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의 '계약부인'이자, 양성애자로 여성들을 사랑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가 거의 최초의 페미니스트였던 것은 우연인가? 남성성이 강한 여성이 여성사회운동을 펼친다는 것은, 필시 양기가 강한 음기의 팽창 작용에 비견되리라; 한편으로는, 흑표당의 말콤 X가 흑인차별에 대한 반동으로 흑인우월주의를 주장한 것처럼,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차별에 대한 반동으로 작위적으로 여성우위를 주장하는 듯한 느낌을 풍긴다

 

2.1. 계약 결혼[편집]

시몬 드 보부아르를 유명하게 만든 스캔들인 계약결혼은 아직도 현대의 일반인들에게 시행하기 망설여질 정도로 파격적인 관계였다. 보부아르는 장폴 사르트르와 함께 계약결혼이라는 새로운 결혼관계제도를 도입한다. 1929년부터 시작한 이 결혼은 2년의 효력이 있었고 서로에게 뜻이 있으면 다시 2년을 갱신하는 식의 관계였다. 자유로운 연인관계를 원했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 최소한의 규칙만을 조건으로 삼았고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방식을 요구했다.

이 내용은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서로 파트너를 바꾸든 상관하지 않지만 서로가 합의하거나 요구하는 날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말 것." 사르트르도 이 사항에 동의를 했고 사르트르의 성격을 잘 알았던 보부아르는 이 계약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계약을 갱신하였다. 두 사람은 언제든지 계약의 갱신을 거부할 수 있었지만 사실상 서로의 입장에 만족을 했기 때문에 말만 자유지 현실은 종신계약이었다. 이 기간동안 두 사람은 결혼관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서로의 원고를 검토하는 등 학문적 동반자로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1947년 보부아르는 미국 여행 중 작가 넬슨 앨그렌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사르트르와 약속한 작업일정에는 항상 맞추어 귀국했다. 넬슨 앨그렌 외에도 영화감독 클로드 란츠만과도 아내로서의 관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클로드 란즈만은 26세였고 보부아르는 란즈만보다 18살 연상이었다. 31세에는 23살의 청년 자크 로앙 보스트와도 연애를 했다. 이외에도 동성 애인도 여럿 두면서 다자연애관계를 유지했다.
 

2.2. 미성년 제자와의 동성애[편집]

보부아르 사후에 공개된 일기와 편지에서 보부아르가 여러 명의 제자들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 보부아르는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철학교사를 하던 시기에까지 젊은 여성 3명과 육체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은 모두 보부아르의 제자였다. 어떤 경우에는 사르트르도 나중에 이 여자들과 육체 관계를 맺었다. 이 뉴스가 보도되자 보부아르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여성들을 꼬드겨 불평등한 권력 관계 속에서 성관계를 맺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첫번째 관계는 러시아 출신 올가 코사키에비치(당시 18세)였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철학도를 꿈꾸던 학생인 올가에게 개인교습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써서 방을 얻어주었다. 곧 보부아르는 그 방에서 올가와 성관계를 맺었다. 올가는 훗날 인터뷰에서 "뭐가 어떻든 간에 나는 그들의 관심을 누린다는 특혜에 완전히 흥분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했다"고 회상하면서, 그들의 권위에 이끌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휘둘렸다고 후회했다.

두번째 관계는 폴란드 출신 수험생이었던 비앙카 비넨펠트(당시 17세)였다. 보부아르는 일기에서 비앙카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육체적 쾌락이 "도착적"이라고 말했으며, 자신이 비앙카의 육체를 "이용하고" "아무 애정 없이" 관능을 즐겼다고 썼다. 비앙카는 훗날 인터뷰에서 불평등한 권력 관계 속에서 성관계를 맺었다고 보부아르를 비난했으며, 보부아르를 "여제자들 중에서 잘 무르익은 젊은 육체를" 선별하여 "자기가 먼저 맛보고 사르트르에게 넘기는" 포식자로 말하였다.

세번째 관계는 이혼가정의 가난한 나탈리 소로킨(당시 18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소르본 대학에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보다 취직을 권했지만, 보부아르가 등록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그녀와도 성관계를 맺는데, 심지어 이 사실을 사르트르에게 편지로 보고했다.[4] 그 글의 일부가 이렇다. "포옹이 다시 시작되었고 호응이 잘되었어요. 올가와 할 때랑은 확실히 달랐어요. 난 그녀의 몸을 좋아해요." 이후 나탈리의 어머니는 보부아르를 '미성년자 풍기 문란 선동'으로 정부에 고소했고, 보부아르는 교사 자격직을 박탈당했다.[5]

물론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프랑스에 미성년법이 아직 제정되기 전이었고, 프랑스가 명확하게 15세 미만과의 성관계를 범죄화한 것은 2021년이나 되어서였다.#[6] 하지만 이것도 자유로운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 지는 관계가 불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공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되어 불평등한 권력 관계 속에 있는 미성년 대상과 관계를 맺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공직자의 그러한 행동은 법으로 제지받는 행동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인해 보부아르는 교사직을 박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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