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선진국은 새로운 지식, 문화를 선도하고, 후진국은 그것을 모방하고 추격한다; 상위인간과 하위인간의 차이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고, 누군가는 만들어진 변화를 수용한다.이 정의가 주어지면 인간은 두 격으로 나누어진다.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와 수용하는 존재다. / 형이상학의 힘: 플라톤 아카데미아 기하학의 해석: 보이지 않는 것을 꿈꾸는 능력이 준비되지 않은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뜻; 영국보다 고고학 유물이 많은 나라가 있는데, 영국은 고고학이 발전했다. 그런데 고고학적 유물이 더 많은 나라보다 고고학이 발전한 영국이 더 센 나라다. 구체적인 유물을 가진 것보다 학(學)을 가진 것이 더 세다. 구체적인 것을 가진 것보다, 구체적인 것을 설명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더 세다. / 기능 (감각)보다는 기술 (사유)이, 예능 (감각)보다는 예술 (사유)가 더 고차원적이다; 대답하는 인간 vs 질문하는 인간 / 과학이 오기 전, 동양은 과거에 서양을 압도했다. 그러나 아편전쟁을 계기로 동서양의 압도가 바뀌었다. 과학은 기술보다 훨씬 안 보이는 것이다. 동양은 연산계수까지는 발전시켰는데, 서양은 기하학이 발전했다. 기하학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세상을 다루는 것이다. / 그리스 로마 신화는 황당하다. 개인의 크기나 문명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신화의 크기다. 신화의 크기를 우리는 황당무계함이라고 한다; 한국의 보건사회부가 세계 최초의 백신을 인증하지 못한 이유는, 스스로 기준을 생산하거나 창조하는 데 익숙하지 않고 항상 외부 기준을 따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자 천도편 윤편 이야기, 니체, 장자 희생양 소 이야기, 노자의 '나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자', 그리고 양주의 "정강이 털 한 올을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해도 뽑지 않겠다"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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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어떻게 사는지 모르면서 그런 얘기를 하려고 하느냐고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 말하더라. 여러분이 어떤 내용을 기대하실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제가 오래 해온 생각들이다.

어떤 나라는 물건들을 만들고, 어떤 나라는 가져다 쓰는가. 어떤 국가는 판을 짜는 전략을 만들고, 어떤 나라는 전술국가로 사는가. 어떤 사람은 고유함을 추구하는데, 어떤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삶을 사는가. 어떤 사람은 생각을 하고, 어떤 사람은 가져다 쓰는가. 오래 생각해왔다.

계기는 우리는 어쨌길래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이나 식민지로 살았나. 일본은 또 어떻게 그 기간 지배를 하였나. 우리는 왜 중국 옆에서 속국처럼 중국 눈치를 보며 살았나. 우리는 그걸 알고 있을까. 그런 일이 일어났던 과거가 앞으로도 안 일어나리라는 확신과 결심을 하고 있을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보다 좀 더 잘 사는 전략국가, 선진국가의 삶의 형태와 그러지 못한 나라의 형태를 비교해봤고, 선진적이고 전략적인 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 나라들은 분명히 사유가 철학적인 높이까지 가있다. 그러지 못한 나라는 철학들을 수입해서 내면화하는 것으로 자기 철학을 하더라. 그러려면 우리도 이제는 다른 사람이 철학을 한 결과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름의 철학을 하는 도전에 나서야겠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나라들이 생각을 한다는데, 떠나간 첫사랑이 떠오르고, 친구들과 다툰 것이 떠오르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는가. 이런 것은 그냥 잡념이다. 잡념이 아니라 생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를 높고 미래적으로 끌고 나가는 생각은 역시 아직 있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추구가 핵심이다.

오늘 우리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인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려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부터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다. 인간이 사는 무대는 두 덩어리다. 두 세계를 하나의 무대로 산다. 한 세계는 인간이 만든 세계, 한 세계는 인간이 안 만든 세계다.

인간이 안 만든 세계는 인간의 원칙이 아니라 자기 원칙대로 돌아간다. 한자로 하면 '자연'이다. 한 덩어리는 인간이 만든 세계인데 이것을 '문명'이라고 한다. 문명의 '문(文)'자는 인간이 만든 것에 붙는다. ‘문’자, ‘문’명, ‘문’학 등이다. 인간은 문명과 자연을 하나의 무대로 두고 산다. 문명과 자연을 모두 알면 지적으로 완벽해진다.

한국은 지적으로 완벽해지면 안 되니까 고등학교에서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농담) 수학2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에 관심 있으면 문과로, 인간이 안 만든 것에 관심이 있으며 이과로 간다. 우리가 안 만든 자연에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존재다. 문명을 만드는 인간의 활동문화라고 한다.

문화.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한다는 뜻이다. 인간을 분류할 때, 호모 하빌리스, 호모 루덴스 등 여러 가지로 나누는데, 무엇을 하느냐, 만드느냐를 기준으로 인간을 분류한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다.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다.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한다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의미이다.

여러분에게 스마트폰이 있다. 이 스마트폰을 누군가 만들었다. 이 스마트폰이 있기 전과 후가 같은 세상인가 다른 세상인가. 다른 세상이다. 내가 여기서 주먹질을 하면, 하기 전후가 달라진다. 인간은 무슨 행위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다. 인간을 원초적으로 정의하면 문화적 존재다. 인간은 이 순간 격이 달라진다. 누군가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고, 누군가는 만들어진 변화를 수용한다.이 정의가 주어지면 인간은 두 격으로 나누어진다.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와 수용하는 존재다.

변화를 야기할 때의 인간을 우리는 자유롭다, 주체적이다, 독립적이라고 하고, 야기한 변화를 수용하는 단계를 종속적이라고 표현한다.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추구할 때, 인간의 활동성을 창의적이라고 한다. 창의성이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에서만 나올 수 있다. 누군가 해놓은 말을 내면화하거나 누군가 야기하는 변화를 수용하는 것을 당연할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나타날 수 없다.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할 때, 야기된 변화는 무엇인가를 만들 때, 보이던 것인가, 안 보이던 것인가? 안 보이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보이던 곳에서 살다가, 안 보이던 곳으로 이동해서 거기서 자기 영토를 건축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안 보이는 곳을 꿈꾸는 존재다. 만져지지 않은 곳, 해석되지 않은 곳을 꿈꾸는 존재다.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는, 아직 해석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려고 몸부림치는 존재다. 그렇다면 좀 촌스러운 논리로 볼 때,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중에 누가 더 쎈가. 안 보이는 것이 더 세다.

서양 문명에서 플라톤이라는 철학자를 뺄 수가 없다. 철인통치, 인격적으로 높은 사람이 하는 정치를 꿈꿨다. 이분이 아카데미아라는 학교를 열었다. 문 위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오지 말라고 써있었다고 한다. 또 달리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해석을 어떻게 하냐면, 보이지 않는 것을 꿈꾸는 능력이 준비되지 않은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기하학이란, 여러분 여기는 서울이고,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가 있다. 경기라는 말은 거의 서울이라는 말이다. 서울, 그러나 서울은 아니다. 기하학은 제가 지금 허공에 손으로 그리는 그림이 원이다. 원이 이 세계에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다. 공책에 원을 그리면 거의 원이지만 원은 아니다. 이 세계에 구체적으로 삼각형이라는 것이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다. 점, 직선, 삼각형, 원은 머릿속에 관념으로만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공책에 삼각형을 그릴 수 있다. 그 삼각형은 삼각형이 아니라 거의 삼각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이 거의 있는 것 같아서, 기하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기하학의 대상들은 이 세계에 실재하는가? 없다. 만질 수 없다. 이 세계에 없는 것인데, 기하학을 가지고 이 세계를 다루는 능럭이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가 난다. 이 세계에 여러 나라들이 있는데, 고고학이 제일 발전한 나라는 어디인가? 여러분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나라들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 미국 등이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지구상 제일 센 나라 중 6개다. 한 번쯤 제국을 꿈꾸고 운용해본 나라다. 영국이 그중 하나다. 그런데 영국이 고고학 유물도 이 세계에서 제일 많을까? 영국보다 고고학 유물이 많은 나라가 있는데, 영국은 고고학이 발전했다. 그런데 고고학적 유물이 더 많은 나라보다 고고학이 발전한 영국이 더 센 나라다.

두 번째 촌스러운 논리로 보면, 구체적인 유물을 가진 것보다 학(學)을 가진 것이 더 세다. 구체적인 유물은 눈에 보이나 안 보이나? 눈에 보이고 만져진다. 그런데 학은 지식으로 되어 있다. 지식은 삼각함수 등으로 이 세계를 설명해놓은 것이다. 지식은 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것을 가진 것보다, 구체적인 것을 설명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더 세다.

만져지고 보이고, 구체적인 것을 현상계, 경험계라고 하고, 이 현상계를 설명하는 것을 지식계, 추상세계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현상세계에 접촉하는 능력보다 추상세계에 접촉하는 능력이 더 세다. 개념이 나오니까 재미가 없으시겠다. 조금만 참으시라. 현상세계를 접촉할 때 감각을 가지고 한다. 현상세계를 설명하는 세계를 접촉하는 능력사유다. 감각 능력과 사유 능력 중에 사유 능력이 세다.

감각과 사유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사유 없는 감각은 질서가 없고, 감각 없는 사유는 맹탕이다. 시선의 높이는 분리해서 말할 수 있다. 감각적 레벨에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기능이다. 사유의 레벨에서 만드는 것기술이다. 과학은 기술에 가깝다. 과학기능이라는 말은 없다. 과학기술이라고 한다. 감각적 레벨이 기능이고, 사유가 기술이다. 감각적 레벨에서 뭔가 쾌락을 만드는 일을 예능이라고 한다. 사유의 높이에서 자극을 만드는 일을 예술이라고 한다.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더 높다. 이 세계를 설명하는 패턴과 관련된 쾌락의 추구, 그 예술에 익숙하게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높다.

사는 목적을 물어보면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는 분들이 많다. 행복은 자연적으로 이 세계에 실재하는가, 인간이 삶을 해석한 결과인가? 행복은 인간의 해석이다. 그것을 자기 안에서 감각화하는 것이다. 자유도 이 세계에 원초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해석의 산물이다. 사유의 결과물이다. 행복하고 싶고 자유롭고 싶은 사람은, 기능과 예능이 아니라 기술과 예술의 단계로 상승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디서 읽은 글인데, 우리는 대개 삶을 감각적 쾌락으로 꾸리면서, 자유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창의적이고 싶어한다. 그리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싶어한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어디에서 즐거움과 쾌락을 얻는가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를 결정한다. 행복과 자유는 사유의 레벨에 있고, 지적 활동의 결과다. 있는 것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지 않고, 2차적으로 상승한 것이 지적활동이다. 자유롭고 행복하고 싶다면 지적이어야 한다. 지적인 행위가 무엇이냐면,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접촉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고 만져지는 그 다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지적 행위를 통해서 문화적 활동을 하고 문명을 건설한다. 아직 해석되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그것으로 옮겨가려는 활동이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다루는 지적활동대답이라고 하고, 있는 것 중에서 아직 나에게 포착되지 않은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동물적 충동질문이라고 한다. 앞선 것, 위대한 것은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하나도 없다. 대답이 아니라 질문과 관련된다.

대답이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먹고,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많이 뱉는가, 누가 더 빨리, 누가 더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가 중요하다. 원래 모습은 시제로 하면 과거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가 사회를 채우면 과거를 논쟁한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미래를 찾아나서기보다, 이미 있는 과거를 파헤치도록 훈련되었다. 대답에 익숙한 인재들은 절대 미래를 살기가 어렵다. 과거를 산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운 사회는 이미 있는 사회적 결과를 다루고 재배치하는 일에 열심히다. 문화적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살았다.

앞으로는 문화적 활동을 해서 더 선도력이 있어야겠다 생각한다면, 대답에 길들여진 영혼을 가지고 과거를 살고 있는 자기를 들여다봐야한다. 질문하는 일보다 대답하는 일에 재주를 발휘하고 바빴던 인재들은 미래를 살기 어렵고 과거를 산다. 질문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 세계에서 나에게만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질문을 할 때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존재하며, 자기 자신이 된다. 인간은 질문할 때만 자기자신이다. 대답할 때는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전달하는 존재다. 이때는 자기가 더 권위 있고 더 완벽해보이는 전달자로 존재하면서 분열되어 있고, 자기에게만 있는 궁금증고 호기심이 발동될 때, 단일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을 때만 자기자신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려는 충동이 만들어낸다.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충동이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을 가진 존재다. 그 충동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세게에 존재하는 많은 경전과 선지식, 철학자들은 가장 중요하게 묻는 질문이 있다. ‘니가 너냐?’,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을 가장 궁극적인 질문으로 삼는다. 너는 누구냐,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행하거나 전달하는 사람이냐, 다른 사람의 꿈을 대행하느냐, 너의 꿈을 꾸느냐, 이 질문은 종교적으로 의미 있어서 가치 있다기보다 모든 위대함이 태어나는 터전이다. 모든 위대함은 여기서 나온다.

인간이 만든 문명 가운데 가장 높이 승화한 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성은 고단한 노력을 거쳐서 훈련된다. 지성이 고양되면, 예술 앞에 섰을 때 호흡과 맥박이 뛴다. 훈련되지 않은 지성은 이발소 그림과 반고흐도 식별하지 못한다.

예술품의 압도적 위압감 때문에 자기 자신의 균형이 무너진다. 이것을 우리는 감동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감정이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고 불균형한 것이다. 예술의 감상자를 불균형으로 빠뜨리는 힘은 의외성이다. 예술적 경지에서 그 예술품의 그것을 예술품이게 하는 가장 근원적 힘은 의외성이다. 의외적이지 않은 것은 예술적이지 않다. 의외적이지 않은 것은 위대해본 적이 없다.

의외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고요함에서 나온다. 자기에게만 있는 고요함이다. 다른 사람과 적대적으로 분열시키는, 다른 사람과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함이 의외성이 태어나는 터전이다. 고요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닫게 된다. 너는 누구냐, 너는 무엇으로 너의 고요함을 표현할 수 있느냐, 고요함을 드러낼 작동기제가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이 궁금증과 호기심이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고,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정확하고 강하게 잡아야 한다.

좀 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성공한 사람의 7가지 습관, 뭐뭐 하는 책들이 많다. 그 성공한 사람들의 몇 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읽고 성공한 사람은 몇 명일까?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습득해서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만나보고 싶다. 성공한 사람은 저자와 출판사 사장이다.

여러분들이 오늘 저와 만났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여러분은 돌아가셔서 이 궁금증과 호기심을 찾아낼까? 책을 읽는 일, 강연을 듣는 일은 가식적이기 쉽다. 자기를 속이기 쉽다. 그것은 마치 다이어트와 비슷하다. 고민하고 연구하고 결심하는 것을 다이어트로 착각한다. 혁신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혁신으로 착각하고, 좋은 강연을 들으면 좋은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들고,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가 성공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무엇을 하든 자기 궁금증이 빠져 있으면, 그것은 자기에게 어떤 것도 큰 의미나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러면 자기를 정말 자기이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다시 반복하지만, 궁금증과 호기심이라고 할 때, 그 내용은 결국 아직 없는 것, 아직 보이지 않는 것, 아직 해석되지 않은 것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이다. 이미 해석된 것을 만족하는 습관을 들이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려는 힘은 약해진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줄거리만 얘기하겠다.

과학이 오기 전, 동양은 과거에 서양을 압도했다. 그러나 아편전쟁을 계기로 동서양의 압도가 바뀌었다. 과학은 기술보다 훨씬 안 보이는 것이다. 동양은 연산계수까지는 발전시켰는데, 서양은 기하학이 발전했다. 기하학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세상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황당하다. 메두사의 피에서 날개가 달린 말이 태어난다. 페가수스다. 제우스의 부인 헤라를 좋아하는 엑시온에게 제우스가 구름으로 헤라를 만들어서 보내니까 헤라를 품고 하루를 자고, 상체는 사람인 반인반마를 만들어낸다. 페가수스는 벼락과 천둥을 데리고 다닌다. 그런데 이걸 황당하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개인의 크기나 문명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신화의 크기다. 신화의 크기를 우리는 황당무계함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것은 항상 이상하고 이해 안 되고 위험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 모험을 하는 사람을 황당무계하다고 한다. 이것이 문명의 신화적 요소다. 누가 더 큰 황당무계한 신화를 가졌느냐. 누가 더 지적이냐, 누가 더 높은 곳에 있느냐를 결정한다.

신화가 개인에게 들어왔을 때 그것을 꿈이라고 한다. 요즘 꿈을 꾸라는 말은 당연하고, 모험도 당연하게 회자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조건으로 꿈과 모험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모든 모험과 꿈은 기존의 조건을 극복하여 돌파한다. 기존의 조건으로 자신의 꿈이 불가능한 것으로 해석되고 좌절한다면 신화를 쓰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들도 신화를 쓸 수 있을까? 질문할 수 있을까? 핵심은 그것이다. 우리가 왜 질문하지 못하는가. 좋은 책을 봐도 변하지 않는가? 핵심은 신화를 쓰려는 도전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꿈꾸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시냐고 묻고 싶다. 어떻게 살다 가고 싶으신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죽기 전까지 이루고야 말겠다는 소명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없으면 궁금한 것이 생기지 않고,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높이 높이 올라서 시간과 공간의 동의를 얻어내는 일을 우리는 신화라고 한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기로 약속하면 좋겠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지를 자기가 원해야 한다. 짧은 인생에서 모두 승리하시기를 빈다.

Q) 베르그송은 지성활동에 비판적이다. 행복과 자유를 알려면 직관과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할 것인데, 지적활동으로 행복과 자유를 이해하는 것과 직관과 체험은 충돌하는 것 같다. 이런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그건 베르그송의 생각이다. 모든 마지막 단계는 직관이다. 감각과 사유가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함께 작동한다. 우리는 안 보이는 곳으로 나아가려는 원함과 꿈을 이야기하면서, 안 보이는 것을 놓고 얘기해보자고 한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 지적이라는 것이 교과서적인 이미지의 조합이 아니라, 행복이 감각과 관련되지만 '감각적 단계를 지적으로 해석한 결과로서의 높이를 가진 것'으로 말한 것이다.

 

 

 

 

 

 

 

 

 


https://lilys.ai/digest/6112974/6047310

최진석교수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나’의 주인으로 사는 법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외부의 보편적인 기준이나 이념에 갇히는 삶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자발적 생명력을 바탕으로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길을 제시하죠. 마치 수레바퀴 장인 윤편의 이야기처럼, 이론이나 지식의 '찌꺼기'에 매몰되지 않고 사건과 감각이라는 일상 속에서 ' 경계'에 서는 유연하고 주체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이 강연은 타인의 충고나 사회적 기대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으로 내면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창조적 동력을 발휘하는 진정한 자유를 선사할 것입니다.

1. '나'의 주인으로 사는 삶의 본질과 중요성

1.1. '나는 누구인가' 질문의 중요성 및 주체적 삶의 시작
  1. 주요 질문: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중요한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된다.

  2. 주체성 존중: 나의 주체성, 존재성, 존엄을 침해하는 외부의 것에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3. 질문의 본질: 질문은 옳고 그름이 없는 순수한 행위이며, 질문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가 있다.

    1. 옳고 그름은 이미 정해진 것에 대한 판단 기준일 뿐이다.

    2. 인류 역사상의 모든 창조적이고 새로운 것은 엉뚱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1.2. 기준의 생산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B형 간염 백신 사례
  1. 김정용 박사의 B형 간염 백신 개발 사례:

    1. 김정용 박사는 세계 최초로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했다.

    2. 하지만 국내에서는 당시 보건사회부에 인증 기준이 없어 상용화되지 못했다.

    3. 1981년 미국과 프랑스 회사에서 백신을 상용화한 후, 그 기준을 사용하여 김정용 박사의 백신이 뒤늦게 인증되었다.

  2. 기준 생산의 중요성:

    1. 한국의 보건사회부가 세계 최초의 백신을 인증하지 못한 이유는, 스스로 기준을 생산하거나 창조하는 데 익숙하지 않고 항상 외부 기준을 따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2. 모든 기준은 누군가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고, 엉뚱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3. 외부에 보편적 이념이나 기준을 두는 사람은 스스로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다.

  3.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법: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기준의 수행자'가 아니라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1.3. 외부 기준에 갇힌 삶의 한계점
  1. 외부 기준의 지배: 외부의 기준은 항상 보편성과 객관성으로 무장하여 우리를 지배한다.

  2. 개인의 위축: 외부에 기준을 두는 개인은 조심스럽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1. 이러한 개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영역은 마치 '이삿짐'처럼 초라하게 보인다.

    2. 보편적이고 공유되는 기준에 비추어 보면 부족하지 않은 인간은 없으며, 죄인 아닌 인간도 없고, 결함 없는 인간도 없다.

  3. 내면의 완결성 확보 질문: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어 나의 완결성을 확보할 방법은 없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2. 장자의 '윤편' 이야기: 사건과 감각에 집중하는 삶

2.1. 니체와 장자: 보편적 이념을 넘어 자기 주인으로 사는 철학자들
  1. 최진석 교수의 철학자 선택: 보편적 이념을 넘어 자기 주인으로 사는 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탁월한 성취를 이룬 철학자로 서양에서는 니체, 동양에서는 장자를 꼽는다.

  2. 장자 '천도편'의 윤편 이야기: 장자 책의 '천도편'에 수레바퀴 깎는 장인 '윤편'의 이야기가 나온다.

2.2. 윤편의 '성인의 말씀은 찌꺼기' 비유
  1. 윤편과 왕의 대화:

    1. 제나라 환공이 당 위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수레바퀴 장인 윤편이 왕에게 책 내용을 묻는다.

    2. 왕이 성인의 말씀이라고 답하자, 윤편은 성인들이 죽었으므로 왕이 읽는 책은 성인들이 남긴 '찌꺼기(조백)'일 뿐이라고 말한다.

    3. 왕은 윤편에게 그 말을 정당하게 설명하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2. 윤편의 설명: 윤편은 평생 수레바퀴 깎는 일을 해왔다고 말한다.

    1. 수레바퀴를 너무 느슨하게 깎으면 쓸모없고, 너무 뻑뻑하게 깎으면 축이 들어가지 않아 쓸 수 없다.

    2. 적당히 제대로 깎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손에서 나오는 '감각'이 맞춰주는 것이다.

    3.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도 이 기술을 전해주지 못해 이 나이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고 설명한다.

    4. 이 설명으로 인해 왕은 윤편을 죽이지 않았다.

2.3. '사건'과 '감각'의 중요성: 이론의 한계
  1. 사건의 존재: 이 세계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건'이며, 우리가 실제 접촉하고 생존하며 지혜를 발휘해야 할 공간은 사건의 세계이지 이론의 세계가 아니다.

  2. 이론의 본질: 이론은 사건을 정리해 놓은 것이며, 다음 사건을 예측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3. 이론의 한계 (윤편의 주장):

    1. 윤편은 진리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이 그것이 생산되는 순간까지만 진리였을 뿐, 그 순간이 지나면 겨우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2. 이론은 지나가고 나서도 효용성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이는 술찌꺼기에 술 기운이 남아 진짜 술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4. 감각의 완성도: 윤편은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고유하게 자신에게만 갖춰진 손끝에서 나오는 '감각의 완성도'라고 강조한다.

  5. 사건과 감각: 지식 구조물( 이념)에 빠져있는 것은 성인들이 남긴 찌꺼기에 빠져있는 것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발을 딛고 서 있어야 할 곳은 '사건'과 '감각'의 세계이다.

3. '자신이 주인으로 사는 삶'의 방해물과 진정한 동력

3.1. 이론에만 머무르는 착각: 다이어트와 혁신 사례
  1. 다이어트 사례:

    1. 강연자의 아내는 27년째 다이어트를 하고 있으며, 다이어트에 관한 거의 모든 방법과 이론에 통달했다.

    2. 그러나 27년 동안 성공적이지 못했다.

    3. 강연자는 아내에게 다이어트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다이어트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했다.

  2. 혁신 사례:

    1. 많은 회사들이 혁신을 강조하며 전문가를 모아 토론하지만, 1~2년이 지나도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2. 혁신에 대해 토론하는 것 자체가 혁신했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3. 성인에 대한 착각:

    1. 성인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이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성인이 말해놓은 기준을 따르는 것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2. 성인의 말씀은 성인이 한 '사건'의 결과물일 뿐이다.

  4. 사건 담당의 중요성:

    1. 혁신을 이야기하는 목적은 혁신을 하는 것, 즉 혁신이라는 '사건'을 담당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2. 다이어트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은 다이어트라는 '사건'의 참여자가 되고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3.2. 일상과 '주체력'의 결여
  1. 이상과 일상: 사건이 일어나는 곳은 '이상'이 아닌 '일상'의 세계이다.

  2. '나'와 '우리'의 차이:

    1. 일상의 세계에는 '내가' 존재한다.

    2. 우리는 보편적 이념으로 나아가는 데는 적극적이지만, 자신이 직접 살고 있는 일상을 관리하는 데는 소홀하다.

    3. '우리'로 사는 데는 열심히지만 '나'로 사는 데는 소홀하며, 공유하는 다이어트이론에는 적극적이지만 나의 사건으로 만드는 데는 힘이 없다.

  3. 주체력의 부재: 이는 사건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이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힘(주체력)'이 없는 것이다.

  4.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이념에 해박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활동성, 나만의 힘, 나만의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사건으로 발동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4. 진정한 '자유'의 의미와 '경계'에 서는 주체

4.1. 장자의 '희생양 소' 이야기: 천하에 얽매이지 않는 삶
  1. 초나라 위왕의 제상 제안: 초나라 위왕이 장자의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내 제상 자리를 제안한다.

  2. 장자의 비유 (희생양 소):

    1. 장자는 제사에 바쳐지는 소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2. 제사를 위해 잘 먹고 키워지던 소는 대접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결국 제물로 바쳐질 운명을 깨닫고 차라리 보잘것없는 돼지로 태어날 걸하고 한탄한다.

    3. 장자는 사신에게 소가 아무리 한탄한들 소용없다고 말한다.

  3. 장자의 선택: 장자는 화려하게 사는 소가 되지 않겠다고 말하며,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스스로 즐기는 삶을 택하겠다고 답하며 제상 제의를 거절한다.

4.2. '나'와 '천하'의 대립: 자발적 생명력의 중요성
  1. 스스로 즐기는 삶 vs 천하: 장자는 '크게 스스로 즐기는 것'과 '천하'를 대립시키며, 천하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즐거움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2. 양주의 '털 한 호' 비유:

    1. 도가 철학자 양주는 자신의 정강이 털 한 올을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해도 뽑지 않겠다고 말한다.

    2. 이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에서 나온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는 약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3. 양주가 꿈꾸는 세상은 개인들이 자발적 생명력을 발휘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3. 노자의 '나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자':

    1. 노자는 나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기고 줄 수 있다고 말한다.

    2. '나'를 천하보다 낮은 단계에 두지 않으며, 천하는 나의 자발성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이념에 갇힌 '나'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3. 이러한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4.3. 함석헌의 '자기로부터의 혁명': 개인의 자발성과 사회 변혁
  1. 함석헌 철학자와의 만남: 강연자는 노자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 함석헌이라는 철학자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2. 학생운동의 한계:

    1. 우리나라는 강력한 학생운동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은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해 있었다.

    2. 하지만 함석헌의 관점에서는 학생운동을 마치고 졸업했을 때, 그 숫자만큼 사회의 정의와 도덕의 양이나 질이 증가하지 않았다고 본다.

    3. 그 이유는 혁명을 하는 개별자들이 혁명되지 않은 채 혁명을 했기 때문이다. 즉, 혁명이라는 이념을 수행만 했을 뿐, 혁명가 자신이 혁명되지 않았다.

  3. 자기로부터의 혁명: 함석헌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4. 자발성의 중요성: 자발성, 독립성, 주체성, 주체력은 단순히 개인적인 범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진정한 변형, 발전, 품격에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

4.4. '자유'의 본질과 '경계'에 서는 삶
  1. 자유의 개념 ('작회'):

    1. '작회'는 다른 말로 '자유'를 의미한다.

    2. 이 자유는 집단에 대항하여 발견되는 활동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 생명력, 나의 내적인 활동성을 근원처로 하여 내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3. 자유의 개념만이 자신이 자신의 주인임을 확인시켜준다.

  2. 일상과 운동:

    1. 진흙탕에서 놀고 있는 자기는 이념속에 있는 자기가 아닌 '일상'에 있는 자기이다.

    2. 이념은 정지해 있지만, 일상은 끊임없이 운동한다.

    3. 운동은 ' 경계가 계속 중첩되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이며, 하나의 형식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3. 경계에 서는 주체:

    1.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발성의 활동성을 중시하는 것은 운동하는 사람이 되고 '경계에 서겠다'는 의미이다.

    2. 모든 이념은 양쪽을 모두 포용할 수 없으며 항상 한쪽에 서게 된다.

    3. 내적인 자발성의 실천가가 되어 이념에 고정되지 않고 사건의 담당자가 되겠다는 것은 ' 경계에 서겠다'는 말과 같다.

    4. 이념은 하나의 가치로 개별자를 가두고 제한하려 한다.

    5. 보편적 이념을 뚫고 자발적 생명력을 가지려는 사람은 자신을 한편에 세우지 않고 운동의 경계적 상황에 맡겨둔다.

  4. 경계에 선 사람의 힘:

    1. 경계에 서 있는 자기가 움직이는 내적인 활동성은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2. 일반적인 이성은 비율을 따지고 계산하며 집단을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3. 집단을 관리하는 보편적 이념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가 경계에 서서 욕망의 활동성에 자신을 맡길 때 비로소 강해질 수 있다.

    4. 경계를 품은 사람은 유연하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경계를 품은 사람은 강하고 유연할 수 있다.

    5. 이념에 갇힌 사람은 굳어지고 왜소한 존재가 되거나, 이념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로 자기 가치가 결정된다.

    6. 살아있는 모든 것은 유연하며 활동하고 운동하며 경계에 선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이다.

    7. 경계의 중첩이 곧 운동이며, 이 운동을 내적으로 수용하고 자신과 일체화할 때 자신이 주인이 된다.

5. 진정한 주체와 자기 표현의 삶

5.1. 기준의 생산자로서 세계와 관계하기
  1. 기준 생산자와의 관계: 우리는 보통 학습된 내면화된 보편적 이념을 자기 기준으로 착각하며 세계와 관계하지만, 진정한 주체는 '세계 운동'과 일체하며 ' 경계를 포용하는 주체'이다.

  2. 기준의 생산자: 자신이 언제 기준의 생산자로 등장하는가가 자신이 언제 '나'로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5.2. 읽기-쓰기, 듣기-말하기, 배우기-표현하기의 균형
  1. 읽기의 목적: 우리는 언젠가 스스로 책을 '쓰기(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2. 듣기의 목적: 우리는 스스로 '말하기' 위해 타인의 말을 듣는다.

    1. 계속 읽기만 하거나 듣기만 하다가는 자신이 걸어야 할 길, 써야 할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3. 배움의 목적: 우리는 언젠가 스스로 '가르칠 수 있는 입장'이 되기 위해 공부한다.

  4. 삶의 목적: 삶은 정해진 것을 수용하거나 학습하거나 실천하는 데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번 '정해보기' 위해, '나를 표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5. 예술가 사례:

    1. 60이 넘은 예술가가 배우는 재미에 빠졌다고 하자, 강연자는 그에게 이제 그만 배우고 자신을 표현하라고 조언했다.

    2. 배움은 아름답지만,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자기 표현에 장애를 갖게 된다.

    3. 배움은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해야 하며, 표현의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배움은 한쪽에 서는 것이다.

  6. 경계의 활동:

    1. 배울 때는 표현의 동력이, 읽을 때는 쓰는 동력이, 들을 때는 말하는 동력이 있어야 한다.

    2. 자기 활동은 읽기와 쓰기 사이, 배우기와 표현하기 사이, 듣기와 말하기 사이에 있어야 한다.

    3. 이 사이에 있을 때 인간은 순수해지거나 점잖아지지 않고, 거칠어지며 '야성'을 회복한다.

    4. 삶 전체를 배우고, 정리하고, 듣는 데만 바친다면 자기 자신은 존재할 곳이 없어진다.

    5.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갇히지 않고, 항상 경계에 서서 자기로 살아 있는 것이다.

5.3. '나'의 존엄성과 무한 신뢰 회복
  1.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 이성에 제어되지 않고 욕망의 주인이 되는 것,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욕망의 실행자가 되는 것,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표현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2. 삶의 궁극적인 동력: 삶의 궁극적인 동력은 '나를 표현하는 것'에 있어야 한다.

  3. 저항의 필요성: 나를 침해하는 어떤 것에도 도전해야 하며, 나의 주체성, 존재성, 존엄을 침해하는 것에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4. 두 가지 금기 사항:

    1. 죽기 전까지 해서는 안 될 두 가지는 '충고하지 않기'와 '남의 충고를 듣지 않기'이다.

    2. 타인의 기대나 충고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한번 살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5. 두 가지 필수 사항:

    1. 죽기 전까지 버려서는 안 될 두 가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와 '무한 사랑'이다.

    2.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이삿짐같이 생각하고 이미 있는 외부 기준에 견주어 보기 때문이다.

    3. 보편적 이념이나 기준은 이미 지나간 '찌꺼기'이므로, 그것에 자신을 빗대어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6. 진정한 자기의 발견: 우리를 지배하는 보편적 이념과 기준에서 벗어나 욕망의 담당자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에 서 있는 주체로 자신을 돌아보면 훨씬 강하고 자유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7. 존엄한 존재의 등장:

    1. 이렇게 강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자신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

    2. 새로 등장한 자기는 자신에게 가장 존엄한 존재이며, 이제 '존엄한 활동'을 하게 된다.

    3. 뇌물과 같은 유혹이 들어와도 자신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 있게 되며, 윤리 규정을 지키려는 것이 아닌 자기 존엄을 지키려는 주체가 된다.

    4. 이는 '윤리적 힘을 가진 주체'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8. 창조적 동력의 출발: 스스로가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고, 강하고, 자유로운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바로 모든 창조적 동력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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