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지배를 받았지만…대만이 일본에 환장하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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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왜 일본을 더 가깝게 느낄까

일본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한국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그런데 대만은 분위기가 다르다. 해외여행 목적지 1순위가 일본으로 굳어졌고, 2위와의 격차도 크다는 말이 나온다.
대만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약 50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을 겪었다. 기간만 놓고 보면 대만이 더 길다. 하지만 통치의 성격은 크게 달랐다.
한반도는 대륙 진출을 위한 군사 전초기지였다. 통치는 군대 논리로 움직였고, 강압과 통제가 일상에 깊게 스며들었다. 식민 통치는 곧 폭력이었다.

반면 대만은 일본 입장에서 첫 번째 식민지였다. 설탕과 쌀을 생산하는 경제 거점이었고, 동시에 서구 열강에 보여줄 통치 모델이었다. 항만과 철도, 상하수도 같은 인프라가 빠르게 깔렸다.
생활이 실제로 달라지면 기억은 단순해지지 않는다. 착취에 대한 분노와 근대화의 체감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남는다. 대만의 식민 기억은 이중적인 감정 위에 쌓였다.
상징적인 장면도 다르다. 한국은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며 식민 잔재를 정리했다. 반면 타이베이의 총독부 건물은 지금도 대통령 집무실인 총통부로 사용된다.


같은 식민 통치의 상징물이지만 선택은 달랐다. 한쪽은 없앴고, 한쪽은 남겨 활용했다. 이 결정이 사회의 정서를 갈라놓았다.
기억을 다루는 방식도 차이가 난다. 대만에는 일제강점기 수리시설을 만든 일본 기술자 하타 요이치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 국가 지도자가 헌화한 사례도 있다.
한국이라면 큰 논란이 될 장면이다. 대만에서는 공과를 분리해 보려는 시선이 비교적 널리 퍼져 있다. 역사를 지우기보다 남겨두고 해석하려는 태도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이 차이를 더 분명히 보여준다. 대만의 전 총통 리덩후이는 2007년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전사한 형을 추모했다. 그는 개인적인 가족사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같은 선택을 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일이다. 대만에서는 가능했던 행동이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역사 인식의 간극이 여기서 드러난다.
저항의 경험도 영향을 줬다는 해석이 많다. 대만에도 항일 무장 투쟁이 있었지만, 대규모 진압 이후 흐름이 빠르게 꺾였다. 기억은 축적되지 못했다.
한국은 달랐다. 3·1운동 같은 전국적 시위부터 외교 활동, 무장 투쟁까지 오랫동안 이어졌다. 독립 말고는 답이 없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각인됐다.
정체성의 구조도 다르다. 한반도는 오랜 왕조 역사와 단일한 민족 서사가 강했다. 외세는 분명한 외부였다.
대만은 원주민, 한족 이주민, 외세 지배가 겹쳐 공동체의 경계가 복잡했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시대마다 달라졌다. 식민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의 경험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 한국은 독립 이후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는 서사가 자리 잡았다. 회복의 기억이 남았다.
대만은 달랐다. 일본 통치가 끝난 뒤 국민당 정부가 들어오며 또 다른 억압과 대규모 학살을 겪었다. 일본 지배와 이후의 혼란이 대비됐다.
이 과정에서 과거가 상대적으로 덜 부정적으로 기억되는 왜곡도 생겼다. 여기에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국제정세가 더해졌다. 일본은 감정보다 현실의 파트너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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