935)했다. 당나라의 쇠퇴와 멸망은 일본에 있어서 국가와 황실의 모습을 바꾸는, 정확하게는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학계에서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25]부터 일본에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천황이 국토와 신민을 지배한다"는 관념도, "천황의 신격 아래 국가 기구를 일원적으로 통합하자는 이념"도 희박해져갔고, 이런 와중에 10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더 이상 고대적인 황권의 잔존만으로는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의 '군주'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천황에게 일본을 다스리는 통치자 즉 임금으로써의 정당성은 어떻게 성립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어려웠다고[26] 지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등장해서 "나는 하늘이 주신 이 무력으로 관동을 점령했다. 이제 하늘의 명을 받은 이 내가 새로운 천황으로써 일본을 지배한다"고, 중국식 '천명사상'을 외치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천명 사상'을 자신의 봉기를 정당화한 마사카도가 실패한 뒤에, 일본에서 천명 사상은 다른 형태로 수용되었다. 마사카도 이후에 등장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시대에는 귀족들 사이에도 '급'과 '직무'가 나뉘어 특정한 사회적 지위와 그에 관련한 직무(관직 포함), 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토지)과 행정 기록 작성 및 관리도 가(家)라 불리는 각각의 특정 가문에서 나누어 맡고 이를 집안 대대로 세습하게 되는 형태로[27] 일본 중세 귀족 사회 질서의 골격이 굳어져가던 와중이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 역시 정실부인의 아들이 대대로 섭관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으로 '섭관가(攝關家)' 즉 섭가(섭정관백가)를 이루었으며, 마사카도와 스미토모의 반란을 진압한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다이라노 사다모리,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다치바나노 토야스, 그리고 오노노 요시후루 등의 후손들이 군사 임무를 집안 단위로 도맡아 세습하는 무문(武門) 즉 무가(武家)로 자리잡은 것도 이러한 특정 가문에 의한 사회적 지위 및 직무의 세습 현상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안들의 각각의 '가업'과 '격'을 근저에서 뒷받침한 것이 일본에서 '군주'의 지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하는 집안인 '가문' 즉 일본 황실의 존재였고, 사회적인 지위와 직무를 집안 단위로 분담, 세습하게 된 '섭가', '무가'와 같은 각 집안들은 그들의 위치와 역할로 이 '황가'를 보좌하고 그 존립을 보장하는 일을 책무로써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형태로 천황의 '일본의 군주'로써의 존립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천황의 조정을 보좌해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명신(明臣)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직계가 맡고, 치안을 유지하고 외침을 방비하는 역할을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진압한 '국가유공자'의 후손들이 맡듯이 천황 역시도 아마테라스 이래의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체(천황)'이라는 지위를 보존하고 독점적으로 그 후손에게 계승시킬 권리를 지닌 집안이며, 섭가도 무가도 모두 이 '황가'를 보좌하여 내우외환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다스려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라고 천황의 존재 이유를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사학자 우에지마 스스무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이후 천황의 신격 아래 국가 기구를 통합하려는 이념은 후퇴했지만, 대신 천황의 '신격'과 '지위'를 완전히 분리하는 사고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즉 천황이라는 지위와 이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지켜야 할 것이 되어도, 그 천황의 지위에 있는 현실의 인간은 분명히 구별되어, 천황이라는 지위와 이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계속 유지, 계승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임금의 자리에 전혀 걸맞지 않은 수양제급 인간말종이 임금이 되어 정치를 개판으로 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면 당연히 그런 임금은 군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고 머지않아 지위를 잃게 된다는 것은 인정되었지만, 그 이념의 토대는 맹자가 말한 천명사상론이 아니라 불교적인 인과응보론[28], 그리고 신대(神代)로부터 내려온 온갖 고대적 전승들의 재해석이었다. "임금에 걸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군주를 삼는 것이 원칙이라고 해도, 일본의 경우는 임금의 종성(種姓)을 가지지 못하면 임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신대 이후로 정한 관습[29]이었고, 여기서 중국처럼 백성으로부터 들고 일어나 군주를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가 '신하 된 자의 자격'으로 '임금(인 인간)'을 갈아치우는 것을 신하의 책무이자 '임금(라는 지위)'을 지키는 한 방편으로 허용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마저도 갈아치우는 경우 그 갈아치우는 신하 자신이나 다른 백성 가운데 누군가를 새로운 군주로 삼는 게 아니라 천황의 다른 일족 가운데 '군주에 걸맞는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자'를 선출해서 세워야 한다는 규정 역시 빠지지 않았다. 천황이 혼자서 국가의 모든 정치를 다 할 수는 없으니 신하를 가려 뽑아 천황을 보좌하게 하되, 신하가 천황을 보좌하고 섬기며 천황을 지키는 역할에 '천황을 다른 황족 가운데에서 선출하여 교체하는 행위'를 포함시킨[30]것이 일본의 군주, 천황제의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31] 그리고 그렇게 군주(자리에 있는 인간)를 폐위시키는 것 역시도 군주(라는 제도)를 지키는 행위로 정당화시키면서 동시에 그 군주의 일족에 속하지 않은 하급 백성들로부터 무언가 '천명사상'을 내세워 군주의 자리에 도전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천황'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정립과 천황의 '군주'로써의 정당성에 대한 '재해석'이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동서 봉기를 진압한 뒤에 일어났다.
일본의 공영방송사인 NHK에서 만든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는 마사카도가 자신의 영지에서 농민들과 함께 대부분이 삼림 지대였던 땅을 개간하면서 철제 농기구를 생산해 보급하고, 영지에서 많은 수의 말을 길러 군사적으로 활용했으며 오늘날 알려진 것과 같은 휘어진 형태의 일본도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군사적 개혁도 행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한 다이라노 사다모리나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미나모토노 쓰네모토[32] 등의 후손들이 국가유공자로서 이세 헤이시나 카와치 겐지 등 네임드 무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헤이케 정권과 가마쿠라 막부, 그리고 이후 무사정권의 수립에 대해서도 한 다리 걸친 셈이다.
전국 시대의 오타 도칸(太田道灌)이나 호조 우지쓰나(北條氏綱) 등의 무장들도 간다묘진에 무운을 빌기도 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 간다묘진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으며 에도 막부가 들어선 뒤에는 아예 간다묘진을 에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시대에는 칙사로서 에도에 내려왔던 다이나곤(大納言)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廣)가 막부로부터 마사카도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조정에 호소해 역적이라는 이름도 제거하게 했다.(물론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진 뒤에는 가차없었다.) 에도 막부가 마사카도를 유난히 숭배한 것은 조정에 대항했던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막부의 수호신으로 삼음으로써 조정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간다묘진의 현 위치는 에도 막부가 옮긴 것으로 에도성의 동북쪽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곳에 해당한다고.
모로 미야가 쓴 헤이안 일본이라는 책에 보면 메이지 덴노가 살아생전 몸소 참배한 두 곳이 야스쿠니 신사와 마사카도의 간다묘진이었다고 적었다. 물론 조정에 반역했던 자에게 천황이 머리를 숙인다는 것이 아무래도 정서상 용납될 수는 없는지라 1884년에 메이지 천황이 간다묘진을 참배할 때는 마사카도의 신위는 신사 본전에서 빼서 경내의 섭사(부속신사)로 옮기고 본전의 빈 자리에는 원래 있던 오쿠니누시 신과 짝을 맞추어 스쿠나비코나 신을 권청해 모셨다. 마사카도가 간다묘진의 본전으로 돌아온 것은 1984년으로 섭사에 들어간 지 백 년만의 일이었다.
2014년에 일본의 모 여성잡지에서 '가장 끔찍한 악당' 4위로 꼽히기도 했다. 1위는 아케치 미츠히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2위는 하필 오다 노부나가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일본 천황의 존재와 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역사, 사회에서 놓고 볼 때 이질적인 존재였다. 일본의 군주인 천황은 맹자의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유교적 정치문화 측면에서 보면 꽤나 이질적인 존재이다.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다른 왕조 국가들과 달리, 진승의 왕후장상이 어디 그 씨가 따로 있다더냐라는, 백성에 의한 혁명과 왕조 교체를 긍정하고 나아가서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질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는 그 유명한 말이나, "정치 똑바로 못하면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임금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맹자의 천명 사상과 역성혁명은 일본 현실 정치에서 좀처럼 통용되지 않았던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마사카도가 살았던 헤이안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천황과 쇼군의 권위가 말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던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입을 옷이 없어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즉위식은 고사하고 선제의 장례식 치를 돈도 없어 글씨를 팔아서 혹은 다이묘들의 성금을 받아서 연명하든 일본 안에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온갖 신분 세탁과 족보 위조를 통해서 자신은 겐페이토키쓰의 먼 친척이네 어쩌네 하면서 득세해서 권력을 잡고 자기 주군까지 쳐내는 하극상을 벌이며 등장한 그 많고 많은 유력 다이묘들이 "내가 천하를 쥐겠노라" 호언하면서도 정작 교토의 천황과 그 조정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끌어내리고 유명무실해진 무로마치 막부를 아예 박살내 버린 '마왕' 오다 노부나가조차도 천황은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무사정권 수립 이래로 실권을 잃고, 백 년에 걸쳐 거의 화석 내지 껍데기뿐인 존재로 전락한 천황이였음에도 일본의 그 수많은 무사들, 다이묘들이나 잇코잇키도 마사카도처럼 그 천황이 정점에 위치해 군림하는 기존의 일본 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로부터 이탈해 독립하려 들었던 역사가 손에 꼽을 정도로 없고,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글씨를 팔아서 연명하든 '천황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으로 신성불가침적 존재이며, 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유일무이한 ‘군주’이니, 하늘이 무너지고 집안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천황은 오직 천황의 일족 외에는 그 누구도 될 수 없다'라는 명제를 고정불변의 절대적 진리로 여기며 부정하지 않았던 일본 사회에서 그러한 일본의 지배 체제와 사회 구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인물은 일본 역사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 외에 그 어떤 인물도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차라리 전국시대는 실권이 없어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속되게 말해 "거저 줘도 안 하는 자리"라는 이유를 들어 넘겨 버릴 수 있더라도, 엄연히 천황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군주로써 군림하고 동시에 통치하던 헤이안 시대에 천황에 대한 '찬탈'을 노리는 이가 마사카도 이전, 그리고 이후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22] 같은 시대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역사의 다른 군주정 국가들과 비교해도 분명히 이질적인 특징이 틀림없다. 천황이 특별히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의 여느 군주들보다 선정을 펼쳐서 그랬을 리는 당연히 없고,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 역사와 일본 사회에서 어떤 위치이기에, 그리고 그 천황을 정점으로 세워진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회 구조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짚어보는 과정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존재는 분명히 이색적인 존재인 동시에 이단적인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봉기하면서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예로부터 힘 있는 자가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러했다. 바로 얼마 전에 발해도 거란에 멸망하지 않았던가. 내가 가진 이 무력도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니, 하늘로부터 받은 이 무력으로 내가 이 일본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다 한들 그것 역시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뿐이지 않느냐 말이다"라는 말은 마사카도가 자신이 동쪽에서 군사를 일으켜 관동 지방을 석권한 '모반 사건'의 대의명분을 '하늘'로부터 찾고 있으며, 마사카도 자신이 간토 지방을 차지할 수 있었던 '무력' 또한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맹자가 말했던 천명사상과도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성의 뜻으로 군사를 일으켰다"고는 운위하지 않았다 해도 자신의 군사력은 엄연히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것과 그것을 행사하여 자신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새로운 임금'이 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비추어 정당한 것이라는 논리는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에서야 지극히 당연한 사고방식이었지만 마사카도 이전이나 이후에 그 누구도 감히 입 밖에 꺼내기는 고사하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파천황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천명사상은 일본이 당나라로부터 율령제를 배워 올 때부터 수용된 것이었지만, "임금에게 덕이 없다면 하늘은 새로 덕이 있는 자를 찾아내 그에게 '천명'을 부여하며, 그로 하여금 왕조를 교체하게 한다"라는 사상은 일본서기에서 일본 신토의 최고위 신이자,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가 니니기에게 말한 이른바 '천양무궁의 신칙' 즉 "지상은 내 후손인 니니기와 그 자손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라는 천황에 대한 일본의 고대적인 관념과는 정면에서 상충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천황의 자리에는 오로지 천황의 일족만이 오를 수 있었고, '천양무궁의 신칙'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천황의 황권에 대해 그걸 '리콜'하거나 '회수'할 권리는 고사하고 이의를 제기할 존재는 일본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임금이라도 정치 똑바로 못하면 쫒겨난다는 맹자의 사고방식 자체는 일본에도 분명히 존재했고 긍정되었다.[23] 문제는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쫒겨난다"의 지목 대상에 어떤 경우에도 천황이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점이고, 이는 천황이 실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차이가 없었다. 맹자가 말한 "하늘과 백성을 거스르고 실정을 일삼는 군주는 그 덕이 쇠약해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덕이 있는 다른 자에게로 옮겨가 버릴 수도 있다"는, 동시에 마사카도가 말한 누구든 임금의 자리에 오를 만한 힘이 있는 자는[24] 누구든 그 자리를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다른 동아시아의 국가들과는 달리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봉기한 것과 시기를 같이 해서 대륙에서는 3백 년에 걸쳐 세계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일본이 한반도 국가들과 함께 국가 경영의 모범으로써 적극 모방했던 당나라가 멸망(907)했고, 일본 황실의 시작과 시기를 거의 비슷하게(어쩌면 더 앞서) 시작했던 신라도 발해(926)에 이어 멸망(935)했다. 당나라의 쇠퇴와 멸망은 일본에 있어서 국가와 황실의 모습을 바꾸는, 정확하게는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학계에서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25]부터 일본에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천황이 국토와 신민을 지배한다"는 관념도, "천황의 신격 아래 국가 기구를 일원적으로 통합하자는 이념"도 희박해져갔고, 이런 와중에 10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더 이상 고대적인 황권의 잔존만으로는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의 '군주'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천황에게 일본을 다스리는 통치자 즉 임금으로써의 정당성은 어떻게 성립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어려웠다고[26] 지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등장해서 "나는 하늘이 주신 이 무력으로 관동을 점령했다. 이제 하늘의 명을 받은 이 내가 새로운 천황으로써 일본을 지배한다"고, 중국식 '천명사상'을 외치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천명 사상'을 자신의 봉기를 정당화한 마사카도가 실패한 뒤에, 일본에서 천명 사상은 다른 형태로 수용되었다. 마사카도 이후에 등장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시대에는 귀족들 사이에도 '급'과 '직무'가 나뉘어 특정한 사회적 지위와 그에 관련한 직무(관직 포함), 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토지)과 행정 기록 작성 및 관리도 가(家)라 불리는 각각의 특정 가문에서 나누어 맡고 이를 집안 대대로 세습하게 되는 형태로[27] 일본 중세 귀족 사회 질서의 골격이 굳어져가던 와중이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 역시 정실부인의 아들이 대대로 섭관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으로 '섭관가(攝關家)' 즉 섭가(섭정관백가)를 이루었으며, 마사카도와 스미토모의 반란을 진압한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다이라노 사다모리,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다치바나노 토야스, 그리고 오노노 요시후루 등의 후손들이 군사 임무를 집안 단위로 도맡아 세습하는 무문(武門) 즉 무가(武家)로 자리잡은 것도 이러한 특정 가문에 의한 사회적 지위 및 직무의 세습 현상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안들의 각각의 '가업'과 '격'을 근저에서 뒷받침한 것이 일본에서 '군주'의 지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하는 집안인 '가문' 즉 일본 황실의 존재였고, 사회적인 지위와 직무를 집안 단위로 분담, 세습하게 된 '섭가', '무가'와 같은 각 집안들은 그들의 위치와 역할로 이 '황가'를 보좌하고 그 존립을 보장하는 일을 책무로써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형태로 천황의 '일본의 군주'로써의 존립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천황의 조정을 보좌해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명신(明臣)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직계가 맡고, 치안을 유지하고 외침을 방비하는 역할을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진압한 '국가유공자'의 후손들이 맡듯이 천황 역시도 아마테라스 이래의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체(천황)'이라는 지위를 보존하고 독점적으로 그 후손에게 계승시킬 권리를 지닌 집안이며, 섭가도 무가도 모두 이 '황가'를 보좌하여 내우외환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다스려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라고 천황의 존재 이유를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사학자 우에지마 스스무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이후 천황의 신격 아래 국가 기구를 통합하려는 이념은 후퇴했지만, 대신 천황의 '신격'과 '지위'를 완전히 분리하는 사고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즉 천황이라는 지위와 이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지켜야 할 것이 되어도, 그 천황의 지위에 있는 현실의 인간은 분명히 구별되어, 천황이라는 지위와 이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계속 유지, 계승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임금의 자리에 전혀 걸맞지 않은 수양제급 인간말종이 임금이 되어 정치를 개판으로 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면 당연히 그런 임금은 군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고 머지않아 지위를 잃게 된다는 것은 인정되었지만, 그 이념의 토대는 맹자가 말한 천명사상론이 아니라 불교적인 인과응보론[28], 그리고 신대(神代)로부터 내려온 온갖 고대적 전승들의 재해석이었다. "임금에 걸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군주를 삼는 것이 원칙이라고 해도, 일본의 경우는 임금의 종성(種姓)을 가지지 못하면 임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신대 이후로 정한 관습[29]이었고, 여기서 중국처럼 백성으로부터 들고 일어나 군주를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가 '신하 된 자의 자격'으로 '임금(인 인간)'을 갈아치우는 것을 신하의 책무이자 '임금(라는 지위)'을 지키는 한 방편으로 허용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마저도 갈아치우는 경우 그 갈아치우는 신하 자신이나 다른 백성 가운데 누군가를 새로운 군주로 삼는 게 아니라 천황의 다른 일족 가운데 '군주에 걸맞는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자'를 선출해서 세워야 한다는 규정 역시 빠지지 않았다. 천황이 혼자서 국가의 모든 정치를 다 할 수는 없으니 신하를 가려 뽑아 천황을 보좌하게 하되, 신하가 천황을 보좌하고 섬기며 천황을 지키는 역할에 '천황을 다른 황족 가운데에서 선출하여 교체하는 행위'를 포함시킨[30]것이 일본의 군주, 천황제의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31] 그리고 그렇게 군주(자리에 있는 인간)를 폐위시키는 것 역시도 군주(라는 제도)를 지키는 행위로 정당화시키면서 동시에 그 군주의 일족에 속하지 않은 하급 백성들로부터 무언가 '천명사상'을 내세워 군주의 자리에 도전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천황'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정립과 천황의 '군주'로써의 정당성에 대한 '재해석'이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동서 봉기를 진압한 뒤에 일어났다.
일본의 공영방송사인 NHK에서 만든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는 마사카도가 자신의 영지에서 농민들과 함께 대부분이 삼림 지대였던 땅을 개간하면서 철제 농기구를 생산해 보급하고, 영지에서 많은 수의 말을 길러 군사적으로 활용했으며 오늘날 알려진 것과 같은 휘어진 형태의 일본도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군사적 개혁도 행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한 다이라노 사다모리나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미나모토노 쓰네모토[32] 등의 후손들이 국가유공자로서 이세 헤이시나 카와치 겐지 등 네임드 무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헤이케 정권과 가마쿠라 막부, 그리고 이후 무사정권의 수립에 대해서도 한 다리 걸친 셈이다.
전국 시대의 오타 도칸(太田道灌)이나 호조 우지쓰나(北條氏綱) 등의 무장들도 간다묘진에 무운을 빌기도 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 간다묘진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으며 에도 막부가 들어선 뒤에는 아예 간다묘진을 에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시대에는 칙사로서 에도에 내려왔던 다이나곤(大納言)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廣)가 막부로부터 마사카도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조정에 호소해 역적이라는 이름도 제거하게 했다.(물론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진 뒤에는 가차없었다.) 에도 막부가 마사카도를 유난히 숭배한 것은 조정에 대항했던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막부의 수호신으로 삼음으로써 조정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간다묘진의 현 위치는 에도 막부가 옮긴 것으로 에도성의 동북쪽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곳에 해당한다고.
모로 미야가 쓴 헤이안 일본이라는 책에 보면 메이지 덴노가 살아생전 몸소 참배한 두 곳이 야스쿠니 신사와 마사카도의 간다묘진이었다고 적었다. 물론 조정에 반역했던 자에게 천황이 머리를 숙인다는 것이 아무래도 정서상 용납될 수는 없는지라 1884년에 메이지 천황이 간다묘진을 참배할 때는 마사카도의 신위는 신사 본전에서 빼서 경내의 섭사(부속신사)로 옮기고 본전의 빈 자리에는 원래 있던 오쿠니누시 신과 짝을 맞추어 스쿠나비코나 신을 권청해 모셨다. 마사카도가 간다묘진의 본전으로 돌아온 것은 1984년으로 섭사에 들어간 지 백 년만의 일이었다.
2014년에 일본의 모 여성잡지에서 '가장 끔찍한 악당' 4위로 꼽히기도 했다. 1위는 아케치 미츠히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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