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가정폭력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위대한 가수, 티나 터너
왜 스위스였나?
사랑과 안식: 1986년부터 교제해온 독일 출신의 음반 제작자 **에르빈 바흐(Erwin Bach)**와 함께 살기 위해 1994년 스위스로 이주했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의 화려하지만 고통스러웠던 삶(전 남편 아이크 터너와의 불화 등)을 뒤로하고 취리히 근처의 호숫가 저택에서 평온을 찾았습니다.
시민권 취득: 2013년, 그녀는 정식으로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그 과정에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습니다. 그녀는 "스위스에서 살면서 매우 행복하며, 이곳이 내 집이라고 느낀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2. 사망 원인과 배경
지병과의 투쟁: 티나 터너는 말년에 여러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었습니다. 2013년 뇌졸중을 앓았고, 2016년에는 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2017년에는 남편 에르빈 바흐로부터 신장을 기증받아 이식 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평화로운 작별: 2023년 5월 24일, 그녀는 스위스 취리히 인근 **퀴스나흐트(Küsnacht)**에 있는 자택에서 오랜 투병 끝에 향년 83세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티나 터너가 겪은 인종차별은 그녀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벽과 같았습니다. 그녀는 1930년대 미국의 인종 격리 정책인 '짐 크로 법(Jim Crow laws)' 시대에 태어나, 록앤롤의 여왕이 된 후에도 전 세계적인 편견과 싸워야 했습니다.
주요 사례를 세 가지 맥락으로 정리해 드립니다.
1. 남부의 인종 격리와 유년 시절
티나 터너(본명 안나 메이 불록)는 테네시주의 시골 마을에서 자라며 일상적인 인종차별을 겪었습니다.
격리된 시설: 흑인 전용 학교를 다녀야 했고, 식당이나 화장실 등 공공시설 이용에 엄격한 제한을 받았습니다.
경제적 불평등: 그녀의 가족은 목화밭에서 일하는 소작농이었으며, 당시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구조적인 빈곤과 차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2. 음악 산업 내의 '장르 차별'
성공한 이후에도 인종차별은 형태를 바꾸어 나타났습니다.
"흑인은 록을 할 수 없다": 록앤롤의 뿌리는 흑인 음악(블루스)에 있었지만, 1960~70년대 미국 시장에서 '록'은 백인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티나 터너가 파워풀한 록 사운드를 선보였을 때, 라디오 방송국들은 그녀의 음악을 'R&B(흑인 음악)' 카테고리에만 가두려 했고, 메인스트림 록 스테이션에서는 그녀의 곡을 틀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차별했습니다.
유럽행의 결정적 이유: 그녀가 80년대에 솔로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보다 인종적 편견이 덜했던 영국과 유럽 시장의 지지 덕분이었습니다. 미국이 그녀를 '과거의 흑인 가수'로 치부할 때, 유럽은 그녀를 '살아있는 록의 전설'로 대우했습니다.
3. 언론과 사회적 편견
이중의 굴레: 그녀는 흑인인 동시에 '여성'이었고, 전 남편 아이크 터너로부터 심각한 가정폭력을 당한 '생존자'였습니다. 당시 언론은 그녀의 고통을 자극적으로 소비하거나, 흑인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억척스럽거나 공격적인 이미지)을 덧씌우기도 했습니다.
티나 터너의 탈출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용기 있는 '자유 선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질문하신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이후의 드라마틱한 반전을 정리해 드립니다.
1. 탈출의 순간 (1976년 7월)
시기 및 나이: 1976년 7월 4일, 티나 터너가 36세였을 때입니다.
사건: 댈러스 공연을 위해 이동하던 중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아이크의 폭행이 이어졌고, 티나는 처음으로 맞서 싸운 뒤 아이크가 잠든 틈을 타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도망쳤습니다.
당시 자산: 주머니에는 단돈 36센트와 주유소 신용카드 한 장뿐이었습니다.
2. 재산권과 이혼 (모든 것을 버린 선택)
재산 상황: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경제적 권력은 아이크에게 있었습니다. 부동산, 저작권, 공연 수익 모두 아이크의 명의였거나 그가 통제했습니다.
이혼 조건: 1978년 최종 이혼 당시, 티나는 아이크가 요구하는 모든 재산을 포기했습니다. 집, 차, 보석, 그리고 그동안 번 모든 돈을 아이크에게 줬습니다.
그녀가 챙긴 단 하나: 그녀는 오직 자신의 예명인 '티나 터너(Tina Turner)'에 대한 성명권만을 요구했습니다. "이름만 주면 나머지는 다 가져가도 좋다"고 선언한 것인데, 이는 자신의 재능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리버럴 아츠적 자아의 표출이었습니다.
3. 재기까지 걸린 시간 (약 8년의 인고)
재기 시점: 1984년 (44세)
과정: 이혼 후 그녀는 빚을 갚기 위해 청소 일을 하고 식료품 보조금을 받으며 클럽 무대를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1984년 앨범 **<Private Dancer>**와 메가 히트곡 **'What's Love Got to Do with It'**이 전 세계를 휩쓸며 44세라는 나이에 팝의 여왕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이는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컴백으로 불립니다.
4. 아이크 터너의 최후
몰락: 티나가 떠난 후 아이크의 커리어는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마약 중독(코카인) 문제가 심각해졌고, 폭행 전과 등이 알려지며 업계에서 외면받았습니다.
사망: 2007년 12월 12일, 샌디에이고 자택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사인: 검인 결과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자신의 폭행 사실을 부인하거나 정당화하며 고립된 삶을 살았습니다.
💡 요약: "자유인의 승리"
티나 터너는 모든 물질적 자산(재산)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과 영혼(자유)**만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아이크보다 훨씬 더 큰 부와 명성을 쌓았으며, 스위스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냈습니다. 반면 모든 것을 가졌던 아이크는 약물 중독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죠.
https://ko.wikipedia.org/wiki/%ED%8B%B0%EB%82%98_%ED%84%B0%EB%84%88
Tina Turner | |
|---|---|
1985년의 터너 | |
| 기본 정보 | |
| 본명 | 애나 메이 불럭 Anna Mae Bullock |
| 출생 | 1939년 11월 26일 미국 테네시주 넛부시 |
| 사망 | 2023년 5월 24일(83세) 스위스 취리히 |
| 성별 | 여성 |
| 국적 | 스위스 |
| 직업 | 가수, 배우, 댄서, 안무가 |
| 장르 | 리듬 앤 블루스, 소울, 팝 록 |
| 활동 시기 | 1958년~2023년 |
| 악기 | 보컬 |
| 배우자 | 아이크 터너(1962~1978) 에르빈 바흐(2013~2023) |
| 종교 | 침례교→창가학회 |
| 레이블 | United Artists, Capitol, Parlophone, Virgin |
| 관련 활동 | 아이크 & 티나 터너 |
| 서명 | |
티나 터너(영어: Tina Turner, 본명은 애나 메이 불럭(영어: Anna Mae Bullock), 1939년 11월 26일~2023년 5월 24일)는 스위스에 귀화한 미국 출신 가수이자 배우다. 티나 터너는 솔로로 데뷔하기 전에 ike & tina turner revue 멤버로 활동하였다. 가장 많은 앨범을 판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자 락앤롤의 여왕으로 불린다. 티나 터너는 무대에서 에너제틱함과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주목받았다. 티나 터너는 1958년 ike turner의 Kings of Rhythm으로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티나 터너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A fool in love(1960)이란 노래 덕이었다. 그리고 2년 뒤 Ike turner와 결혼했다. 티나 터너는 이후에 줄줄이 음악적으로 성공했다. 예를 들어 1966년에 발표한 River deep mountain high와 그래미를 탄 Proud mary(1971) 그리고 Nutbush city limits(1973) 이후 티나 터너는 1976년 ike turner와 떨어진다. 물론 여기에 관계단절은 인간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다. 결국 1978년 부부는 이혼한다. 1986년에 발매한 티나 터너 자서전에 따르면, 결혼 생활하면서 가정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1980년대 티나 터너는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Private Dancer(1984)를 발표한다. 이 앨범에는 “What’s love got do with it”을 포함하고 있다. 이 노래는 티나 터너에게 Grammy Award for record of the year 상을 안겨주었고 처음이자 아직까진 마지막 곡이 되었다. 티나 터너는 1980년대와 90년대 성공은 multi platinum album과 히트 싱글로 계속 이어나갔다. 히트 싱글은 "Better Be Good to Me" (1984), "Private Dancer" (1984), "We Don't Need Another Hero (Thunderdome)" (1985), "Typical Male" (1986), and "I Don't Wanna Fight" (1993)를 포함한다. 1993년 티나 터너는 “what’s love got to do with it”라는 티나 터너 인생을 담은 영화를 발표한다. 연기 배우는 당대 최고 여배우 앤절라 배싯. 앤절라는 이후 인터뷰에서 티나의 특이한 행동과 춤을 연기하는 게 매우 힘들었으며 그만큼 티나가 위대한 가수였음을 표현했다. 티나 터너는 1975년에 개봉한 록 뮤지컬 Tommy와 1985년에 개봉한 Mad Max Beyond Thunderdome, 1993년도에 개봉한 Last Action Hero를 통해 배우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티나 터너는 12번 그래미상을 받았다. 롤링스톤지 집계에 따르면, 100 greatest artists of all time에서 63위, 100 greatest singers of all time에서 17위에 등재되었다. 티나 터너는 Hollywood Walk of Fame과 St. Louis Walk of Fame에 별(대체할 말을 찾아주세요.)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1991년 전 남편과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고 2005년 케네디 공로상 수령인이었다.
한 때 안락사를 생각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남편인 바흐 권고로 2017년 4월 7일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2023년 5월 24일 암, 뇌졸중, 신부전으로 투병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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