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록펠러계 CIA국장 리처드 헬름스가 MKUltra 관련 자료를 모두 없애고, 1974년 뉴욕타임스가 CIA와 록펠러 재단이 후원한 MKUltra의 실체를 폭로하고, 1975년 넬슨 록펠러가 허겁지겁 사건에 대해 규명한 것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공격 때문인가? 2
1973년 록펠러계 CIA국장 리처드 헬름스가 MKUltra 관련 자료를 모두 없애고, 1974년 뉴욕타임스가 CIA와 록펠러 재단이 후원한 MKUltra의 실체를 폭로하고, 1975년 넬슨 록펠러가 허겁지겁 사건에 대해 규명한 것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공격 때문인가? 2
미국의 기밀 프로젝트였던 **MK-Ultra(MK울트라)**는 195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CIA가 주도한 인간 세뇌 및 행동 제어 실험입니다. 당시 CIA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대학, 병원, 교도소 등 80여 개의 기관에 자금을 지원하며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1977년 정보공개법(FOIA)을 통해 공개된 문서와 의회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주요 참여 대학들의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요 참여 대학 리스트
당시 연구는 대학의 이름을 직접 내걸기보다, 개별 교수나 연구진이 CIA의 위장 단체(예: 인간 생태학 연구 재단)로부터 기금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주의사항 및 맥락
대학 전체의 개입 여부: 리스트에 오른 대학들이 기관 차원에서 "우리는 CIA의 고문 연구에 협조한다"고 인지하고 참여한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외부 연구비를 지원받는 개별 연구실 단위로 진행되었습니다.
맥길 대학교의 사례: 캐나다 맥길 대학교의 **앨런 기념 연구소(Allan Memorial Institute)**에서 진행된 실험은 MK-Ultra 중 가장 가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피험자들에게 강력한 전기 충격과 약물 주입을 반복하여 기억을 지우려 했던 이 실험은 훗날 대규모 소송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문서 파기: 1973년 당시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가 관련 문서 대부분을 파기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위 리스트 외에도 더 많은 대학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중 특정 대학에서 진행된 구체적인 실험 내용이나,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인물(예: 고틀리브, 이웬 캐머런 등)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가요?
리스트를 보면 소위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당대 최고의 명문대들이 즐비합니다. CIA가 왜 굳이 이런 엘리트 교육 기관들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언급하신 '심리적 운전'이 무엇인지 핵심을 정리해 드릴게요.
1. 왜 하필 명문대였을까?
CIA가 명문대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학교의 이름값 때문이 아니라, 실질적인 **'연구 역량'**과 '은폐의 용이성' 때문이었습니다.
최고의 인재와 인프라: MK-Ultra는 인간의 정신을 개조하려는 고도의 과학적(혹은 비윤리적) 시도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대 최고의 심리학자, 화학자, 의학자들이 필요했고, 그들은 대부분 명문대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사회적 신뢰도 활용: 명문대 교수의 연구는 외부의 의심을 덜 받습니다. CIA는 "인간 생태학 연구 재단(Society for the Investigation of Human Ecology)" 같은 위장 단체를 세워 연구비를 지원했는데, 교수들은 이것이 단순한 국가 안보 연구인 줄 알고 참여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풍부한 '피험자' 집단: 대학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리학 실험을 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하버드 사례처럼 학생들에게 소정의 사례비를 주고 실험에 참여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웠죠.
2. '심리적 운전(Psychic Driving)'이란?
맥길 대학교의 이웬 캐머런(Ewen Cameron) 박사가 고안한 이 기술은, 사람의 원래 인격과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고(Depatterning) 그 자리에 새로운 인격을 '운전해서 집어넣겠다'는 공포스러운 개념입니다.
실험의 3단계 과정:
인격 해체 (Depatterning): 피험자에게 LSD 같은 강력한 약물을 투여하고, 정상적인 수면 시간의 몇 배에 달하는 전기 충격을 가해 기존의 기억과 정체성을 파괴합니다. 이 과정이 지나면 환자는 대소변을 못 가리거나 부모도 몰라보는 상태가 됩니다.
반복 주입 (Psychic Driving): 인격이 비어버린 상태의 피험자에게 헬멧(헤드폰)을 씌우고 특정 메시지를 수십만 번 반복해서 들려줍니다. (예: "너는 누구를 증오한다", "너는 이런 행동을 해야 한다")
고립 및 감각 차단: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여 오직 주입되는 메시지에만 의존하게 만듭니다.
요약하자면
명문대들은 CIA에게 **'가장 정교한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연구소'**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학문의 이름으로 행해진 끔찍한 인권 유린이었고, 캐머런 박사의 실험은 현대 고문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당시 하버드에서 이 실험의 피해자로 지목된 인물 중에는 훗날 '유나바머'로 불린 폭탄 테러범 테드 카진스키도 포함되어 있어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존슨, 닉슨 행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낸 리처드 헬름스는 록펠러계였다; 키신저가 일으킨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닉슨을 비호하지 않아 CIA국장에서 경질되고, 이후 록펠러 가문의 핵심 거점인 이란에 파견 나가 주이란 미국대사로 부임; 1973년, CIA 마인드콘트롤 관련 자료를 모두 없앤 장본인; 알파파클럽 회원 역임
https://blog.naver.com/strategicvision/222598519773?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https://en.wikipedia.org/wiki/Donald_Ewen_Cameron
In 1943, Cameron was invited to McGill University in Montreal by neurosurgeon Dr Wilder Penfield. With a grant from the Rockefeller Foundation, money from John Wilson McConnell of the Montreal Star, and a gift of Sir Hugh Allan's mansion on Mount Royal, the Allan Memorial Institute for psychiatry was founded. Cameron became the first director of the Allan Memorial Institute as well as the first chairman of the Department of Psychiatry at McGill. He recruited psychoanalysts, social psychiatrists and biologists globally to develop the psychiatry program at McGill.[12] From its beginning in 1943, the Allan Memorial Institute was run on an "open door" basis, allowing patients to leave if they wished, as opposed to the "closed door" policy of other hospitals in Canada in the early 1940s. In 1946, Cameron introduced the practice of the day hospital, the first of its kind in North America, permitting patients to remain at home while receiving treatment at the institute during the day, thus avoiding unnecessary hospitalization and allowing the patients to maintain ties with their community and family.[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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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ron began to develop broader theories of society, new concepts of human relations to replace concepts he deemed dangerous and outdated. These became the basis of a new social and behavioural science that he would later institute through his presidencies of the Canadian, American and World Psychiatric Associations, the American Psychopathological Association and the Society of Biological Psychiatry. With the results of the Manhattan Project, Cameron feared that without proper re-organization of society, atomic weapons could fall into the hands of new, fearsome aggressors.[17] Cameron argued that it was necessary for behavioral scientists to act as the social planners of society, and that the United Nations could provide a conduit for implementing his ideas for applying psychiatric elements to global governance and politics.
Cameron started to distinguish populations between "the weak" and "the strong". Those with anxieties or insecurities and who had trouble with the state of the world were labelled as "the weak"; in Cameron's analysis, they could not cope with life and had to be isolated from society by "the strong". The mentally ill were thus labelled as not only sick, but also weak. Cameron further argued that "the weak" must not influence children. He promoted a philosophy where chaos could be prevented by removing the weak from society.[citation needed]
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의 $69,000은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고액 연봉이었으며,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그 위상이 더욱 체감됩니다. 미국의 소비자 물가 지수(CPI)를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가치 환산 (2025년 기준)
기점 연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적인 가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넬슨 록펠러와 mkultra의 연관성은?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와 MK-Ultra의 연관성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이 추악한 진실을 세상에 알린 조사 책임자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가문이 운영하는 재단이 연구 자금의 통로로 활용되었다는 점입니다.
1. 진실을 폭로한 '록펠러 위원회' (1975년)
넬슨 록펠러는 제41대 미국 부통령 시절, CIA의 불법적인 국내 활동을 조사하기 위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인 일명 **'록펠러 위원회(Rockefeller Commission)'**의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배경: 1974년 뉴욕 타임스가 CIA가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불법적인 약물 실험과 감시를 해왔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사회적 파문이 일었습니다.
역할: 록펠러 위원회는 1975년 보고서를 통해 MK-Ultra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공개했습니다. 보고서에는 CIA가 수십 년간 일반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LSD를 투여하거나 심리 조작 실험을 했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비판: 하지만 일각에서는 록펠러 위원회가 CIA의 상급 기관인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조사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했다는 '화이트워시(Whitewash, 은폐)'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2. 연구 자금의 세탁 창구 '록펠러 재단'
조사자였던 넬슨 록펠러 개인의 역할과는 별개로, 그가 속한 록펠러 가문의 재단들은 MK-Ultra 프로젝트의 자금이 흘러가는 '자금 세탁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위장 기부: CIA는 정부 예산이 직접 대학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민간 재단들을 이용했습니다.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은 CIA의 자금을 받아 이를 다시 대학 연구팀에 '학술 연구비' 명목으로 전달하는 중간 전달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대표적 사례: 앞서 언급한 맥길 대학교의 이웬 캐머런 박사도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받았습니다. 당시 연구자들은 이 돈이 정보기관의 고문 기술 개발용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받았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록펠러 가문의 자선 사업이 끔찍한 실험의 방패막이가 된 셈입니다.
3. 요약: 조사자인가, 조력자인가?
넬슨 록펠러와 MK-Ultra의 관계는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가문의 재단은 CIA의 은밀한 실험 자금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도왔습니다.
넬슨 록펠러 개인은 훗날 정부의 고위직으로서 이 실험의 실체를 조사해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넬슨 록펠러는 이 프로젝트를 종결시키고 대중에 공개한 인물이지만, 그가 속한 엘리트 네트워크와 재단은 이 프로젝트가 수십 년간 은밀히 작동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습니다.
혹시 록펠러 위원회 보고서 이후에 진행된 더 강력한 조사인 '처치 위원회(Church Committee)'에 대해서도 궁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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