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병쉰색희 칼 마르크스
드라가 유럽 여행 중 칼 맑스 독일 트리어 생가도 방문한 바, 어머니 가문을 통해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결된 만큼, 박지성 면도날 LG 대만 TSMG에 기술 제공한, 오늘날 LG가 가전 산업하면 LG를 내세울 정도가 시작한 출발점이 네덜란드 필립스 사인데, 네덜란드 필립스 가문과 사촌 관계인 만큼, 매우 부유한 삶을 살았던 칼 마르크스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이는 당대 칼 마르크스 자본론을 이해한 이들이 극히 드물며, 심지어 책조차 읽은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가정부를 무급으로 부려먹은 것도 모자라 혼외정사 성폭행으로 아이까지 낳았고, 그 아이조차 비정하게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칼 맑스와 함께 한, 칼 맑스의 부인이자 독일 귀족 예니가 자본론 책자 홍보에 나설 정도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주의자란 명함, 혁명가라는 떡밥만 중요하지, 99% 염불보다 잿밥이었습니다. 칼 맑스가 인기를 얻은 건, 그의 글쓰기 때문이 아니라 카를 마르크스가 어머니 가문을 통해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결되었다는 것 단 한 가지였습니다. 어쩌다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식사 시간 같은 때마다 어머니는 예니보다 더 높은 상위 귀족 가문으로서의 품위를 강조하였기에 소문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칼 맑스와 독일 귀족 예니 결혼식 때 카를 마르크스 친척들은, 수준이 낮은 가문과 결혼한다고, 이 결혼 반대일세, 하고 결혼식에 불참하였습니다. 반면, 독일 귀족 예니 가문은, 이게 웬 떡이야,하며 결혼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물론, 칼 맑스는 어머니와 늘 불화였으나, 어머니가 죽은 뒤 어머니 재산을 상속받아 말년에 매우 풍족하게 지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카를 마르크스는 늘 귀족적인 부유한 삶을 살았습니다. 단 한 번도 가난한 적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건, 파리 콤뮌 실패 후 실제 원인이야 어떠하든, 수많은 사회주의자, 혁명가 명함 떡밥들이 칼 마르크스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숨은 떡밥이 칼 맑스로 보고 줄을 선 셈인데, 로스차일드 가문이 카를 마르크스를 버렸다고 본 것입니다. 알고 보니, 칼 맑스 허세꾼이었네,로 평가절하당한 셈입니다. 중요한 건, 파리 콤뮌 대참사로 인하여, 칼 마르크스가 제 1 인터내셔널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참다 못해 제 1 인터내셔널 본부를 유럽이 아닌 미국으로 보내 사실상 제 1 인터내셔널을 해체시키는데 핵심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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