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법부의 막장성이 드러난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 (1997)

1997년 3월 19일 도쿄도 시부야구 마루야마쵸(円山町)[1]의 한 아파트의 1층 빈 방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그 아파트의 소유주인 네팔 요리점의 주인이었다.[2] 그는 아파트 옆을 지나다가 열린 창문 사이로 옷을 입은 여자가 누워 있는 걸 목격했는데 단순히 자는걸로 생각하고 지나쳤지만 다음날에도 여자는 그 자리에 누워 있었고 심지어 어제와 자세도 똑같은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조사 결과 사망자는 도쿄전력의 간부급 직원 39세 와타나베 야스코(渡辺泰子)라고 드러났다. 그런데 자기 집도 아니고 남의 아파트 빈 방에서 시체로 발견되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와타나베 야스코의 집은 고급 주택가로 유명한 도쿄도 세타가야구였기 때문에 시신이 시부야구에서 발견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경찰은 이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시작했는데… 와타나베가 낮에는 도쿄전력의 전도유망한 간부급 직원으로, 밤에는 매춘부로 살아 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시부야의 아파트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도 이곳에서 매춘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피해자의 이중적 모습에 일본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시신의 부패 등의 정도로 보아 와타나베 야스코는 시신이 발견되기 10여 일 전인 3월 8일 밤~3월 9일 새벽에 누군가에게 교살되었다고 추정되었다. 경찰은 수사를 진행한 끝에 그해 5월 20일 네팔인 불법체류자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다. 이때부터 고빈다와 일본 사법부간 치열한 공방전이 15년간 벌어졌다.
체포된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는 일본에 불법체류하던 네팔인으로, 와타나베 야스코가 시체로 발견된 아파트 인근에서 다른 네팔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경찰의 조사 결과 고빈다는 야스코와 매춘을
한 사실이 있었고 고빈다도 그 사실은 시인했다. 당시 네팔에서 친척을 데려오면 살게 하려고 빌린 아파트 빈방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와타나베를 데려가 매춘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빈다는 자신이 와타나베를 죽일 이유가 전혀 없다면서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사실 문제는 고빈다가 범인임을 증명할 직접적인 물적 증거는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정황증거들만 있을 뿐이라서 사건의 진상을 그려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검찰이 제시한 정황증거는 다음과 같다.
사실 문제는 고빈다가 범인임을 증명할 직접적인 물적 증거는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정황증거들만 있을 뿐이라서 사건의 진상을 그려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검찰이 제시한 정황증거는 다음과 같다.
- 고빈다가 피해자와의 관계를 부인하다가 말을 바꾼 점
고빈다는 처음에는 "야스코를 모른다"고 부인했다가 야스코와의 매춘 증거가 나오자 말을 바꾸었다. 검찰은 이를 "고빈다가 살인한 것을 숨기려는 의도"라고 주장했고 변호인 측은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실수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 사건 직전 현장 근처에서 야스코와 한 남성이 목격된 점
검찰은 "사건 직전 현장 근처에서 목격된 야스코와 함께 있던 남자의 정체는 고빈다"라고 주장했고 변호인 측은 '고빈다가 아닌 다른 남자'라고 맞섰다.
- 사건전후 달라진 고빈다의 금전 관련 문제
고빈다는 사건 이전에 7만 엔밖에 소지하지 않았으나 사건 이후 지인에게 빌린 돈 10만 엔을 갚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사건현장에서 와타나베가 소지하고 있던 4만엔이 사라진 걸로 볼 때, 고빈다가 야스코와 매춘 후에 야스코의 돈을 노리고 살인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논란이 많은 정황 증거들을 놓고 설왕설래한 끝에 2000년 4월 14일 1심 재판부의 오부치 토시카즈 재판장은 "현장에서 제3자의 체모가 발견된 이상 현장에 고빈다 외에 제3의 인물이 있었을 개연성이 있으므로 고빈다를 범인으로 확정하긴 어렵다."는 점을 들어 고빈다에게 무죄 판결했다. 검찰은 바로 항소했는데 이후 고빈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오부치 토시카즈 판사는 하치오지 지원 총괄판사로 옮겼다. 이를 두고 이 사건을 오랫동안 추적한 논픽션 작가 사노 신이치는 "오부치 판사는 좌천되었다."고 주장했다.[4]
도쿄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재판 끝에 2000년 12월 22일 2심 재판부 타카기 토시오 재판장은 "현장에서 발견된 콘돔의 체액과 체모가 고빈다의 것과 일치하므로 현장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사건 이후 갑자기 지인에게 10만 엔을 갚은 것 등"을 이유로 1심의 무죄 판결을 뒤집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에 고빈다는 "신이시여, 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변호인 측은 다시 최고재판소에 상고했으나 최고재판소는 "2심 판결에 문제가 없다."면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고빈다는 2005년 도쿄고등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했다. 일본변호사협회, 일본국민지원회 등의 단체들이 "고빈다는 무죄"라고 주장하면서 재심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2011년 도쿄고등재판소는 변호인 측의 요청으로 이 사건의 증거물들을 심의하던 중 현장에서 발견된 DNA를 검찰 측에서 감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도쿄고등검찰청에 DNA 감정을 요청했고 검찰은 DNA 감정에 나섰다.
그런데 이 DNA 감정으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DNA 감정 결과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DNA와 일치했으나 고빈다의 DNA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즉, 현장에 고빈다의 것 이외에 다른 DNA가 있고 이는 현장에 알려지지 않은 제3의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당황한 검찰은 "2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고 변명했는데 첫째는 고빈다가 사건 전날에 있었고 피해자는 다음날 제3의 남성과 매춘을 하다가 살해되었을 가능성, 둘째는 반대로 제3의 인물과 먼저 매춘을 하고 이후 고빈다가 피해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언제 성관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이상, 고빈다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검찰은 주장했다.
그러나 사건은 점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11년 10월 21일, 제3자의 DNA가 발견된 체모가 피해자의 체내에서 발견된 정액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변호인 측은 "고빈다의 DNA는 쓰고 버린 콘돔에서 나왔지만, 제3자의 DNA는 피해자의 체내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고빈다보다는 제3자가 더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여러모로 DNA적 증거로 보면 고빈다보다는 제3자의 범행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결국 2012년 6월 11일 도쿄고등재판소는 고빈다에 대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도쿄고등재판소는 제3자의 범행가능성이 나온 반면 고빈다의 유죄 인정에 도달할 요건이 떨어지기 때문에 고빈다가 무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재심청구 수용과 더불어 고빈다의 형집행을 정지하는 결정도 내렸다. 검찰은 이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고재판소 특별항고를 고려했으나 결국 포기하여 고빈다의 재심이 개시되었다.
형이 정지된 고빈다는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추방되어 고국 네팔로 돌아갔다. 이후 재심 과정에서 검찰은 처음에는 고빈다의 유죄를 주장했으나 추가로 진행된 조사에서 피해자의 손톱에서 DNA가 검출되었는데 이 DNA는 고빈다가 아닌 제3자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더 이상 고빈다의 유죄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피해자의 체내는 물론 손톱에도 제3의 DNA가 있다면 제3자의 범행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피해자의 가슴에서 타액이 발견되었는데 타액의 혈액형 조사를 한 결과 O형 남성이라고 판명되었다. 문제는 고빈다의 혈액형은 B형이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고빈다에게 유리한 증거임에도 타액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아서 변호인 측으로부터 '증거를 은폐하려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국 2012년 10월 29일 재심 첫 공판에서 검찰은 '고빈다의 범행 가능성이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고 11월 7일 도쿄고등재판소는 고빈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고빈다는 그동안의 수감 생활에 대한 배상 청구를 했는데 수감 기간을 하루당 1만 2500엔으로 쳐서 배상금 6800만 엔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고빈다는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아버지는 귀국하기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고빈다의 무죄는 밝혀졌으나 누가 와타나베를 살해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에 싸였다. 재심 과정에서 드러난 제3자의 DNA가 있었기 때문에 진범을 밝혀낼 수만 있다면 DNA 대조로 잡을 수 있겠으나 27년째 와타나베를 살해한 진범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DNA 감정으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DNA 감정 결과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DNA와 일치했으나 고빈다의 DNA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즉, 현장에 고빈다의 것 이외에 다른 DNA가 있고 이는 현장에 알려지지 않은 제3의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당황한 검찰은 "2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고 변명했는데 첫째는 고빈다가 사건 전날에 있었고 피해자는 다음날 제3의 남성과 매춘을 하다가 살해되었을 가능성, 둘째는 반대로 제3의 인물과 먼저 매춘을 하고 이후 고빈다가 피해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언제 성관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이상, 고빈다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검찰은 주장했다.
그러나 사건은 점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11년 10월 21일, 제3자의 DNA가 발견된 체모가 피해자의 체내에서 발견된 정액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변호인 측은 "고빈다의 DNA는 쓰고 버린 콘돔에서 나왔지만, 제3자의 DNA는 피해자의 체내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고빈다보다는 제3자가 더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여러모로 DNA적 증거로 보면 고빈다보다는 제3자의 범행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결국 2012년 6월 11일 도쿄고등재판소는 고빈다에 대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도쿄고등재판소는 제3자의 범행가능성이 나온 반면 고빈다의 유죄 인정에 도달할 요건이 떨어지기 때문에 고빈다가 무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재심청구 수용과 더불어 고빈다의 형집행을 정지하는 결정도 내렸다. 검찰은 이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고재판소 특별항고를 고려했으나 결국 포기하여 고빈다의 재심이 개시되었다.
형이 정지된 고빈다는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추방되어 고국 네팔로 돌아갔다. 이후 재심 과정에서 검찰은 처음에는 고빈다의 유죄를 주장했으나 추가로 진행된 조사에서 피해자의 손톱에서 DNA가 검출되었는데 이 DNA는 고빈다가 아닌 제3자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더 이상 고빈다의 유죄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피해자의 체내는 물론 손톱에도 제3의 DNA가 있다면 제3자의 범행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피해자의 가슴에서 타액이 발견되었는데 타액의 혈액형 조사를 한 결과 O형 남성이라고 판명되었다. 문제는 고빈다의 혈액형은 B형이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고빈다에게 유리한 증거임에도 타액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아서 변호인 측으로부터 '증거를 은폐하려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국 2012년 10월 29일 재심 첫 공판에서 검찰은 '고빈다의 범행 가능성이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고 11월 7일 도쿄고등재판소는 고빈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고빈다는 그동안의 수감 생활에 대한 배상 청구를 했는데 수감 기간을 하루당 1만 2500엔으로 쳐서 배상금 6800만 엔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고빈다는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아버지는 귀국하기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고빈다의 무죄는 밝혀졌으나 누가 와타나베를 살해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에 싸였다. 재심 과정에서 드러난 제3자의 DNA가 있었기 때문에 진범을 밝혀낼 수만 있다면 DNA 대조로 잡을 수 있겠으나 27년째 와타나베를 살해한 진범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 고빈다는 2013년 부당하게 구류된 것에 대한 형사보상청구를 해 약 6800만엔(2023년 5월 환율 기준으로 약 6억 8천만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2017년 11월 아내와 함께 다시 일본을 방문했고 일본 매체와 인터뷰도 했다. 취재에 의하면 고빈다는 일본 교도소 수감당시 겪은 끔찍한 생활[11]이나 인간들을 지금도 꿈에서 보며 그 악몽으로 잠을 설치곤 한다고 했다. 15년간의 수감생활로 인한 공백이 너무 컸기 때문에 네팔에서도 일을 찾지 못해 무직 상태라고 한다. 다행히 보상금으로 생활은 문제가 없지만 일본 정부에게 빼앗긴 소중한 자신의 인생 15년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호소했으며 잘못된 수사로 진범을 놓친 일본 경찰과 사법부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난했다.[11] 일본 경찰에게 폭행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