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든, 경제든, 타이밍; 1930년 일본의 금해금 정책은 왜 일본 경제를 폭망에 기울게 하고, 결국 군부가 득세하는 상황까지 치닫게 만들었는가?

  

1930년 일본 하마구치 내각이 단행한 **금해금(金解禁)**은 일본 경제사에서 **'최악의 타이밍이 만든 인재(人災)'**로 불립니다. 일본이 국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금본위제로 복귀(금 수출 자유화)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 민초들의 삶을 파괴하고 군국주의의 길을 여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왜 이 정책이 그토록 치명적이었는지 3가지 핵심 이유로 정리해 드립니다.


1. 최악의 타이밍: 세계 대공황과의 만남

가장 큰 비극은 시점이었습니다. 일본이 금해금을 단행하기 직전인 1929년 10월, 미국에서 세계 대공황이 터졌습니다.

  • 상황: 전 세계가 문을 걸어 잠그고 보호무역을 시작했는데, 일본만 거꾸로 "우리는 이제 자유롭게 금을 수출하고 무역하겠다"며 문을 연 꼴이 되었습니다.

  • 결과: 전 세계적인 수요 감소와 일본의 개방이 맞물려 일본의 수출은 반토막이 났고, 국내 자금(금)은 순식간에 해외로 빠져나갔습니다.

2. 엔화 가치의 과대평가 (구평가 해금)

당시 일본 정부는 엔화의 가치를 시장 가격보다 훨씬 높게 설정(구평가, 수준)하여 금해금을 진행했습니다.

  • 수출 경쟁력 상실: 엔화 가치가 실제보다 높게 매겨지니, 일본 상품의 가격이 해외에서 너무 비싸졌습니다. 안 그래도 대공황으로 물건이 안 팔리는데, 가격까지 비싸니 일본 기업들은 줄도산하게 됩니다.

  • 디플레이션의 늪: 정부는 엔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폈고, 이는 물가 하락과 임금 삭감으로 이어져 내수 경기까지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3. '쇼와 공황'과 농촌의 붕괴

이 정책의 여파로 발생한 경제 위기를 **'쇼와 공황'**이라고 합니다.

  • 농촌의 비극: 수출길이 막힌 생사(비단실)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가 수입이 끊겼습니다. 당시 일본 농촌에서는 굶주림 때문에 딸을 팔아넘기는 '무스메미우리(娘売り)'가 발생할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 정치적 반동: 경제 실패에 분노한 민중과 청년 장교들은 기성 정치인과 재벌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는 5.15 사건, 2.26 사건 등 군부 쿠데타와 군국주의로 급격히 쏠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금해금의 인과관계 프로세스

  1. 금해금 실시 (1930. 1) 구평가(엔고) 유지

  2. 세계 대공황 직격탄 일본 수출 급감

  3. 금 유출 및 긴축 극심한 디플레이션 발생

  4. 민생 파탄 의회 정치 실망 및 군부 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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