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유서類書의 역사: 한나라 때 사마천의 사기, 전국시대 거상이자 진나라 재상인 여불위가 거금을 들여만든 여씨춘추, 북제의 수문전어람, 당나라 때 명관료이자 학자였던 구양순의 예문유취와 문사박요, 송나라 때의 자치통감과 속자치통감, 송사대서인 책부원구, 태평광기, 문원영화, 태평어람, 명나라 영락제의 영락대전, 청나라 강희제 때 발간을 명령하고 옹정때 때 완성된 고금도서집성, 그리고 건륭제의 사고전서
태평어람
본디 태평총류(太平總類), 태평류편(太平類編), 태평편류(太平編類)라고 불렸으나 1천 권에 달하는 책을 완성하자마자 태종이 기뻐하며 하루에 3권씩 독파하여 1년 동안 다 보았다고 해서 《태평어람》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새로 지은 책을 열심히 탐독하는 황제의 건강을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송태종은 "책은 펼치기만 해도 이로움이 있소. 짐은 이를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소."(開卷有益,朕不以爲勞也)라고 답했고, 이 말에서 '개권유익(開卷有益)'[3]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송태종은 비록 무인이긴 했어도 대단한 책벌레였던 모양이다.
전대의 서적들 1690여 권[4]에서 인용한 내용들을 정리한 책으로, 인용된 서적 중 70~80%가 이미 유실된 것들이고, 송대 이전의 고사라든지 주변국, 특히 고대 한국의 역사 및 풍습에 대한 기록들도 있어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이런 유서는 《태평어람》 이후에도 활발하게 간행되어서 명나라 영락제의 《영락대전》(2만 2877권)이나 청나라의 강희제가 발간을 명령하고 옹정제 때 완성된 《고금도서집성》(1만 권), 건륭제의 《사고전서》(7만 9377권) 등이 발간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중국 역사 상 자료와 서적들에서 유서(類書)를 편찬하는 일은 역대 왕조마다 개인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이뤄졌다. 이전에도 전국시대의 거상이자 진나라의 재상인 여불위가 거금을 들여 《여씨춘추》라는 책을 편찬했고, 북제의 《수문전어람》, 당나라 때 명관료이자 학자이기도 했던 구양순의 《예문유취》를 비롯하여 《문사박요》 등의 유서가 있었다. 《태평어람》은 이러한 전시대의 유서 및 각종 서적들의 기록과 문장을 인용하여 다시 유서 형식으로 엮은 책이었다.
읽어보면 재밌는 일화들이나 한국에 관련된 일화들이 꽤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대의 서적들 1690여 권[4]에서 인용한 내용들을 정리한 책으로, 인용된 서적 중 70~80%가 이미 유실된 것들이고, 송대 이전의 고사라든지 주변국, 특히 고대 한국의 역사 및 풍습에 대한 기록들도 있어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이런 유서는 《태평어람》 이후에도 활발하게 간행되어서 명나라 영락제의 《영락대전》(2만 2877권)이나 청나라의 강희제가 발간을 명령하고 옹정제 때 완성된 《고금도서집성》(1만 권), 건륭제의 《사고전서》(7만 9377권) 등이 발간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중국 역사 상 자료와 서적들에서 유서(類書)를 편찬하는 일은 역대 왕조마다 개인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이뤄졌다. 이전에도 전국시대의 거상이자 진나라의 재상인 여불위가 거금을 들여 《여씨춘추》라는 책을 편찬했고, 북제의 《수문전어람》, 당나라 때 명관료이자 학자이기도 했던 구양순의 《예문유취》를 비롯하여 《문사박요》 등의 유서가 있었다. 《태평어람》은 이러한 전시대의 유서 및 각종 서적들의 기록과 문장을 인용하여 다시 유서 형식으로 엮은 책이었다.
읽어보면 재밌는 일화들이나 한국에 관련된 일화들이 꽤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고려 중기로 보이는데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숙종 5년(1100)에 고려사신 오연총[5]이 구해 처음 들여왔던 것 같다. 이후 《태평광기》 등 다른 4대서들도 들어온 듯하다.
자치통감
특히 세종대왕은 명실공히 《자치통감》덕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애독하여 경연에서 《자치통감》을 강연하게 했고, 스스로 해설서를 붙여 간행하기도 했으나, 이 책의 분량이 분량인 만큼 세종의 시력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는 데도 일조했다. 집현전의 인재들을 총동원해 펴낸 이 주석서가 바로 《자치통감훈의》로, 세종은 세종 16년에 이를 편찬했으며(세종 16년 6월 26일) 이것을 간행하기 위해서 전국을 수소문해 호삼성이 음주를 단 《자치통감》 일부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세종 17년 3월 5일 세종은 이후 청주 향교에 《자치통감훈의》를 비롯한 서적을 하사하기도 하는 등 《자치통감훈의》의 보급에 힘썼다.(세종 26년 8월 14일)
- 마오쩌둥이 무려 17번이나 완독했다고 한다. 특히 문화대혁명 직전에 11번이나 읽었다고.[31] 특히 자세한 뜻을 알기 위해서 고대어 사전을 여러 권 놓고[32]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꼼꼼히 읽었다고. 대장정 도중에도 마오쩌둥은 《자치통감》을 손에서 놓지 않고 베개 밑에 두고 잤으며, 때문에 페이지 곳곳이 너덜너덜해져서 투명반창고 투성이였다고 한다. "읽을 때마다 수확을 얻는 책"이라는 것이 《자치통감》에 대한 마오쩌둥의 평가였다. 심지어 마오쩌둥 자신이 《자치통감》의 독후감격인 《자치통감평석》(資治通鑑評釋)을 쓰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역사책을 좋아했는데, 모든 역사책 가운데서도 《자치통감》을 가장 즐겨 읽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시진핑은 2013년 전국 조직공작회의에서의 강화 등 몇몇 문장에서 "정치의 요체는 사람을 잘 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爲政之要, 莫先於用人)"라는 《자치통감》의 표현을 인용하기도 했다. 현대 중국공산당은 《자치통감》을 제왕의 교과서라고 부르며 공산당 간부들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의 교과서로 만들고자 한다고 한다.
- 세종이 경연에서 직접 사용하던 《자치통감강목》 완질(59권 59책)은 2014년에 중국 상하이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14년 10월 16일 상하이도서관 및 푸단대학도서관 소장 한국 전적 조사과정에서 이를 확인했다. 재단 측은 "1420년에 만든 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로 간행한 판본으로, 같은 인쇄본이 없는 귀중본"이라고 밝혔다. 책에 날인된 '경연'(經筵) 인장은 이 《자치통감강목》 이 세종 시대 경연 소장본이었음을 말해준다. 조선 왕실의 경연 소장본이었던 이 책은 이후 청주 한씨와 남양 홍씨 집안에 소장돼 있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약탈돼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에 날인된 '서원한씨'(西原韓氏), '숙창희경'(叔昌熙卿) 및 '남양후학홍섬퇴지장'(南陽後學洪暹退之章)이란 인장을 통해 청주 한씨 한숙창(1478~1537)과 남양 홍씨 홍섬(1504~1585) 등이 소장했음을 알 수 있다.[33] 또, 이 책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유출됐다는 것은 '비요문고'(尾陽文庫)로 날인된 장서인을 통해서 확인된다. 비요는 나고야를 뜻하는 옛 명칭이며, '비요문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로 오와리(尾張·나고야)의 초대 번주였던 도쿠가와 요시나오(1601~1650)가 소장했던 장서에 주로 날인되었던 인장이다. 이후 책은 장서인인 '악저서씨장본'(鄂渚徐氏藏本)을 통해 중국의 저명한 장서가인 쉬수(徐恕·1890~1959)에 의해 소장됐던 것으로 확인된다. 10만 권에 달하는 책을 수집해 소장했던 쉬수는 사망 뒤에 대부분의 장서를 국가에 기증, 상하이 도서관에서 이 《자치통감강목》 을 소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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