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의 버트런트 러셀론: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극적으로 승리한 이유, 한국전쟁이 발생한 이유, 1950년대 후반에 가서야 북한에서 러셀계 소련파, 연안파가 숙청된 이유, 북한의 국호가 북조선인 이유, 1970년대 북한이 흑룡회 조총련에 의존적인 된 이유

오랜 소빙하기 시대를 거친 후, 1850년대에 이르러서야 동서양 권력이 역전됩니다.

당대 국유본 황제이며, 영국 베드포드 공작 가문 방계 러셀 백작 가문의 정당한 승계자 러셀 백작이며, 케임브리지 대학 사도회 회원이며, 300인 위원회 회원이며, 페이비언 협회 회원이며, 향후 백여년간 영국 엘리트 양성소인 영국 런던정경대 실질 주인이며, 당대 세계 정부인 채텀하우스를 주도한, 버트런트 러셀은 세 가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하나, 당대 유럽이 곧 세계였습니다. 유럽 권력을 장악해야 합니다. 직전 국유본 황제 가문인,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적극 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1대 국유본 황제 가문인 베어링 가문이 무능함을 보여주었기에, 영국 국유본 귀족들이 로스차일드 2대 국유본 황제 가문에 대항하는 조직으로, 로스차일드 2대 국유본 황제 가문을 제치고 다시금 국유본 권력이라는 영광을 되찾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 페이비언 협회였습니다. 베어링 가문에 의존한 옛 동인도 회사 국유본 귀족들 중심 300인 위원회가 19세기말까지 잠시 동안 활약했지만, 19세기말 베어링 가문 실질적인 파산으로 300인 위원회에서 페이비언 협회로 중심 이동이 되었고, 후일 채텀하우스로 진화한 것입니다.

버트런트 러셀은, 독일 유학을 통해, 헤겔 철학의 허접스러움=사이비쓰레기이즘을 곧바로 이해했고, 당대 프리메이슨 자유 사상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자 동맹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공 조합의 영향력을 중시하였으며, 로스차일드 인척 맑스의 경제학 허실을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무엇보다 당대 독일 황제가 프리메이슨 계몽 사상이라는 명분과 로스차일드 가문 후원이라는 실리를 등에 업고, 영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 문명국이라는 야심을 품었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버트런트 러셀은, 독일 유학 - 영국 정보부 창설 - 런던 정경대 - 당대 세계 정부인 채텀하우스 조직화를 통해서 유럽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냉정하게 볼 때, 사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교과 과정이, 버트런트 러셀 통치 이념에 따른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버트런트 러셀이 자유 좌파 창시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버트런트 러셀이 자유 우파 창시자라고도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둘, 버트런트 러셀은, 중국과 러시아를 통치하면서 한편으로 견제해야 했습니다. 인간 학살자 레닌과 트로츠키가 행한, 러시아 10월 쿠데타는, 파리 로스차일드 작품입니다. 이 견해는, 유대인 노엄 촘스키와 인드라가 공유하는 것이니 함부로 딴지를 걸지 말기를 바랍니다. 버트런트 러셀 고민은, 중국과 러시아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였습니다.

러시아에서 계몽 군주 알렉산드르 2세 같은 인물이 또 다시 등장한다면, 영국인 버트런트 러셀에게는 분명 힘겨운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레닌, 트로츠키, 레닌 트로츠키보다 더 한 ㅄ인, 스탈린과 같은 무능 부패한 ㅄ이 러시아를 압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버트런트 러셀은, ㅄ스런 인간 도살자 레닌 트로츠키를 만나서 예상했던 대로 상대가 ㅄ임을 확인하고, 중앙 아시아를 관통한 후, 중국에서 잠시 머물렀습니다. 버트런트 러셀은, 당대 영일 동맹의 지나친 부작용으로 일본이 비대해졌다고 여겨, 주은래, 모택동, 장개석을 키웠습니다.

핵심은 '적당히'였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버트런트 러셀은, 중국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버트런트 러셀이 중국을 두려워한 것은, 몽골 제국 징기스칸과 특히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때문입니다. 만일, 중국에서 다시금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면, 영국의 운명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중국을 망하게 하기 위해선, 장개석이냐, 모택동이냐. 오랜 고심 끝에 버트런트 러셀은, 주은래를 통해 모택동을 택한 것입니다. 모택동이라면, 중국을 충분하게 망하게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장개석이 중국을 석권한다고 중국이 무조건 발전하는 것이아닙니다. 중요한 건, 장개석보다 모택동 같은 좌익 파쇼가 집권하는 것이 중국을 확실히 망하게 하는 확율이 높았던 것입니다. 장개석 역시 자신 아들을 모스크바에 유학 사실상 볼모로 보낸 바 있을 만큼 국공 내전 끝까지 버트런트 러셀 당대 국유본 황제에게 충성하였으나 버림받은 셈입니다.

많은 이들이 국공 내전에서 간과하는 것이, 만주에서의 국공 내전 전투입니다. 만주에서 무능 부패 수구 꼴통 인간 도살자 좌익 파쇼 모택동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무엇입니까.

일, 당대 국유본 황제 버트런트 러셀은, 식민지 소련 통치자로 좌익 파쇼 스탈린을 임명하였고, 우선 몽골을 정복한 뒤 징기스칸 유산을 전부 삭제하라고 지시합니다. 이후, 스탈린에게 획득한 일본 만주군 장비 등을 모두 모택동 좌익 파쇼 군대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 동시에 아직까지 전 세계 정보부에서 통제하고 있는, 국공 내전과 한국 분단, 한국 전쟁 핵심인데, 한반도 북부를 불법 점령중인, 좌익괴뢰파쇼 반쪽일성을 임명한 뒤, 한반도 북부에 중꽁 모택동 대규모 부대를 진입시켜서 게릴라 전투로 국공 내전 만주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하도록 합니다. 직전까지 장개석 군대는 국공 내전에서 99.9% 승리할 수 있었는데, 전황을 바꾼 것입니다. 버트런트 러셀 채텀하우스 입장에서, 한반도 해방 직후, 모택동 군대가 북한 지역에서 주둔 활동했다는 것을 은폐해야 합니다.

삼, 이차대전 직후, 세계 경제가 일시적으로 불황에 빠져 영국 경제를 살려야 했으며, 일본, 독일 패망국 경제를 살려야 하며, 도래할 냉전 체제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이 당대 국유본 황제 버트런트 러셀 불가피한 결정이며, 영국 채텀하우스와 영국 정보부가 일으킨, 한국 전쟁이었습니다.

셋, 당대 버트런트 러셀은, 마지막으로 미국과 록펠러 가문을 견제한 것입니다.

당대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록펠러 가문은 당대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신에 불과하였습니다. 영국 국유본 귀족은, 미국 국력 팽창을 우려하여, 초기에 작정한 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주도하는, 자유 우파 공화당 원조 링컨 암살 작전에 편승하는 것이었습니다. 막상 자유 우파 링컨이 암살당한 후, 영국 국유본 귀족은, 미국이 남북으로 분단하는 것을 선호하였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이 분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분명하였습니다.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 북부에 대한 이해가 깊은 반면, 당대 영국 국유본 귀족은 미국 남부에 보다 더 깊은 이해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대 록펠러 가문 막내 아들인, 데이비드 록펠러가 영국 런던정경대에 유학을 옵니다. 마치 버트런트 러셀이 독일 유학을 한 것처럼^^! 데이비드 록펠러는 당대 국유본 황제 버트런트 러셀에게 충성 맹세를 합니다. 해서, 당대 국유본 황제인, 버트런트 러셀은 좌 스탈린, 우 록펠러로 세계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허나, 천재 중의 천재, 버트런트 러셀도 간과한 것이, 경제였습니다. 돈입니다. 버트런트 러셀은, 철학과 종교, 정치와 외교, 정보부를 장악하면, 다시 말해 인맥을 장악하면, 세상을 통치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여겼으나, 경제 인맥 특수성을 방관한 것입니다. 뉴튼도, 러셀도 경제 불규칙성을 과소평가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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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하고,

인드라는 한국 전쟁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 존재론. 왜 좌익괴뢰파쇼 반쪽일성 염원과 다르게,

방호산은 보불 전쟁 때처럼 진격전을 전개하지 않았습니까.

둘, 인식론. 방호산은 왜 한국 전쟁 휴전 때가 아닌 1959년에야 숙청당했습니까.

셋, 실천론. 방호산의 호남 군정 정치가 로스차일드 가문이 일으킨 것으로 인드라가 추정하는, 광주 항쟁에 이어, 오늘날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 일본 우익 파쇼 흑룡회 똘마니 좌익 파쇼 반쪽 민주당 근거지 역할을 하는데, 인드라 국유본론 분석으로, 2025년 이후 국유본 전략상 한반도 분단 체제 가성비가 마이너스로 바뀌는 시대에서, 호남 지역이 국유본 지정학론에서 어떤 방식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까.

https://ko.wikipedia.org/wiki/%EB%B0%A9%ED%98%B8%EC%82%B0

191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2] 이명은 이천부(李天夫)이다. 만주사변 직후에 중국에서 동북항일연군 제4군의 전신인 중국 공산당 헤이룽장성 미산현(密山縣) 유격대에 합류하여 항일 운동을 벌이다 1937년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이익연구학원(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녔다.

1939년 연안으로 온 뒤 1940년 항일군정대학동북간부훈련반에서 수료하고 중국공산당 팔로군 일선부대에 파견되어 조선반에서 조선해방문제를 연구하고 1945년 2월 연안에서 정식으로 개교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제1구대 협리원이 되었다.

1945년 11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동북지방으로 이동하여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위원으로 남만주 일대에서 군대 증강과 조선인 보호 등에 활동하였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중국공산당의 반국민당 전투에 참전하였다.

1949년 7월 조선인들이 절대 다수인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사단장으로로서 부대를 이끌고 입북하였다. 동 부대를 제6사단으로 개편하고,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제6사단을 이끌고 김포반도를 통해 제일 먼저 한강을 도하하였으며 충남과 호남 일대를 점령하여 휘하의 6사단과 빨치산 등을 통해 점령지역들에서 양민을 학살하였고[3][4], 이후 진주, 마산까지 진출하는 등 전공으로 제6사단은 근위사단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당시 워커 장군이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은 이제까지의 한국전쟁을 통해 가장 훌륭한 기동이었다”고 극찬하였으며[5] 1950년 10월에는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동부전선 전투를 지휘하였다. 1956년 6월 영웅칭호를 받았다.

1958년 8월 인민군 제5군단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연안계가 기도한 반당·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eI65PeobIo




파리 유학파 주은래(이차대전 후 상당수 제 3세계 지도자가 런던 파리 유학파입니다. 이유가 있겠죠^^?) 추천으로 당대 국유본 황제는 무능 부패하기에 오히려 적당한 지도자로 모택동을 임명합니다. 러셀 북경대 연설을 청강한 바 있는, 북경대 청강생 모택동은, 중국에 잠시 체류하면서 영국 프리메이슨 선교사가 번역한 중국 고전들을 읽었던 버트런트 러셀 지도를 받았는지, 일자무식이 대부분인 농민에게조차 널리 퍼져 있던 삼국지 연의 이야기를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shorts/4vTbPOBDWM4

하고, 국공 내전, 한반도 분단, 한국 전쟁과 휴전을 기획 연출했던, 당대 국유본 세계 정부인 채텀하우스와 당대 세계 최고 정보부인 영국 MI6 지도에 따라, 한국 전쟁 후, 북에서는 오늘날과 달리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합니다. 1950년을 제외하고 3년 내내 한국 전쟁을 주도한 건 중공군이었습니다. 당시 북한군은 사실상 전멸하여 1951년부터 전력외였습니다. 하고, 해방 이후는 물론 전후에도 수십만 명 중공군이 북한에 주둔하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처럼 수많은 강간 살인 사건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북한 시민이 중국인에 안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건 먼 옛날 기억 때문이 아니라 1940년 50년대 중꽁군 만행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소련파도 있었습니다. 해서, 1950년대는 주체사상이란 게 없었습니다. 헌데, 국유본 황제가 버트런트 러셀에서 빅터 로스차일드로 바뀌면서 그 이후로 북한은 구소련=빅터 로스차일드 식민지, 모택동 중공=버트런트 러셀 식민지라는 묘한 구도 속에서 완충 지대가 된 것입니다. 러셀파 스탈린 사망으로 끈 떨어진 소련파나 박헌영 남로당파 숙청은 주북 중공군을 뒷배경으로 하는, 중공 연안파에 비해 손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완충 지대를 원하는, 빅터 로스차일드 당대 국유본 황제 지시로 중공군이 중공으로 되돌아가니 연안파도 숙청당한 것입니다.

https://blog.naver.com/miavenus/223315207221?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이때, 중요한 건, 북한이 왜 국호를 굳이 북조선으로 했느냐는 것입니다. 국유본 지시인 셈입니다. 꽁산당 독재를 위해서는 분권화를 적대시하고 중앙집권화가 필수였던 데다가 유교 꽁산주의가 중꽁 모택동 정권에서 대약진운동 참새대학살극이 있기 전까지 1950년대 초중반까지 나름 성공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영남 퇴계문도 후예였다 사회주의자가 된 남로당파가 실학 정약용 동학혁명 운운하며 1950년대 북한 역사학계를 주도하였는데, 1960년대 동학농민혁명의 적통인,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에 정통성에 상처를 입은, 좌익괴뢰파쇼 반쪽일성이 실학? 동학농민혁명? 다 때려 쳐! 하게 된 것입니다.

해서, 1960년대부터는 중꽁 모택동 유교 꽁산주의와는 다른 무엇이 북에서는 필요했는데, 초기에 이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 황장엽 선생이었던 셈입니다.1960년대 주체사상도 인드라가 비판적이지만, 그래도 이 시기 주체사상이란, 황장엽 선생이 그나마 애써 만든 것인데, 반쪽일성 탓에 허접할 수밖에 없는, 맑스레닌주의의 북조선화 현지화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 경제 분석에서 인드라가 인정하는 캐주얼 스칼라 Casual Schola를 참고하길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JKNwhhOTV8

문제는 1970년대입니다. 그간 돈줄이었던 소련 무상 원조가 끊긴 것입니다. 이는 당대 국유본 권력 투쟁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일본 조총련 재일동포 자금이 구명줄이 된 것입니다. 하고, 일본 조총련 재일동포 자금 배후에는 일본 우익파쇼 흑룡회가 있었습니다. 흑룡회 초창기에는, 민비 시해에도 앞장서긴 했지만, 좌우익 파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막부 분권화 시대에서 베어링 가문이 임명한 일본왕 중앙집중제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조선 초기 때처럼 유교가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허나, 1920년대 이후 흑룡회는 당대 국제 정세에 따라 좌우익파쇼 수구꼴통반동화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 이후 조선 유교가 수구꼴통반동화된 것과 같습니다. 해서, 좌우익파쇼 역사학 진앙지 서울대 국사학파가 영정조 등 무능 부패한 왕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조선 후기 관료 탓, 황장엽 탓과 같은 안동 김문 탓이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오늘날에도 탈북인들 여론조사를 보면, 기근 책임이 반쪽일성 가문 탓이 아니라 관료 탓 운운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좌익괴뢰파쇼 반쪽일성 정권 공식 입장입니다.

더 큰 문제는, 2025년까지 한반도 분단 체제가 이익이라고 본, 당대 국유본이 한반도 문제를 일본에게 일임하여 일본에서 반쪽정일을 후계자로 추천한 것입니다. 동시에 수구꼴통반동 우익파쇼 일본 흑룡회에서 천황 대신 반쪽일성으로 한글로 번역했을 뿐인, 좌익괴뢰파쇼사상인 주체사상을 제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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