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무묘앙에오가 있다면, 인도에는 유지 크리슈나무르티가 있다; 종교, 영성계의 악동이랄까?; 둘 다 해체주의, 반골, 반구루, 디오니시우스적 정신이 충만한건 마음에 드는데, 논리적 체계가 없다는 건 걸린다
https://m.blog.naver.com/kkang36/220814923364
유지(UG) 크리슈나무르티
다들 그를 역설의 성자, 안티 구루 등으로 표현하며 별난 수행자 중 한사람 정도로 폄하하지만.. 곰곰히 그의 주장들을 되씹어 보면 깨달음에 대해 설파하는 그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불교나 힌두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상태를 바라보는 시각이 기존의 해석과는 전혀 방향을 달리하는 것 뿐이다.
여하튼 UG의 주장은 그가 '다 부질없으니 멈추라'고 하는, 그 '생각'을 더욱 많이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여러 대화록 중에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던 부분들을 발췌해 보았다.
#01 깨달음이라는 '상태'
저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해방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상태를 설명하는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작업'을 한다는 사람들이 가려 놓은 장막을 걷어내려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상상 속에만 있는 경지를 쫓아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막을 수 있겠죠.
제가 묘사하는 이 상태는 저의 상태도 신을 깨달은 사람의상태도 아닙니다. 돌연변이나 그런것도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의 자연스러운 상태죠. 무언가에 도달하려는 마음과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려는 노력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스스로 드러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연스러운 상태는 자신을 깨달았거나 신을 깨달은 사람들의 상태가 아닙니다. 성취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려고 애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고 있는 이 상태입니다. 삶의 기능적인 활동력입니다. 제가 말하는 삶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감각이 생각의 간섭 없이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감각의 일에 억지로 끼여들어 참견을 합니다. 생각은 감각의 운동목표를 가리켜 줍니다. 그리고 감각을 이용해서 생각은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 영적인 안내를 한다는 이들이 소위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어떤 '상태'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설사 우연히 그런 '상태'가 당신에게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당신이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02 자아,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
여러분은 무언가를 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이 보는 것을 인식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아가 설 곳이 없으니까요. 여러분이 감각의 정보를 해석하는 동안에는 '나'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의 감각으로 가방이란 것을 봅니다.
그 사물을 보는 순간 '가방'이라는 단어가 안에 떠오릅니다. 가방이 아니면 의자, 난간, 계단 혹은 뭔가 다른 것일 수 있겠지요. 관념은 해석을 해대면서 감각을 간섭합니다. 항상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중얼 거립니다. 관념은 왜 간섭을 하는 걸까요? 그 간섭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생각은 감각이 기능하는 것과 전혀 다른 정의를 내립니다.
이것이 전부 입니다. '가방'이라는 단어는 관념적으로 보고 있는 것(객체)과 우리(자아)를 분리시켜 놓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일을 멈추면 그 둘 사이에는 빈 공간이(분별)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나'라는 것도 생겨납니다.
생각이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사고와 경험의 집합체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자기의 '생각을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환상입니다.
여러분의 '기분'은 더욱 복잡합니다.
여러분의 안에 자기의 '기분을 느끼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의를 내립니다. 우울함, 불행, 행복감, 질투, 욕망 그리고 분노. 왜 스스로 '나는 화가 났다'고 말해야 합니까?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 감각을 해석하는 어떤 것을(자아) 실제로 존재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나'라고 말하는 것은 '가방, 의자' 혹은 '분노, 행복감' 등과 같은 관념적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자신이 무언가 기억해야 할 때만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항상 자기에게 무언가를 말하고(생각) 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는 것 뿐입니다.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하겠지요.
왜 생각을, 기분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합니까? 왜 끊임없이 해석을 합니까? 그 이유는 스스로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지 않으면 '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여러분이 말하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 생각을, 해석을 멈추면 '나' 또한 없어지는 것임을. '나'와 나 아닌 것의 이분법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임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기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각이 '나'를 만들고 지속시키고 존재하게 만드는 것임을.
#03 경험구조의 허상을 보는 것, 깨어있음
생각, 사고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남에게서 들은 것 뿐입니다. 스스로 조절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것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것을 가지고 무언가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왜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나'라고 부르는 것이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멈추지 않게 무의식 적으로 방어하고 있습니다. 사고는 바로 이 방어의 메카니즘 입니다. 사고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 '나'를 지켜냅니다. 생각에서 나온 모든 것은 파괴적입니다. 결국 여러분을 파괴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겠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너무 강한 상대입니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무력합니다. 그 무력함을 의식 조차 못합니다.
명상한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일상의 모든 일에 깨어 있으라는 수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여러분은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깨어 있음'과 '나'는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일생 동안 단 일초라도 깨어 있었다면, '나'라는 연속성은 산산이 부셔졌을 것입니다. 경험구조의 환상은 이미 박살이 났을 겁니다. '나'는 무너지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합류했을 겁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 들어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음' 입니다.
## 진정한 '깨어 있음'과 '나'는 병존할 수 없다는 말이 신선하게 와 닿습니다. '무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보다 더 선명하게 설명해주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04 고통의 원인, 삶의 파고
그대와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통합적인 움직임이며 흐름이다. 그대는 개체가 아니다. 주변의 '사물'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통합적인 흐름은 그대가 경험하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은 삶의 흐름이 그대의 방어막 안으로 치고 들어올까봐 두려워 한다. 그래서 사념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적 방어막으로 기를 쓰고 사수하려 한다. 그러나 삶은 둑을 위협하며 거세게 밀려드는 강물과 같다. 그대의 사고 체계와 심리구조 체계는 한계가 있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경계가 없는 자유로운 삶의 파고가 당신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여기'에서 폭발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기에 당신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다.
## 삶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간다. 어찌할 수 도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에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휩쓸리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것이 고통의 실체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고통의 원인은 '생각'이다. 생각을 멈춰야 하지만, 그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또한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또한 생각일 뿐이다. 나는 그대에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하지 않는다. 생각이 바로 그대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만약 생각이 멈추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스스로를 표현하게 하라. 그것을 홀로 놔둬라.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면 제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에게 잘못된 점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대는 용기가 없을 뿐이다.
그대 자신이 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대는 욕망에 대해 아무 간섭도 하지 않고 가만히 놔둔 적이 없다. 욕망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삶이다. 그러나 욕망에 간섭하면 할 수록 이 욕망은, 삶은 더 큰 괴로움을 초래한다. 그대가 항상 고통받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존재할 용기가 없다. 그대 자신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대 홀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05 깨달음과 죽음의 관계
그대의 문제에 대한 단 하나의 해결책은 죽음 뿐이다. 그대가 꿈꾸는 자유는 오직 죽음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결국 해탈을 얻게 되어 있다. 해탈은 항상 죽음의 전조인데, 모든 인간이 죽기 때문이다.
그대가 죽으면 몸은 무력한 상태에 놓인다. 기능이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다시 자신을 새롭게 회생시킨다. 이것은 날마다 너무나 당연한 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내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그대에게 경고하건대, 그대가 목표로 하는 해탈이 진짜로 일어난다면 그대는 죽어버릴 것이다.
나는 신체적 죽음을 말한다. 해탈의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체적 죽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호흡 조절이 기쁨을 준다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탐닉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숨을 너무 오래 참으면 그대는 질식해서 죽어버린다.
UG의 해탈과 죽음에 관한 주장이 터무니 없는 말 같지만, 20세기 최고의 구루로 여겨지는 '오쇼 라즈니쉬'도 이에 관해 비슷한 언급을 한 바 있다.
"각 종교나 경전에서 숨기는 사항이 하나 있다.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그 즉시 죽어 버린다는 비밀이다.
깨달음은 심신의 건강에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자연은 인간의 육체에 깨달음의 강한 전류를 받아들일만 한 아무런 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깨달음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약한 부분은 어디서든 터져 버린다. 깨달은 사람 중 열명에 아홉은 이렇게 죽어 나가는 것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아 진리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깨달음의 모습에 관한 '고피 크리슈나' 구루의 언급도 수행자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깨달음을 얻었지만) 나는 육체적으로 전과 달라진 점이 없다. 사고나 재난을 만날 가능성도 그대로 였고, 병에 걸려 쇠약해지며 늙어가는 것이다. 뇌는 더이상 논리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직장을 다닐 수가 없어 7년 동안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 깨달음은 결코 화려하거나, 초월적인 피안의 그 무언가가 아니라는 현실.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삶의 물질적인 파고로부터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 그리고.. 진정한 깨달음은 죽음을 동반할 수도 있다는 치명적인 위험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할 길' 이라는데, 삶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다.
이 점에서 유지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런 깨달음은 없다.. (당신이 바라고 기대하던 그런.....)"
#####
UG의 설법은.. 역설적으로 깨달음의 상태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라는 허상의 모습과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자신을 속박하고 이 모든 번뇌의 뿌리가 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UG 크리슈나무르티는 세상의 모든 깨달음을 부정하며, '그런 깨달음' 따위는 없다고 냉소 한다.
이분법적 허상의 구조를 넘어 '무아'의 경지에 들어섰음에도.. 'So What?' 이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분명 일정한 경지 이상의 어딘가 쯤에 이르렀고, 그 경지가 결코 우리가 기대하는 삶의 고통을 넘어서는 이상향이 아님을 통렬히 설파하고 있다.
허나.. 붓다께서는 이미 설하셨다. 진정으로 깨달은 이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고.
그에게는 그 가르침 조차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를 원했지만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좌절했던 것일까?
그 근처에도 이르지 못한 중생으로서는 정녕 궁금할 따름이다. 몹시도 부러울 따름이다.
주말 출장 기간 동안 가르침에 관한 많은 글들을 읽을 수 있었다.
UG 크리슈나무르티의 글에서 부터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에 관한 여러 글들, 또한 쿤달리니에 관한 글들과 여러 영성 추구에 관한 글들까지 한동안 부실했던 불법 공부를 한 번에 다 보충하려는 듯이 수많은 정보들이 한꺼번에 머리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하나의 화두에 모든 것이 집중이 되는 것을 느낀다.
"희망을 버려라~!!!"가 그것이다.
오쇼 라즈니쉬는 말한다.
"모든 희망은 에고를 위한 음식이다.
낙원에 이르고자 하는 희망, 천국에 가고자 하는 희망,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희망, 이 모든 희망은 에고의 음식이다.
깨닫고 싶어 안달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종교적 헌신이나 영적인 길 그 모두가 당신을 어디에 데려다 줍니까?
그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 투쟁과 전쟁, 노력, 의지를 요구합니다. 그래도 당신이 그 목표에 도달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목표가 거기에 있다고 가정하고, 자신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목표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계속 합니다. 그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두 구루의 답변은 달라진다.
오쇼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한다.
"에고는 오직 노력과 함께 존재한다. 노력하는 만큼 에고는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무엇인가 성취하고자 하는 동안 자신의 에고를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가 붓다 처럼 될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 그 전에 6년의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노력없이 깨달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력이 없는 무위의 차원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그들은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완전히 다 쓰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의 의식적인 마음이 어떤 노력도 할 수 없게끔 하라. 의식이 어떤 것도 할 수 없을때 돌연 무의식이 드러나는 것이다."
허나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는 정반대의 논리를 편다.
"당신이 원하는 마음의 평화는 노력과 투쟁이라는 이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상은 교전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해 좀더 많은 노력과 힘을 들이게 됩니다. 어떻게 전쟁을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기도나 명상후에 남는 마음의 평화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고갈로 인한 결과일 뿐입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마음의 평화란 그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당신의 생각을 억누르거나 조절하려는 시도는 전투로 인한 기진맥진만 불러올 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두 사람 다 성취에 대한 희망으로 시작한 수행으로는 '의식의 고갈'에 도달할 뿐이라는데 공통의 목소리를 낸다.
오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하라고 말하고.
유지는, 인위적인 노력을 거두고 그저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무의식의 발현을 통해서든, 생각을 멈춘 진아가 자가발전을 하든, 그 과정이 어떻든지 간에,
그것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마땅한 이에게 '불쑥'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전 생에서 쌓았던 카르마의 업보를 견디어 내고 새로운 운명을 감당 할 만큼 영적인 성숙을 이루었을 때 그것은 찾아오는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 수 없으니, 주어진 현생이 그 운명을 향해가는 과정이라 여기고 다만 묵묵히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오쇼 라즈니쉬의 말로 어설픈 끝맺음을 해본다.
"이 우주가 그대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궁극의 불성 조차도."
https://www.be1.co.kr/bbs/board.php?bo_table=menu30&wr_id=12995&page=203
다른 명상교주들이 욕설을 하는질 모르겠구요
오쇼가 죽고 난뒤 마두카르 톰슨은 럭나우의 성자 파파지에게 깨달음을 인가 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의심과 성냄이 남아 있어 괴로워 하다가 파파지와 결별합니다.(파파지 아쉬람 폭탄사건으로 고소까지 당하지요).그 뒤로 많은 인도의 스승을 만나 자신이 파파지에게 깨달음을 인가 받았는데 여전히 의심과 성냄이 남아 괴롭고 이 놈의 도판에서 빠져나오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유지는 그들에게 맞는 안티 구루였지요. 유지 또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이 처녀가 하나도 없고 이런 저런 스승을 거쳐서온 이들이라고 투덜댑니다. 이 책을 번역한 역자도 마두카르와 비슷한 심정인 듯 합니다.
유지 -- 중략
나는 오직 두 사람의 스승,쉬바난다와 라마나 마하리쉬 만을 만나 봤다.
몇몇 친구들이 마하리쉬를 만나러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당시에
나는 지금처럼 어휘력이 풍부하지 않았다. 이제나는 그를 오만한 xxx(유지는 욕설을 사용하였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내가 가진것을 너에게 줄 수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받을 수 있는가? 정말 기념비적인 오만함이지 않은가? 나는 너에게 줄수 있지만 네가 받을 수
있는가? 그는 그런 오래된 헛소리들을 퍼뜨리는데 일조 하고 있었다.
마두카르 마하르쉬는 무었을 줄 수 있었습니까?
유지 오래된 헛소리라니까!
마두카르 하지만 그도 실제로 무엇을 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유지 그가 가진것은 무엇이든 줄 수 있겠지.
마두카르 그가 무엇을 가졌나요?
유지 나는 모른다. 그것이 내가 알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당신이 무엇을 가졌든지
그것을 저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만한 xxx의 대답은 나는 그것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을 받을 수 있는가?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이것은 내가 평생 들어온 낡은 헛소리이다.어쩌면 나는 그런 종류
의 것을 받을 준비가 않았는 지도 모른다.어쩌면 나는 충분한 수행을 하지 않아서 당신이 줄 수있는
것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이 가진 무었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것이 나의 구도의 끝이었다. 끝났다! 이 두 스승을 만난뒤에 나는 결론에 도달했다. 더
이상 시장을 돌아다니며 스승이라 불리는 창녀들을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
유지 --중략--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라즈니쉬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위대한 xxx이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 와같은 xxx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왜 그르 xxx라고 부르는가? 보통의
xxx는 남자에게서 돈을 받아 여자들과 함께 나눈다. 그러나 라즈니쉬라는 xxx는 남자와 여자 양
쪽에서 돈을 받아 자기가 챙긴다.
나 자신은 그런 종류의 거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았다. 내가왜 사람들을 착취해야만 하는가?
구도자들은 착취하기 쉽다.나는 성스러운 거래의 모든 속임수를 알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생존
하기 위한 다른 방법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나의 안전을 지켜 줄 도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착취하지 않는다.
내가 왜 그대가 갖지 못한것을 가졌으며 그것을 그대가 줄 수 있다고 느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
무엇인가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스승다운 목소리로 나는 요구한다라고 말하게 할 것이다. 나는
열명의 비서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것이다. 내 사업을 관리할 경영자들이
생길것이고, 나는 그들을 감독할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해야할 일을 명령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줄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진실이다.
==================================================================
마두카르 그러나 재난은 일어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유지 그 재난(그는 깨달음을 이렇게 부른다)은 일어 났다. 그 재난은 이 사람이 깨닫게 되는 사건은 아니었다.
그재난은 내가 언제나 똑같은 놈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나는 언제나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매혹되는 똑같은 놈이었다.(웃음)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종교적인 인간이나 깨달은 사람 같지 않다고 비난 했다면 나는 여자에게 매혹 될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동안 쌓아 왔던 것은
이제 사라졌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마두카르 쌓아왔던 것은 무었이었습니까?
유지 쌓아 왔던 욕망의 축적물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여자에게 더욱 매혹되어 키스하거나 포옹하는 것이 더 즐겁고 흥분된다. 우리 모두 즐기고 사랑을 나누자.(?앞과 좀 상반되는 듯)
마두카르 한번더 질문하겠습니다. 만약 재난이 경험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유지 그것은 내가 그대가 나눌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그대와 그것을 나눈다는 것은 내가 아주 커다란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대나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8천만달라 쯤 기부하거나 부동산을 기부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로 인해 먹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생존할지 조차 알지 못한다.(웃음) 그런데 왜 내가 다른 사람들이 나로 인해 먹고 살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가?
출판되어 있는 책들도 나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출판사와 직접 계약을 맺은 것들이다. 그 책들은 저작권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출판한 대가로 나에게 돈을 주었다. 나는 그 책들로 돈을 벌길 원치 않는다.나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책이나 말에서 나오는 돈은 필요없다.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그대를 향해 그대의 말을 퍼붓는다.그러나 나는 그대를 향해 말 하지 않는다. 그대가 퍼부은 말은 그대에게로 튕겨나간다. 그러나 그대에게 다시 튕겨난 말은 그대가 나에게 퍼부은 말은 아니다.
고맙다!
https://blog.naver.com/sunyanet/223966435384
출구 없는 지혜 – 현대 문명과 인간 조건에 대한 급진적 통찰
『출구는 없다(No Way Out: Conversations with U.G. Krishnamurti)』(2005년 출간)는 기존의 영적, 종교적 가르침을 거부하며 인간 의식의 근본적 오류를 파헤치는 U.G. Krishnamurti의 대화를 담은 책입니다. 그는 깨달음이나 해탈과 같은 목표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주장하며, 사상과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자연적인 상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스스로의 믿음과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며, 진리를 향한 모든 탐색이 무의미하다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영적인 구도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들에게 U.G. 크리슈나무르티는 익숙하면서도 도발적인 이름일 것입니다. 그는 흔히 "안티 구루(Un-Guru)", "격노하는 현인(Raging Sage)", 심지어 "구루 집단의 돈 리클스(Don Rickles of the Guru Set)"로 불리며, 영적인 영역에서 매우 특이하고 수수께끼 같으며 파격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모든 전통과 제도를 비판하는 "걷는 루드라"와 같아서, 인간 문명의 기초를 유례없는 방식으로 비판합니다. J. 크리슈나무르티와 달리, U.G.는 대중 강연이나 고위 인사의 인터뷰를 하지 않으며, 일기나 공책을 기록하거나 삶에 대한 '해설'을 남기지도 않습니다. 그를 만나 이야기하는 데는 어떤 거만한 '추종자'나 '일꾼'의 호의를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U.G.가 어디에 있든 그의 문은 방문객들에게 항상 열려 있었고, 대부분의 현대 구루들과 달리 그는 부, 지위, 카스트, 인종, 종교, 국적에 따라 방문객을 차별하지 않는 특이하지만 진정한 비공식적인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그는 73세의 나이에도 전 세계 친구들의 초대에 응하며 계속 여행을 다녔으며,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그에게 헌신적인 친구들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베스트셀러인 『깨달음의 신비 The Mystique of Enlightenment)』(1982년 출간)(국내: 그런 깨달음은 없다(2015년))와 『마음은 신화다(Mind is a Myth)』(1988년 출간),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생각은 당신의 적이다(Thought is Your Enemy)』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U.G.와 나눈 대화를 편집하여 엮은 책들입니다. 특히 놀라운 점은 U.G.가 이 책들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내 동의나 다른 누구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복제, 배포, 해석, 오해, 왜곡,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전례 없는 일로, 마치 자연이 그 창조물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U.G.는 자신이 어떤 '영적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 가르침이 개인의 변화나 변형 가능성을 전제하고, 이를 위한 기술이나 방법을 제시한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는 "나는 변형이라는 생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에 그런 가르침이 없다. 나는 당신에게 변형되거나 변화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는 명상 기술이나 수행법의 무기고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변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선언: 사유의 본질과 인간의 환상
U.G.의 철학적 접근 방식은 '비합리적(unrational)' 이라는 용어로 가장 잘 설명됩니다. 그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해결책이 곧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가 자주 언급하듯이, "질문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답변에서 태어난다". 질문의 원천은 우리가 전통으로부터 습득한 답변들인데, 이 답변들은 진정한 답변이 아닙니다. 만약 답변들이 진정했다면 질문들은 변형되지 않거나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질문들은 계속됩니다. 우리 전통의 모든 답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신, 삶의 의미 등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U.G.는 답변들이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진정한 답변이 있다면 그것은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답변과 질문 모두의 해체에 있습니다.
U.G.의 접근 방식은 또 다른 의미에서 '비합리적'입니다. 그는 질문을 다루기 위해 논리적 주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질문을 그것을 구성하는 심리적 요구로 해체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그런 다음 이 심리적 요구가 근거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신에 대한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U.G.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리적 주장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하는 것은 질문을 영원한 쾌락이나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구성적 요구로 해체하는 것입니다. U.G.는 영원한 행복에 대한 이러한 요구가 영속성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행복에 대한 심리적 요구는 신체가 영원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생리적 근거가 없습니다. U.G.의 말에 따르면, "신 또는 깨달음은 궁극적인 쾌락, 끊임없는 행복이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변형, 해탈, 이 모든 것들은 같은 주제의 변형일 뿐이다. 신체는 끊임없는 쾌락을 오랫동안 감당할 수 없다. 파괴될 것이다". 그는 "가상의 영원한 행복 상태를 원하는 것은 실제로는 심각한 신경학적 문제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죽음의 문제도 또 다른 예입니다. U.G.는 '영혼'과 '사후 세계'에 대한 추측을 일축합니다. 그는 우리 안에 죽음 후에 환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며, "당신 안에는 두려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관심은 죽음에 대한 질문의 근저에 깔린 '경험자'의 연속성에 대한 요구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신의 경험 구조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어떤 사건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심지어 자신의 해체마저 주재할 것으로 기대하며, 그래서 죽음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상태가 어떠할지 투영하려 한다. 그러나 미래의 경험을 예상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구조에 지식, 즉 참조할 수 있는 유사한 과거 경험이 필요하다. 당신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으며, 자신의 탄생도 기억할 수 없으므로, 미래의 비존재를 투영할 근거가 없다".
U.G.는 이성 철학자들의 많은 가정도 부정합니다. 그는 "인간이 합리적 존재라고 말한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우리 모두를 속였다"고 선언하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염두에 둡니다. U.G.는 인간 행동의 원동력이 합리성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는 합리성 자체가 권력의 도구라고 봅니다. 합리주의적 접근은 인간 조건을 변형시키는 사고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기초합니다. U.G.는 사고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고는 분열적이고 궁극적으로 파괴적인 도구입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의 연속성에만 관심이 있으며, 모든 것을 자신의 영속화를 위한 수단으로 바꿉니다. 그것은 소위 자아나 에고와 세상 사이의 분열이라는 관점에서만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상적인 자아와 대립하는 세상 사이의 이러한 분열은 궁극적으로 파괴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자아'의 증대만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고에서 비롯된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해롭습니다. 따라서 사고는 우리의 조건을 변형시킬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러나 U.G.는 직관이나 믿음과 같은 어떤 영적 능력을 구원의 도구로 지목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직관을 미묘하고 세련된 사고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일축하며, 믿음은 아무런 근거 없는 희망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U.G.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타고난 또는 자연적인 지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습득된 지능인 지성(intellect)은 신체의 타고난 지능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이 지능은 신체의 비범하게 복잡한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면역 체계만 보아도 살아있는 신체의 이러한 타고난 지능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U.G.는 신체의 이러한 타고난 지능이 지성과 무관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사고가 만들어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되거나 지시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고의 책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고는 신체의 이러한 타고난 지능의 적입니다. 사고는 모든 것을 쾌락의 움직임으로 바꾸기 때문에 신체의 조화로운 기능에 해롭습니다. 이것이 사고가 자신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방식입니다. 영속성의 추구 또한 사고가 신체의 조화로운 기능에 해롭게 되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U.G.에 따르면, 쾌락과 영속성에 대한 요구는 장기적으로 신체의 민감성을 파괴합니다. 신체는 영속성에 관심이 없습니다. 신체의 신경계는 쾌락적이든 고통스럽든 영원한 상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자신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영원한 평화, 행복 또는 황홀경의 상태를 투영해 왔습니다. 따라서 '마음' 또는 사고의 요구와 신체의 기능 사이에는 근본적인 갈등이 존재합니다.
사고와 신체 사이의 이러한 갈등은 사고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사고가 이 갈등을 다루려는 어떤 시도도 문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종식되어야 할 것은 자아를 영속시키는 사고 메커니즘의 왜곡된 간섭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그 메커니즘 자체로는 달성될 수 없습니다. U.G.는 사고를 종식시키거나 통제하려는 모든 기술과 수행법이 무용하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자체가 사고의 산물이며 그 영속화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합리주의적 접근 방식은 인과율 개념에도 헌신합니다. U.G.는 인과율을 낡은 교리로 거부합니다. 그는 사건들이 실제로는 단절되어 있으며, 그것들을 인과율 개념을 통해 연결하는 것은 사고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자연에 실제로 인과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는 그가 우주의 창조자 개념뿐만 아니라 빅뱅 가설까지도 거부하게 만듭니다. 그는 우주에는 원인도, 시작도, 끝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U.G.는 '자아(self)'라는 존재가 사고 과정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생각하는 자는 없고 오직 '생각함(thinking)'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자', 즉 생각하고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알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사고의 움직임만 존재합니다. U.G.는 감정이나 정서와 사고 사이에 날카로운 구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지각과 감각도 사고로 물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사고의 움직임(movement of thought)'이라는 표현은 그 의미가 매우 광범위합니다. U.G.는 사고의 움직임을 조건 짓는 기억에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합니다. 사실, 그는 사고가 기억의 움직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또한 독립적인 의식이나 불교의 '식온(vijnana skandha)'에도 자리를 주지 않습니다.
U.G.는 모든 파괴, 혼란, 고통이 자아와 세계 또는 자연 사이의 분열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열적인 사고의 움직임은 인류 진화 과정 어딘가에서 자아 의식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 종의 종말의 시작을 알립니다. "우리가 창조의 정점에 놓는다고 생각하는 도구는 인간 종뿐만 아니라 이 행성의 모든 생명체를 파괴로 이끌 것"이라고 U.G.는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사고가 완전히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고 없는 상태라는 이상은 힌두교도들이 희생양이 된 많은 거짓말 중 하나입니다. 그는 자아 영속적 사고 메커니즘이 붕괴될 때 남는 것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조화로운 기능 모드이며, 여기서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그리고 도전에 응하여 발생하고 사라진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자아 영속적인 사고 과정이지, 생각의 발생 자체는 아닙니다. U.G.가 묘사하는 "자연 상태"에서는, 즉 사고의 간섭 없이 신체가 기능하는 상태에서는, 생각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 상태에서 감각적인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문제를 구성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생각이 '좋은지' '나쁜지', 또는 아예 발생하는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습니다. U.G.는 "어떻게 그런 사람이 감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는 그 생각을 억압할 수도, 그 생각이 행동할 여지를 줄 수도 없다. 그 생각은 머물 수 없다. 연속성도, 축적도 없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 거기서 끝난다. 그리고 다른 것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U.G.의 '재앙(calamity)'과 신체의 자연 상태
1967년 스위스에서 U.G.에게 일어난 이 "재앙"은 그의 깨달음 추구가 오히려 자연 상태를 방해한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 발생했습니다. 이 깨달음은 번개처럼 그를 강타했고, 자아 영속적인 사고 과정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6일 동안 신체 기능에 일련의 변화를 겪었고, 7일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아이 같아서 세상에서 기능하는 데 필요한 모든 단어를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U.G.는 이 현상을 모든 종교적 또는 신비적 내용에서 벗겨냅니다. 그는 이것이 단순히 생리적 현상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또한 이것이 비인과적 현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영적 또는 신체적 기술로도 이를 초래할 수 없습니다. U.G.는 자신이 수행했던 모든 사다나(영적 수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가 사다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이 "우연히 마주친" 상태가 행복, 지복, 사고 없는 침묵, 전지, 전능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답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감각이 서로 독립적으로 최고조로 기능하는 당혹스러운 신체 상태였습니다. 이는 분리적인 사고 과정의 왜곡된 간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지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앎이 없는 상태'였고, 알고자 하는 욕구가 끝난 상태였습니다. 지복이나 황홀경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아 영속적인 사고 메커니즘의 붕괴로 인해 신체에 "에너지의 분출"이 있을 때 엄청난 신체적 긴장과 고통을 동반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듯 무기력한 "마음의 침묵" 상태가 아니라, 모든 에너지의 본질을 품고 있는 화산 폭발의 침묵과 같았습니다.
그는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공유는 자아와 타인 사이에 분열이 있고,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줄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지식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U.G.에게는 그 상태에서 '자아'와 '타인' 사이에 분열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나 전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U.G.는 스승이나 영적 권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른다면, 그는 자신의 상태를 다른 사람의 상태와 비교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권위로 내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독립적인 경험자의 부재를 의미하므로, 이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U.G.는 깨달음이나 해탈이 깨달은 스승이나 교사와의 접촉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진정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문화, 종교,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
U.G.는 영적 권위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이유로 거부감을 표합니다. 그는 각 개인이 독특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깨달음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각 개인에게 독특할 것입니다. 모든 개인이 맞춰야 할 보편적인 깨달음의 패턴이나 모델은 없습니다.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독특합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수행의 기반이 되는 다른 사람의 '영적 깨달음'을 모방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자신의 '영적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의 모델로 삼으려는 어떤 시도에도 해당됩니다. 이것이 U.G.가 역사상 대부분의 영적 스승들을 비판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의 모델로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불가능합니다. 만약 '깨달음'이 각 개인에게 독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되거나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면, 구루 개념의 기초 자체가 무너집니다.
U.G.는 영적인 권위에 대한 그의 비판이 착취적이고 탐욕스러운 노예 주인으로 판명된 구루들로 가득 찬 시대에 매우 적절하다고 말합니다. 영성의 옷을 입은 착취와 상업주의에 대한 그의 타협 없는 비판은 아직 견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바그완 라즈니쉬, 묵타난다, 다 프리 존과 같은 사례들은 U.G.의 구루 및 기타 종교 교사에 대한 경고를 증명합니다. U.G.는 조직이나 기관을 설립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파하려는 유혹이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루와 종교 교사를 비판할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U.G.는 깨달음, 구원 또는 해탈의 추구가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라는 가장 급진적이고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U.G.는 그것이 모든 고통 중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이 존재하지 않는 문화가 강요한 목표를 추구하면서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육체적, 심리적 고문에 시달려 왔습니다. U.G.는 모든 형태의 금욕주의나 자기 부정을 변태적이라고 간주합니다. 영적 경험을 얻기 위해 신체를 고문하거나 기본적인 신체적 필요를 박탈하는 것은 변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문은 신체의 신진대사를 급진적으로 방해하고, 위대한 영적 경험으로 간주되는 환각을 유발합니다. "이 모든 영적 경험과 환상들은 신체의 신진대사 교란에서 태어난다"고 U.G.는 선언합니다. 그는 호흡 조절이나 프라나야마로 유도된 경험들은 뇌로의 산소 흐름 감소의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신도들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생리적 과정에 대한 반응으로 눈의 자연적인 기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U.G.는 "그것들은 실제로는 헌신이나 박티의 눈물이 아니라, 자가 유발된 생리적 스트레스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다"라고 말합니다. 욕망의 포기라는 이상에 대하여 U.G.는 "욕망을 신체 내 호르몬의 기능입니다. 살아있는 신체에 욕망이 완전히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도에 만연한 또 다른 속임수입니다. 굳이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해탈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U.G.에 따르면, 물질적 가치의 추구와 소위 영적 가치의 추구 사이에 질적인 대조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상위'와 '하위' 목표 사이의 구분을 거부합니다. 영적 가치의 추구가 물질적 가치의 추구보다 어떤 면에서도 우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특히 인도 전통의 맥락에서는 매우 급진적인 입장입니다. U.G.는 목표 달성을 위해 사고라는 물리적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두 가지 추구 모두에 공통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영적 구도자 또한 자신의 투영된 목표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사고를 사용하므로, 그의 추구 또한 물질적이고 측정 가능한 것의 범위 안에 속합니다. 그것에는 '초월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영적 추구는 물질적 추구만큼이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평화나 구원에 관심이 있든, 재정 상태에 관심이 있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이기적인 추구입니다. U.G.는 또한 영적 목표가 물질적 목표의 환상적인 확장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을 믿음으로써 사람들은 좋은 직업이나 질병 또는 기형의 치료와 같은 물질 세계에서의 안정감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물질적 목표를 얻는 수단이 됩니다. 이것은 단지 망상입니다. U.G.의 말에 따르면, "영적 목표는 전혀 없다. 그것들은 단순히 물질적 목표를 당신이 더 높고 고귀하다고 상상하는 차원으로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당신은 영적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어떻게든 기적적으로 물질적 목표가 단순하고 관리하기 쉽게 될 것이라고 잘못 믿는다. 이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당신은 열등한 사람들만이 물질적 목표를 추구하고, 물질적 성취가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당신이 설정한 소위 영적 목표들도 똑같다".
U.G.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성의 추구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는 '인류'를 위한 거대 프로그램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인류'라는 개념이 영원성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추상화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특정하고 소멸하는 개인들 위에 '인류'라는 집단적이고 영원한 존재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 가정은 U.G.에게는 타당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혁명적 프로그램은 '인류'가 영원할 것이며 결국 미래의 공산주의 시대의 열매를 경험할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이 가정은 근거가 없습니다. '인류'는 자본주의 시대에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개인의 곤경입니다. 혁명가는 자신의 비영원성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자신의 유토피아 사회에서의 삶의 혜택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류'라는 추상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영원성을 부여합니다. U.G.는 "당신이 사용하는 의미의 인류와 그 미래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영원성에 대한 요구가 끝나면 '인류'라는 개념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U.G.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비참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만큼 현실적입니다. 그는 사회를 "인간 정글"이라고 부르며, 자연의 정글에서 살아남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우리가 만든 정글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나무에서 과일을 따려고 해도 나무는 누군가 또는 사회의 소유다". 그는 다른 곳에서 재산 제도에 대해 더 명백히 비난합니다. "자유롭게 흐르는 강에 대해 재산권을 주장할 권리가 당신에게 있는가?"라고 그는 묻습니다. U.G.는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환상이 없습니다. 그는 사회가 기본적으로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하며, 자신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는 개인을 주저 없이 제거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일부 사회는 반대 의견을 용인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사회도 그 연속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용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현상 유지를 종식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폭력을 초래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U.G.는 "우리는 순전히 기능적인 이유로 우리에게 강요된 사회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U.G.는 성(sex)과 사랑에 대한 과감한 견해로 악명이 높습니다. 그는 60년대 슬로건인 "사랑을 하라, 전쟁을 하지 마라"에 대해 "사랑하는 것은 전쟁이다!"라고 반박합니다. U.G.에게 사랑하는 것과 전쟁하는 것은 모두 동일한 근원, 즉 분리적인 사고 구조에서 비롯됩니다. 둘 다 '자아'와 '타인' 사이의 분열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이 U.G.가 '사랑하는 관계'에 대한 유행하는 이야기에 호의적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분리적인 사고 구조가 만들어낸 고립감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합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공허나 공백을 누군가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만족, 자기 충족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비참한 진실을 인정할 만큼 정직하지 못합니다. 대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속이기 위해 '사랑'과 '보살핌'과 같은 허구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허구들이 날아가 버리면 남는 것은 그 자체의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러면 사랑할 '타인'이나 사랑받을 '타인'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두 사람'을 의미하며, 분열이 있는 곳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U.G.에게 관계는 즉시 형성되고 즉시 해체됩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은 틀 안에서 일어납니다. 성은 단순한 생물학적 욕구이며, 신체는 생존과 자기 복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성을 쾌락의 움직임으로 만들었기에 문제가 됩니다. 생각이 없으면 성도 없다고 U.G.는 주장합니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는 순간,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말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되며, 이는 문화의 개입입니다. U.G.는 자신의 경우, 이러한 '축적(build-up)'이 완전히 없기 때문에 감각적 경험이 즉각적으로 변하고 초점이 계속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물리적인 매력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억압하려는 시도가 문제를 만듭니다. 금욕주의는 자연에 대한 범죄이며, 성적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봅니다.
인류의 운명과 미래에 대한 전망
영원성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는 사회를 마비시킵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영원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외부의 것으로 인식되는 것들, 즉 사회, 인류, 국가, 세계도 영원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영원성을 추구합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모든 형태의 영원성은 우리 자신의 창조물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영원성에 대한 바로 그 요구의 확장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물을 영원하게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은 자연의 방식에 전적으로 어긋납니다. 우리는 영원성에 대한 우리의 요구가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집합니다.
U.G.는 삶의 의미는 없으며, 깊은 의미는 더욱이 없다고 말합니다. 삶은 포착하거나 담거나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에너지는 삶의 표현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인체의 상태일 뿐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들, 즉 다른 사람의 부재를 느낄 때 생겨나는 생각들뿐입니다. 우리 자신의 죽음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른 개인이 사라짐으로써 생겨나는 공허함이며, 존재하지 않는 영원성 속에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충족되지 않은 요구입니다. 이러한 모든 '영원한' 관계가 지속될 무대는 '내일'입니다. 즉, 천국, 다음 생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방해받지 않는 영원한 연속성에 관심이 있는 '자아'가 만들어낸 허구적인 미래 속에서만 존재하는 마음의 발명품입니다. 연속성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내일도 행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의 삶을 풀 수 없는 딜레마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알기를 원하며, 그 지식을 통해 우리의 비참한 존재를 영원히 지속하기를 희망합니다.
U.G.는 두려움이 사라지면 '나' 자신도 끝난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나'는 두려움에서 태어나 두려움 속에서 살고 기능하며 죽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지루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U.G.는 지루함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이며,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응답합니다. 우리는 지루함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려 애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하는 일보다 더 흥미롭고, 더 목적 있고, 더 의미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지루함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계속 반복됩니다. 카우보이 영화로 자신을 즐겁게 하지 않으면 교회에 가서 기도하거나, 절에 가서 기도하거나, 거룩한 사람이 온갖 엉터리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머리로 서서 어깨로 서라, 이것저것 해라, 그러면 괜찮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엉성한 영적 물건들을 팔 것입니다.
사회의 문제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자연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연에는 풍요로움이 있지만, 인간은 모두에게 마땅히 돌아갈 것을 빼앗고는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U.G.는 자선을 베푸는 행위가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려 하지 않는 종교인의 행위라고 지적합니다.
유전 공학의 발전과 기술이 인류를 로봇화할 것이라는 경고는 U.G.의 비관적인 미래관을 보여줍니다. 그는 과학자들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보고, 오히려 그들의 연구 결과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어 인간을 조작하고 전쟁에 이용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이러한 비극은 피할 수 없으며, 인류는 이 경향을 되돌릴 수 없다고 U.G.는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사고는 본래 파시스트적이며, 자기 보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이 이미 '지옥'에 살고 있으며 그것을 즐기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U.G.는 자신이 인류의 구원자가 아니며, 누구도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전쟁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지만, 기존의 생각과 가치 체계를 뒤흔드는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U.G.는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거부하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어떠한 정의나 기대에도 부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내적인 충동이 없으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응답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의 가르침이 어떠한 특정 목적이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하고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U.G. 크리슈나무르티는 인간의 의식, 문화, 그리고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제시합니다. 그의 "출구 없는(No Way Out)" 이라는 관점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 자체에 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그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환상, 즉 종교, 영성, 사랑, 심지어 '자아' 개념까지도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그가 제시하는 인간의 자연 상태는 생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기능에 기반한 것으로, 사고의 간섭이 없는 순수한 존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기존의 해결책들을 재고하게 만들며,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길이나 모델도 제시하지 않으며, 단지 개인이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의 말처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아는 그대로, 그리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경험하는 그대로의 '당신'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재앙'과 같을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를 제약하는 모든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ksy3075k/223210800400
<오늘의 책>
STOP THINKING
현대의 붓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모든 것
이 책은 저자인 최준식님이 이번에 출간한 메타 종교 관련 시리즈 3권 중 마지막 책이다.
최준식 명예 교수님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강연을 미국에서 실제로 들은 적도 있고, 여러 종교와 종교를 넘어선 영적 현상(이를테면 마이클 뉴턴의 최면 사례 등)도 통합해서 잘 정리해서 알려주는 분이다.
과거 유지 관련 책을 한국에 출간하기도 하셨고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해서는 아마 한국에서 거의 제일 많이 파고든 분 중에 한 분일 것이다.(일단 유지 자체가 사람들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최준식 교수님(이하 저자)은 유지를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이 책을 읽으면 좋다.
저자의 말대로 유지는 거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 단계의 무수한 영적 경험과, 그것을 넘어서 실제로 몸이 변하는 신비 체험을 한다. 내분비선이 변화되어 왼쪽 가슴에 여성형 유방이 생겼고 여성 호르몬으로 인해 생식기가 많이 퇴화됬다고 한다(이건 유지의 간병인의 증언이다).
흔히 영적 스승, 구루, 교주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대부분 피하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게 성(SEX) 관련 문제인데,
유지는 애초부터 성을 억압해야할 것으로도, 거룩히 여겨야 할 것으로도 대하지 않되 있는 그대로 존중했다.
이건 이후에 올릴 <그런 깨달음은 없다> 관련 포스팅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
유지가 직접 책을 집필한 적은 없으며
유지를 다룬 책은 한국에 지금까지 3권, 절판된 책까지 포함하면 4권이 전부다.
유지는 자신의 가르침이나 강연에 대한 모든 내용에 대한 저작권을 소유하기를 거부했고,
심지어 유지의 가르침으로 책을 출간할 때도, 유지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출간한 사람의 가르침이라고 하며 가로채도 상관없다. 동의도 필요 없고 다른 누구의 허락도 받을 필요도 없다고 했다...
유지는' 죽을 때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내가 사라지면, 그것이 완벽한 죽음'이라고 하였다.
---
아무튼 유지는 성적으로 자유로울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미 몸의 변화, 호르몬-내분비선의 변화, 뇌의 변화가 쿤달리니 각성 이후에 찾아왔기 때문에 몸 안에 남성과 여성적인 특징이 모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성욕을 초월해버린 것이다.
이쯤에서 성욕이 있으면서 그것을 절제하는 사람과 유지처럼 아예 성욕이 사라진 경우를 비교할 때 어떤 경지가 더 높은 경지인가? 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볼 부분이고 어쨌거나 유지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봉의 현상적 깨달음을 경험했다.(인도 수행에서는 맥박과 호흡이 멈추는 단계가 삼매의 최고 단계이고 무수히 많은 요가 수행자가 추구하는 삼매의 단계인데, 유지는 그 정도의 삼매는 물론이고 그걸 넘어서서 아예 몸이 변했다.)
임사체험(근사체험)으로 유명한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의 저자인 아니타 무르자니도 말기암에 시달리다가 근사 상태에서 유체이탈 체험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고 말기암이 완치되었으며, 3개월 시한부의 삶으로 육체가 망가지고 다 죽어가던 레스터 레븐슨 역시 극적인 깨달음 이후에 완벽히 건강한 몸으로 회복했다.
이와 같이 그 사람의 깨달음이 얼마나 깊은 지 판단할 때, 가장 정확하면서도 간단한 척도가 몸의 변화이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뇌파-내분비선-뇌-세포-건강-행동 등등 실질적으로 그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가 그 사람의 깨달음의 깊이이다.
하지만 아니타 무르자니나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게는 이러한 깨달음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예고치 않게 찾아왔다.
그냥 '부어졌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레스터 레븐슨의 경우에는 본인이 죽음 앞에서 죽기 살기로 깨달음(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서 성취해낸 결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몸이 변할 정도의 깨달음은 구도 중에 찾아 온다기 보다 그냥 사고처럼 우연히 들이닥치는 경우가 많다.
호흡훈련을 통해 차크라 각성을 해서 제3의 눈(아즈나 차크라)를 개안하고 쿤달리니 각성(7차크라가 모두 개방된 것)을 맞이한 사람들은 저정도의 몸이 변하는 현상적 깨달음을 체험하지 못한다.
쿤달리니 각성 이후 몸이 지속적으로 아프고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느정도의 변화가 찾아오기도 하고 쿤달리니 각성을 할때 소위 말하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유지, 아니타, 레스터 정도의 몸의 변화가 찾아온 사람은 못봤다.
유지와 아니타는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쳐두더라도
레스터는 차크라를 깨우기 위해 요가식 명상이나 수행을 한 것이 아니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깊이 파고들다가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깨달음이 너무 강렬해서 몸이 변화되고 신체가 치유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1) 명상에서의 호흡 훈련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2) 내면으로 파고들어 '앎'에 도달하는 게 중요한가를 봤을 때 둘 다하면 제일 좋지만 2)가 조금더 직관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사설이 길었는데
앞으로
왜 힌두-차크라 방식의 깨달음(쿤달리니 각성)에서는 육체에 큰 충격이 오고 사람들이 죽어버리는데, 아니타와 레스터처럼 임사체험이나 '앎'등 다른 방식의 깨달음에서는 오히려 사람이 살아나는지 에 대해서 이어지는 포스팅을 쭉 쓰고 싶어서 대략적으로 정리해봤다.
이제 책 내용으로 ㄱㄱ
신앙이란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다.
폴 틸리히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인 인간이 되려고 한다면 먼처 착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그래서 이번 메타 종교 시리즈의 첫 책이 카르마에 대해 이야기한 <인생의 절대 법칙>이다. 구약에서 십계명이 등장하고, 예전 종교일 수록 강력한 법이 있는 이유다. 일단 사람이 너무 차원이 낮고 짐승에 가까울 수록 이 단계가 필요하다.)
붓다고 예수고 다 거짓말쟁이
U.G. 크리슈나무르티
내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행복을 찾고 있는 한 당신은 불행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All I can guarantee you is that as long as you are searching for happiness, you will remain unhappy.-U.G. krishnamurti
나는 전공인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틈틈히 세계적인 스승을 찾아 개인적으로 탐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유지)의 책을 읽고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다른 스승들과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를 할 수록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가 보여준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그 끝모르는 자존감에 나는 참으로 반해버렸다.
그의 언행을 보면, 어떤 세계적인 위인도 맥을 못 추었다.
붓다도 예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쇼 라즈니쉬
현대의 성자라고 하는 오쇼 라즈니쉬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역시 그의 예봉을 피해갈 수 없었다.
기존 종교 전통에 있는 테레사 수녀나 달라이라마 같은 사람들도 그의 표적이 되었다.
유지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아무 이유 없이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그런 유명한 종교 지도자를 숭앙하는 관습 혹은 관례를 깨버리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 진리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자기가 한 말은 개가 짖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고 하니 말이다.
그는 항상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에게 와서 공연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그는 항상 말했다.
종교인들이 그렇게 갈망하는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이 없으니 깨달은 성자도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성자들을 신처럼 섬기니 그런 관습을 단칼에 잘라버린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스스로 설 생각은 하지 않고 기존의 성자들에게 의존해서 묻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태도를 보면 선가에서 말하는 '살불사조'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문구가 떠오른다.(이런 면에서는 유지와 레스터는 상당히 유사하다. 결국 어느 종교든 깨달음이든 구도이든 끝은 스스로가 신이 되는 단계가 될 수밖에 없다. 외부는 자신의 단계를 점검할 때, 혹은 길을 헤맬 때 잠시 참고하는 것이지 언제나 답은 개인 스스로이며 개인의 내면이다. 외부의 영양분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은 성장폭이 정해져있다. 다른 사람을 경외할 그 에너지로 당신 스스로를 경외하라)
당신은 당신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바로 그 생각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자 혹은 구세주가 구원해줄 것이라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유지
지금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적은 책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있다. 돈 1, 2만원 정도면 세계 최고 스승들이 설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돈을 들여 책을 사지 않아도 인터넷 등 각종 매체에서 무지막지하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활용하여 혼자 공부하면 된다. 그러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있으면 간헐적으로 만나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 만날 필요도 없을 게다. 온라인으로 의사소통하면 되기 때문이다.(실제로 대학 교수들도 나라를 넘어 협업하며 논문을 낼 때, 화상 회의나 메일로 의견을 주고 받고 실제로 만나지 않고 논문을 내는 경우가 더 많다.)
현대의 사정이 이러하니 굳이 교단을 만들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책이나 사이버 공간에서 해결되는데 무엇하로 종교를 세우고 교단을 만들어 여러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붓다가 현대에 온다면 2천 5백여 년 전에 했던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가 지금 다시 나타난다면 유지와 같은 식으로 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상상을 초월하는 유지의 초탈한 모습은 그의 선배인 지두와 비교된다.
유지는 지두를 사정없이 공격한 것으로 유명한데, 지두는 'Krishnamurti Foundation'과 같은 단체를 만들어 자신을 홍보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나 녹음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 등을 팔았다.
(최고의 단계로)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을 홍보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충족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낼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그래서 오쇼는 깨달은 사람들(쿤달리니 각성을 제대로 겪은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가 그 깨달음의 에너지를 견디지 못해서 죽어버리며, 살아남은 사람들 중 10명 중 9명은 입을 다문다고 했다.)
자신이 부족하니까 바깥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고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에게 의존하는 태도로서 깨달은 사람은 결코 취하지 않는 자세이다.(물론 그 사람이 중생구제, 보살도의 자세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면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이 시대의 붓다가 이렇게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불가사의하다.
그의 가르침은 너무나 급진적이고 직접적이어서 일반인들은 따라오기 힘들다.
그는 사진의 말을 포함한 모든 것을 부정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를 감당하기 힘들다.
깨달음이 없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깨달았다고 전해지는 사람들이 다 사기꾼이라고 하니 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게다가 명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니 일반인들은 망연자실해지는 것이다.
자신이 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당신은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지를 행사할 필요가 없고, 자신이 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지
유지를 정의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유지는 '우리 구도의 끝'이라는것이다.
당신이 만일 유지와 함께 있으면 길의 끝에 왔다고 느낄 것이다.
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Science and Spirituality, Narayana Moorti
유지는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거나 논박할 수 없는 논리를 사용했다는 점(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토론에서 이러한 면이 여실히 드러난다)에서 소크라테스와 비슷하면서도 돈이나 권력, 지위 , 특권 등에 어떤 경의도 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디오게네스와 비슷하다.
그리고 거울처럼 우리의 시대를 멋들어지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실제로 그에게 오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각자의 경지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증좌는 몸에 일어난 변화다.
말은 얼마든지 번지르르하게 흉내를 낼 수 있지만 몸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다.
물론 정신의 변화가 생겼다고 해서 몸이 곧 반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몸에 변화가 왔다면 그것은 정신의 변화를 의미한다.(cf.아니타 무르자니, 레스터 레븐슨)
종교 체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모세처럼 신을 간접적으로 만나는 체험이나, 천사와 신령과 같은 신적인 존재를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도 종교적 체험이다.(수호천사, 안내자 영혼, 영적 가이드 등)
그런가 하면 신적인 존재나 인격적인 존재와 조우없이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경우도 있다. 이런 깨달음은 신적 존재와 아무 관계가 없다. 붓다의 체험이 대표적인 예다. 선불교의 선사들도 모두 이 계통에 속한다.
(최근 보고 있는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내용은 '신은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다'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차원이 달라서 오는 존재적인 한계이고 자신이 다 안다, 다 맞다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다.)
진정한 종교 체험을 겪었다면 정신과 몸 모두에서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철학자들은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일 뿐 몸의 변화를 경험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깨달음은 머리라는 부분에만 그친다. 그들의 깨달음은 머리라는 부분에만 그친다. 비유로 말하면 그들은 설탕이 어떻게 생겼지는지는 알지만 먹어본 것은 아니다.(길은 알지만 그 길을 가보지 않은 것. 관광지를 겉에서 봤지만 그 내부에서 실제로 바라보지 않은 것. 내부에서 실제로 본것과 외부에서 겉을 본것은 하늘과 땅차이다. 실체를 본인이 겪어야 경탄이 나온다.)
의식으로는 절대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바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몸에 관련된 사항들이다.
몸과 관련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의식을 지배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전체 의식을 송두리째 뒤집어서 무의식을 대면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종교 체험을 할 수 있다.
몸에 이전에 한번도 없던 대격변이 있은 다음에야 우리는 이원론적인 의식에 의존하지 않고 비로소 존재 전체로 살게 된다. 그래야 우리의 의식이 작동을 멈춘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여기서 저자가 말한 깨달음은 진정한 쿤달리니 각성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신체가 대격변되는 단계까지의 쿤달리니 각성은 겪지 못했다. 쿤달리니 각성을 통해 최하위 차크라부터 최상위 차크라까지 에너지의 흐름이 개방되면 이원성이 사라지고 참나와 합일된다. 이후에 다양한 영적인 초능력도 생긴다. 붓다, 유지 등 유명한 스승들부터 블로그 이웃분, 내 지인까지 영각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성 이후 나름의 초상 능력을 경험했다.)
유지의 쿤달리니 에너지 각성
1960~1967
1960년대 초, 그는 영국 런던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돈이 다 떨어져서 라마크리슈나 선교회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곳 수련실에서 명상하던 중 어느날 유지는 자신의 몸에서 에너지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성기에서 에너지가 나와 척추를 타고 올라가 머리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에너지는 한 번은 시계 방향으로 돌고 다음에는 반대로 돌면서 상승했다. 그리고 머리에 큰 구멍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일반적인 사람들이 느끼는 경험하는 정도의 쿤달리니 각성)
몇년 후에 그는 스위스의 자아넨에서 발렌타인이라는 연상의 여인과 함께 살게 된다. 당시 유지는 극히 심한 두통을 겪어 매일 수십 알의 아스피린을 먹고 커피도 하루에 15~20잔을 마셨다. 그러나 두통에 별 차도가 없었다.
유지가 이렇게 아픈 체험만 한 것은 아니다. 유지의 몸에는 신기한 현상도 일어났다. 유지가 손을 부비든가 손으로 몸을 쓰다듬으면 불꽃이 일어났다. 침대에서 뒹굴 때에도 몸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우리는 특정한 환경에 있을 때에만 정전기 현상을 경험하지만 유지는 외부의 자극 없이도 이런 일을 일상적으로 겪었으니 특이하다고 하겠다.
유지에게 이런 일들이 한동안 계속되다 두통은 사라졌지만 다른 체험이 엄습했다.
이번에는 머리가 없어진 것 같은 체험을 한다. 생각하는 주체가 사라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 생각하는 주체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깨달음이란 생각만 멈추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배경자아,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본래면목, 본래의식, 참나)
그의 체험은 계속된다.
한번은 언덕에 올라가 주변을 보았는데 기이하게도 경치가 360도로 보였다고 한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데도 전체 경치가 다 보인 것이다. 이것은 유지가 주변과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아가 없어지면 당연히 주변과 하나가 된다.
이렇게 외부의 사물과 하나 되는 체험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해오와 증오라는 두가지 요소로 나누기도 한다.
해오는 깨달음의 경지를 머리로만 안 것이고,
증오는 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몸 전체가 깨달은 것을 의미한다.
유지는 몸 전체에서 폭발이 일어났으니 증오 쪽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영각 체험을 몸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머리로 접했으니 해오 쪽에 해당할 것이다.(내가 겪은 나름의 체험들도 진짜 찐한 체험을 한 사람들 앞에서는 귀여운 수준이다...)
1967년, 유지는 49세가 되는 해의 생일에 쿤달리니 에너지가 대폭발하는 사건을 경험한다.
이것을 두고 유지는 '재난'이라고 부르는 한편, 동시에 '자연 현상'이라고도 불렀다.
폭탄을 맞은 것 같이 큰 에너지의 충격이 지속적으로 몸에 영향을 주었기에 재난이었고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를 득했기에 자연 현상이었다.
우리는 인간이라면 응당히 '생각'을 하고 그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다.
끊임없이 생각이 간섭하고 있는 상태, 즉 평범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태가 외려 고통을 양산하는 지극히 비자연적인 상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붓다는 오랜 기간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행을 했다. 그러다 그는 이 고행이 결코 깨달음의 획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고행을 그만둔다.
그리고 자신이 만일 깨닫지 못한다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보리수 밑에 좌정한다(레스터 레븐슨과 유사). 그리고 6일째 되는 날 밤에 악마로부터 유혹, 위협을 받고 7일 째 새벽에 별을 보고 깨쳤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보면 유지가 깨닫는 과정이 붓다가 깨닫는 과정과 산술적으로는 매우 비숫하다. 유지 역시 7일 째 되는날 일련의 쿤달리니 대 각성은 일차적으로 종료된다.
이전의 자아는 죽고 새로운 자아로 재탄생한다.
7일째 되는 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죽음에서 벗어난다.
첫째 날
40대 후반의 그가 20대의 외모처럼 변한다.
피부가 비단처럼 부드러워지고 황금빛의 광채가 났다.
피부가 너무 부드러워 면도를 할 수 없었다. 면도 날이 미끄러졌다.(요가 수행을 많이한 요기들의 피부와 이와 같았다고 전해진다.)
둘째 날
생각이 끊어진다.
'풀린' 상태가 된다.
토마토 수프를 먹고 있는데 이 수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익숙한 토마토 수프의 맛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심의 상태가 됐다.
각 생각을 연결해주는 심적인 중재자가 사라졌다.
불교의 깨달음은 다른 어떤 환상적인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의 중심에 있는 이 중재자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
이 순간은 획득하거나 경험되거나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생각한 것을 획득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그것을 당신의 과거의 일부로 만듭니다.
유지
생각이 문제입니다.
슬픔이 문제가 아니라 슬픔에 대한 생각이 문제입니다.
유지
셋째 날
감각이 끊어진다.
어떤 향을 맡으면 후각이 자극되는 것은 알았는데, 그것이 어떤 사물의 냄새인지 알지 못했다.
소똥 냄새나 향수 냄새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지식은 경험을 만들어내고 경험은 지식을 강화시킵니다. 이것은 악순환입니다.
유지
넷째 날
보이는 것과 하나가 된다.
이날 유지는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위의 경치가 모두 시아에 들어왔다.
이때 그가 본 경치가 오목 거울로 본 것 같았다고 한다.
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외부의 사물이 유지의 내면으로 들어왔다가 나갔다.
저기 식당 밖에서 움직여야할 자동차가 그의 안으로 들어왔따가 빠져 나갔다.
'나'라는 주체가 없어졌다.
다섯째 날
소리와 하나된다.
이원론적 세계와 불이론적 세계를 자유롭게 오간다.
어떤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외부에서 들려온다기보다 내부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개가 짖어도 자신의 안에서 짖는 것 같이 느껴졌고 기차의 기적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유지가 초이원론의 단계에 올라갔다고 해서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되살릴 수 있다.
여섯째 날
몸이 사라진다.
자신의 몸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아 개념마저 사라졌다.
이제 마지막 단계까지 왔다.
다음날 그는 쿤달리니 에너지의 대폭발을 맞이한다.(이후에도 폭발은 계속 되었는데 이 날이 고비였고, 이 고비를 넘기고 지상에 남게된다.)
일곱째 날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 에너지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너무나 강한 에너지의 폭발 앞에 그는 죽음 앞에 선다.
천 볼트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전압기가 있다고 하자.
어쩌다가 만 볼트 전류가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 전압기는 폭발을 일으키며 터져버릴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인간의 몸에 엄청난 에너지가 흘렀으니 남은 것은 죽는 것 밖에 없었다.
죽음과 생명의 줄다리기
폭발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유지에 따르면 몸 안에 있는 생명 에너지가 움직이면서 한쪽으로 모이는 것 같았는데 이 움직임이 흡사 사진기의 조리개가 닫히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 상태로 계속 갔으면 그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조리개를 다시 여는 어떤 힘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다른 힘이 있어서 죽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같은 죽음과 생명이 서로 우위를 겨루는 줄다리기 과정이 수십 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죽음 쪽의 에너지가 더 강했던지 육체가 식어가기 시작했다. 손과 발이 차가워지고 몸이 굳어졌고 박동과 호흡이 현저히 느려진다.
이때 더글라스라는 지인으로 부터 전화가 왔고, 유지는 훗날 이 전화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그대로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했다.
범람하는 강물처럼
이상 징표들, 몸에 나타난 변화
유지는 한번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몸에서 항속적으로 폭발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레스터 레븐슨도 폭발 이야기는 안했지만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잠과 음식이 필요 없는 삶을 보여줬다.)
자신은 그 폭발에서 생기는 에너지로 산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끝난 후 작게 폭발하면서 없어진다고 한다.
유지는 바로 그때 생긴 에너지를 취하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몸에는 재가 생긴다고 한다.
그의 몸에는 쿤달리니 요가에서 말하는 다양한 징표가 나타났다.
차크라가 있는 지점에 다양한 혹이 나타났고 이 혹은 다양한 모양과 여러 가지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인도에서 흔히 발견되는 힌두교 신상을 보면 이런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이 상들은 유지의 경우처럼 사람의 몸에 실제로 나타난 모습을 가지고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는다. 그런 에너지가 정말 존재하는지의 여부부터 이 에너지가 왜 움직이는지, 움직이면 항상 이런 형상으로 발현되는지, 왜 이런 현상은 인도에서만 보고되는지 등등이 그것이다.
대각성보다 더 중요한 변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변화다.
유지의 몸에 있는 차크라 중에 6번쨰에 해당하는 아즈나 차크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차크라는 뇌하수체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통 제3의 눈이라고 불린다.
유지에 따르면, 아즈나 차크라는 육체에 직접 명령을 내리는 기능을 갖고 있다.('아즈나'는 '명령하다'라는 뜻이다.)
아즈나 차크라만이 생각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이 차크라가 재가동되면 우리의 심신은 이원론적인 영역을 벗어나 초이원론(불이론)적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멈추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 내츄럴 스테이트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유지는 일관되게 아즈나 차크라를 포함해 모든 차크라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하려는 어떤 시도도 실패한다는 데에 있다.
그렇게 노력을 하면 또다른 오염 물질을 만들 뿐이고 생각이 없는 상태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이 생각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시간이란 생각입니다.
생각이 있을 때 거기에 섹스가 있고 신이 있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섹스도 없고 신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깨달아야할 자아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유지
유지는 깨달음이고 마음이고 영이고 사후생이고 환생이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니, 방문객들은 스스로를 가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유지는 가서 돈이나 많이 벌라고 했다.
만일 유지가 이 체험을 바탕으로 교단을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 교단은 오쇼의 라즈니쉬 푸람처럼 거대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돈을 긁어 모았을 것이다.
이렇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그의 체험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이 글에 다 담지는 못했지만 쿤달리니 대각성 이전부터 그는 다양한 영적 체험을 했다. 그는 인도에서 알아주는 영적인 집안에서 자랐고, 그의 외할아버지는 신지학회 창립자들과 친했다. 유지는 지두처럼 어려서부터 세계적인 영적 교사로 길러졌고 수행 과정에서 온갖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인도의 다른 구루들과 비교해 보아도 그의 체험은 단연코 압권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하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능가하는 것은 물론이다.
추정컨데 20세기 최고의 요기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라마나 마하르쉬도 그런 강렬한 체험이 있던 것 같지는 않다.(다만 마하리쉬는 참나 체험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손꼽힐만큼 강한 사람이다. 과장이 좀 섞였을 수 있지만 그는 거의 평생을 참나, 삼매 상태에 거하고 있다가 문득 문득 에고 상태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그가 나고 자랄 때부터 죽을 때 까지 수행하기에 최적화된 수련원안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를 시중드는 사람이 늘 있었고 그는 그냥 참나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어도 괜찮았다.)
그가 수행할 때 자주 삼매에 빠졌다는 기록은 있지만 쿤달리니 에너지의 폭발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오쇼 라즈니쉬 같은 이는 이 반열에 끼지도 못한다.)
↑ 2부로 이어집니다.
https://m.blog.naver.com/ksy3075k/223213275275
ㄴ1부에서 이어집니다.
종교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 각자(깨달은 자)
유지는 세속에 살되 세속과는 절연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더 대단하다. 다른 많은 구루들은 추종자들이 만든 자리에 올라 그들이 만든 공동체에서 보호를 받으며 편안하게 살았다. 왕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처럼 추앙받았다. 그런 삶은 상대적으로 쉽다. 해주는 대로 받아먹고 제한된 사람만 만나며 가끔 법문(다르마) 같은 것만 해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숭배하고 돈을 바친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살지 않는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깨달은 이의 모습이다. 조금이라도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이는 장삼이사, 즉 대중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Q : 500년 후에 세상이 당신을 어떻게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U.G. : 세계가 나와 관련된 모든 기억과 기념물을 태워 버린다면 나는 축복받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종교인이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밖에서 보였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실수하지 않는다면 그는 깨달았거나 깨달음에 근접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할 때에 실수를 밥먹듯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깨달은 '사람도 사람인데 어떻게 실수를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판단을 내리면 그것은 무조건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판단이 된다.
사람들 중에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해 깨달은 사람이 자신과 같은 차원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진인들은 우리 보통 사람들과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그의 일상생활에서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검사가 필요 없다.
(나는 이부분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유지도 비행기 표까지 팔아서 생활비로 다 닦아쓰고, 대책없는 삶을 살다가 결국 거처도 없어 스위스의 영사관에 갔는데 거기서 발렌타인을 만났다. MBTI로 따지만 극단적인 잘못된 P의 형태인 것이다. 이런 건 '실수'가 아니라 신성의 계획이고 예정이기 때문에 눈 감을 수 있는 부분일까? 물론 그때는 7일 대각성 체험을 하기 전이었지만, 저때도 유지는 상당한 반열에 올라있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노년의 유지는 완강하고 고집강한 노인에 지나지 않는 모습도 종종 나왔는데 이 부분은 저자도 의구심을 품은 부분이다. 깨달은 이도 사람이기 때문에 신성화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의식적으로 살아가고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일반인과 다르다는 것은 인정한다. )
돈! 돈을 찬양하고 숭배하라!
보통 종교에서는 돈, 그리고 그것과 관계된 인간의 욕망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돈이 너무 중요하다. 때문에 돈을 신격화해서 매먼(mammon)이라는 신까지 만들어냈다.
인간은 이처럼 강한 돈의 힘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돈과 거리를 두어라, 돈을 초월해라 하는 식으로 돈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유지는 정반대로 갔다.
자기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그냥 돌아가서 돈이나 벌라고 종용했다.
...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로지 돈을 위해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노상 돈 이야기만 하고 사니 말이다.
돈에 얼마나 환장하면 가족을 죽일 수 있을까?(보험사기)
생면부지의 남도 아니고 가족을 죽인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돈은 이처럼 사람을 무분별하게 만든다.
나라끼리 벌이는 전쟁도 그 원인이 대부분 돈이다.
유지는 이처럼 인간이 돈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생각을 한다.
생각은 곧 욕망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욕망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소유이고
소유하는 대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돈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있는한, 욕망이 있는 것이니 우리는 결코 돈에서 못 벗어난다.
돈에서 벗어나겠다고 점잖은 척 해봐야 그것은 되는 일이 아니다.
3. 돈과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믿지 마라
5. 돈의 신을 섬기는 자는 나중에 확실하게 보상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발가벗겨져 노숙자의 신세가 될 것이다.
6. 돈은 모든 꽃을 피게하는 뿌리다.
27. 돈이 없어서 비참한 것보다는 돈이 많아서 비참한 게 낫다.
31. 돈을 부정하는 것은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36. 입은 닥치고 지갑은 열어라
56. 모든 것을 마음대로 그리고 인자하게 주무르는 것은 신이 아니라 돈이다.
76. 돈(머니)이 없으면 애인(허니)도 없다.
98. 돈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믿지 마라.
유지의 제자들이 만든 돈의 108경구(격언) 중에서
백화점이든 은행이든 어느 곳을 막론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돈밖에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우리는 고객님들의 돈을 노립니다.'와 같은 문구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유지는 이런 위선들을 까발린 것이다.
예술가가 되어 온갖 폼을 잡고 살든
교육자가 되어 사람을 가르치는 숭고한 일을 하든 결국 우리는 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는 돈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는 가끔씩 이 격언들이 적힌 종이를 들고 그것이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것처럼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돈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유지의 이런 모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자의 모습과 너무 달라 놀랍기만 하다.
자신이 성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흡사 목 아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근엄하게 무게를 잡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성자를 생각할 때, 그분들은 모든 것을 품어주고 항상 인자하게 웃고 잇을 것이라는 이미지를 연상한다.
유지는 그런 선입견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러나 정작 유지는 돈을 추구하지 않았고 자신의 가방에 두세 벌의 옷과 그릇, 컵 정도만 가지고 다녔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내 지인 중 한 명은, '장사의 신'이라는 유튜버를 보고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성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유지와 같은 맥락으로 느껴졌다ㅎㅎ )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가고 난 다음에 세상에 남은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 50년만 지나도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유지는 붓다와 많은 대조를 이룬다.
붓다는 사후에 흔적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장례나 화장을 어떤 식으로든 했고 그의 몸에서는 사리가 나왔다.
유지는 자신이 기억될 만한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그는 어떤 조직도 만들지 않았고 제자 or 후계자도 없었다.(레스터 레븐슨은 조직은 만들었으나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아 레스터가 죽은 후에 제자들 끼리의 분쟁이 있었다.)
페이스북에는 유지와 관련된 계정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는 Friends of UG Krishnamurti 이다. '유지의 친구'라는 뜻이니 그들 역시 유지를 구루로 여기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따. 이것은 유지의 뜻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유지의 생애
유지가 태어나고 7일 만에 모친이 사망한다.
이 사건은 붓다의 탄생 과정과 너무도 흡사해 놀랄 지경이다.(붓다의 모친도 그를 낳고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신지학회
유지의 외할아버지는 힌두교에도 열심이지었만 당시에 인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신지학회의 열성 회원이었다.
신지학회란 서양인들이 주축이 되어 기독교와 힌두교의 교리를 섞어 만든 새로운 종교 운동이었다.
(신지학회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서구 영성 문화가 현대에 정립되기 시작된 뿌리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뉴에이지, 카발라, 점성술, 영혼 상승, 입문식, 하이어라키 등등...)
본래 신지학(Theosophy)은 연금술, 점성학과 같은 인류의 오랜 비의적 전통(esotericism)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고 근대적인 모습의 서양 사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후, 비의주의는 이제까지 오랫동안 인류가 연구해온 방향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는 인류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신지학과 달리 그 내용과 방향이 상당히 혼란스러운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지학회는 초기에 오컬티스트(occulists), 유대카발라 신비주의자들, 골동품 수집가들, 이집트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집된 것이었다. 하지만 점차로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다양한 신비주의를 혼합하기 시작하였다. 신지학회는 모세의 하나님인 인격신을 강하게 부정한다. 카르마의 원리를 인정하며, 인간, 우주를 모두 일곱 차원으로 설명한다.
신지학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지학회의 많은 회원들이 영국의 종교적 비국교도들이었음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영국의 국교도들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거부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동양 종교와 각종 신비주의들이 결합된 신지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지학회 회원들이 서양 세계의 오랜 종교적 신념인 그리스도나 하느님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해석되는 그리스도를 원했다. 그래서 신지학회가 내세우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새로운 개념의 그리스도인 ‘세계의 교사’라는 관념에 흥미를 가졌던 것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러한 당시 서양인들의 관심을 집약한 하나의 아이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윈뉴스(win뉴스)(http://www.newswin.kr)
이 영적인 운동은 초기에는 그 기세가 대단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호응이 있었다.
유지의 집에는 당시 신지학회의 창설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출입했다.
이러한 독특한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결혼하기 전까지 신지학회 본부 안에서 살기도 하하고 학회장의 비서로도 일했으며 신지학회를 알리는 강연을 수년 간 하는 등 충실한 신지학회 회원이었다.
( 힌두 문화에서는 어릴 때 부터 영적 스승으로 성장할 사람을 지정해서, 구루로 키우는 문화가 있는데 신지학회도 이 맥을 같이 했다. 오히려 신지학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메시아'를 선택해서 키워냈는데 그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다. 당시 신지학회의 멤버 중에는 사람들의 전생, 심지어 전생을 넘어 여러 생 이전까지의 생을 볼 수 있는 영 능력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해변가에서 놀고 있던 13살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보고 감동하며 '찾았다!! 이사람이다!!! '하고 그를 채택한다. 이후 지두는 신지학회에서 양육되고 신지학회에서 의도한 '세계의 교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결국 신지학회와 결별하고, 자신의 단체까지 해제하며 '진리는 도달할 길이 없는 땅'이라는 말을 남기며 유지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두나 유지 정도의 사람들은 이미 이전 생에서 굉장히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이룬 사람인데, 특별한 역할이 있어 이번 생에 왔다고 믿고있다.
유지의 외조부는 하루에 한두 시간은 반드시 명상을 했는데, 한번은 한두 살밖에 안된 어린 아이가 명상 시간에 울었다.
울음 소리를 들은 그(외조부)는 아이를 마구 때렸다.
그것을 본 어린 유지는 경악하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항상 경전을 외우고 명상을 하면서 도를 닦는다는 사람이 어리디 어린 아기를 때리는 모습은 분명 충격 그 자체 였을 것이다.
유지의 집에는 인도 최고의 요기인 라마 크리슈나의 제자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때 온 제자들 가운데에는 라마 크리슈나를 직접 본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이 수행자들도 유지의 높은 영성을 만족시져주지는 못했다.
그가 보기에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한 평생 명상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행동은 다르게 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떤 것이다.
유지는 후에 인도의 전통적인 명상 수행법이 무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싹이 이렇게 어릴 떄부터 있었다.
유지는 외할아버지나 이런 높은 계급의 수행자들에 대해서는 아주 반항적이고 뻣뻣하게 대했다. 하지만 주변의 소소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자비로웠다. 학교 친구나 하인들에게 매우 친절했다.
할아버지의 돈을 몰래 훔쳐 친구들의 학비도 내주고 교과서나 신발도 사줬다.
예수나 붓다도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살았을 텐데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다.
나이가 조금 들자 유지는 당시 큰 명성을 누리고 있던 구루 '사라스와티 시바난다'를 방문해 힌두교의 정통 수행법들을 연마한다.
유지는 14세부터 21세까지 7년간 간헐적으로 시바난다를 찾아가 요가와 명상 등 온갖 종류의 수행을 했다.(동굴에서 10~17시간 동안 명상,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며칠씩 수행.)
유지의 말에 따르면 해탈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반드시 얻어 보겠다고 수행에 전념했다고 한다.
유지는 그때 책에서 보았던 환상의 경지들을 모두 다 경험했다고 한다.
( 삼매 가운데 가장 높은 경지로 일컬어지는 '무상삼매' 포함 )
이런 체험은 생각으로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유지
그는 이런 영적 경험들을 한 후에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그 체험들이 관념의 세계에서만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생각이 바뀌면 이 체험들도 사라진다.
즉 이 체험들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체험 뒤에 바뀐 것이 없다.
따라서 이런 명상기법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유지
(그의 체험은 '시간'이 존재하는 이미 '과거'의 체험이 되었고 현실로 돌아오면 과거의 체험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성(SEX)
시바난다와 수행을 하면서 유지에게 가장 큰 문제로 다가왔던 것은 성에 관한 것이었다.
위와 같은 종교적 체험을 하고 나면 성욕 같은 '지저분한' 탐욕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이상했다.
그의 성욕은 이후 49세때 대폭발이 일어난 다음에나 극복될 수 있었다.
대폭발 이후에 한번은 어떤 인도 청년이 유지에게
당신도 섹스를 할 수 있나요?
하고 물었다.(유지가 오쇼나 지두 같은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그 어떤 질문도 유지에게 스스럼 없이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보통 이런 질문은 구루나 스승에게는 불경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지는 대각 체험후 성에 대한 정체성(gender)이 사라졌고 성욕이 사라졌다.
시바난다를 떠나다
시바난다는 제자들에게 매우 엄했다.
금욕은 물론이고 채식만 요구했으며 매운 음식도 못 먹게 했다.
그러다 시바난다는 문을 잠가 놓고 사람들 몰래 매운 피클을 먹고 있는 모습을 유지에게 들키고 만다.
이상하게 유지는 이런 종교적인 인간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찾아냈다.
유지는 이런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 일후에 유지는 다시는 시바난다의 도장을 찾지 않았다.
유지의 입장에서는 자칭 깨달았다는 이 스승들은 사실 어떤 욕망도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극복하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니 거짓도 그런 거짓이 없었다.
유지는 솔직했다.
시바난다의 슬하에서 명상과 수행으로 일련의 체험을 해보았지만 자신은 여전히 화가 가득했고 그 화를 없앨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또 성욕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나는 21세에 붓다나 예수, 라마크리슈나 같은 모든 스승들이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설명하는 그런 성스러운 상태가 어디 있는가? ... 많은 사람들이 화내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언제나 화가 나있다.
내 내면은 잔인한 행위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내게 무욕의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를 외려 망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거짓된 삶을 살기 싫다.
나는 탐욕이 많은데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이 탐욕이야말로 리얼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부자연적인 것이다.
유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지는 지금까지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다 틀렸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했으니 그 가르침이 아무리 성스러워도 다 틀렸다는 것이다.
이런 끝에 유지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은 이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한 인도 최고의 구루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어처구니 없는 성 스캔들을 일으킨 사례가 많이 나온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마하트마 간디, 성경에서는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한 다윗왕 등등)
라마나 마하르쉬와의 만남
1939년, 유지 나이 21살
인도의 종교 사상은 크게 유신론 계통과 비유신론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계통에서는 각각 시대를 달리하며 위대한 영각자들이 돌출하는데, 19세기와 20세기에도 예외 없이 그런 인물들이 나타났다.
유신론 전통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앞에서 간략히 등장한 라마크리슈나이다. 그는 칼리 여신을 숭배한 박타(헌신의 요가 수행자)였다.
비유신론을 대표하는 성자는 라마나 마하르쉬다.
(오쇼 라즈니쉬는 라마나 마하르쉬를 두고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성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하다.
라마크리슈나처럼 신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자기에게 던져 진아를 찾는 것이다.(레스터 레븐슨도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뉴욕의 아파트안에 홀로 틀어박혀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3개월간 끝없이 깊게 파고들어 깨달음을 얻고 모든 병이 완치되었다.)
사람들은 마하르쉬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져 불안이나 의문이 사라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책으로 읽었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은 분들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그의 에너지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의 마음 상태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항간에는 부처님 같은 분을 실제로 알현한다면 그 즉시 깨달을 수 있다고도 한다.
그의 에너지 장이 워낙 강력하니 우리의 진동이 붓다의 진동과 맞추어지면 그의 깨달음이 그대로 전수될 수도 있으니 그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인이 유지에게 마하르쉬를 만나러 가자고 했을 때
그는 그다지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만나봐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뭐 대단할게 있겠느냐고 생각한 것 같다.
이때 마하르쉬에 관련된 책을 읽어보고 유지는 크게 손해 볼 것은 없겠다고 생각했던지 마하르쉬를 만나러 간다.
마하르쉬의 아쉬람에 도착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하르쉬를 바라보며 약 두 시간 정도 아무 말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동안 마하르쉬는 항상 그랬듯, 말 없이 만화(마하르쉬는 만화를 즐겨보았다)나 보고 야채를 다듬고 있었다.
유지는 처음에는 '이런 사람이 어찌 나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갖가지 의문이 일어났는데 드디어 마하르쉬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침묵을 깨고
해탈 혹은 자유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던졌다.
곧 마하리쉬로부터 "있다" 라는 답이 왔다.
이에 유지는
"그것이 있다면 선생님은 그것을 나에게 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마하리쉬는 즉답을 주지 않았다.
유지는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제서야 마하르쉬는
"줄 수 있다. 그런데 그대가 그것을 받을 수 있을까?"
라고 대답했다.
잘 알려진 유지와 마하르쉬 간의 대화이다.
사실 이 대화는 비유를 들자면 어떤 한국 대학생이 시시대 최고의 선불교승 이었던 성철 스님을 만나 그 깨달음을 나에게 줄 수 있느냐고 물은 것과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성철과 같은 고승을 만나면 그저 세 번 절하고 고승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기다리는,
매우 수동적인 자세만을 취할 수 있다.
이런 판국에 젊은 이가 늙은 선사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유지는 원래 직설적이고 저돌적인 사람이라 그냥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 들이댄 것이다.
마하르쉬는 그런 유지에게 '과연 당신이 내 경지를 따라올 수 있겠는가?'하고 가볍게 질책한 것이다.
그런 답변에 유지는 돌아가며 '만약 그런 해탈과 자유가 존재한다면, 또한 그것을 줄 수 있다면 나야말로 그것을 받을만한 사람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이 청년기의 유지는 대단한 영적 집안에서 자라고, 유지가 태어날 때 이미 대단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는 꿈도 받았으며, 어린 나이가 온갖 수행들을 하고 그 결과 경전들에 있는 영적 현상은 다 경험했는데 나야 말로 그걸 받을 만한 사람이지.. 내가 그걸 못 받는다고?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다. '마! 내가 이런 사람이다!'하는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이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유지가 마하르쉬를 다시 만난 적은 없다.
마하르쉬와의 대화 이후에도 유지는 도대체 이 궁극의 상태라는 게 있는 건지, 있다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나타냈고 그 의문은 49세때 대폭발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유지가 수많은 구루들을 사정없이 비판했지만 마하르쉬와 라마크리슈나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학, 결혼, 네명의 아이
유지는 인도의 마드라스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3년 만에 대학 다니기를 포기한다.
그는 심리학을 공부하다 실망한 일밖에는 없다고 서술했다.
프로이트나 융, 아들러 등의 심리학을 공부해 보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마음'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교수에게 질문했다.
교수는 유지에게 그런 불편하고 위험한 질문하지 말고 시험 잘 보고 학위나 받으라고 권했다.
그것으로 유지에게 대학은 끝이었다.
그는 더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유지는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하는 등, 다른 구루들보다는 우리처럼 평범하게 살았다.(지두는 스타처럼 살았다.)
하지만 유지는 결혼 직후에 결혼한 것을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로 여겼다...
그러나 자식도 아들 둘, 딸 둘 낳고 17년간이나 결혼 생활을 유지했던 것을 보면 이면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쨋거나 나중에는 결혼 생활을 정리한다.
또 한명의 크리슈나무르티, 지두와의 만남
결혼 후 유지는 1946년부터 신지학회에서 일했다.
회장의 비서가 되어 7년동안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신지학회에 대해 열심히 알리고 다녔다.
그러다 1953년 회장이 사망하자 그도 학회를 떠났다.
신지학회는 유지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이 학회 때문에 지두를 만나게 된다.
유지는 지두에 관해 한번도 칭찬을 안했을 뿐더러 폭언을 마구 해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인도 전통을 따른 것이라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 있다.
인도 전통에서는 후학들은 전대의 사람들을 마음 놓고 비난해도 된다.
이 관례가 잘 지켜진다면 많은 진보가 있을 수 있다.
성역없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만이 유일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지두와 유지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전의 앞 뒷면 처럼 본체는 하나이지만 양면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두와 유지는 자신들의 주장을 모두 부정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지두는 마지막에 긍정으로 끝내는데에 비해 유지는 결코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부정으로 가는 것이 다르다.
사람들은 지두의 가르침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두는
"완전 부정은 긍정의 핵심이다. 생각이 심리적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될 때, 거기에는 사랑만이 남는다. 이 사랑이 자비이자 지성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가르침은 미자막에 사랑과 자비 같은 부드럽고 희망에 찬 단어로 끝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다.
이에 반해 유지는 끝까지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유지가 보기엔 사랑이란 없다.
사랑이나 자비 같은 개념은 매우 숭고해 보이지만 실은 이원론에 갇혀 있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에는 그 반대 개념인 증오나 약탈과 같은 개념이 이미 공존하고 있다.
조금 더 과장되게 말하면 사랑과 증오는 같다.
진정한 힐링? 끝까지 후벼파서 완전히 좌절해야
사람들은 힘들 때 희망을 찾으려 너도나도 위로와 힐링을 갈구한다.
그럴때 매끄러운 언어로 위로해주면 사람들은 기뻐한다.
그것은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임시 '땜빵'질에 불과하다.
문제를 진짜로 해결하려면 더 후벼파서 문제의 끝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 본질적인 문제를 직면하고 완전히 좌절했을 때 재수가 좋으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게 진정한 힐링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유지.. 너 T발 C야?)
지두와의 격렬한 토론, 과감한 결별
유지가 지두를 본격적으로 만나는 것은 지두가 신지학회를 떠난 뒤 8년 만에 인도로 돌아와 강연할 때(1947년)였다.
지두는 인도의 지식인 사회에 매우 큰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진정한 의미의 베단타 철학자, 더 나아가서 깨달은 이로 각인되었다.
지두는 1929년 자신을 미륵불로 추앙하던 모임을 해산하고 신지학회를 떠났다.
그러면서 '진리는 갈 수 있는 길이 없는 땅'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어떤 것으로도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접근법은 당시에 매우 충격적이고 신선했다.
스승이라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제시하는 방법이 최고라고 주장하기 마련인데 지두는 그런 것들을 모두 부정했으니 말이다.
한국의 상황에 빗대어 보면
불교 내부를 보면 자신의 종파가 진리를 독점했다고 주장하는 종파를 적잖게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불교에서는 참선만이 진리를 깨닫는 유일한 방법이고 다른 수행법은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경 공부로는 절대 진리를 깨칠 수 없고 요가 같은 체조법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남방 불교(미얀마,티벳)에서는 위빠사나 명상법만이 최상승의 수행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럴 때 어떤 뛰어난 선승이 나와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어떤 방법도 소용없다고 하며 자신의 제자들을 모두 환속, 귀가 조치하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자기도 승복을 벗고 일반인으로 돌아간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두는 이런 일을 한 것이다.
당시 최고의 스승이 그런 일을 했으니 그 파격이란 대단했다.
설탕을 본 것 같기는 한데 맛 본 것 같지는 않아
유지가 지두를 경험하고 남긴 평
지두와 유지의 본격적인 토론은 1953년부터 벌어졌다.
지두(당시 58세)는 인도의 여러 도시에서 강연회를 가졌는데 이때부터 2년간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강연이 끝나면 지두는 엄선된 몇 사람을 불러 뒤풀이 토론을 했는데,
유지(당시 35세)와 논쟁이 붙으면 다른 사람은 끼어 들지 못할 정도로 둘은 토론에 격렬했다.
유지가 늘 싸움닭처럼 마구 달려들었다면
지두는 언제나 냉정함을 잃지 않고 점잖은 태도를 취했다.
중간에 유지로부터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나오면 지두는 말을 돌려 화제를 바꿨다.
한번은 지두가 인간이 지닌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한 모양이다.
UG : 나는 잠재의식이니 무의식이니 하는 마음을 발견할 수 없는데 선생님은 왜 그런 마음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J(지두) : 우리에게는 이런 용어가 의미가 없지만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런 용어를 썼습니다
지두는 유지가 보기에 추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한 마디로 두루뭉술 했다.
듣기는 좋은데 남는 게 없다.
신지학회의 강령을 보면 믿을 수 없는 주장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히말라야 산 속에 세간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대도사(마스터)들이 살고 있다는 주장이다.(흔히 말하는 히말라야 초인)
그 도사들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최고의 영혼을 교육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는 임무를 가졌다고 한다.
이런 신비적인 존재나 이야기를 그냥 두고 볼 유지가 아니다.
유지는 지두에게 '직공'했다.
UG : 단도직입적으로 히말라야에는 그 같은 대도사들이 있나요? 없나요?
J :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그것은 권위적인 것이 된다.
이같은 지두의 모호한 태도에 유지는 매우 답답해 했다.
UG :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그 추상적인 개념 뒤에는 다른 무엇이 있기나 한 겁니까?
J : 당신 혼자서는 그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UG : 내가 그것을 알 방법이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소통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나는 그동안 당신과 토론하면서 수년을 헛되게 보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내용의 영어 원문을 보면 유지가 지두를 'chappie'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놈' 혹은 '녀석'이라는 의미의 폄칭이다.
자신보다 23세 연상인 대 스승을 녀석이라고 한 것이다.
유지는 옛 속담을 빌려 지두를 두고
'당신은 설탕을 본 것 같기는 한데 맛본 것 같지는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로만 알지 몸으로 체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훗날 유지의 회고에 따르면,
지두가 자신과 그렇게 많은 토론을 한 것은 유지를 거울이나 공명판처럼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지두는 자신의 깨달음과 체험을 점검하고 싶어 유지를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지두에게는 유지만한 상대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존재인지라 그 내면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지두는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서 유지같은 깨달은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지두는 아마도 본인이 겪은 쿤달리니 폭발이 유지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진동수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진동수가 비슷하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는 지두가 죽을 때 유지에게 엄청난 에너지의 진동이 일어난 사건을 들 수 있다.
그때 지두와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었는데도 유지는 자신의 몸에 있는 에너지가 마구 출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에너지가 공명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지두가 유지를 만나 토론할 떄 어떤 심경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영성에서 유행하는 '쌍둥이 영혼(트윈플레임)'의 측면에서, 유지와 지두는 쌍둥이 영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전생에서도 각자가 굉장히 높은 경지였지만 이번 생에서 서로를 만남으로서 성장하고 완성된 것일수도..)
소아마비 아들을 기로 고친다고?
지두는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고쳤다.
기 치료사들처럼 사람의 아픈 부위에 손을 올려놓고 몇 분간 치료하는 일을 했다.
그럼으로써 지두는 그 사람의 막힌 기를 뚫어준 모양이다.
지두는 유지의 아들이 소아마비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아들을 고쳐보겠다고 제안했다.
유지는 "아마 선생님도 못 고칠 것입니다. 제 아들의 발 세포는 완전히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고친다면 저는 당신을 믿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
아픈 아들의 일이니 응하기는 했지만 유지는 기적 따위는 믿지 않았다.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그 물이 깊지 않아서였고 떡과 생선을 뻥튀기한 것(오병이어)은 그저 그것들을 잘게 나누어 준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를 들은 지두는 파안대소했다.
아무튼 지두의 치료가 시작됐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러자 유지는 아들의 병을 고치려 미국에 가려고 했다.
지두는 유지에게 1년만 더 치료해보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두 번째 시도를 했지만 그 역시 차도가 없었다.
천하의 지두도 못 고친 것이다.
이번에도 유지가 맞았다.
일단 세포가 죽으면 그것은 예수 할아버지가 와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도 죽고나서 3일 후에 부활했다고 전해지는 데, 일부 사람들은 3일이 넘어갔다면 부패가 진행되어 예수의 육식도 살아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사람이 죽고나서 육신이 몇일 내로 부활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인도를 떠나다
유지는 1955년 미국행을 결심한다.
아들의 치료비는 수만 불이라는 엄청난 돈이 들었고 생활비와 치료비를 벌기 위해 유지는 유료 강연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미국 사회에 꽤 알려져 '주목할 만한 인도 사상가'라는 평을 받았다.
그렇게 살다가 그는 강연에 흥미를 잃었다.
유지는 아내에게 수중에 남은 수백 달러의 돈을 주면서 더이상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유지의 아내는 얼마나 황망했겠는가? 도대체 아들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을 어떻게 하라고 남편이 이렇게 나자빠지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아주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백수 선언을 한 직후 유지는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딕슨이라는 신지학회 시카고 지회 회원을 길에서 만났다.
그는 유지를 보자 인도에서 왔느냐고 물으면서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한다.
그가 말하길 히말라야에 사는 큰 스승(쿠투미 대사)이 자신의 꿈에 나와 '너는 곧 곤경에 빠진 인도 사람을 만날 터이니 그를 힘껏 도와라'고 했다는 것이다.
쿠트후미 대사(마스터)-출처:https://m.cafe.daum.net/seongsoogo17/Ajg5/55?
이 쿠투미 대사라는 존재는, 지두를 영적으로 지도했던 반신 반인의 존재인데 앞에서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 도대체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어떤 때에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있는 존재로 나타나다가 또 어떤 때는 영적인 존재로만 나온다.
그런데 유지가 인도의 신지학회에 있을 때 지두가 이 쿠투미로부터 지도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유지가 지두에게 '그런 대사가 정말로 존재하느냐'라고 다그치듯 물은 것이다.
딕슨은 꿈에서 받은 쿠투미의 계시대로 자신이 받는 연금에서 매달 200달러를 유지에게 주기로 약속하고 유지의 처에게는 직장도 잡아주었다.
딕슨은 유지가 미국을 떠나는 1959년까지 돈을 대주었고 유지가 미국을 떠난뒤, 딕슨은 곧 죽었다.
당시 200달러면 지금으로 치면 꽤 큰 돈일 것이다.
유지는 딕슨 덕에 미국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쿠투미는 전설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딕슨이 꿈에서 확실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유랑하는 유지
유지는 가족과 결별하는 데 이 때의 과정이 붓다가 가정을 등지고 출가를 단행했을 때와 비슷했다.
유지는 인도에 머무를 당시 네루 수상도 만나고 부통령을 지낸 저명한 철학가인 라다크리슈난도 만난다.
인도에서는 그의 명성이 자자했다.
유지는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고 영국 런던에 도착하는 데, 여기서부터 방랑자 삶이 시작된다.
유지는 런던에서 호텔방에 머무르다 너무 심심해서 국립도서관으로 갔다.
거기서 마르크스가 앉았던 책상의 옆 책상에 앉아 '동의어 사전'을 몇시간 동안 읽었다.(뭔가를 해서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읽은 것인데,책은 필연적으로 '생각'을 유발한다. 그 중 동의어 사전은 생각을 유발하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시내를 쏘다녔는데 나무에 걸려 있는 창녀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읽고 다녔다.
그러다 유지는 수중에 있던 돈이 바닥나고 공원에 있었는데 경찰이 와서 유지를 노숙자 취급하고 공원을 떠나라고 윽박질렀다...
이때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의 머리 속에
'라마크리슈나 선교본부로 가라'는 말이 들려온다.
그렇게 그는 우여곡절 끝에 라마크리슈나 선교본부에서 오전에는 일을 해주고 오후에는 시내에 가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삶을 반복한다.
이때 수련실에서 명상하는 사람들을 보고 유지가 평한 말이 재미있다.
저 사람들은 왜 명상하는가?
어차피 아무 것도 얻지 못할 텐데,,
그의 설명을 보면 명상을 해서 지금과 다른 상태가 되려는 것은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현재를 부정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어떤 상태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더 높은 상태(현재와 다른 상태)를 원하기 때문에 현재에 있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부유할 뿐 궁극의 경지로 가지 못한다.
그래서 유지는 항상 무엇이 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깨달은 이들은 지금이 항상 최고의 순간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그는 스위스로 갔다가 거기서 '발렌타인'이라는 여인을 만나고 그녀의 집에 머물게 된다.
다시 만난 지두
유지가 스위스 자아넨에 있을 때 지두도 이곳에 수차례 와서 강연을 했다.
당시 지두는 유지가 자아넨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길에서 두 번 정도 마주쳤는데, 그들은 간단하게 인사만하고 지나친다.
(ㄴ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1967년 스위스 자아넨에서의 강연 중 하나. 오디오만 있다.)
1967년(유지의 대폭발이 있던 해) 4월에도 지두가 자아넨에 와서 강연을 했는데, 유지는 이 강연회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인들이 하도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입장료가 2프랑(이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굉장한 거금)이었다.
입장료의 금액을 듣고 유지는 '그까짓 지두의 이야기를 듣는데 2프랑이나 되는 큰돈을 쓸 수 없다!'고 우겨서 지인들을 데리고 극장으로 갔다.
극장에서 유지는 신이한 체험을 한다.
무용수가 춤을 추고 있었는데 정작 자신이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외계와 자신 사이에 분리감이 없었던 것이다.
자타불이, 즉 외계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의 상태였다.
( 이후에도 그는 이런 체험들을 하는데 그 내용은 이 전 글에서 다루었다.)
이때 유지는 매우 흥미로운 꿈을 꾸는데, 꿈에서 그는 코브라에 물려 죽었다.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화장하려고 장작 위에 올려 놓았는데 불을 막 붙이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꿈의 계시에 맞춰 유지는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해 8월 지두가 또 자아넨에 왔다.
유지는 이때 지두의 강연을 듣는데 지두가 설명하고 있는 것이 모두 유지의 현재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령 '침묵 속에는 더 이상 마음이 남아 있지 않고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라고 지두가 말하자 유지는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마음의 작용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생각하는 '나'가 사라지기 시작
그것으로 끝났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그때 유지는 '나는 내가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다시말해 그 사실을 자신이 어떻게 인지했느냐는 것이다.
곧 답으로 '내가 이전에 알았거나 체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알게 되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이 체험 역시 지식에 불과한 것이고 여전히 이원론 안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분리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유지는 갑자기 의문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의문이 사라지고 생각이 사라졌다.
생각하는 '나'가 사라졌다.
이 일로 인해 유지는 철저하게 현재에만 살게 됐다.
이러한 변화가 몸에 전달되어 곧 쿤달리니 에너지의 대폭발이 일어나게 된다.
모든 세포, 신경, 내분비선에서 엄청난 폭발과 변화가 발생한다.
대폭발 이후
내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혹은 어떻게 행동하든지 간에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 들어 온 것이지 자기 것은 없다.
자기만의 어떤 것이 있겠거니 하고 찾아보면 그것들이 모두 외부의 것을 모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자아 개념은 외부에서 유입된 개념들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는데 유지는 이것을 통칭해 '문화'라고 불렀다.
1) 일단 말을 뱉으면 그것은 생각의 영역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과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 여기서 한가지 더 보태자면, 어떤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그 순간 '언어'로 인한 왜곡이 발생한다 )
2) 게다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뇌로 들어가면 다시금 그 사람의 이해 체계에서 왜곡된다.
이렇게 우리가 하는 대화는 두 번씩 왜곡된다.
유지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이다.
자신이 하는 말을 개가 짖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너무 나간 것 같다.
우리는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 아무 감흥이 없다.
하지만 유지의 말을 들어보면 그 처절한 부정 속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우리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다.
일례로 평생 동안 스승을 찾아다니며 드높은 영성을 추구하던 '로버트 카'라는 사람은 유지를 만나 영성 추구를 깨끗이 덮고 식당을 열었다.
유지의 말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고, 유지가 한 말이기 때문에 큰 변화를 겪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사람이 진짜 개소리를 들었다면 그러한 변화가 생겼겠는가?
우리는 옳고 그름 또는 선과 악을 가르는 이분법에 사로 잡히지 않아야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이원론에 사로 잡혀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잘못을 저지를 위험이 있습니다.
유지
생각으로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
생각의 생멸은 몸(아즈나 차크라)이 해주는 것. 다른 어떤 시도도 악순환일 뿐 성공할 수 없어
참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유지의 주장대로라면 이른바 대자유, 해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지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올 필요가 없다고 역설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로운 도움을 주기는커녕 불행이 추가되는 것을 도울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마구 소리치면서
나한테 올 것 없고
돌아가서
Eating이나 Fucking이나 하라
고 했다..
대스승에게 고상한 말씀을 바라는 거인 아니지만 그렇다고
'처먹기(eating)'나 하고 '박기(fucking)'나 하라는 말은 지나친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이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주저앉을 것인가?
대안을 찾기 전에 우리는 더 절망해야 한다.
진짜 희망은 절망이 다한 끝에 오는 것이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섣부른 기대에서는 오지 않는다.
(농구공이 추락하고 있는 중에는 튀어 오르고 있다고 생각해도 자신의 생각일 뿐, 바닥을 찍어야 그때서야 튀어오른다.)
정말로 절망하려면 공부를 더 해야한다.
우리의 상태가 어떻게 절망적인지를 알려면 더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주장이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생각으로 그 절망적인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전에 누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혹은 어느 경전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까 하는 식으로 자기 밖에서 그 준거의 근거를 찾으면 안된다.
그런 것들은 모두 남의 말이다.
남의 말은 참고만 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그전까지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지는 아무 희망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쉽게도 사람들로부터 보편적인 주목이나 환영을 받지 못한다.
특히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
이제 막 영성이라는 것을 찾아보려고 하는데 모든 교리나 신념을 파괴해버리니 말이다.
(자신이 나름대로 꽤 영적으로 진화한 인간으로 자부하며 살고 있었는데 유지를 만나 파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간 사람도 있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U.G. Krishnamurti )와 심리학자 제프리 미쉬러브(Jeffrey Mishlove )의 대담)- 한글자막 설정에서 키면 나옵니다
생각에서 해방되기
유지에 따르면 깨달음의 실체는 아즈나 차크라가 가동되는 것이고 생각이 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 공부나 수행으로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우리의 몸이 변화하지 않는 한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최신 뇌과학이 밝혀낸 것은, 생각이 감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감정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박수를 낮춰주는 호흡훈련(명상)이나 운동, 숙면, 양질의 식사가 중요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원론적 사고는 원래 허상, 혹은 그림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실체는 이원성의 세계가 아닌데, 우리의 뇌는 현상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이원론으로 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생존에 유리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이론을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냥 불이론이라고 하면 안되고 불이론적 이원론 이라고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원론이 포함되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줄 수있기 때문이다.
불이론적 이원론의 상태를 인지해야 우리는 불이론과 이원론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살 수 있다.
깨달음은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주와 하나되려면 나 혹은 자아 개념이 없어야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자아 개념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보는(seeing) 행위를 놓고 이렇게 말한다.
'보는 나도 없고 보이는 대상도 없고 단지 보는 행위만 있어야 한다.'
주객이 다 사라지고 오직 보는 것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 봄은 진정한 봄이 된다.
[예를 들어, 직장상사에게 야단을 맞아 화가 나 있다고 치자 . 그러면 거기 '직장상사'와 '나'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을 포함해서 전체로 보면 그냥 하나의 상황이 된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바라보는 것이다.-세도나 마음혁명의 한 각주 해설인데 이것도 전체로서의 '봄'에 대해 완벽한 표현은 아니라 조금 아쉽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바라볼 때도 그것을 바라보는 '나'로 인해 이원성에 갇히기 쉽다.
1) 내가 저 드라마의 배역이면서
2) 드라마의 다른 배역들과 소품들, 그리고 드라마의 전체 상황 그 자체가 동시에 나이면서
3)나는 그 바깥에서 드라마를 바라보고 있는 주시자인 것이다.
이게 머리로 굴려서 인식될 때는 여전히 '생각'의 영역이지만 직관적으로 되면 불이론적 이원론 상태이다. 나는 소우주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 전체 우주가 그대로 담겨 있다. 작은 우주의 일부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우주가 담겨있다.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있다.]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