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 지원을 받고 르네상스 인문주의 부흥을 이끈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영혼과 명상에 대한 연구가였다는 사실도 괄목할만하다
Ficino's broad view of philosophy occurs when he records various practices of "dormition" or alienation from the physical body as exemplary among many ancient figures. For example, Ficino, while discussing "signs" of the soul's immortality, offers instances of the soul's power over bodily phenomena: "They say that for fifty years Epimenides of Crete slept, that is, in my opinion, he lived separated from his senses. Similarly Pythagoras, they say, lay hidden away for ten years, and Zoroaser for twenty. Socrates, Plato writes, stood motionless in the same spot from one sunrise to another without closing his eyes and with his face and gaze directed toward the same place, deep in thought and abstracted from his body" (PT, 4:13.2.2, p.121)
Plato did things like this, as did Xenocrates (one hour a day) and others. Ficio's concern for practice as well as theory reveals a fact about philosophy that remained an important part of philosophy until at least the 18th century: philosophy was about living an exemplary life, a vita philosophica, as much as it was about coming up with systematic theories or verbally coherent argumentation.
Descartes considered mathematics as a kind of personal spiritual exercise.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정점이자,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끈 인물입니다. 그의 말년은 화려했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정치적 격변과 종교적 갈등 속에서 고독하게 자신의 철학을 갈무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1. 메디치 가문의 몰락과 정치적 풍랑
피치노의 삶은 메디치 가문과 궤를 같이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후원자의 죽음: 1492년, 그의 평생 후원자였던 '위대한 로렌초' 메디치가 사망합니다. 이는 피치노에게 단순한 후원자의 상실을 넘어, 그를 보호해주던 거대한 성벽이 사라진 것과 같았습니다.
사보나롤라의 등장: 로렌초 사후, 피렌체는 광신적인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지배하게 됩니다. 사보나롤라는 피치노가 추구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과 인문주의를 '이교도적인 것'으로 몰아세우며 탄압했습니다. 피치노는 한때 사보나롤라의 개혁 의지에 공감하기도 했으나, 점차 그의 극단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은둔에 들어갑니다.
2. 신학과 철학의 통합에 몰두
말년의 피치노는 자신의 '신플라톤주의'가 가톨릭 신앙과 배치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데 남은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신부였기에, 플라톤의 철학이 기독교 신앙을 보완하는 **'경건한 철학(Pia Philosophia)'**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오니시오스(Dionysius)의 저작들을 번역하고 주석을 다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3. 최후와 안식 (1499년 10월 1일)
피치노는 1499년 10월 1일, 피렌체 근교의 카레지(Careggi) 빌라에서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레지 빌라의 의미: 이곳은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에게 하사한 곳으로, 플라톤 아카데미의 본거지이자 그가 평생 연구에 매진했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학문의 고향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례와 추모: 그의 시신은 피렌체의 상징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두오모)**에 안치되었습니다. 대성당 내부에는 그가 책을 안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의 기념비가 세워져, 오늘날까지도 '르네상스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피치노는 단순히 학문적으로만 플라톤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일종의 '영적 수행'이자 '생활 방식'으로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명상'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는 매일 '정신적 상승'을 위한 엄격한 리듬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피치노의 일과와 수행 방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정신적인 평온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지적 명상: '천상의 음악'과 '수성(Mercury)'의 리듬
피치노는 매일 아침 **'오르페우스 찬가'**를 직접 하프로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목적: 그는 음악이 영혼의 무질서를 바로잡고 천상의 조화(Cosmos)와 연결해준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즐기는 음악이 아니라, 정신을 집중시켜 고차원의 철학적 사유로 들어가기 위한 **'소리 명상'**이었습니다.
별의 영향: 점성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자신의 우울질(Melancholy)을 다스리기 위해 행성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명상적 행위를 일상화했습니다.
2. '관조(Contemplatio)'의 시간
피치노에게 독서와 번역은 그 자체로 깊은 명상이었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텍스트를 읽는 행위를 **'관조'**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눈으로 글자를 읽는 것을 넘어, 육체의 감각을 차단하고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카레지 빌라의 정원을 거닐며 자연 속에서 신의 섭리를 명상하는 시간을 매일 가졌습니다. 그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복잡한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고요 속에서 영혼을 돌보는 시간"**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3. '영혼의 돌봄'을 위한 일상적 규율
피치노는 육체와 정신의 연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철저한 절제: 그는 과도한 식사나 육체적 쾌락이 영혼의 거울을 흐리게 한다고 보아 매우 절제된 식단을 유지했습니다.
우울질(Melancholy) 관리: 철학자들은 흔히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고 믿었기에, 그는 매일 빛을 쬐고 향기로운 꽃과 허브를 가까이하며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모니터링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마음챙김(Mindfulness)'**과 매우 유사한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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