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녹춘: 야마구치구미 2인자 다카야마도 한국계 / 싸움은 곤조 (근성)로 하는 것 / 한국어와 일본어 모두 글을 읽지도, 쓰지도, 말도 잘 못하는데 오사카 부동산을 기반으로 1조 5000억 부자가 된 것은 신기할 정도 - 그릇과 담력이 크면 결국 그만한 세계가 따라오는 것 / 배에서 자신을 괴롭힌 선원들 때문에 쫓겨났는데 그 배가 난파당해서 선원들은 모두 죽은 천운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02100047
“아니오. 손가락도 안 잘랐고, 사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피신시키고, 저는 100일 동안 다시 도망을 다녔어요. 제가 계속
일본 야쿠자들과 싸우니까, 다른 한국 출신 조직들이 도와줬습니다. 호남출신이 만든 난도카이(남도회), 간다히치로(강신옥)파 등이
저희 조직과 뜻을 같이했죠. 네 번째 전쟁부터는 고베의 다카야마가 합세를 했습니다. 다카야마도 한국 사람이죠.”
//
젊었을 때 그는 일본 최대의 카바레인 후지카바레를 포함, 4개의 카바레를 운영했다. 십수 년 전에 카바레 사업을 정리하고 카바레
부지 두 개를 팔았지만, 남아 있는 두 곳의 카바레 부지 시세만 현재 약 9000억~1조원이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오사카
도톤보리(道頓堀), 우메다(梅田) 등지에 있는 부동산 가격을 모두 합하면 약 1조5000억원대다.
이야기로만 전해 들은 한녹춘 회장은, 말 그대로 ‘암흑가의 보스’였다. 사진으로 본 그의 얼굴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뭔지 모를
불만으로 가득했다. 사진 속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생을 일본에서 산 셈이지만, 일본말이 아직도 유창하지
않다. 조직의 ‘오야붕’으로 항상 ‘단답형 문답’만을 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땅에서건 일본땅에서건 학교를 다닌 적은 없다.
그래서 한국어와 일본어 모두 읽거나 쓰는 데 서툴다. 40년 넘게 그의 옆을 지킨 홍성인(洪性仁·76) 전(前) 오사카 민단
단장은 “읽지도 말하지도 쓰지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일본 야쿠자 조직을 이끌고 그 엄청난 재산을 모은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
―체구가 작으신데 싸움을 어떻게 잘하셨습니까.
“체구는 작았지만 빠르고 힘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싸움은 ‘곤조(根性·근성, 마음보, 성질)’입니다. ‘곤조’. 저는 항상 제가
당한 만큼 상대에게 갚아줬습니다. 무조건 복수는 한다는 게 제 신조였습니다. 아마, 여기 있는 당신들은 당해도 복수 같은 건 못
하겠지만… 하하하.”
//
“니상(형님), 김 기자 고향이 강원도랍니다. 강원도.”
얼굴을 펴지 않은 채 귀를 기울이던 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또렷한 한국말로 “깡원도. 깡원도”라고 몇 번 되뇌더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연방 팔을 잡아 흔들며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주변에 있던 민단 원로들도 “진작 강원도 얘기를 할 걸 그랬네”라며 긴장을 풀었다.
홍성인 전 단장에 따르면, 한녹춘 회장은 자신의 고향을 강원도 고성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러한 사연으로, 강원도가 고향인 한녹춘 회장은 어린 고향 후배에게 ‘불고기를 꼭 사줘야 한다’며 자리를 따로 만들었다.
일행이 들어간 야키니쿠집 인근에 한 회장이 운영하던 카바레 건물이 있다. 과거 그가 운영하던 두 곳의 카바레는 현재 주차장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데, 매일 1억원이 넘는 현금이 들어온다고 한다.
한 회장은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했다.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동촌’이라고 했다. 홍성인 전 단장은 “강원도 주소를 찾아봐도 고성에는 동촌도 없고 동천도 없다”고 했다. 한녹춘 회장의
이야기다.
둘째 형님 보려고 흥남까지 걸어가
“제 고향은 아주 깊은 산골짜기였습니다. 아버님이 콩이나 팥을 가지고 바닷가에서 열리는 장에 나가 물건을 바꿔온 기억이 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걸으면, 저녁 무렵에나 장터에 닿았어요.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아서 집이 띄엄띄엄 있었습니다. 집 근처에 큰 강이
있었는데, 그 강이 서울까지 간다고 동네 어른들이 얘기했어요.”
―주소를 정확히 모르십니까.
“동촌리예요. 동촌리.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 때 강원도 갔을 때, 내 고향이 고성이라고 했어요. 내 한국 본적이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이라고 돼 있습니다. 내 정확한 고향을 몰라서 그때 고성군에서 명예 시민증을 줬어요.”
―다른 기억은 없습니까.
“없어요. 난 고향도 기억을 못 하는 사람이지.”
이 말을 하면서 한 회장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옆에 앉아 있던 홍성인 전 단장이 말을 거들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자주 한국을 갔는데, 지금 고향을 잊은 게 참 이상해요. 박 대통령 시절에 중앙정보부에서 아버지 다른 여동생을
찾아줘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40여 년 전에 다시 소식이 끊겼어요. 그때 동생에게 들은 고향 이름이
‘동촌’이라는 겁니다.”
다시 한녹춘 회장과 나눈 얘기다.
―언제 고향인 강원도 고성을 떠났습니까.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열세 살이나 열네 살이었어요. 당시 둘째 형님이 흥남에 있는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고향에서
무작정 형님을 만나기 위해 흥남으로 걸어갔습니다. 며칠이 걸렸는지 기억도 안 나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서 무작정 걸었어요.
겨우겨우 둘째 형님을 만났어요. 형님이 일하던 공장에서 함께 일을 했죠.”
당시 그가 일하던 공장은 매일 잔업을 했는데, 어린 한녹춘 회장에겐 일을 잘 못한다고 잔업을 시키지 않았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때였다. 그는 공장 감독원이 담배를 피우는 걸 보고 꾀를 냈다고 한다. 한녹춘 회장의 얘기다.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담배를 한 개비씩 샀어요. 그걸 모아서 감독원에게 건넸더니, 일본인 감독원이 잔업을 하게 해 줬어요. 제
둘째 형님이 제가 잔업 해서 받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줬습니다. 그 돈에다 형님 돈을 합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게 해 줬어요.
당시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 중이라서 그런지, 화물선에도 기관총을 달고 있었어요. 그 배를 타고, 저 혼자 겨우 일본땅에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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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
“니상(형님), 김 기자 고향이 강원도랍니다. 강원도.”
얼굴을 펴지 않은 채 귀를 기울이던 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또렷한 한국말로 “깡원도. 깡원도”라고 몇 번 되뇌더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연방 팔을 잡아 흔들며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주변에 있던 민단 원로들도 “진작 강원도 얘기를 할 걸 그랬네”라며 긴장을 풀었다.
홍성인 전 단장에 따르면, 한녹춘 회장은 자신의 고향을 강원도 고성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러한 사연으로, 강원도가 고향인 한녹춘 회장은 어린 고향 후배에게 ‘불고기를 꼭 사줘야 한다’며 자리를 따로 만들었다.
일행이 들어간 야키니쿠집 인근에 한 회장이 운영하던 카바레 건물이 있다. 과거 그가 운영하던 두 곳의 카바레는 현재 주차장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데, 매일 1억원이 넘는 현금이 들어온다고 한다.
한 회장은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했다.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동촌’이라고 했다. 홍성인 전 단장은 “강원도 주소를 찾아봐도 고성에는 동촌도 없고 동천도 없다”고 했다. 한녹춘 회장의
이야기다.
둘째 형님 보려고 흥남까지 걸어가
“제 고향은 아주 깊은 산골짜기였습니다. 아버님이 콩이나 팥을 가지고 바닷가에서 열리는 장에 나가 물건을 바꿔온 기억이 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걸으면, 저녁 무렵에나 장터에 닿았어요.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아서 집이 띄엄띄엄 있었습니다. 집 근처에 큰 강이
있었는데, 그 강이 서울까지 간다고 동네 어른들이 얘기했어요.”
―주소를 정확히 모르십니까.
“동촌리예요. 동촌리.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 때 강원도 갔을 때, 내 고향이 고성이라고 했어요. 내 한국 본적이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이라고 돼 있습니다. 내 정확한 고향을 몰라서 그때 고성군에서 명예 시민증을 줬어요.”
―다른 기억은 없습니까.
“없어요. 난 고향도 기억을 못 하는 사람이지.”
이 말을 하면서 한 회장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옆에 앉아 있던 홍성인 전 단장이 말을 거들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자주 한국을 갔는데, 지금 고향을 잊은 게 참 이상해요. 박 대통령 시절에 중앙정보부에서 아버지 다른 여동생을
찾아줘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40여 년 전에 다시 소식이 끊겼어요. 그때 동생에게 들은 고향 이름이
‘동촌’이라는 겁니다.”
다시 한녹춘 회장과 나눈 얘기다.
―언제 고향인 강원도 고성을 떠났습니까.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열세 살이나 열네 살이었어요. 당시 둘째 형님이 흥남에 있는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고향에서
무작정 형님을 만나기 위해 흥남으로 걸어갔습니다. 며칠이 걸렸는지 기억도 안 나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서 무작정 걸었어요.
겨우겨우 둘째 형님을 만났어요. 형님이 일하던 공장에서 함께 일을 했죠.”
당시 그가 일하던 공장은 매일 잔업을 했는데, 어린 한녹춘 회장에겐 일을 잘 못한다고 잔업을 시키지 않았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때였다. 그는 공장 감독원이 담배를 피우는 걸 보고 꾀를 냈다고 한다. 한녹춘 회장의 얘기다.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담배를 한 개비씩 샀어요. 그걸 모아서 감독원에게 건넸더니, 일본인 감독원이 잔업을 하게 해 줬어요. 제
둘째 형님이 제가 잔업 해서 받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줬습니다. 그 돈에다 형님 돈을 합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게 해 줬어요.
당시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 중이라서 그런지, 화물선에도 기관총을 달고 있었어요. 그 배를 타고, 저 혼자 겨우 일본땅에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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