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는 외세로부터 우수한 문화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개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자연스럽게 강조한 역사의 반복; 일본적인 것의 실체는 사실 외래문화의 흡수 및 그에 대한 반동이다; 견수사, 견당사 등 화혼한재 (유교/불교+야마토다마시) -> 세세동점, 탈아입구의 흐름 속 화혼양재 (서구식 근대화/제국주의+무사시의 야마토다마시) -> 국체 민족주의와 대동아공영권 -> 패전 이후 일본을 동아시아 냉전의 거점지대로 삼으려고 했던 GHQ의 reverse course (1935-1952년 록펠러재단 이사로 근무했고, 아이젠하워 국무장관을 지낸 존 포스터 덜레스가 에드윈 라이샤워 등의 학자들을 꼬드겨 미국과 서방세계에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국화학을 시작했다 (근면성실하고 예의바른 일본인, 선량한 천황의 이미지 등) - 일본은 록펠러 가문 식민지였다 -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데이비드 록펠러의 삼극위원회 구상도 나오고, 1979년에 하버드대 교수 에즈라 보겔이 Japan As No.1이라는 베스트셀러 서적을 써냈던 것) -> 1980년대 일본의 자만심의 폭주와 버블폭락 -> 2000년대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한 Cool Japan Strategy는 일본 문화가 세계에, 특히 서방세계에, 쿨하게 비춰줘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일본 아니메의 세계화를 설명하며 그 원류로 우키요에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사실 춘화라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You는 뭐하러 일본에"에 출연한 외국인의 76%는 백인; 일본의 최다 방문 국가 1~3위가 각각 한국, 중국, 대만인 것을 생각하면 특히 편향성이 심하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자신의 책 뒤편에 영어로 시놉시스를 적고, 일본인을 서양인처럼 그리는 무의식적 이유
야마토다마시
야마토다마시(
大和魂 )는 외국과 비교하여 일본적이라고 생각되는 정신이나 지혜, 사상을 가리키는 용어·관념이다. 대화심(大和心 ), 화혼(和魂 )이라고도 한다.유교나 불교 따위가 전래되기 이전의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견해를 뒷받침하는 정신을 가리킨다. 유교나 노장사상에 기반을 둔 '한재(
漢才 )'에 대비하여 쓰여 에도 후기부터는 일본민족 특유의 "정직하고 자유로운 마음"의 의미가 부여되었다.헤이안시대 중기 무렵부터 '재(才)', '한재(漢才)'와 대비되어 쓰이기 시작하여 많은 내용을 포함하는, 대단히 그 의미가 넓은 개념이다. 에도시대 중기 무렵 국학의 흐름 속에서 '한의(
漢意 )와 대비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아져 "일본 고래부터 전통적으로 전해져온 고유의 정신"이라는 관념이 부여되었다.근세까지 일본에서는 야마토다마시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 세사에 대응하여, 사회 속에서 일체의 일을 원활히 진행해나가기 위한 상식이나 세간적 능력.
- 특히 각종 전문적 학문·교양·기술 따위를 사회 속에서 실제로 쓸모있게 쓸 수 있게끔 하는 재능이나 수완.
- 중국 등 외국문화와 문명을 향수함에 있어서 그것과 한쌍이 되는 상식적, 일본적 대응능력(야마토고코로).
- 지식이나 논리나 윤리가 아닌, 감정적 정서나 인정으로써 사물을 파악하고 공감하는 능력·감수성(모노노아와레).
- 이상의 근저가 됨직한 훌륭한 인물이 지닌 영적 능력.
- 일본민족 고유의 용감하고 청렴하며 특히 주군·천황에 대해 충의로운 기질, 정신성, 성품(근세 국학 이래의 신해석).
역사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이 처음 세상에 등장한 것은 《겐지모노가타리》의 《소녀》첩이라고 알려져 있다. 야마토다마시라는 말과 개념은 한재의 말과 개념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탄생하였다. 《겐지모토가타리》가 탄생한 헤이안 중기는 국풍문화라는 일본 특유의 문화가 성했던 시대였으나, 당시 사람들 가운데서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지식·문화를 기반으로 삼아 일본풍으로 양념한 것에 불과하다, 라는 인식이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야마토다마시는 책상물림스러운 지식을 현실의 다양한 국면에서 응용하는 비판력·능력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주로 '실무능력'의 의미로서 쓰였다.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 중기 이래 국학의 흐름 속에서 상대문자의 연구가 진행되어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은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주창한 한의(漢意)와 대비되게 되어 '모노노아와레', '의뭉스러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올곧은 마음', '불교나 유학에서 벗어난 일본 고래부터 전통적으로 전해져온 고유의 정신' 등의 개념이 발견·부여되었다. 후기에 들면 '일본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 용어'로서 쓰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견당사 폐지를 건언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야먀토다마시라는 말을 창시한 인물로서 가탁(仮託)되게 이르렀다. 이같은 경향은 유학의 심화와 미토학·국학 등의 발전과 그에 따른 존황론의 흥륭에 동반되는 것이었으며 근대화에 이르는 원동력이기도 하였다.
메이지에 들면 서양의 지식·학문·문화가 한꺼번에 유입됨으로써 오카쿠라 덴신 등의 인물에 의해 그것을 일본식으로 섭취해야 한다 하는 주장이 발생하여 야마토다마시와 더불어 화혼양재(화혼한재에서 한을 양으로 바꾼 것으로 화혼한재는 한재, 즉 중국 등으로부터 유입된 지식·학문을 그대로 일본에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초적 교양으로서 받아들여 그것을 일본의 실정에 맞게끔 하여 응용적으로 정치, 생활 등 상황에서 발휘하는 것을 이른다[1])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이 말은 야마토다마시의 본래 뜻도 포함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서양의 지식·문화를 필요 이상으로 섭취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을 내포한다. 이윽고 구미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구미를 모방한 중앙주권적 국가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이 가진 사상(엘란 비탈)과 국민의 통제교육도 정비되어 그때까지의 자유주의적 경향의 교육에서 중앙집권적·국가주의적 경향으로 교육정책의 방향성이 바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점점 '야마토다마시(일본정신)'라는 사상은 본래의 의미에서 국가충성심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그 뜻이 변질되었다. 특히 러일전쟁 승전 이래 제국주의가 대두되며 국가에 대한 희생적 정신과 함께 타국에 대한 배외적·확장적인 자세를 포함하는 말로서 쓰이게 되었으며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은 애오라지 일본정신의 독자성·우위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쇼와 초기, 즉 제2차 세계대전기에는 군국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어 현상(現状)을 타파하는 돌격정신을 고무하는 의미가 핵심이 되었다.
관동군의 중포병으로 입대할 당시, "백발백중의 포 일문은 백발일중의 포 백문에 상당한다"고 배웠다. 의문을 대꾸하면 "네놈은 감투(敢闘)정신이 부족하다. 포의 부족함은 야마토다마시로써 벌충하라"고 윽박을 질렀다.
"방어강판의 얇음은 야마토다마시로 벌충하라. 더욱이 강판이 얇으면 기동력이 있다." 포의 힘이 약하다고 해도 적의 보병과 포병에는 유효하지 않은가. 실제로는 적의 보병과 포병을 적의 전차가 지키고 있다. 그 전차를 부수기 위해 전차가 필요하다, 라는 근대전의 구조를 전혀 몰랐거나, 모르는 체를 하고 있었다. 전차 출신의 참모본부의 간부가 한 명도 없었으니만큼 몰랐다고 하는 편이 옳을 듯싶다.
— 시바 료타로 〈역사와 시점 나의 잡기첩〉(신호사)일본의 패전 직후에는 쓰이는 일이 그다지 없게 되었으나 이후의 일본문화론에서는 원래의 야마토다마시의 의미에 가까운 입론에 기초하는 논고가 다수 쓰여졌다.[2]
헤이세이 이후로도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은 여러 상황에서 쓰이고 있다.[3][4][5][6][7]
야마토다마시를 제재로 삼은 와카
- 무슨 이유로 깨어질 몸이냐 누군가 묻거든 거기에 야마토다마시라 답하노라(何故に砕きし身ぞと人問はばそれと答む日本魂)
- 시키시마의 야마토고코로를 누군가 묻거든 아침해에 풍기는 산벚나무라 하노라(敷島の大和心を人問はば 朝日に匂ふ山桜花)
- 그리하면 그리될 줄 알면서도 부득불 그만두지 못하는 야마토다마시(かくすればかくなるものと知りながらやむにやまれぬ大和魂)
- 설령 몸은 무사시의 들판에 썩을지라도 남겨두고 싶구나 야마토다마시(身はたとひ武蔵の野辺に朽ちぬとも留め置かまし大和魂)
- 시키시마의 야마토고코로를 누군가 묻거든 몽고의 목을 친 도키무네라 하노라(しきしまの大和心を人問はば蒙古のつかひ斬りし時宗)
- 그 누구의 몸에도 있음을 모르고 갈팡대누나 신이 남겨주신 야마토다마시(誰が身にもありとは知らでまどふめり神のかたみの大和魂)
- 무사의 야마토고코로를 한데 뭉치어 단 한줄기 대승(大繩)으로 화하라(もののふの大和心をよりあはせ末ひとすぢの大繩にせよ)
- 노무라 모토니. 가집 《향릉집》에 수록된 시.[15]
- 부운이 떠 있더라도 무사의 야마토고코로의 하나가 될 수 있다면야(浮雲のかかるもよしやもののふの大和心のかずにいりなば)
- 노무라 모토니. 후쿠오카번에서 자택근신을 명령받았을 무렵 지은 시.
- 몸은 이끼 아래 썩을망정 야마토다마시가 장맛비의 이슬로 사라질쏜가(身は苔の下に朽つとも五月雨の露とは消えじやまと魂)
- 시모노 간페이. 《근왕전》(勤王傳)에 수록된 시.[16]
- 일본의 야마토고코로의 덧거친 바닷가에 깨어져 돌아가는 먼바다의 흰물결(日本のやまと心のあらいそにくだけて歸れ沖ノ白浪)
- 해 뜨는 곳의 야마토고코로의 흔들림없는 증표는 후지의 고령일레라(日の本のやまと心の動きなきしるしは富士の高根なりけり)
- 이노우에 후미오. 《조학집》에 수록된 시.[17]
- 미늘창의 길 험할지언정 나아가는 야마토고코로의 말 끊임이 없으리(玉鉾の道はあれても進み行くやまと心の駒はたゆまじ)
- 무사의 야마토고코로 갈고닦아 찬 태도에 맑게 깃들은 달이여(武士のやまと心をとぎて佩く太刀のさやかにすめる月かな)
각주
- 「和魂漢才」(岩波国語 & 2011-11, 1615쪽)
- 三島由紀夫「6月24日(金)」(『小説家の休暇』講談社、1955年11月)。28巻 & 2003-03, 650–656쪽
- “寺島しのぶさんが男児出産「大和魂、大和の美しさ忘れないで」”. 《MSN産経ニュース》. 2012년 9월 12일.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7월 16일에 확인함.틀:リンク切れ
- “豪栄道 大関昇進決まる、伝達式口上は「大和魂を貫いてまいります」”. 《スポーツニッポン》. 2014년 7월 30일. 2015년 7월 16일에 확인함.
- “K1渡部「大和魂で戦う」繰り上げ出場で気合い”. 《日刊スポーツ》. 2015년 5월 20일. 2015년 7월 16일에 확인함.
- “U22日本が快勝!リオ五輪へ「大和魂」 (1/2ページ)”. 《デイリースポーツ》. 2015년 7월 1일. 2015년 7월 16일에 확인함.
- “U22日本が快勝!リオ五輪へ「大和魂」 (2/2ページ)”. 《デイリースポーツ》. 2015년 7월 1일. 2015년 7월 16일에 확인함.
- 津歴史街道構想推進事業委員会編『改訂谷川士清小伝』津歴史街道構想推進事業委員会、2003年、p.31。
- 田中康二『国学史再考:のぞきからくり本居宣長』新典社〈新典社選書47〉2012年1月、pp.210-211。ISBN 9784787967978
- 伊藤嘉夫「百人一首と佐佐木信綱・愛国百人一首前後」『跡見学園女子大学紀要』第4号、1971年、p.64。
- 田中康二『本居宣長の大東亜戦争』ぺりかん社、2009年7月、pp.140-144。ISBN 9784831512420
- 田中康二『国学史再考:のぞきからくり本居宣長』新典社〈新典社選書47〉2012年1月、pp.170-172。ISBN 9784787967978
- 多久善郎編『維新のこころ:孝明天皇と志士たちの歌』明成社、2018年11月、p.68。ISBN 9784905410539
- 伊藤嘉夫「百人一首と佐佐木信綱・愛国百人一首前後」『跡見学園女子大学紀要』第4号、1971年、p.61。
- 弥富破摩雄『尽忠報国歌集』日本古典全集刊行会、昭和17年6月、p.119。
- 弥富破摩雄『尽忠報国歌集』日本古典全集刊行会、昭和17年6月、p.113。
- 弥富破摩雄『尽忠報国歌集』日本古典全集刊行会、昭和17年6月、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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