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빙 사건(King-Byng Affair, 1926) 2: 록펠러 2세의 베프인 대표적 록펠러계 윌리엄 라이언 맥켄지 킹(William Lyon Mackenzie King)의 자유당이 (버트런트 러셀-프리메이슨-록펠러 연합으로 만들어진 일본 자민당의 당명을 연상시킨다) 록펠러 빽 믿고 의회해산 해달라 요청하자, 영국 왕실을 대표하고 (로스차일드-영국을 대표하는) 캐나다 보수당을 챙기던 줄리안 빙 총독이 거절한 사건; 빙 총독의 결정으로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보수당 정부도 며칠 못 가 의회에서 불신임당하고 맙니다. 결국 선거가 치러졌는데, 여기서 킹 총리의 천재적인(혹은 영악한) 정치질이 발동합니다. 킹의 전략: "영국에서 보낸 총독이 감히 캐나다 국민이 뽑은 총리의 말을 무시해? 이건 영국의 간섭이다!"라고 선동했습니다. 민심의 동요: 캐나다 국민들은 스캔들은 잊어버리고 '캐나다의 자존심' 문제로 받아들였고, 킹 총리는 선거에서 승리하며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 이 사건 이후, 캐나다와 영국의 관계는 완전히 재정립되었습니다. 총독의 권한 박탈: "총독은 총리의 조언(요구)을 거부할 수 없다"는 관례가 대못처럼 박혔습니다. 영국과의 법적 분리: 1926년 '밸포어 선언'과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이어지며, 총독은 '영국 정부의 대표'가 아니라 단순히 **'국왕의 상징적 대리인'**으로 격하되었습니다. / 1960년대 사카린 밀수 사건의 본질이 중앙정보부 내 김종필 세력 (MI6, 로스차일드) vs 이후락 세력 (CIA, 록펠러)였던 것을 상기시키는 사건 / 무지랭이들의 착각과 다르게 하나의 세계정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국제투기자본 내에서도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여러 분파가 있다 / 해서, 국제투기자본의 빌 클린턴이나 도널드 트럼프도 최근 엡스타인 사건으로 곤혹을 치르는 것

 

킹-빙 사건(King-Byng Affair, 1926) 2: 록펠러 2세의 베프인 대표적 록펠러계 윌리엄 라이언 맥켄지 킹(William Lyon Mackenzie King)의 자유당이 (버트런트 러셀-프리메이슨-록펠러 연합으로 만들어진 일본 자민당의 당명을 연상시킨다) 록펠러 빽 믿고 의회해산 해달라 요청하자, 영국 왕실을 대표하고 (로스차일드-영국을 대표하는) 캐나다 보수당을 챙기던 줄리안 빙 총독이 거절한 사건;  빙 총독의 결정으로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보수당 정부도 며칠 못 가 의회에서 불신임당하고 맙니다. 결국 선거가 치러졌는데, 여기서 킹 총리의 천재적인(혹은 영악한) 정치질이 발동합니다.      킹의 전략: "영국에서 보낸 총독이 감히 캐나다 국민이 뽑은 총리의 말을 무시해? 이건 영국의 간섭이다!"라고 선동했습니다.      민심의 동요: 캐나다 국민들은 스캔들은 잊어버리고 '캐나다의 자존심' 문제로 받아들였고, 킹 총리는 선거에서 승리하며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 이 사건 이후, 캐나다와 영국의 관계는 완전히 재정립되었습니다.      총독의 권한 박탈: "총독은 총리의 조언(요구)을 거부할 수 없다"는 관례가 대못처럼 박혔습니다.      영국과의 법적 분리: 1926년 '밸포어 선언'과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이어지며, 총독은 '영국 정부의 대표'가 아니라 단순히 **'국왕의 상징적 대리인'**으로 격하되었습니다. /  1960년대 사카린 밀수 사건의 본질이 중앙정보부 내 김종필 세력 (MI6, 로스차일드) vs 이후락 세력 (CIA, 록펠러)였던 것을 상기시키는 사건 / 무지랭이들의 착각과 다르게 하나의 세계정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국제투기자본 내에서도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여러 분파가 있다 / 해서, 국제투기자본의 빌 클린턴이나 도널드 트럼프도 최근 엡스타인 사건으로 곤혹을 치르는 것

  캐나다 역사에서 딱 한 번 총독이 총리의 요구(의회 해산)를 거절했던 **'킹-빙 사건(King-Byng Affair, 1926)'**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총독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맞습니다. 실질적으로 찰스 3세는 런던에 살고 있고, 캐나다인들 입장에서도 '우리 왕이긴 한데 결국 영국에 있는 사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 관계를 "말장난"이나 "형식적인 허례허식"이라고 느끼시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질문하신 **킹-빙 사건(King-Byng Affair, 1926)**은 바로 그 '말장난' 같은 권위를 두고 **"총리가 대장인가, 왕의 대리인(총독)이 대장인가?"**를 놓고 정면 충돌했던 사건입니다.


1. 사건의 배경: 아슬아슬한 소수 정부

1925년 캐나다 총선 결과,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라이언 맥켄지 킹(William Lyon Mackenzie King)**의 자유당은 보수당보다 의석수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소수 정당의 지지를 얻어 억지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죠.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터집니다. 킹 총리의 정부 인사들이 연루된 **'세관 밀수 뇌물 스캔들'**이 폭로된 것입니다. 의회에서 정부 불신임안이 통과되어 실각할 위기에 처하자, 킹 총리는 꼼수를 부립니다.

2. 충돌: "해산해 달라" vs "못 하겠다"

킹 총리는 자신이 쫓겨나기 전에 판을 엎으려고 당시 총독이었던 줄리안 빙(Julian Byng) 장군을 찾아가 이렇게 요구합니다.

킹 총리: "의회를 해산하고 당장 새로 선거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자기가 불리하니까 판을 깨겠다는 심보였죠.)

하지만 빙 총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빙 총독: "선거 치른 지 1년도 안 됐는데 또? 게다가 지금 1당은 보수당이잖아. 내가 보수당한테 정부 구성할 기회를 먼저 줘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선거하자."

빙 총독은 총리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캐나다 역사상 총독이 총리의 의회 해산 권고를 거부한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3. 결과와 반전

빙 총독의 결정으로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보수당 정부도 며칠 못 가 의회에서 불신임당하고 맙니다. 결국 선거가 치러졌는데, 여기서 킹 총리의 천재적인(혹은 영악한) 정치질이 발동합니다.

  • 킹의 전략: "영국에서 보낸 총독이 감히 캐나다 국민이 뽑은 총리의 말을 무시해? 이건 영국의 간섭이다!"라고 선동했습니다.

  • 민심의 동요: 캐나다 국민들은 스캔들은 잊어버리고 '캐나다의 자존심' 문제로 받아들였고, 킹 총리는 선거에서 승리하며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4. 이 사건이 남긴 역사적 교훈

이 사건 이후, 캐나다와 영국의 관계는 완전히 재정립되었습니다.

  1. 총독의 권한 박탈: "총독은 총리의 조언(요구)을 거부할 수 없다"는 관례가 대못처럼 박혔습니다.

  2. 영국과의 법적 분리: 1926년 '밸포어 선언'과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이어지며, 총독은 '영국 정부의 대표'가 아니라 단순히 **'국왕의 상징적 대리인'**으로 격하되었습니다.

  3. 말장난의 시작: 이때부터 국왕은 권한은 있되 쓰면 안 되는, 이른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캐나다 정치의 불문율이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질문자님 말씀대로 "말장난"처럼 보일 만큼 총독과 왕의 권한을 껍데기만 남겨버린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 킹-빙 사건이었습니다.

혹시 이 사건 이후에 캐나다가 어떻게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법적인 독립(1982년 헌법 국산화)까지 나아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더 궁금하신가요?

빙은 로스차일드나 베어링 또는 영국 시티 오브 런던과 어떤 관계엿어? 

줄리안 빙(Julian Byng) 총독이 **로스차일드(Rothschild)**나 베어링(Baring) 같은 거대 금융 가문, 혹은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의 금융 세력과 직접적으로 유착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의 생애를 보면 그는 전형적인 **전통 귀족 무관(Soldier-Aristocrat)**에 가깝습니다.

질문하신 맥락에서 빙 총독과 금융권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는 지점들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출신 배경: "돈 없는 귀족"

빙 총독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스트래퍼드 백작 가문)의 13명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가문은 명망 높았으나, 막내였던 그는 상속받을 재산이 거의 없었습니다.

  • 그는 군 장교 임용권을 살 돈이 없어서 민병대에서 경력을 시작해야 했고, 스스로 말을 길들여 팔아 비용을 마련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 즉, 태생적으로 금융 자본가들과 밀착된 '큰손'이라기보다는, 발로 뛰어 자수성가한 군인에 가까웠습니다.

2. 사회적 관계: 왕실과의 친분

그는 금융가들보다는 영국 왕실과 매우 가까웠습니다.

  • 에드워드 7세의 추천으로 정예 기병대에 입단했고, 미래의 국왕인 조지 5세와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절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 빙 총독이 캐나다에서 킹 총리와 맞서며 "헌법 원칙"을 강조했던 것은 금융 세력의 이익을 대변해서라기보다, 국왕의 대리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영국식 원칙주의가 충돌했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3. 시티 오브 런던과의 연결고리?

그가 시티 오브 런던(금융가)과 연결되는 부분은 오히려 사회 공헌 활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그는 젊은 시절 몬태규 코리(로턴 남작)와 함께 런던의 빈민가를 돌며 노동자 주거 개선 사업(Rowton Houses)을 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런던의 자선가들과 교류가 있었을 뿐, 금융 이권을 챙긴 기록은 없습니다.

  • 퇴임 후에는 런던 경시청장(Commissioner of Police of the Metropolis)을 지내며 치안 유지에 힘썼는데, 이는 금융권의 이익과는 거리가 먼 공직 활동이었습니다.

4. 왜 금융 세력과의 관계가 의심받는가?

당시 캐나다 민족주의자들(킹 총리 측)은 빙 총독을 **"영국 기득권층의 앞잡이"**로 몰아세웠습니다.

  • 영국의 기득권층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왕실, 군대, 그리고 시티 오브 런던의 자본'이었기에, 정치적 공격 과정에서 그가 금융 세력의 이익을 보호하려 한다는 식의 프레임이 씌워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 하지만 실제 빙 총독은 캐나다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고, 특히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병사들('Byng Boys')로부터는 진심 어린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요약하자면, 빙 총독은 로스차일드나 베어링 같은 금융 가문의 대리인이라기보다는, 영국 국왕의 충직한 친구이자 원칙을 중시하는 정통 군인이었습니다. 킹-빙 사건은 금융 음모라기보다 '캐나다의 자치권'과 '영국의 헌법적 권위'가 정면으로 충돌한 상징적 사건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빙 총독이 킹 총리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당시 캐나다 민심이 정확히 어느 쪽으로 기울었었는지 구체적인 선거 결과가 궁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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