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흑인노예가 성행하게 된 이유: 미개한 서양인들이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인디오의 인간성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

 
바야돌리드 논쟁
1550년 스페인 서북부의 바야돌리드에서 일어난 논쟁.
2. 배경[편집]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수많은 인디오[1]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잔혹한 식민통치가 계속 되자 스페인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오들이 스페인의 가혹한 통치로 점점 인구가 감소하면서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엔코미엔다[2]를 폐지하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엔코미엔다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던 스페인 대귀족들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3] 이에 카를로스 1세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오들의 지위와 권리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고 바야돌리드에서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3. 전개[편집]
이 회의에서 저명한 스페인의 석학인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는 "인디오들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강압적 방법으로 지배하고 통치해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 도미니코회 수사인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인디오들에게도 이성이 있으며, 강압적인 방식이 아닌 설득과 교육으로 인디오들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4. 결과 및 의의[편집]
논쟁 끝에 교황 특사는 라스카사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인디오에게도 이성과 문화가 있으며 우리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이니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거나 가혹한 처우를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따라 인디오를 노예로 만드는 모든 행위가 불법화한다.

그런데 인디오를 노예로 삼지 못하게 되자, 노예상인들은 "아, 그러면 아프리카인을 끌고와서 노예로 부리면 되겠구나?"라는 신박한 결론을 내린다(...) 이후 아프리카의 중서부 지역의 흑인을 대규모로 노예로 끌고 오며 그들은 바야돌리드 논쟁과 같은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이는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가 논쟁 당시 인디오 대신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자고 주장했단 바지만, 이후 흑인이 학대받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고 노예제 철폐를 주장한다.물론 안 그래도 인디오 노예 해방으로 손해를 본 스페인 정부는 이번에는 아얘 듣지도 않고 쌩깐다.[4]

그래도 이 논쟁은 근대 국제법의 탄생에 직결되며 몽테뉴가 1580년에 "야만인의 악행엔 정죄하면서 우리의 악행엔 눈이 멀었다"라고 개탄하는 등, 자기 반성적 태도를 부른다.[5]

상기의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해, 프랑스의 작가 장클로드 카리에가 쓴 소설도 있으며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 (바야돌리드 논쟁, 샘터,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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