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한편의 꿈으로 본 동양의 문학작품들: 한단지몽, 남가일몽, 일장춘몽, 조신의 꿈, 금오신화 (한국 최초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세구, 구운몽, 홍루몽, 춘원 이광수의 꿈, 신상옥의 꿈 (1954, 1967), 배창호의 꿈 (1990), 아시발꿈

 

한단지몽 (731년)

1. 개요[편집]

(唐)나라 심기제(沈旣濟)[1]가 쓴 ≪침중기≫(枕中記)라는 전기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어휘로 덧없는 일생을 비유한 말.

2. 줄거리[편집]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일이다. 도사(道士) 여옹(呂翁)[2]은 한단(邯鄲)으로 가는 도중 주막에서 쉬다가 노생(盧生)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산동(山東)에 사는데,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산다며 신세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으로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 속에서 점점 커지는 베개 구멍 속으로 들어가보니, 고래등 같은 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 명문가인 그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하여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게 되었다. 노생은 포박당하며 "내 고향 산동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았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벼슬길에 나갔던가.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거닐던 때가 그립구나."라고 말하며 자결하려 했으나, 아내와 아들들이 만류하여 그만 두었다. 다행히 사형은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수년 후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노생은 모두 고관이 된 아들 다섯과 손자 열 명을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80세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그런데 노생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 보니 이었다. 옆에는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메조밥을 짓고 있었는데, 아직 뜸이 들지 않았을 정도의 짧은 동안의 꿈이었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네."라고 웃으며 말했다. 노생은 한바탕 꿈으로 온갖 영욕과 부귀와 죽음까지도 다 겪게 해서 부질없는 욕망을 막아준 여옹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하고 한단을 떠났다.

 


남가일몽 (794)

1. 개요[편집]

南柯一夢(남가일몽)은 '인생의 부귀영화가 모두 한 번의 과 같이 허무하다'라는 뜻, 혹은 더 나아가 '인생이 한 번의 꿈과 같은 것'이라는 뜻을 지닌 사자성어이다.

3글자로 남가몽(南柯夢), 혹은 괴안몽(槐安夢) 등으로도 불리는데, 출전은 본래 당(唐)의 진한(陳翰)이 편찬한 『이문집(異聞集)』 중 이공좌(李公佐)가 794년에 지은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인데, 원서는 산일(散佚)되고 후에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다시 수록되었다. 관련 고사는 16세기 명나라 때 탕현조가 희곡으로 각색하기도 하였다.

2. 유래[편집]

중국의 당나라 덕종(德宗) 대에 강남 양주(陽州)에 순우분(淳于棼)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집 남쪽에 커다란 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어느 날 순우분은 친구들과 괴화나무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집 마당 처마 밑에서 잠이 든다. 잠시 후 잠에서 깨어보니 괴안국(槐安國)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신이라면서 두 관원(官員)이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정신 없이 따라간 순우분은 홰나무 아래 쪽의 동굴 안으로 들어가 화려한 도성에 당도했는데, 성문에는 금으로 새겨진 '대괴안국(大槐安國)'이라는 현판이 있었다. 곧 괴안국 국왕의 환대를 받으며 부마의 자리에 오르고, 남가군(南柯郡)이라는 지역의 태수로 임명된다. 그 후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고, 순우분의 20여년 간의 통치로 남가군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백성들은 순우분을 칭송한다.

하지만 순우분의 능력을 시기하는 자들이 생기자, 국왕은 순우분에게 '그대는 본래 속세의 사람이니 고향에 다녀오라.' 라고 하면서 3년 후에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하며, 관원을 시켜 그를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그날 밤, 순우분이 집으로 돌아와 처마 밑에 서 있는데, 관원의 큰 호령에 눈을 번쩍 뜨니 처음 처마 밑에서 잠이 들었던 자신만이 있었다.

그제야 순우분은 그간의 모든 일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기억이 너무 생생하여 괴화나무 아래의 구멍을 보니 개미집이 있었다. 또 나무를 더듬어 남쪽으로 난 가지를 향하자 네모난 모양의 개미집이 있었는데, 역시 남가군의 형상이었다. 날이 어두어 다음날 다시 보기로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보니 간밤에 비바람이 몰아쳐 개미집은 온데간데 없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결국 순우분은 인생이라는 것이 남가의 꿈처럼 부질없고 덧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술에 전념하며 지내다가 3년 후에 생을 마감했다. 이 3년이 바로 괴안국의 임금과 약속했던 기한이었던 것이다.

판본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잠이 든 곳이 괴화나무 아래로 서술되어 있기도 하고, 단라국(檀羅國)의 침략을 받았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기도 하며, 괴안국의 왕이 '천도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일단 고향에 내려가라'고 말하는 판본도 있다. 여기서 '천도'는 꿈에서 깬 뒤 괴화나무 아래에 있던 그 개미집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후청록 일장춘몽

2. 유래[편집]

송나라 시절의 전집인 《후청록》에 적혀있는 내용에 따르면, 소동파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이후 유유자적하게 산책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아낙네가 벼슬 자리에 앉아있던 지난날은 '한바탕의 봄 꿈'이셨습니까?라 물은 것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라고 한다.

3. 여담[편집]

  • 보통 길 장(長)을 썼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마당 장(場)을 쓴다. 헷갈리지 말자.
  • 같거나 비슷한 의미의 고사성어들이 은근히 많다. 남가일몽[1], 삼일천하, 한단지몽[2] 등등.
  • 한국 고전문학 작품 중에는 조신지몽 설화, 김시습 용궁부연록, 김만중 구운몽 등이 이러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 야빠들은 매년 봄에는 그렇게 우주최강팀의 면모를 보이다 여름 이후만 왔다 하면 한순간에 약체로 고꾸라져버리기 십상인 KBO 리그 모 구단 모습을 이 사자성어에 빗대곤 한다.
  • 다소 천박하긴 하지만 아시발꿈이 일장춘몽의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 현대 중국어에서도 사용되는 성어이다. '춘몽'만 쓰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에로틱한 꿈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조신의 꿈

1. 개요[편집]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편에 실린 대표적인 꿈 이야기로, 조신몽(調信夢), 조신지몽(調信之夢), 조신설화(調信說話)라고도 한다. 우리 고전문헌에서 일장춘몽 속의 허무한 인생을 그린 원조 격 작품이니, 중국의 한단지몽, 남가일몽에 못지 않게 우리 조상님들 또한 꿈 이야기에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 플롯은 우리 국문학사상 전기체(傳奇體) 소설의 효시라 일컫는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 금오신화에 실린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서도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꿈 속에서는 세속적 욕망에 매우 충실하고 일장춘몽은 그저 형식적 교훈으로만 보이는 후대의 몽자류 소설과 달리, 조신의 꿈은 불교적인 주제를 잘 담은 비극적인 작품이다.

2. 내용[편집]

주인공은 신라 승려 조신(調信). 조신은 본디 세달사(世達寺)[1]에 있었는데, 절의 장원(莊園)이 명주(溟洲) 내리군(㮈李郡)[2]에 있었으므로 파견되어 장원을 관리하였다.

조신은 명주 태수[3] 김흔(金昕, 803~849)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낙산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그 여인과 맺어지게 해주십사 하고 남몰래 기도하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연분이 맺어지기는커녕 다른 남자와 혼사가 정해졌다는 소문이 들릴 뿐이었다. 조신은 밤중에 불당에서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사모하던 낭자가 제 발로 절에 나타나 불당 문을 열고 조신을 찾아오지 않는가. 낭자는 웃는 얼굴로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제가 일찍이 스님의 얼굴을 알아 마음으로 사랑하였으니 잠시도 잊지 못하였으나, 부모의 명에 못 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무덤에 묻힐 짝이 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김씨 낭자 또한 부모가 정한 혼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우연히 만난 조신에게 연정을 품고 과감히 집을 나온 것.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그대로 고향으로 도피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가정을 일구었다.

두 남녀는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식 5명을 낳았으나 집은 서 발 장대 거칠 것이 없는 판이었다. 나중에는 그 보잘것없는 누옥도 잃고 온 가족이 함께 떠돌아다니며 구걸로 먹고 살기를 10년 간 했는데, 입은 옷마저 갈갈이 찢어질 정도였다. 어느 날 명주 해현령(蟹峴嶺)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15살 된 큰아이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죽자, 부부는 대성통곡을 하며 시신을 길 옆에 묻었다. 그 뒤 남은 가족들이 우곡현(羽曲縣)[4]에서 풀을 엮어 집으로 삼아 구걸로 먹고 살았다. 부부는 늙어서 움직이기도 힘든데, 어느 날 10살 된 딸이 마을에서 구걸을 하다가 에게 발목을 물려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부부가 이 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눈물을 흘리는데 아내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아름답고 젊었으며 의복도 깨끗했습니다.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으며 함께 살아온 세월이 벌써 50년이니 참으로 깊은 인연입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해가 거듭될수록 병은 깊어가는데 굶주리며 추위에 떨기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곁방살이나 한 병의 마실 것도 사람들이 용납하여 주지 않으니, 수많은 집 문 앞에서 당하는 그 수모는 산더미같이 무겁기만 합니다.

아이들이 이런 꼴을 당해도 돌보지도 못하는데 언제 부부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얼굴이며 밝은 웃음도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지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언약도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가지처럼 지나갔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예전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뿌리였습니다. 다 함께 굶어죽기보다는 서로 헤어져 상대방을 그리워함만 못할 것입니다. 좋다고 취하고 나쁘다고 버림은 사람 마음에 차마 할 짓이 못 되지만,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고 만남에도 명이 따르는 것이지요. 바라건대 이제 헤어집시다."

조신은 아내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각자 아이들을 둘씩 데리고 헤어지기로 하였다.[5] 떠나기 전에 아내가 말하였다.

"저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두 사람이 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길을 떠나려는데 조신이 꿈에서 깨어났다. 쇠잔한 등불이 가물거리고 새벽빛이 희뿌옇게 밝아오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이 새하얗게 세어버렸다. 마치 한평생의 희노애락을 모두 겪은 듯 세상사에 뜻이 사라지고 재물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또한 자기 앞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웠다.

조신이 돌아가는 길에 꿈 속에서 큰아이를 묻은 곳에 들러 땅을 파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조신은 미륵상을 물에 씻어 가까운 절에 봉안하고 세달사로 돌아와 소임을 내려놓은 뒤,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하며 살았다. 이후 조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조신이라는 사람이 스님으로 살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운 좋게 그 여자도 조신에게 호감이 있어서 둘은 사실상 야반도주를 해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밑천 없이 대충 가정부터 만들었으니 둘 다 가난에 허덕이며 수십 년간 살다 끝내 첫 아이까지 잃고, 자식들은 구걸로 먹고 살다가 개한테 물리는 지경에 처한다. 조신 부부는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서로가 만남이 바로 고통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하고 이혼하기로 한다. 근데 여기까지 전부 다 꿈이었고, 조신은 깨달음을 얻어 속세에 관심을 잃은 후 다른 절(정토사)을 세우고 선행을 베풀며 살았다는 것.

과연 불교에 기반을 둔 삼국유사의 집필 취지에 부합하는 불교식 교훈과 결말로 끝난 이야기라 하겠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전기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곰곰이 궁리해보니, 어찌 반드시 조신 스님의 꿈만 그렇겠는가? 현재도 모든 사람들이 인간세상이 즐거운 줄만 알고 기뻐 날뛰며 애쓰고 있으니, 이는 오로지 깨달음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금오신화

4.4. 용궁부연록[편집]

글솜씨가 뛰어나다고 알려진 한생이 용궁에 초대를 받아 가고 그곳에서 상량문을 지어 올리게 된다. 용왕은 그의 재주를 칭찬하며 연회에서 잘 대접한 후, 용궁 구경을 시켜주고 각종 진귀한 보물을 선물해 도로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꿈에서 깨어난 한생은 가산을 정리하여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여기서 한생은 어린 시절 뛰어난 글솜씨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방외인으로 남게 된 김시습의 모습을 나타내며, 용왕은 세종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다.

 

 

구운몽

https://namu.wiki/w/%EA%B5%AC%EC%9A%B4%EB%AA%BD#s-3.1 

1687년(숙종 13)에 서포 김만중이 집필한 고전소설. 한국 양반소설의 대표적인 대명사와 같은 세력급의 선두주자적인 작품으로, 그 모티브는 고려 시대의 승려 일연 선사의 저서인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조신의 꿈'의 기본 틀을 활용하여 스토리를 확장한 소설이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조설근의 대작 소설 《홍루몽》과 비슷한 줄거리 형식을 지니고 있는 소설인데, 시기상으로 보자면 1740년 청나라에서 쓰인 《홍루몽》보다 오히려 1687년에 쓰인 《구운몽》이 더 앞선다. 그렇기에 일각에서는 《홍루몽》이 청나라에 수출된 《구운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전기적, 불교적인 성격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인생무상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아시발꿈

https://namu.wiki/w/%EC%95%84%EC%8B%9C%EB%B0%9C%EA%BF%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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