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인라디오 병쉰색희의 스탈린 미화: 러시아가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더 강해서 러시아에서는 우크라 국기 걸고 다녀도 문제없지만, 우크라에서는 총맞는다는 병쉰같은 헛소리를 하고, 스탈린이 1) 1시간에 250페이지를 읽을 정도로 독서속도가 뛰어났다고 출처불명의 개소리를 지껄이고, (2) 코란을 잘 알고 있었다는 헛소리를 하며, (3) 그가 1929년에 도입한 집단농업체제에 대한 과오를 1952년에 반성했다고 개뻥을 치며, (4) 약 950,000 ~ 1,200,000명이 죽은 1937-8년의 대숙청을 유대-볼셰비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 쯤으로 평가절상하고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는 파시스트 같은 소리나 떠든다 이 병쉰색희는), (5) 앤서니 서튼의 연구를 읽어보지도 않고 종종 인용하는 주제에 1930~1940년대 스탈린이 서구로부터 과학기술, 자본 지원을 받아 계획경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고 스탈린 본인의 능력으로만 서술; 집단농업체제 정도가 스탈린의 유일한 과오정도로 묘사하는 파시스트 개색희; 이 색희는 프랑스 유학 시절 얻어터졌는지 서유럽 중심 문화에 반감이 많은데, 그것까지는 좋지만, 러시아를 심각하게 미화한다는 게 문제; 뭐, 흐루시초프가 일자무식의 무능력범이라고 묘사한 것은 옳았고, 그의 유일한 업적이 소련의 고질적인 집단농업체제를 top-bottom에서 bottom-top으로 바꿔 농업생산량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는 지적은 옳다; “스탈린이 없었다면 러시아는 벌써 망했다.” (Andrei Fursov)

 https://www.youtube.com/watch?v=tSmolRLPBss

 

자주인라디오 병쉰색희의 스탈린 미화: 러시아가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더 강해서 러시아에서는 우크라 국기 걸고 다녀도 문제없지만, 우크라에서는 총맞는다는 병쉰같은 헛소리를 하고, 스탈린이 1) 1시간에 250페이지를 읽을 정도로 독서속도가 뛰어났다고 출처불명의 개소리를 지껄이고, (2) 코란을 잘 알고 있었다는 헛소리를 하며, (3) 그가 1929년에 도입한 집단농업체제에 대한 과오를 1952년에 반성했다고 개뻥을 치며, (4) 약 950,000 ~ 1,200,000명이 죽은 1937-8년의 대숙청을 유대-볼셰비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 쯤으로 평가절상하고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는 파시스트 같은 소리나 떠든다 이 병쉰색희는), (5) 앤서니 서튼의 연구를 읽어보지도 않고 종종 인용하는 주제에 1930~1940년대 스탈린이 서구로부터 과학기술, 자본 지원을 받아 계획경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고 스탈린 본인의 능력으로만 서술; 집단농업체제 정도가 스탈린의 유일한 과오정도로 묘사하는 파시스트 개색희; 이 색희는 프랑스 유학 시절 얻어터졌는지 서유럽 중심 문화에 반감이 많은데, 그것까지는 좋지만, 러시아를 심각하게 미화한다는 게 문제; 뭐, 흐루시초프가 일자무식의 무능력범이라고 묘사한 것은 옳았고, 그의 유일한 업적이 소련의 고질적인 집단농업체제를 top-bottom에서 bottom-top으로 바꿔 농업생산량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는 지적은 옳다; “스탈린이 없었다면 러시아는 벌써 망했다.” (Andrei Fursov)

 

 

 

 


 

대숙청
Большой террор | Great Purge
시기
주동자
이오시프 스탈린(소비에트 연방 최고지도자)
니콜라이 예조프(소비에트 연방 내무인민위원)
라브렌티 베리야(소비에트 연방 내무인민위원)
위치
소련 전역
사망자
681,692명(사형 집행)
약 950,000 ~ 1,200,000명(사형 이외까지 모두 합해서 추산)
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권력 강화 및 소련의 대대적 개혁 시도
결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권력 강화 성공
소련군 지휘관 및 정치인 대거 사망 및 교체[1]
소련 전 지역에서의 대규모 민간인 체포와 처형
영향
소련군 지휘관의 공백으로 인한 소련군 군사력 약화[2]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대숙청으로 사망한 인물들3.2. 숙청 대상이었으나 살아남은 경우3.3. 소수민족 박해와 학살
3.3.1. 폴란드인과 라트비아인3.3.2. 고려인
4. 원인 분석
4.1. 전통주의적 시각
4.1.1.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
4.2.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
4.2.1. 군부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
5. 여담6. 관련 어록7.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우리는 그런 적들을 모조리 없애 버릴 겁니다. 설사 그들이 옛 볼셰비키라도! 우리는 그들의 일족, 그들의 가족까지 없애 버릴 겁니다. 우리는 생각과 행동으로 (그렇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우리 사회주의 국가의 통일을 해치는 자는 모두 가차없이 처단할 겁니다. 그들은 물론 그들의 일족까지, 모든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1937년 11월 8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연설

1937년부터 1938년[3] 사이의 기간 동안 소련의 정치, 경제, 국방, 행정, 사법, 언론, 문화예술, 과학기술, 교육, 농업, 산업 등 전 분야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체제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조리 숙청당한 사건.

이오시프 스탈린이 기획하였으며 이를 주도적인 위치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한 것은 니콜라이 예조프였다.[4] 대숙청은 숙청 대상에게 대부분 스파이 혐의 등으로 사형을 판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수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 사례로 꼽힌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현재까지 발견된 자료와 기록에 의하면 1937년~1938년에 걸쳐 사형이 집행된 인원은 681,692명이며 굴라크에서 강제 노역 중 질병, 고문 등으로 인해 사망한 인원은 136,520명이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망자의 숫자를 950,000명에서 1,200,000명 사이로 추산하고 있다.

러시아어 발쇼이 테로르(Большой террор)[5]이며 주도적인 위치를 담당한 니콜라이 예조프의 이름을 따 예좁시나(ежовщина), 치스트카(чистка)로도 불린다. 영어로는 Great Purge, Great Terror, Stalin's Purge, Stalin's Terror, Great Cleaning 등으로 불린다. 러시아어 'террор'나 영어 'Terror'는 모두 라틴어를 어원으로 하는 동원어로,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 정부의 공포정치에서 기원한 것이다.

 

 

 

스탈린이 젊은시절 책을 1시간에 250pg를 읽을 수 있었고, 성경과 코란도 통달했다는 이야기는 사실?

스탈린의 독서 습관과 지식 수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질문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독서 속도: 1시간에 250페이지

이것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스탈린이 매우 빠르고 다독했던 인물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 스탈린은 엄청난 **다독가(多讀家)**였으며, 특히 정치, 역사, 경제, 군사 분야의 책을 탐독했습니다. 그의 사서(司書)나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책을 읽었고, 읽은 내용을 놀라울 정도로 잘 기억했다고 합니다.

  • 하루에 수백 페이지를 읽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1시간에 250페이지"**라는 구체적인 수치는 그가 책을 매우 빨리 읽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전설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 그의 개인 도서관에는 수만 권의 책이 있었고, 그는 책에 수많은 메모와 밑줄을 남겼습니다. 이는 단순히 빨리 읽는 것을 넘어 깊이 있는 독서를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성경(Bible) 및 코란(Quran) 통달

성경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통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 성경: 스탈린은 젊은 시절(1894년~1899년) **트빌리시 정교회 신학교(Tbilisi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습니다. 신학교 과정은 정교회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으므로, 그는 **성경(구약과 신약)**과 신학, 교회 역사 등에 대해 아주 철저하고 깊이 있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뛰어난 학생이었고, 특히 성경과 관련된 지식은 매우 해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성경을 암송하고 인용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 코란: 코란(이슬람 경전)을 성경처럼 '통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나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은 코카서스 지역(Caucasus region) 출신으로, 이 지역은 이슬람 문화권과 인접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소련의 민족 문제를 다루는 데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이슬람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정규적으로 배운 성경처럼 '통달'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약하자면, 스탈린은 경이로운 독서가였고 성경 지식이 매우 해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1시간에 250페이지나 코란을 통달했다는 것은 그 독서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did stalin read 250pgs of a book within an hour?

The claim that Stalin could read 250 pages of a book within an hour is likely an exaggeration used to emphasize his exceptional reading habits.

Here is a breakdown of what is known about his reading:

  • Voracious Reader: Stalin was unquestionably a serious and prolific reader (a "voracious reader" and "serious intellectual"). His personal library contained an estimated 20,000 books, and many of the surviving volumes are heavily annotated with his markings (pometki).

  • Daily Quota: Sources often claim he set himself a daily reading quota of between 300 and 500 pages. However, one historian suggests that this 500-page figure might be unrealistic given his heavy workload.

  • Actual Speed: Reading 250 pages in an hour is an extremely high speed that approaches the capabilities of modern-day "speed reading" techniques, which are often met with skepticism by cognitive neuroscientists. For an average text, reading 250 pages in one hour would require an impossible pace of thousands of words per minute.

  • Reading Style: His notes show he read with engagement and discipline, underlining key points and often writing his own subheadings. He read for learning, sometimes selectively, sometimes comprehensively, but always methodically.

In summary: While Stalin was an extraordinarily fast and dedicated reader who read hundreds of pages daily, the specific figure of 250 pages per hour is almost certainly a myth or a significant overstatement of his actual speed.

소련에 집단농업체제가 도입된 것은언제의 일? 1932년?

소련에 **집단농업체제(콜호즈)**가 본격적으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1929년 말부터입니다. 1932년은 그 정책이 가장 격렬하게 추진되고 정착되던 시기에 해당합니다.

질문하신 시기와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면적인 추진 시작 시점: 1929년

  • 1928년: 스탈린이 주도한 **제1차 5개년 계획(1928-1932)**의 일환으로 농업 집단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느슨하게 장려되었습니다.

  • 1929년: 스탈린이 **전면적 집단화(sploshnoi collectivization)**를 선언하고, 특히 곡창 지대에서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해는 당대 소련에서 **"위대한 전환의 해(The Great Break)"**라고 불렸습니다.

  • 1929년 말 ~ 1930년 초: 집단화가 가장 폭력적이고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로, 농민들의 거센 저항이 있었으며 부농(쿨라크) 계층이 청산되었습니다.

2. 집단화의 정점 및 확립: 1932년 ~ 1937년

  • 1932년: 이 시기는 집단화 정책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며, 강제 집단화와 곡물 징발로 인해 **소련 대기근(홀로도모르)**이 발생했던 시기 중 일부입니다. 따라서 1932년은 집단농업체제가 이미 확립되어 가혹하게 운영되던 시기에 해당합니다.

  • 1936년~1937년: 대다수의 농가(약 90% 이상)가 집단농장에 편입되면서, 소련의 농업 체제로서 콜호즈가 완전히 정착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도입을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시점 1929년이며, 1932년은 그 정책이 절정에 달하여 수많은 희생을 낳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스탈린은 1952년 즈음에 자신의 집단농업체제의 과오를 인정함?

스탈린은 1952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주도한 집단농업체제(콜호즈) 정책의 과오나 인명 피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스탈린은 자신의 농업 정책을 정당화하고 사회주의 경제 이론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1. "과오 인정" 대신 "이론 정립"

1952년은 스탈린이 사망하기 1년 전이며, 그가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Economic Problems of Socialism in the USSR)》**라는 논문을 발표한 해입니다. 이 글은 소련 경제학의 교과서 편찬을 위해 집필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물물교환 확대 제안: 스탈린은 농업 생산물의 교환 형태를 화폐를 통한 매매(상품 교환) 대신 **물물교환(상품-물품 교환)**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집단농장 생산물을 '상품'에서 '사회주의적 생산물'로 완전히 전환하여 국가 소유화 수준을 높이는, 즉 집단농장을 국가 소유의 국영농장(소프호즈)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중간 단계를 제안했습니다.

  • 사회주의로의 이행 강조: 이 주장은 집단농업체제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을 개선하는 데 필요하며, 앞으로 더 높은 사회주의 단계로 발전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지, 과거 집단화 과정에서의 강제성과 폭력, 기근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 피해(홀로도모르 등)를 과오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2. 스탈린의 태도

스탈린은 재임 기간 동안 자신의 정책이 초래한 대규모 기근과 희생에 대해 공식적으로 책임을 인정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단화 정책을 소련의 급속한 공업화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1952년은 집단화 정책의 과오를 인정한 시기가 아니라, 스탈린이 집단농업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사회주의적 경제 이론을 발전시키려 시도했던 말년의 사상적 정리 시기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집단화의 과오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과 정책 변화는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탈스탈린화 과정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스탈린은 말년에 관저보다 모스크바 서부, 흑해 연안 별장들에서 주로 생활했고[103] 그곳에서 편지를 통해 지시를 내렸다. 이 별장에는 당구장, 영화관이 설치되어 있었고 인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한 요리와 술, 그리고 담배가 준비되었다. 스탈린은 마음 내키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지냈다. 물론 그들은 대개 스탈린의 충실한 종이었다.

1953년 2월 28일 저녁, 스탈린은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브렌티 베리야, 니콜라이 불가닌, 니키타 흐루쇼프를 호출하여 여느 때처럼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영화를 본 스탈린은 측근 4인방을 데리고 그의 별장인 블리즈나야로 데려가 연회에 초대했다. 베리야를 포함한 고위 당원들은 스탈린의 피바람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연회가 가시방석 같았겠지만 그렇다고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연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몇 사람들을 숙청했기 때문이다. 만찬은 다음 날인 3월 1일 오전 4시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스탈린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모두 심각하게 취한 상태였다. 스탈린은 이날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고,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면서 참석자들을 배웅하고 농담을 늘어놓으며 참석자들을 애칭으로 불렀다. 스탈린이 이렇게 기분 좋게 그들을 배웅하는 일은 언제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흐루쇼프 등도 기분 좋게 귀가했다. 측근들이 돌아가자 스탈린은 경호원들에게 자신이 부를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말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3월 1일 아침에 경호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매일 아침 10시마다 경호원들을 불러 보고를 받던 스탈린이 아무리 기다려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경호원들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경우 자칫 큰 재앙을 부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좌불안석이 되어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다가 오후 6시 반에 별장 안에 불이 켜지자 경호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방에서 아무런 명령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경호원들은 누군가는 들어가 봐야 한다고 싸웠지만 아무도 감히 스탈린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후 오후 10시쯤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사무실에서 스탈린에게 온 소포가 도착하자 경호원들은 오후 11시에 이 소포를 빌미로 하여 방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때 파벨 로즈가쇼프, 혹은 미하일 스타로스틴은 별장에 들어가 식당에 불을 켰다가 스탈린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스탈린은 의식은 있었지만 말은 못하는 상태였고, 손을 심하게 떨고 소변을 잔뜩 흘린 상태였다. 스탈린은 손을 흔들며 도움을 요청했고, 그래서 나머지 경호원들이 몰려와 스탈린을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들은 누구도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고, 또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로봇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위급한 상황일 때 오히려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의료진을 모조리 감옥에 가둔 상태라 의사도 곁에 없었다. 결국 스탈린은 자신이 뿌린 행동 때문에 자멸해 버린 자승자박의 전형적인 예시가 되어버렸다.

경호원들은 먼저 국가보안부 장관 세묜 이그나티예프에게 연락했고, 이그나티예프는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부르라고 했다. 베리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말렌코프와 겨우 연락이 닿을 수 있었는데, 말렌코프는 베리야, 흐루쇼프, 불가닌을 모두 불러서 다 같이 별장으로 갔다. 말렌코프가 혼자서 스탈린의 별장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경호원들로부터 스탈린이 오줌을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 말을 듣고 경악한 측근들은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보내 조심스럽게 스탈린의 상태를 살폈다. 스탈린이 깰까 봐 말렌코프는 구두를 벗고 양말 바람으로 스탈린에게 다가가 그가 코를 골고 있는 걸 확인했다.[104] 스탈린의 관저에서 나온 베리야는 스탈린은 그저 잘 뿐인데 법석을 떨었다고 경호원들에게 각오하라고 질책을 했다. 경호원들은 몇 시간 전에는 사태가 더 위중했다고 해명을 시도했지만 측근들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스탈린과 별장에 남은 경호원들은 스탈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호소했다. 이에 측근들은 마침내 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사무국을 소집해서 의사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진료했을 때 곧 스탈린의 상태가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오른쪽 팔다리는 마비되었고, 피를 토했으며, 체인-스톡스 호흡(Cheyne-Stokes respiration)이라는 불규칙한 호흡[105]을 했다.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나 뇌경색일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탈린의 부검 결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스탈린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스탈린이 살아나면 곤란한 베리야를 비롯한 고위 당간부들이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기밀 문서가 해금되면서 이런 음모론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예를 들어 2011년 소련의 비밀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스탈린의 사인은 확실하게 뇌출혈이라고 판명이 났다. 스탈린의 측근들이 스탈린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음모론도 그들의 당시 행동의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설득력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아무튼 당 지도부는 스탈린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사악한 배신자로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던 전문의들을 찾아갔다. 의사들은 자신들을 고문하고 심문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공손하게 돌변한 데에 굉장히 놀랐다. 당 지도부는 그들에게 체인-스톡스 호흡을 한다는 환자가 어떻게 되는지 질문했고, 의사들은 사망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결과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당 지도부원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포스트 스탈린 시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몰로토프는 한때 스탈린의 후계자로 생각되었으나 그는 스탈린의 공격을 받은 상태로 실권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최고 권력을 얻겠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2인자 따위는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제 새로운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스탈린의 정치국원들은 3월 4일에서 3월 5일로 넘어가는 심야에 당중앙위원회 간부회 사무국 회의를 소집하여 사무국을 폐지하고 19차 당대회 이전의 정치국처럼 작은 규모로 간부회를 축소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5일, 당중앙위원회, 소련 장관회의,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연합회의가 개최되어 스탈린을 건강상의 이유로 수상에서 해임하고 말렌코프를 수상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몰로토프, 베리야, 불가닌, 카가노비치를 제1부수상에 임명하고 내무부와 국가보안부를 통합하여 베리야를 장관에 임명하였다. 스탈린은 혼수상태에서 그렇게 권좌에서 물러났는데, 그가 죽기 70분 전의 일이었다.

결국 적기를 놓친 상태에서 무의미한 치료가 계속되다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음악으로 들은 뒤[106]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발표된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고혈압의 발작에 의한 뇌의 대출혈'. 말년의 스탈린은 이중 삼중으로 경비를 세웠고, 항상 자신이 자는 방을 수시로 바꿀 정도로 암살이나 테러를 두려워했다. 특히 의심병에 빠져 위급 시에 자신을 돌봐줄 의사들을 숙청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수많은 인민들과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공포 정치를 휘두르던 강철의 사나이 스탈린도 공포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104] 정말 코를 골고 있었다기보다는 스탈린이 깰까 봐 두려워 불도 켜지 못한 상황에서 들어가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상황이었기에 의학적인 지식이 부족한 측근들이 체인-스톡스 호흡(호흡 이상)을 코고는 소리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105] 호흡이 점차 깊어지다가(동시에 더 빨라지는 경우도 있다) 다시 천천히 호흡이 얕아지고(호흡이 점차 빨라지던 경우엔 이때 속도 역시 감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호흡 상태가 잠시 동안 지속되고, 그 이후 다시 한 사이클이 반복된다. 간격은 약 30초에서 2분. 그리고 이러한 호흡을 보이는 경우, 사실상 죽음에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106] 스탈린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매우 좋아했고 특히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매우 좋아했으며, 특히 마리야 유디나가 연주한 버전을 선호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유디나는 스탈린을 매우 경멸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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