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식 혁명으로 반문명적 인습을 타파하려고 했다던 메이지~다이쇼 시대에도 여전히 미신이 횡행했던 사례들: 메이지가 몸소 참배한 마사카도의 간다묘진 (마사카도의 머리무덤) / 히로히토의 스토쿠 덴노에 대한 식년제 거행


4. 마사카도의 머리무덤[편집]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쿠비즈카


전국 시대의 오타 도칸(太田道灌)이나 호조 우지쓰나(北條氏綱) 등의 무장들도 간다묘진에 무운을 빌기도 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 간다묘진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으며 에도 막부가 들어선 뒤에는 아예 간다묘진을 에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시대에는 칙사로서 에도에 내려왔던 다이나곤(大納言)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廣)가 막부로부터 마사카도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조정에 호소해 역적이라는 이름도 제거하게 했다.(물론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진 뒤에는 가차없었다.) 에도 막부가 마사카도를 유난히 숭배한 것은 조정에 대항했던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막부의 수호신으로 삼음으로써 조정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간다묘진의 현 위치는 에도 막부가 옮긴 것으로 에도성의 동북쪽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곳에 해당한다고.

모로 미야가 쓴 헤이안 일본이라는 책에 보면 메이지 덴노가 살아생전 몸소 참배한 두 곳이 야스쿠니 신사와 마사카도의 간다묘진이었다고 적었다. 물론 조정에 반역했던 자에게 천황이 머리를 숙인다는 것이 아무래도 정서상 용납될 수는 없는지라 1884년에 메이지 천황이 간다묘진을 참배할 때는 마사카도의 신위는 신사 본전에서 빼서 경내의 섭사(부속신사)로 옮기고 본전의 빈 자리에는 원래 있던 오쿠니누시 신과 짝을 맞추어 스쿠나비코나 신을 권청해 모셨다. 마사카도가 간다묘진의 본전으로 돌아온 것은 1984년으로 섭사에 들어간 지 백 년만의 일이었다.
 
 마사카도의 묘가 두 군데 있는데, 한 곳은 몸이 묻힌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참수된 마사카도의 머리가 날아가다가 도중에 멈춘 곳이라 한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 지방을 근거로 했던 마사카도의 영을 위무하기 위해 7개의 신사를 건립했는데, 그 중 마사카도의 머리가 날아가다 멈춘 곳은 머리무덤(首塚, 구비즈카)이라 한다. 이 머리무덤은 도쿄 고쿄 동쪽, 오테마치역 주위[33]의 빌딩들 사이의 큰 길가에 있는데, 주변에 몇십층 짜리 빌딩들이 있는 사이에 자그마한 사당이 홀로 버티는 것을 보면 이 머리무덤에 대한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몇 번 밀어버리려고 하다가도 저주 때문에 관뒀는데, 대표적으로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머리무덤이 파괴된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장성(현 재무성)의 임시 청사를 짓기 위해 머리무덤을 발굴하고 밀어버리려다 공사 관계자부터 당시 대장대신 하야미 세이지까지 관계자 14명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죽는 일이 벌어졌고, 마사카도의 분노를 두려워한 일본 정부가 머리무덤을 현재의 형태로 복구했다. 지금도 이런 경외는 변함이 없어서, 2020 도쿄 올림픽을 대비한 오오테마치 재개발에서도 해당 위치만 교묘하게 빠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상단의 '平将門の首塚' 부분 그 외에 일본의 코메디언 듀오 폭소문제의 멤버인 오오타 히카리가 머리무덤에 드롭킥을 날렸다가 한동안 일거리가 없었다(...)는 소문도 있는 모양.

마사카도를 간토의 수호신인 칸다 대명신(神田大明神)으로 모신 칸다묘진이란 신사가 이 머리 무덤에서 얼마 못 가서 있으므로 이 장소를 굳이 고수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이 심령스포트로 유명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34]
 
 
 

3.1. 타이죠코 스토쿠 텐구(太上皇崇徳天狗, 태상황 스토쿠 텐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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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가나로는 たいじょうこうすとくてんぐ. 우타카와 쿠니요시(歌川国芳 1798.01.01~1861.04.14)가 그린 스토쿠 텐구.

일본 최고의 대텐구로 통칭 상황, 상황천구(죠코 텐구), 일본대마왕. 그 유래는 일본 75대 천황 스토쿠 덴노가 변하여 텐구가 된 형태이다.[11]

당시 일본은 천황의 아버지가 조코(태상황)로 즉위하여 인세이를 펼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질적으로 천황은 황태자 정도의 지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스토쿠 덴노의 아버지인 도바 상황 후지와라노 도쿠시/나리코를 총애하여 그 자식인 고노에 덴노를 즉위시키고 스토쿠 덴노를 상황으로 밀어올린다. 하지만 스토쿠 덴노는 명목상의 상황일 뿐, 자신의 자식이 천황이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권은 전혀 없었다.

대신에 스토쿠 덴노는 자신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을 도쿠시의 양자로 들여보내서 차기 황태자, 천황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고노에 덴노가 급사했을 때, 궁중에서는 스토쿠 덴노가 시게히토 친왕을 천황으로 만들고 싶어서 당시 조정의 집권자이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와 결탁해 고노에 덴노를 저주해서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여기에 분노한 도바 법황은 시게히토 친왕 대신에 자신의 넷째 아들[12]인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을 천황으로 책봉한다. 바로 고시라카와 덴노이다.

원래 고시라카와 덴노는 즉위하기 전까지 황태자로 책봉받지도 못했으며, 노래 연습에나 몰두하는 한량이었다. 고시라카와 덴노도 사실은 그 다음 천황으로 예정된, 자신의 아들이자 계모 토쿠시의 양자인 니조 덴노가 황위에 오를 때까지의 중계 역할로 즉위한 것이었지만, 아무튼 이것은 스토쿠 덴노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으며 권력에서 더욱 멀어지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스토쿠 덴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가 사실은 도바 상황의 아들이 아니라 시라카와 덴노가 늘그막에 본 사생아 출신이었다는 소문이었다. 시라카와 덴노는 희대의 난봉꾼이라서 젊어서부터 굉장히 주색을 밝혔는데, 시라카와 덴노의 장남인 호리카와 덴노가 불쌍한 자신의 막내 동생을 늘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장남인 도바 법황에게 스토쿠를 양아들로 삼으라고 명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바 법황은 스토쿠가 자신의 친아들을 황태자로 내세운 데 반발하여 자신의 넷째 아들인 고시라카와를 차기 천황으로 지지했다. 즉 스토쿠는 고시라카와에게는 형님이지만, 사실은 막내 할아버지라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

도바 법황이 사망하자 스토쿠 덴노는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와 결탁하여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스토쿠는 고시라카와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후에 일으킨 쿠데타도 실패하여 정권을 완전히 탈취당해 버린다. 이후 절에 유폐된 후에는 불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절에서 전념하여 사경한 경전을 조정에 바쳤지만 '반역자'가 올린 경전은 불경하다는 사유로 거절당했다. 이때에 분노와 자기비애의 정점을 찍게된 스토쿠는 완전히 돌아서고 만다. 자신의 혀를 씹어 잘라 흘러내린 피로 사경했던 경전 위에 저주를 쓰게 된다.
にっぽんこくだいえんとなり、おう[13]ってたみとしたみおうとなさん!
このきょうどうこうす!
일본의 대마연이 되어, 황제를 잡아서 백성으로 하고 백성을 황제로 만들리라!
이 경을 마귀의 세계에 회향[14]하노라!

이후 스스로를 '일본대마왕(日本大魔王)'이라고 칭하였고 손톱과 머리카락이 계속 뻗어가더니 야차와 같은 모습이 되어 그 상태로 죽은 후 바로 귀신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대마왕이 된 상황은 대텐구가 되어 일본 전국의 텐구를 다스리며 여러 시대에 걸쳐 전란과 불안을 일으킨다. 전설에 의하면 텐구들은 보통 수많은 악귀와 요괴들의 장(長)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스토쿠가 일본의 모든 요괴와 귀신을 다스리는 것이 되므로 정말 '일본대마왕'으로서 군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헤이안쿄의 대화재, 요사스러운 별의 출현, 겐지(源氏) 헤이지(平治)의 대결전,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괴이한 사망[15], 14세기 아시카가 사건도 그가 배후에서 모든 일을 공작한 것이라고도 한다.

메이지 유신 후에도 조정은 상황의 원령이 막부군에 힘을 실어줄까 두려워 스토쿠 덴노의 신령을 쿄토로 맞이하는 의식을 거행하며 시라미네 신궁(白峯神宮)을 창건했다. 그 후로도 천좌 때의 호우, 1964년의 사후 800주년 기념 제사에서의 대화재, 대화재 직후의 뇌우 등을 보며 사람들은 아직도 스토쿠 대텐구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다.

1963년 쇼와 덴노 1964 도쿄 올림픽 개최에 임하여 가가와현 사카이데 시에 있던 스토쿠인의 능에 칙사를 보내 스토쿠 덴노 식년제(崇徳天皇式年祭)를 거행했다. 이는 올림픽을 하는 동안 진정하라는 의미로 한 일이었다고 하며, 현대에서도 일본 황실에서 그에 대한 공포가 내려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20세기 사람인 쇼와 덴노가 이런 미신 같은 걸 따른 이유는 히로히토도 이래저래 겪은 일이 많은 사람이었을뿐더러[16] 위에 말한 것처럼 스토쿠 덴노 사후 800주년을 기념하는 제에서 큰불이 나고 천둥번개가 내리쳤으며 비가 쏟아지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세간에 유포되는 원령담[17]과 위와 같은 무시무시한 일면과는 달리, 의외로 스토쿠 덴노는 자신을 위로하거나 자신에게 기원을 한 사람들을 잘 챙겨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8] 시코쿠 전체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하며, 고시라카와 덴노 즉 자기 정적의 증손자인 츠치미카도 상황이 쇼큐의 난(承久の乱)에서 패배한 후 토사로 유배를 갔을 때 스토쿠 천황의 묘에서 혼령을 위로하는 비파연주를 한 날 밤의 꿈에 스토쿠 천황이 나타나 수도에 남은 가족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고, 상황의 유아는 나중에 가마쿠라 막부의 추천으로 고사가 덴노가 되었다. 또한 무로마치 막부의 관령(管領)인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시코쿠의 슈고(守護)가 되었을 때 스토쿠 덴노에게 기원한 후 시코쿠 평정에 성공한 이래로 호소카와 가의 수호신으로 받들여졌다고 한다. 시라미네 신궁은 축국의 종가 터에 자리잡은 연고로 인해 구기종목 전반의 수호신사로 떠받들어지는데다가, 1950년에 스토쿠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에서 불꽃 속에서 출현한 용신을 모시는 부속 신사의 우물물은 악연 절단과 질병 치유에 효과가 높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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