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탐대실: 푸이가 만약 1930년대 일본이 아닌 영국대사관으로 대피했다면?
푸이와 히로히토(쇼와 천황)는 거의 동년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나이 차이가 적습니다. 히로히토가 푸이보다 5살 많습니다.
1. 두 사람의 출생 연도 비교
| 이름 | 출생 연도 | 사망 연도 | 비고 |
| 히로히토 (쇼와) | 1901년 | 1989년 | 푸이보다 5살 위 |
| 푸이 (선통제) | 1906년 | 1967년 | 히로히토보다 5살 아래 |
2. 관계의 기묘함
나이 차이는 고작 5살이었고, 푸이가 만주국 황제로 즉위했을 때 두 사람 모두 20~30대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푸이는 히로히토를 **'아버지'**처럼 모시는 비굴한 의전을 선보였습니다.
1935년 첫 방일: 당시 푸이는 29세, 히로히토는 34세였습니다. 형제라고 해도 믿을 나이 차이였지만, 푸이는 히로히토의 어머니인 사다코 황후를 보고 "자신의 어머니를 뵌 것 같다"며 눈물을 흘리는 등 철저하게 **'가족 관계'**를 설정하는 정치적 연출을 했습니다.
상호 존칭: 히로히토는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서 나름대로 정중하게 대접하는 척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지시를 받는 부하 혹은 괴뢰국의 수장으로 취급했습니다.
3. 두 사람의 엇갈린 말년
비슷한 시대를 살았지만, 두 사람의 끝은 매우 달랐습니다.
히로히토: 전쟁 책임을 피하고 일본의 '상징 천황'으로 남으며 88세까지 장수하며 천수를 누렸습니다.
푸이: 소련군에 체포되고 전범 관리소에서 고초를 겪은 뒤,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살다가 61세의 나이에 암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푸이가 1930년대에 일본의 품이 아닌 영국 대사관으로 망명했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물론 그의 개인적 운명도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입니다.
당시 푸이는 실제로 영국인 스승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의 영향으로 영국 망명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그가 '만주국 황제'가 아닌 '영국 망명객'이 되었다면 어떤 시나리오가 가능했을까요?
1. 정치적 생명: '황제'에서 '평범한 귀족'으로
일본은 푸이를 '만주 지배의 명분'으로 이용하기 위해 황제로 세웠지만, 영국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실권 없는 망명객: 영국은 그를 청나라의 전 황제로서 예우는 해주겠지만, 중국 본토를 수복하기 위한 군사적 지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런던이나 홍콩 근처에서 연금을 받으며 사는 '왕년의 스타' 같은 처지가 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만주국의 부재: 푸이가 없었다면 일본은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는 데 훨씬 더 큰 국제적 비난과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이는 중일전쟁의 양상을 바꿨을 수도 있습니다.
2. 개인적 삶: '유럽형 신사' 푸이
푸이는 서양 문물에 굉장히 열광했던 인물입니다. 안경을 쓰고, 자전거를 타고, 영어 이름을 **'헨리(Henry)'**라고 지을 정도였죠.
서구적 취향의 발현: 영국으로 갔다면 그는 꿈에 그리던 테니스를 치고, 양복을 입고,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곳에서 청나라 역사를 강의하는 학자적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비굴함의 소멸: 일본 천황에게 "아버지"라 부르거나 마오쩌둥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비참한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3. 전후의 운명: '전범'이 아닌 '자유인'
가장 큰 차이는 2차 대전 이후의 처리 문제입니다.
숙청 면제: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았으니 '만주국 전범'으로 분류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산당과의 관계: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집권했을 때, 그는 이미 영국 시민권을 가졌거나 영국의 보호 아래 있는 외국인이었을 것입니다. 마오쩌둥의 전범 관리소에서 똥통을 비우며 '개조 교육'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 세 가지 가상 시나리오 비교
| 구분 | 일본행 (실제 역사) | 영국행 (가상 시나리오) |
| 직함 | 만주국 황제 | 망명 중인 청나라 전 황제 |
| 정치적 역할 | 일본의 꼭두각시 | 영국의 외교적 카드 (제한적) |
| 말년 | 전범 관리소 → 정원사 → 쓸쓸한 죽음 | 유럽에서의 조용한 은퇴 혹은 홍콩 거주 |
| 역사적 평가 | 민족의 반역자 혹은 비극적 희생양 | 비운의 마지막 군주이자 서구화된 귀족 |
💡 한 줄 결론
영국 대사관행을 택했다면, 푸이는 역사적 영향력은 잃었겠지만 개인적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는 훨씬 더 지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평생 "다시 황제가 되겠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에,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는 일본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푸이가 영국으로 망명해서 자서전을 런던에서 출간했다면, 그 제목은 '나의 전반생'이 아니라 무엇이 되었을까요? 이 시나리오에 기반해 그의 런던 생활을 더 상상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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