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혈서 논란
1. 개요[편집]
2. 박정희 혈서 지원 진위 논란[편집]
내용은 조선일보에서 조갑제가 박정희의 일생을 다룬 전기이다. 1998년 10월 28일, 이 내용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출판되었다. 해당 내용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권 95페이지에 서술되어있다.
조갑제에 취재에 의해서 처음 주장했고, 2009년 11월 5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해당 신문을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굴했고 혈서의 내용과 신문을 처음 공개하였다.#
2.1. 박정희 혈서의 내용[편집]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満洲新聞) 7면 상단 우측으로부터 4번째 줄, 박정희(朴正熙)군(23)[1] |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모든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스러운줄 아오나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할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충성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중략)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고자 해도 자격 연령이 16살 이상 19살까지이기 때문에 23살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同君)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滿洲新聞)> 7면
2009년 11월 5일 민족문제연구소
2.2. 혈서에 대한 증언[편집]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줘서 그 혈서건이 신문에 났는지,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동료 교사 유증선 할아버지의 증언(1998년의 인터뷰)조갑제 닷컴 - 박정희는 血書(혈서)를 쓰고 滿軍(군)에 갔다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 신문에 났다(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이 신문을 보고서 姜(강) 대위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고 그와의 상면은 만주의 여관에서였다. 그로부터 강은 박의 引導人(인도인)이 되었고, 강은 당시 시험관이었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牧丹江)성에 있는 만주군 6관구 사령부內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렀다.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다. 李再起(이재기·작고·육군 대령 예편)도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만주군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길래 시험 감독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 다음해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생도 채용고시 합격자 공보’가 실렸다. 박정희는 240명 합격자(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가운데 15등, 李翰林(이한림·전 1군사령관)은 봉천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20등이었다.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 혈서를 쓴 한국 청년이 39년 첫 해엔 45명, 다음 해 40년에는 168명이었다.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석좌 이정식 교수중앙일보 - 박정희, 日학교 입학하며 혈서까지 쓴건 일종의…
2.3. 박정희의 연혁 정리[편집]
2.4. 혈서에 대한 진위 논란[편집]
혈서 진위에 대한 의혹과 반론 | |
의혹 | 제1기 시험(1938년 11월)에 연령 초과를 이유로 거부되었는데, 제2기 시험(1939년 10월)에 같은 혈서가 효력을 발휘했다는 주장이다. 혈서를 보도한 기사(1939년 3월 31일)는 혈서와 제2기 시험 사이에 7개월이라는 상당한 시간 차이가 있어, 혈서가 제2기 시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증거다. |
반론 | 이 지적은 위 기사의 전문 내용과 조갑제 평론가의 저서를 읽으면 전후 맥락과 의문이 풀린다. 연령초과인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 대좌[4]와 강재호 상위(대위)는 간도특설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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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 만주일보(満洲日報)는 1908년 6월에 이미 폐간된 신문이다. 혈서를 보도했다는 1939년 3월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문사다. |
반론 | |
의혹 |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서 교련 과목을 이수했고 하사관 자격을 취득하여 군적 자격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불문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지원이 가능하였다. |
반론 | 인터넷 상의 블로그와 게시글에서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나, 그 근거에 대한 출처와 자료가 불분명하다. |
의혹 |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날짜와 내용 등에서 오류가 있어 신빙성이 낮다. |
반론 | 혈서를 보도한 만주신문에는 1939년 3월에 발행되었고, 유증선씨의 증언에 따르면 시기는 1938년 5월경, 혈서의 내용은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혈서 시기가 틀렸고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내용이 없었지만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내용이 분명히 있었으며, 1998년 인터뷰 당시 유증선씨의 나이는 87세로 약 60년전 일을 증언한 것을 고려하면 일부 오류는 이해되는 부분이며 그럼에도 매우 구체적이다. "1)혈서의 내용이 기록된 만주신문의 발견, 2)이낙선의 비방록의 내용" 등의 서로 다른 3개의 출처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크로스 체크, 신빙성이 높다. |
의혹 | 혈서 신문 보도 내용 중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은 1939년 3월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조선인은 일계(日系)가 아닌 만계(滿系)로 지원할 수 있었다. 일계(日系)의 최초 모집은 1940년(소화(昭和) 14년) 11월 28일 陸滿秘 공문 제1019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일계(日系)는 별도의 전형과정 없이 육군예과사관학교 또는 육군경리학교 지원자 중 성적 우수자에 대한 육군성의 추천을 통해 별도의 특별시험을 경유한 자들로 선발된다.[참조문헌1] 따라서 일계(日系) 생도를 위한 모집요강 따위가 있을리 없고, 조선인 박정희가 지원하려했다면 "일계(日系) 모집요강"이 아닌 "만계(滿系) 모집요강"을 읽었어야 한다. 조선인들은 만계(滿系)로 지원했으며 합격자들은 만계(滿系)로 분류되어 공고되었다. |
반론 | |
1938년 11월 2일 동아일보 기사에도 알수 있듯, 조선인을 상대로 만주국군 육사군사과생을 모집하는데 "일계(日系)"라고 적시되어 있다. 즉, 1938년 조선인도 만주군관학교에 "일계(日系)"로 지원이 가능했고 조선인 박정희가 "일계(日系)"로 지원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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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 |
반론 | 만주국은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일련의 정부개혁을 진행하였으며, 수많은 기구가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면서 부서의 명칭이 자주 바뀌었고, 이로 인해 두 가지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1) 당시 사람들은 부서의 명칭을 편의대로 혼용했으며, "징모과"는 인재 모집과 채용과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의 명칭으로 중국 각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참조문헌4] 2) 당시 만주국은 1938년에 "징모과"가 설치되고 국병법이 시행했고, 1940년 4월에는 병사과와 각 군관구에 병사처와 판사처를 설치되었다. 혈서가 보도된 시기(1939년 3월)에 치안부-군정사 아래 징모를 담당한 군무과의 하급 부서를 "징모과"로 호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참조문헌5] |
아래는 일본 육군성 육군 제도 개편에 대한 기사이다. 1937년(강덕 4년)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역시 독립적인 제도를 새로운 제도를 사용하기보다는 일본 육군성의 제도를 그대로 가져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38년 11월 만주국군 육사군사과생 모집하는 동아일보 기사의 내용에는 "치안부(治安部)에 신입하리라"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1938년 11월 육군성 개편 내용에도 "징모과(徵募課)를 인사국(人事局)에 옮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치안부-군정사-징모과"에 지원을 했다는 기사는 틀린 말이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유령 부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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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 군관학교 생도채용과 관련한 주무부서는 징모과나 군무과가 아닌, 참모사 훈련과 소관이다. 모집요강을 읽었다면, 문의사항은 가까운 군관구 사령부, 또는 치안부 훈련과, 육군군관학교, 지방관공서에 하라고 되어있는 문구를 분명히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군관생도의 채용과 전혀 상관이 없는 징모과로 혈서를 보냈다는 말인가? 징모과는 군관생도가 아닌, 만주 국적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사무와 신검을 담당하는 부서다. |
반론 | 군관학교 생도 채용과 관련된 주무부서에 대한 문제는 당시의 상황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가 육군 군관학교에 입학한 사실만으로 꾸준히 군관학교만 지원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당시 만주국에서는 1938년 5월 7일에 관리 모집명령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일계(日係) 군관 모집"과 관련된 내용이다. 박정희가 확인한 "일계 군관 모집요강"은 아마 참조문헌6의 것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참조문헌6] 만주국육군군관학교의 입학과정은 전년도 10월경에 입학이 결정되어 4월 초에 입학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박정희가 편지를 보낸 3월경에는 이미 탈락한 이후이다. 이는 경상북도에서 만주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해 착각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는 혈서 편지를 보내고 탈락 이후에도 다시 입학 시도하여, 39년 10월에 입학을 허가 받아 이듬해 40년 봄에 비로소 입학에 성공할 수 있었다.[참조문헌7] |
의혹 | 일본 국회 도서관에 수십 년 동안 소장되어 온 박정희 혈서 기사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을까? 해당 기사는 원본 없는 마이크로필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기사의 진위 여부는 독자들의 판단할 것이다. |
반론 | 마이크로필름을 사용하는 것은 원본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자료의 특성상 원본이 훼손될 것을 방지하고 보전하기 위해 필름으로 촬영해 놓은 것이다. 마이크로필름은 연구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물론 지금도 능력이 되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일본국회도서관에 방문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12] |
수십년 동안 국회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발견했느냐고 묻는다면, 역사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이런 일이라고 답할 수 있다. 지금도 역사학자들은 도서관의 도서목록을 조사하며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옛날 서적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특히 만주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해당 시대에 관한 가장 생생한 정보를 담고 있는 신문 기사를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2.5. 혈서와 관련된 소송의 결과[편집]
재판 결과 형사소송에서는 불기소처리, 민사소송에서는 강용석, 정미홍, 일베 회원 강 모 씨에게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각각 500만 원, 300만 원, 3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져 승소했다.
3. 백년전쟁에 소개된 부분에 대한 보론[편집]
민족문제연구소의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서 소개된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된 문서를 인용할때, 내용 해석이 주관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하며, 편향된 잘못된 해석과 부분을 수정하고 빠진 부분이 있다는 주장이다.
3.1. 대통령 브리핑 북 원본[편집]
3.2. 백년전쟁에 소개된 내용[편집]
1961년 11월, 미국 케네디 대통령 브리핑 문서 143p |
원문 | However, Pak gave evidence that resulted in apprehenesion of some three hundred Communist agents:he thus won a reprieve from the death penalty. |
해석 | 박정희는 약 300명의 동료들이 체포되도록 증거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그는 사형을 면했다. |
3.3. 케네디 대통령 브리핑 북에 대한 보론[편집]
원문 | His reputation as a brilliant young officer helped him in late 1948 when he was court-martialed as a Communist after the Yosu-Sunchon uprisings. |
해석 | |
원문 | (His older brother, a member of the South Korean Communist Party, had been killed by the National Police during the Taegu riots of 1946; this supposedly embittered Pak and turned him towards Communism.) |
해석 | |
원문 | Pak gave evidence that resulted in apprehenesion of some three hundred Communist agents:he thus won a reprieve from the death penalty, |
해석 | 박정희는 약 300명의 공산당원 첩보원들이 체포되도록 증거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그는 사형을 면했다, |
가려진 부분의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원문 | and though efforts of Chong Il-kwon (now Ambassador to the US) and Peak Son-yop (now Ambassador to France), his sentence was reduced to ten years. |
해석 | |
원문 | Released upon the outbreak of war, he has since displayed no trace of Communist sympathies. |
해석 | 전쟁 발발에 의해 풀려났고, 그는 이후로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흔적을 보인 적이 없다. |
원문 | Pak served with distinction during the korean war and earned respect for his hard work, honestly, and anti-corruption efforts. |
해석 | 박정희는 한국전 중에 탁월하게 복무하였으며, 열정적인 임무수행과 정직함 그리고 부패청산에 대해 존경을 받았다. |
원문 | He openly opposed the Liberal Party's rigging of the March 1960 election and the army's part in it. |
해석 | 그는 공개적으로 1960년 3월의 자유당의 부정선거와 부정에 참여한 군에 반대했다. |
3.4. 방통위와 법원의 판단[편집]
평소 베오베만 눈팅하던 사람인데 박근혜씨 관련 글 댓글 중에
'아직도 박정희 혈서기사가 조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냐'는 글이 있길래 적어봄.
원래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지만 거참...
처음 박정희 혈서 기사가 이슈가 되었을 때 박빠쪽에서는 두가지 부류가 있었음
하나는 일본 육사도 아니고 만주군관학교 들어간게 뭐 그리 큰 잘못이냐?
<--- 만주국이 일제 괴뢰국이고 독립군이 만주에서 활동한걸 고려하면 무식의 정점을 찍는거임 ㅋㅋ
또 하나는 멘붕이 와서 신문 이미지가 잘못된 것, 곧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류.
전자는 그래도 다음 단계로 대화를 진행 할 수가 있음 하지만 이건 답이 안나옴 ㅋㅋㅋ
지들 생각에도 친일파는 까는게 맞는데 혈서쓰고 만주군 들어갔으면 친일파 아니라고 우기기도 어려움
그냥 우리 박정희님이 손까락을 째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거임 ㅋ
어떻게 보면 그래도 순수한 진상이라고 볼 수 있을듯.
원래 박정희 혈서는 전설처럼 오래동안 떠도는 이야기였음.
그래서 그동안 소문을 확인하려고 긴세월 많은 연구자와 기자들이 만주지역에 대학이나 도서관, 벌판을 헤메며 신문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음
이유는 소문에 혈서 기사가 만주신문 혹은 만주일보에 실려있다고 퍼져 있었기 때문.
결론 부터 말하자면 만주신문은 일본에서 발행되던 지방지 같은 거였음,
당시에는 만주가 개척지였으니까 일본에 만주소식을 알고 싶어하는 수요가 있었던 듯.
쉽게 말하자면 부산일보를 서울에서 발행하는데 서울 사람들이 사서 보라고 찍어내는 거였음.
그러니까 그동안 만주에 가서 뒤지고 다녀도 아무도 찾을 수 없었던거임.
박정희 혈서 입대 재인증 사진이라고 하지만
일본 국회 도서관에 있는 마이크로 필름 사진 찍어온거.
참고로 일본 국회도서관은 사진촬영 금지라 몰래찍어옴... 무셔
이 사진을 보고도 박정희 혈서 기사가 조작이라고 할려면 직접 일본국회도서관에 가서 확인하고 와서 말꺼내기 바람.
일본국회도서관에 있는 마이크로 필름이 조작된거라고 할려면 1939년에 만주신문 편집장이 조선이 독립하고 박정희가 17년 동안 대통령 해먹을 걸 어떻게 알고 기사 편집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말꺼내기 바람.
그리고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이 글은 박정희가 나이 기준도 넘었는데 교사 때려 치우고 만주군 장교될려고 손까락째고 진상 부려서 겨우겨우 입대했다는
정도의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선에서 정리가 되면 좋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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