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증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일요일에 초등학생 딸과 영화를 보고 왔다. (주토피아2) 아이는 영화가 재미있었다고 했는데, 나는 그리 즐겁지 않았다. 영화 내용이 "무슨 일이 일어났다. 다음은 무슨 일이 이어질 것이다."라는 정보로만 느껴지고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감정세포가 다 죽어버린 것 같다.
쇼핑몰 내에 있는 영화관이라서 쇼핑몰 내부를 한참 지나와야 했다. 외부에 노출된 오락실 기계들에서 엄청난 소음이 들리는데, 사람들은 거기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1분도 있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런 곳에서 1시간쯤 머무르면 나는 집에 와서 몇 시간은 더 늘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여자아이들의 참새방앗간 - 다이소, 아트박스, 올리브영, 떡볶이가게, 마라탕, 아이스크림할인점...
이 중에서 아트박스에 들렀다. 딸은 작은 인형 키링을 하나 샀고, 나는 형광색 삼색볼펜을 하나 샀다. 아이가 미술용 붓을 보더니 사고 싶다고 했다. 집에 붓이 없어서 그림을 못 그렸다는 것이다. (물감과 붓은 미술학원에서만 사용한다.)
"엄마가 숨겨둔 붓 잔뜩 있어. 그거 꺼내줄게."
집에 와서 튼튼한 붓케이스에 꽂혀 있는 붓들을 보여주니 아이가 감탄했다. 그 동안 나는 집이 어질러지는 게 싫어서 집에서 물감을 못 쓰게 했다. 이제는 아이가 혼자 물감을 쓰고 책상을 잘 치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딸은 집에 오자마자 물을 떠다 놓고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그라데이션을 하면서 수채화로 꽃을 그렸다. 나는 아이의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보기만 해도 지치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나는 의욕이 없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저 붓들 중에는 내가 20대에 쓰던 것도 있고, 30대에 그림을 그려볼까 해서 사둔 것도 있다. 하지만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늘 살림과 육아에 지쳐 있었고, 유튜버로 일할 때는 편집 일에 지쳐 있었고, 지금은 그냥 나이가 들어서 의욕이 없다. 모든 일이 귀찮고 머릿속에 "쉬고 싶다."라는 생각만 있다. 물론 일상 속에서 다양한 일을 하지만,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을 하는 목적이 "빨리 끝내고 쉬고 싶다."라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지쳐 있어서 공연장에 종종 다닌다. 춤이든 음악이든, 예술인들의 공연을 볼 때마다 치유되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이런 생각이 든다.
"참 열심히들 산다. 뭐 하러 저런 일에 오랜 시간을 들여서 고생하지? 별로 돈도 안 될 텐데."
나의 내면의 투사이다. 나는 귀찮아서 저런 일에 오래 몰두하기 힘들 것이다.
되돌아 보면 이건 단지 최근 몇 년의 일이 아니라 뿌리깊은 고질병같은 것이다. 이 오래된 무기력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요즘 계속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있다.
나의 내면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너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을 풀어서 쓰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남들 눈에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지친다는 것이다. 본래 자신의 내면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즐겁고 지치지 않는다.
챗지피티에게 나의 문제점이 뭐냐고 물어보면, 자신이 너무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돌보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엄마인 내가 자세히 돌보지 않으면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지."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점점 심해지는 무기력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토요일 오후에 집 근처 공연장에서 예매해 둔 클래식 음악 공연을 보았다. 혼자가 편하다. 다음으로 상가에 가서 음식들을 사왔다. 초밥, 만두, 빵, 과일까지 사서 집에 왔다. 매일 집에서 아이가 먹다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때우니 사는 게 재미없어지는 것 같다.
남편은 가게에서 한 팩 5500원에 파는 만두가 비싸다고 왜 샀냐는 식으로 말했지만, 내가 먹어보니 괜찮았다.
"맨날 비비고 냉동만두만 먹으니까 질려. 맛있네 뭐!"
사온 음식들을 골고루 조금씩 먹었다. 커피는 먹지 않지만 모카크림빵은 좋아한다. 냉동 블루베리를 전자렌지에 녹여서 무가당 요거트를 부어서 먹었다. 다양한 음식들을 조금씩 먹으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나는 돼지고기가 냄새나서 먹지 못하고, 생선회도 비려서 잘 먹지 못한다. 계란 정도 먹을 수 있고, 흰살생선으로 만든 생선가스와 가리비 초밥을 좋아한다. 두부는 너무 자주 먹어서 질렸다. 먹을 수 있는 단백질 음식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먹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잘 챙겨 먹어야 한다.
나와 큰아들은 잡곡밥을 좋아하는데 남편은 백미밥 없냐고 불만이다. 남편이 백미밥을 해 두면 나는 그게 맛이 없어서 불만이다. 남편은 가끔 뜨끈한 국밥이 먹고 싶다며 선지해장국을 사다가 먹는다. 내가 보면 "뭐 저런 걸 먹나?" 싶은 걸 맛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집에서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많이 끓여먹는 것 같은데 나는 찌개를 거의 안 끓인다. 남편은 필요한 것을 사다 먹고, 나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따로 사온다.
큰아들의 식성이 나와 비슷해서 식물로 음식을 만들어 주면 좋아한다. 유럽산 냉동 완두콩이 저렴해서 먹기에 좋다. 냉동 완두콩, 그린빈스, 청경채, 숙주, 이런 것 중에 랜덤으로 두어 가지를 굴소스 넣고 볶아서 먹는다. 큰아들과 나만 잘 먹는 음식이다. 얼마 전에는 렌틸콩 수프를 만들었더니 큰아들이 좋아했다.
큰아들은 같은 음식을 자주 주면 빠르게 질려버리고 힘들어한다. 특히 고기를 자주 주면 싫어한다. 오랜만에 새로운 채소로 만든 음식을 주면 좋아한다. 늦은 봄에 마늘쫑 볶음을 주거나 가을에 우엉, 연근 조림을 주는 것이다. 계절마다 제철 채소 반찬을 주어야 한다.
아들처럼 나 역시 제철 채소 음식을 먹는 데서 큰 즐거움과 만족감이 온다. 남편은 나와 식성이 달라서 채소반찬이 있어도 한 가닥씩 먹을 뿐인데, 큰아들이 잘 먹어주니 동지가 생겨서 기쁘다. 겨울철에 꼬막비빔밥도 아들이 잘 먹는다. 홈플러스에서 파는 자숙 가리비 한 팩을 고추장 양념에 무치고 상추를 잘라 넣고 가리비 비빔밥을 주어도 좋아한다.
아이들은 부모들의 아바타이다. 나는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소질을 충분히 계발하지 못했고, 어린 딸은 즐겁게 그림을 그린다. 내가 어릴 때는 집이 가난해서 늘 낡고 남자아이같은 옷만 입었는데, 딸에게 옷을 이것저것 사서 입히는 게 재미있다. 딸은 날씬해서 모든 옷이 잘 어울린다.
큰아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채소 음식들을 잘 먹는다. 둘째아들 역시 큰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지낸다. 내가 자랄 때는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고 방치된 환경에서 자랐다. 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었고 수능시험 도시락도 내가 싸가야 했다. 그에 비해 나의 아이들은 보호받고 자라고 있다.
남편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PC로 게임을 할 의욕이 없어서 오래 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대신에 아이들이 열심히 게임을 한다. 남편은 최근에 OLED 모니터를 2개나 사고 최신 그래픽카드까지 집안의 게임 장비에 수백만 원을 들였다. 아이들에게 게임을 시켜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과거의 욕망을 투사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지금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천천히 잘 생각해보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려고 한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미니멀라이프를 좀 더 확실하게 실천하기"인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남의 눈에 좋아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따라 사는 연습을 계속 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다 보면 감정세포가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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