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과 그 조교였던 미셸 푸코의 '내면화'와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고등사범학교의 교수로 약 30년을 재직하면서, 고전 철학을 강의하고 교수가 될 학생들의 임용 시험을 도와주고, 시험지를 첨삭해주는 일을 맡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고등사범학교에 다니던 거의 모든 프랑스 철학자들이 알튀세르 밑에서 철학을 배웠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름만 나열해도 나중에 알튀세르의 조교가 되는 미셸 푸코[4], 자크 데리다를 위시해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샹탈 무페, 자크 비데,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등 엄청난 수준이고, 같은 대학에 재직했던 모리스 메를로퐁티, 피에르 부르디외와도 활발히 교류했다. 그가 가르친 것은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장 자크 루소, 몽테스키외를 위시로 한 서양 고전 철학 전반이었고 이 방면에서도 알튀세르는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낸다.[5] 푸코가 회상하길 알튀세르는 메를로퐁티에 비해 수업은 대충 했는데, 시험지 첨삭과 학생별 개별 상담을 잘해줘서 학생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1965년에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한 공동 저작[6]인 『자본을 읽자』를 출간해서 엄청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해 좌파 지식인들에게 "어떤 현대인도 야기시키지 못한 열정, 열광, 모방의 대상"[7]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세계 혁명의 비밀스러운 교황"[8]처럼 보였다. 1969년에 『레닌과 철학』을 썼고 197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 포기 등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 전환을 비판했으나 죽을 때까지 당적은 유지했다.
1968년 68혁명을 기점으로 알튀세르는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미셸 푸코 등 자신의 제자들과 사상적 견해 차이로 결별을 겪게 되며[9], 이는 알튀세르에게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젊었을 때부터 정신병적 우울증 증세로 치료를 받고 있었던 알튀세르는 상기한 이유와, 68혁명의 실패, 소속 정당인 공산당에서의 소외[10] 등으로 70년대 후반에 들어 정신착란이 심해졌다. 그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 담당의사는 안이하게 알튀세르의 외출을 종종 허락했고, 그러던 1980년 11월 16일, 허가를 받고 병원에서 나온 알튀세르가 정신착란 속에서 자신의 부인을 목 졸라 죽이는 비극이 벌어졌다. 다음 해 금치산자 판정을 받고 법적 책임을 면책받았으나, 이 사건은 알튀세르의 명성을 심각하게 손상시켰고 알튀세르는 사회적 발언권을 박탈당하며 철학계에서 퇴출된다.[11] 이후에도 보호관찰 상태에서 파리 북부의 한 아파트에 머물면서 비공개적으로 저술활동을 했지만 학계에서는 거의 잊혀진 채로 말년을 보내다가, 1987년 식도 폐쇄로 응급 수술을 받은 뒤로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고 1990년 10월 22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당시 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비롯한 비공개 원고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까지 꾸준하게 발굴되어 뒤늦게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를 위시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계에 파장을 안겼다.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를 접합시킨 프랑스 철학자다.
알튀세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학교, 종교, 미디어 등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SA)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여 대중들에게 사고의 준거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대중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데올로기를 실천해 나가게 된다.
즉, 이데올로기 없이 대중은 현실을 사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특히 강조하는 개념이 바로 '호명(Interpellation)'이다.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호명'의 절차를 거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주체로 칭해지게 된다.
즉, 호명은 "우리가 일상에서 언어와 이미지로 전달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스스로 구축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고 속의 이미지는 시청자로서의 우리를 호명하게 되며, 이러한 호명 과정을 통해서 시청자는 광고 이미지가 의도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광고에서 "당신을 향한 제품이다."라고 말할 때, 시청자가 당신을 자신이라고 느끼는 순간 그 시청자는 광고가 의도하는 주체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알튀세르에 의하면 "대중문화 텍스트가 수용자 대중의 주체를 구성해냄으로써 자본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은 김춘수의 시 '꽃'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어야 그에게 "꽃" 될 수 있듯이, 이데올로기가 나를 주체로 호명해주어야 내가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김춘수의 '꽃'에서는 나도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알튀세르의 '호명'에서는 내가 이데올로기를 부를 수 없다는 점이다.
알튀세르가 주장하는 구조주의에서 인간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받는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단지 이데올로기적 기구가 찍어내는 붕어빵같은 존재로 귀결되는 것이다.
'호명' 이란 개념에서 인간은 사회 변혁을 일으킬 수 없도 없으며, 심지어 저항할 수도 없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받고 사고해야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조주의가 반인간주의적이라고 비판받곤 한다. 인간의 능동적인 측면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강의록’ 번역 진태원 교수 “인간은 전적으로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는 佛 18세기 급진사상가 ‘엘베시우스’에 주목 “인간,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생산” ‘호명 이론’ 뿌리 관련 색다른 주장 첫 제기

“이봐, 거기”
경찰관이 거리의 행인을 부른다. 행인은 그 소리에 뒤돌아서서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잘 알려진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이론’이다. 개인을 부르는 권위적 목소리의 효과로서 주체는 종속되고, 주체는 이 종속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호명 이론’은 현대철학, 특히 정신분석학에서 주체나 이데올로기를 거론할 때 자주 인용된다.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 번역된 ‘권력의 정신적 삶’에서 “호명 이론에서 부름은 법과 자신을 나란히 놓으려는 요구, 법을 마주하기 위한 돌아섬, 죄의식을 통한 자기귀속의 언어( “나 여기 있어요”)로의 진입으로 비유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은 프로이트, 라캉, 스피노자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18세기 대표적인 공리주의자 엘베시우스에게도 가 닿는다는 사실이 이번에 출간된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후마니타스)에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알튀세르의 강의록을 엮은 이 책은 알튀세르가 생전에 저작에서 언급한 적이 없는 호명이론과 엘베시우스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 만하다.
강의록은 알튀세르의 타이핑 원고와 육필원고, 그리고 수강생 강의 노트에 의존했다.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루소를 비롯, 몽테스키외, 콩도르세, 엘베시우스 같은 18세기 프랑스 정치철학자들, 그리고 헤겔과 마르크스 등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주요 사상가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이 강의록에서 화제의 인물은 단연 18세기 공리주의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 엘베시우스다. 엘베시우스의 책 ‘정신의 대하여’는 파리 고등법원의 판결에 의해 1759년 2월10일 재판소 대계단 아래에서 불태워졌다. 그의 사유가 당시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파를 던졌는지 가늠케 한다.

알튀세르는 이 책에서 엘베시우스의 ‘정신에 대하여’를 언급하면서 엘베시우스의 도덕관을 꼼꼼이 들여다본다. 엘베시우스는 “인간들의 이기심에 화를 내는 것은, 봄의 소나기, 여름의 무더위, 가을의 비, 겨울의 얼음에 불평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며, 인간을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장한다. 엘베시우스는 또 “이익은 피조물들의 눈앞에서 모든 대상을 변화시키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라고 설파한다. “들판에서 풀을 뜯는 양은 풀잎 사이에서 살아가는 잘 보이지 않는 벌레들에게는 공포와 경악의 대상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오히려 풀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자나 호랑이는 양들에게 복수를 하는 이로운 동물이다. ‘상이한 이익의 관점’이 어떻게 대상을 변모시키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엘베시우스는 인간을 전적으로 우연적인 존재로, 환경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는 존재로 이해한다. 또 누군가가 바보가 되거나 천재가 되는 일, 또는 미치광이가 되는 일은 모두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특히 인간은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 및 사회 전체의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교육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엘베시우스에게 교육은 인간 존재를 생산하고 변형하는 활동 일반으로서 확장된 의미를 얻는다.
알튀세르가 볼 때 엘베시우스의 이런 사상이 인간 생산의 역사로서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고 본다. 인간의 발전이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면,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 자신의 역사에 의해 전체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되며 변형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을 번역한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엘베시우스 사상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어떤 특성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진태원은 책의 ‘옮긴이 후기’에서,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선험적인(경험과 독립적이며서 필연적인)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되고 변형되는 존재라는 점이다”라 말한다. 알튀세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호명’ 개념을 고안해 냈다는 것이다. 호명 이론은 인간은 그 계급적 정체성만이 아니라 그 개인적 실존에까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고 재생산되고 변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바깥에서의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엘베시우스의 반(反)자연주의적 인간학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가능한 또 다른 원천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엘베시우스에게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다는 진태원의 문제제기에 학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김능옥 기자/
"너네 알아둬
여기에 정상은 없어
하나도 하나도"
Brynn X Jvcki Wai, <SOMO>
현재의 정당성은 역사에 기초한다. 역사가 바뀌면 현재의 정당성은 사라진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가 바뀌면 나도 바뀐다. 우리들의 계보가 바뀌면 우리들의 존재도 바뀐다.
우리가 믿었던 근대적 합리성, 근대 역사, 근대적 도덕이 진실이 아니라면?
고전주의 시기(17-18C) 가 되면서 광기가 정상적인 삶에서 배제됨.
"대감금의 시대가 왔다."
1656년(즉, 17C 말)에 general hospital(종합병원)이 생김. 이전에 중세시대에는 나병수용소가 있었음.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분리, 분류, 배제하기 시작함.
(= 노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골라냄 = 부르주아의 이상에 맞지 않는 자 = 근면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사람)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정상인'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합리적 이성의 소유자'인 것이 아니다.
합리성에 대한 개념은 광기의 배제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의 최고 죄목은 '탐욕'이고 가난은 신성함, 청빈함으로 좋은 덕목이었으나
계몽주의 시기의 최고 죄목은 '게으름'
근세 이후 준법의식, 근면성같은 개념이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합리성'과 같은 개념도 강조되기 시작.
19C(근대) 들어오면 광인들은 치료의 대상(의학담론의 대상 => '지식은 곧 권력'(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구분하려 한다)
= 환자(발달이 덜 된 사람 취급)
자신의 비정상성을 깨닫고 정상적 부르주아적 합리성을 갖추라는 강요를 받음
=> 죄의식과 열등감의 내면화
르네상스까지만 해도 바보, 광대, 미치광이들은 때로는 진실을 말하고 지혜와 영감을 가져다주면서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왜 광인들을 격리했을까?
누군가는 가난해야 한다!
그리고 가난은 나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여야 한다.
도구적 합리성.
누군가는 비정상이어야 한다!(abnormal. 최대의 인풋으로 최소의 아웃풋을 뽑아내는 사람들)
그리고 비정상은 나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비정상은 격리되어야 한다.
도구적 합리성을 추구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간주.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과 '권력의 계보학'이라는 두 가지 방법론으로 사상을 전개해나갔다.
* 계보학 : 어떠한 관념이 언제부터 그러한 방식으로 쓰이고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찾는 방법론(니체의 계보학으로부터 영향 받음)
☞ 니체의 계보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니체는 현재의 도덕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한다.]
도덕의 계보 : 도덕 개념 및 도덕 가치의 발생사를 계보적 방법론을 통해 분석해낸 책
- 우리의 도덕관은 선악의 도덕관
- 선악의 도덕은 기독교의 득세와 연결
- 기독교적 도덕관은 사제들이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과 맞물림
- 사제들은 그 과정에서 복종을 당연시 하는 노예도덕을 만듬
- 주어진 질서에 복종하며 따르고 자기 자신이 되기를 포기하는 도덕이 노예의 도덕
-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도덕관을 버려야 한다
- 자기 자신이 되어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주인의 도덕을 행하자.
'힘에의 의지'에서의 '권력 관계' 개념을 지식과 연관시킨다.
지식과 권력은 불가분하다. 권력 또한 도처에 있다. (미시적·편재적)
지식과 권력은 상호작용하는 복합체이며 근대적 지식은 합리성, 정상성 따위의 개념을 만든다.
<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에 이러한 내용이 잘 드러나있음.
푸코는 자유주의적 권력 개념과 전체주의적 권력 개념을 모두 비판
1. 사회계약론(홉스 등) 2. 전체주의적 권력 개념(맑시즘 : 특정 권력의 계급 억압으로 생김)
=> 권력은 소유, 획득, 양도, 유통할 수 있는 실체적 재화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권력의 또 다른 측면 : 생산과 창조(단순한 억압 x)
=>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삶, 사유형태가 만들어진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 또한 권력관계이다. 병원에서는 의학적 담론 안에서 환자가 '생산'됨.
권력-지식 복합체의 생산적 속성
1. 권력은 단순한 억압, 의무, 금지, 강제, 부정이 아니라 생산적 효과가 있다.
2. 권력-지식 관계망에 들어온 인간을 그 관계망의 '주체'와 '대상'으로 생산한다.
3. 지식과 관련없는 권력관계는 없고, 권력관계를 만들지 않는 지식도 없다.
길들여진 몸
- 사람의 몸이 몸을 통제, 금지, 조절하는 권력 앞에 노출
- 규율이란? 길들여진 몸을 만드는 여러 기법과 전술 ex) 관찰, 규범적 판단, 검사
권력의 내면화 (감옥, 회사, 공장, 학교, 군대, 병원)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군대나 병원과 흡사하고, 이러한 모든 기관이 감옥과 닮은 것이라고 해서 무엇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감옥이란 범죄자들을 잡아서 처벌하고 통제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감옥인 것을 감추기 위해 있지 않을까?"
감옥을 만드는 순간 다른 모든 기관들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여지고 감옥만 비정상이 되기 때문이다.
감옥을 제외한 다른 공간의 정상화 및 감시의 은폐
에피스테메 : 적극적으로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질서이자 밑바탕(패러다임과 유사함)
근대 이전에는 어느 나라든지 남자도 긴 머리를 지녔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긴 머리 남자를 이상하게 쳐다봄.
"개인은 특별한 규율적 권력 기법이 생산한 실재"
反 인간주의 니체 : 신은 죽었다 - 신은 만들어진 것(창신 신화는 없다) - 중세의 굳건한 믿음 파괴
푸코 : 인간은 죽었다 - 인간도 만들어진 것 - 근대의 굳건한 믿음(근대적 인간) 파괴
인간은 만물의 영장? 인간은 위대하다? 인류는 진보한다?
=> 근대의 이성이 만들어낸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다. 근대에 만들어진 조작된 인간!
우리의 삶에 '정답'은 없다.
근대적 주체 개념도 처음부터 본질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시기에 특정 지식-권력 복합체의 효과도 '만들어진 것'일 뿐.
푸코에 따르면,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관념은 권력-지식 관계에 따라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다.
권력의 수용과정
권력행사자가 행사하는 권력이 권력수용자에게 전다로디는 과정은 크게 복종과, 동일시 그리고 내면화의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1)복종 -권력행사자의 의도에 꼭 들어맞게 권력수용자에게 권력이 전달되는 경우를 말한다. 구성원이 복종을 하게 되는 이유는 복종을 함으로써 자기에게 돌아오게 될 보상에 대한 기대와 복종하지 않았을 때 받게 될 처벌에 대한 두려움 이다.
2)동일시
다른 사람의 지시를 즐거운 마음으로 따른 것은 그 사람이나 혹은 그가 속한 집단과 인간적인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희망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행사자에게 많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스스로 그의 영향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 권력수용자가 권력행사자와 동일시과정을 거침으로써 권력이 전이된다고 할 수 있다.
3)내면화
권력수용자는 권력행사자의 행위가 자기의 가치관과 일치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내면에 깊숙이 간직함으로써 자기내면화를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별도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 내면적 보상에 만족함으로써, 자기의 욕구가 충족되고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설정되는 것이다. 이는 권력의 수용과정에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사상적, 정치적 상황에서 내면화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신자들, 수많은 막스의 제자들,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배교하지 않고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내면화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복종-권력의 원천 보상적, 강압적 권력 보상을 얻고 처벌을 회피하려는 욕구
리더가 보상과 처벌이 가능한 곳에 위치해야 함
동일시-준거적 권력 리저와 만족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려는 욕구 리더와 수용자와의 친분이 형성 되어야 함
내면화-전문적 권력, 합법적 권력 가치관이 동일, 리더를 절대 신뢰하여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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