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일본은 금, 은, 구리(동전)를 사용하는 사마제도를 운영했으며, 이는 금은이 없는 조선보다 앞선 문명 수준을 보여준다; 조선은 1882년에야 대동은전이라는 은화가 처음 나왔으며, 이는 기념주화 성격이었다. 조선의 금화는 1905년 일본이 실질 권력을 잡은 후에야 발행되며 금본위를 실행했다. / 8세기 부터 은을 사용했던 일본 /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실험적 개혁: 함량 및 크기 조절을 통한 화폐량 증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금화와 은화의 함량을 줄이고 크기를 축소하여 화폐 발행량을 늘림으로써, 화폐 유동량 부족으로 인한 물가 하락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 이러한 화폐량 조절 방식이 가능했던 이유는?일본은 회치법(큐펄레이션)이라는 재련 기술이 발달하여 금은동을 산출할 수 있었고, 대외 무역 시에는 다른 금화를 사용하는 등 리더층의 뛰어난 화폐 운용 전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도 시대 일본이 화폐 유통량 부족 문제를 금 함량 조절이라는 기발한 엔지니어링으로 해결한 과정을 파헤칩니다. 이들이 어떻게 금속 재련 기술을 바탕으로 물가 안정과 화폐 시스템 유지에 성공했는지 비교하며, 당대 조선 및 중국과의 문명 수준 차이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폐의 역사 30; 일본 3; 에도시대 탁월한 화폐량 조절flowchart TD A["에도 시대 일본 화폐 시스템"] --> B["금/은/구리 기반 사마제도"] A --> C["화폐 유통량 부족 문제 발생"] C --> D["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 D --> E["금/은 함량 및 크기 조절"] E --> F["화폐량 증가 및 물가 안정화"] B --> G["조선/중국과의 화폐 문명 수준 비교"]1. 에도 시대 일본의 화폐 제도와 조선과의 비교에도 시대 일본은 금, 은, 구리(동전)를 사용하는 사마제도를 운영했으며, 이는 금은이 없는 조선보다 앞선 문명 수준을 보여준다.
1.1. 일본의 사마제도와 조선의 화폐 사용 현실일본의 화폐 구성: 에도 시대 일본은 금, 은, 구리(또는 철동전)를 사용하는 사마제도를 운영했다.
조선이 구리/철동전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 조선에는 금과 은이 없어 본위 화폐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포(옷감)의 사용: 조선에서는 구리/철동전보다 포(옷감)가 더 가볍고 사용하기 편리하여 화폐로 활용되었다.
포는 무게 때문에 돈으로 사용하기에 부담이 컸으며, 같은 가치라도 쌀 한 말 두 말의 규모가 되면 짊어져야 할 정도였다.
국가 통제와 시장 가치: 국가가 구리동전의 가치를 정해도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으며, 이는 종이 화폐(지폐)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
시장 가치를 무시하고 강요하는 행위는 지옥과 같으며, 이를 추악하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일본의 은화 및 금화: 일본은 7세기부터 은화(무문은전)가 있었으며, 8세기에는 금화(골드 코인)도 발굴되었다.
7세기 은화의 발행 주체(국가 vs 민간)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중국의 금화는 거의 없으며, 당나라 개원통보는 구리 동전이다.
중국은 금과 은을 사치품으로 보관하여 금화가 극히 드물었다.
은본위제의 시작 시점 비교:
일본: 8세기부터 금본위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속나라 때 은병(은화)을 뿌리면서 은본위로 볼 수 있으나, 국가 발행 기록이 없다. 명나라 중기(1600년경)부터 은본위가 시작되었다.
조선: 1905년에야 금본위를 시작했다.
문명의 잣대로서의 화폐:
화폐(금/은) 사용 역사는 그 나라 수준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잣대이다.
중국이 일본보다 늦었기 때문에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화폐 유통량 부족으로 인한 물가 하락에 대응하여 금속 함량과 크기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화폐량을 늘려 시장을 안정시켰다.
2.1. 일본 화폐의 구조와 재련 기술에도 시대 금화와 은화:
금화: 소반(코반) 1분 반(이치부반)이 있었으며, '반(分)'은 금화의 대명사이다.
은화: 정은(초긴, 긴자)이라고 불렀으며, 길쭉한 은덩어리 형태였다.
긴자(길드): 금화 제작 조직을 의미했다.
마메이타킨: 콩 모양 또는 똥 모양으로 생긴 은화로, 길쭉한 초기은과 함께 사용되었다.
주조 방식과 기술력:
일본의 금화/은화는 유럽처럼 찍어내는 주조(Milling) 방식이 아닌, 망치질로 깎아내는 방식이었다.
똥 모양/길쭉한 모양을 쓴 것은 밀링 재련 기술이 약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발달된 재련 기술:
일본은 회취법(큐퍼레이션)이 발달하여 금, 은, 동을 산출할 수 있었다.
중국과 조선은 이 기술이 없어 광산 개발이 불가능했고, 이 때문에 종이 집회를 남발했다.
일본은 유럽의 진화 흐름을 독자적으로 따라가며 금본위/은본위를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를 이룰 수 있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등장:
요시무네는 8대 쇼군으로 1716년부터 약 30년간 재직하며 일본을 만들었다.
그는 난학(서양 학문)을 시작하여 일본의 사고방식을 업그레이드했다.
기독교 금지 이후 서양 책 수입이 막혔으나, 요시무네는 기독교와 무관한 서양 책 수입을 허용했다.
화폐 유통량 부족과 물가 하락:
요시무네는 교호 개혁을 통해 개혁을 단행했다.
금은을 계속 발굴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은이 모자라 화폐 재료가 부족해졌다 (로마 때와 유사).
이로 인해 화폐 유통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물가가 하락했다.
함량 및 크기 조절을 통한 화폐량 증가:
요시무네는 재직 22년 후인 1736년에 금화와 은화를 다시 발행했다.
금화(코반) 함량 조절: 이전 84~86% 순도에서 함량을 줄이고 크기도 줄였다.
유럽 금화 순도는 약 98%로 일본보다 높았다.
화폐량을 이전보다 두 배로 늘려 찍어냈고, 이로 인해 떨어졌던 시장 물가를 원 상태로 회복시켰다.
지속적인 화폐량 유지:
이후 금은이 계속 부족해지자, 금 함량을 50%대로 계속 줄였다.
함량을 절반 가까이 줄이면서도 화폐량을 늘려 시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화폐 단위의 유래:
코반(금화)은 86%가 금이고 14%가 은이었다.
코반의 크기는 문(文) 단위로 표시되었으며 (예: 4.76문, 3.5문), 이 '문'이 한국의 '돈' 단위의 기원이 되었다.
한국의 금 한 돈(3.75g)과 비교하여 당시 코반의 총 금 중량을 계산할 수 있었다.
코반은 직사각형 타원식이었으며, 크기를 3.5문으로 줄이고 함량도 줄이면서 이전 함량과 같다고 여겨지게 시장에서 사용되었다.
조선 화폐의 늦은 도입:
일본은 로마의 전법을 사용하여 지폐(피아트머니) 발행 대신 함량 조절로 문제를 해결했으나, 조선과 중국은 종이 집회를 남발했다.
일본의 집회는 약속어음(오브 익스체인지) 성격이었지 조선의 저화 같은 종이 집회가 아니었다.
조선은 1882년에야 대동은전이라는 은화가 처음 나왔으며, 이는 기념주화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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