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나도 위안부와 놀았다" 전 일본군이 말하는 그 때의 진실 / 위안부의 역사적 배경: 일본군의 1937년 난징대학살과 집단강간으로 (1) 일본군 내에 성병이 만연하고, (2) 중국 전역의 반감을 사게되자, 연합군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겠다고 하여, 일본군이 계획적으로 위안부를 모집 및 관리하게 됨

뻔뻔한 할아버지를 대신해 위안부 진실을 탐구한 일본인과 (그는 아사이 신문은 위안부는 진실이고, 산케이는 자발적 매춘부라 했는데,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전 아시아신문 종군기자 출신의 지식인인 (2015년 방영 당시) 101세의 무노 다케지의 명쾌한 언변과 논리력에 감탄했으며 (그는 이듬해인 2016년에 사망했다),

한국어는 다 잊어버렸지만 고향의 한국 노래를 정확히 노래하는 조선족 할머니의 에피소드가 인상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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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아키타현 출생. 도쿄외국어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호치신문사를 거쳐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서 보도 업무에 종사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전쟁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퇴사하고, 1948년 아키타현 요코테시에서 주간 신문 『다이마쓰』를 창간하였으며 1978년을 기하여 휴간하기까지 편집장으로서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펼쳤다. 그 후에도 저작 및 강연 등을 통하여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했으며, 2016년에 별세하였다.  

 

 

희로애락, 그 하나하나를 마음껏 발휘하라.
이것들은 모두 생명을 길러내는 신호이다.
갓난아기의 첫 울음소리는 희로애락의 첫 번째 소리다.

화내지 않는 사람은 도망친다.
생명력이 넘치기 때문에 화내는 것이다.
나는 화내지 못하는 친구는 곁에 두지 않는다.
[본문 19페이지]

평범하고 보통이며 당연해 보이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핵심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방법으로 저마다 자신의 삶을 경작한다.
그러면 비범한 기쁨이 솟아난다.
[본문 41페이지]

언어와 관련된 업무를 장기간 하였는데 의아한 것이 있다. 일본어도 그렇고 외국어도 그렇고 사람을 실제보다 나쁘게 매도하고 폄하하는 표현이 실로 풍작이다. 반면 인간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표현은 흉작이다. 인간들이여, 어째서인가?
[본문 54페이지]

다 함께 노력해서 모두의 기쁨을 창출하는 것을 계속 게을리하고 있다. 그래서 모두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슬픔을 한 명 한 명이 모두 짊어지고 있다.
[본문 146페이지]

 

 

목차

  • 저자의 바람

    겨울 학기 - 밤이 아침을 낳는다
    1월
    2월
    3월

    봄 학기 - 나아가자! 삼보 전진
    4월
    5월
    6월

    여름 학기 - 선명하게 나로 산다. 그것이 아름답다
    7월
    8월
    9월

    가을 학기 - 죽을 때야말로 삶의 클라이맥스
    10월
    11월
    12월

    본서의 내용과 저자의 생애
    본서의 제작과 관련하여
    역자 후기
    무노 다케지의 저서 일람

 

 일생 반전과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데
목소리를 높였던 저널리스트의 인생 통찰!

저자 무노 다케지는 아사히신문사 종군기자로서 태평양전쟁을 취재했지만, 신문사의 자체 검열에 짓눌려 진실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종전 날에 거짓보도를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신문사를 퇴사한다. 저자는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 『다이마쓰(횃불)』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반전과 평화 등을 주제로 평론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대한 배상 문제를 매듭짓지 않았다고 크게 지적해왔으며, 아베 신조 정권의 안보법 개정 움직임에도 앞장서서 비판했다. 2016년 101세로 별세하기 6일 전에도 호헌집회에 참여하는 등 평생 일본 사회에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노력했던 저널리스트다. 이 책의 메시지는 저자가 생후 99년차를 맞이하기까지 기자 및 평론가로서 걸어온 외길 위에 쌓인 발자국 중에서 엄선한 것이다.

100년 가까운 삶의 경지에서 배어나오는 폭넓고 깊은 인생 찬가!

이 책은 인간, 삶, 생명, 평화, 일상에 대한 인생의 진리와 역사적 증언들을 짧은 문장들로 가슴 깊이 우리에게 전한다. 저자는 이 책을 걸레나 수세미와 같이 이용해달라고 말한다.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 묻어 있는 오염물과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를 깨끗하게 닦아내는 데 써달라고 당부한다. 그렇게 생활환경을 깨끗하게 정화하면 사람은 반드시 큰 소리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며, 서로에게 힘이 되고 연결되어 기쁜 메아리를 만들어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과정에 새로운 약동을 낳을 자극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 저자의 바람이다. 99세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경험과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글들을 하루 한마디씩 곱씹다 보면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치는 많은 것들을 일깨워줄 것이다. 독자들이 365일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 상대로 삼아주기를 바라며 써나간 저자의 진심 어린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https://ja.wikipedia.org/wiki/%E3%82%80%E3%81%AE%E3%81%9F%E3%81%91%E3%81%98

 

무노타케지 (본명 : 타케노 다케지, 1915년 1월 2일 - 2016년 8월 21일 )는 일본  저널리스트 . 태평양 전쟁 종군 기자 로서의 경험·반성으로부터, 전후에 반전·평화를 계속 호소했다.

신문 「타마츠」를 창간. 농촌·농업의 진로, 돈벌이 문제, 농민운동의 존재 방식, 지방문화나 서클 활동에 대해 추구해, 「자신의 말에 자신의 전체 무게를 건다」기사를 계속 썼다.

경력 [ 편집 ]

아키타현 센호쿠군 로쿠고쵸 (현 : 미고쵸 )의 소작 농민 의 집에서 태어난다. 현립 요코테 중학교(현:아키타 현립 요코테 고등학교 )에서 교사를 맡고 있던 이시자카 요지로 에게, 국어·작문· 수신 을 가르쳤다. 1932년  도쿄외국어학교 (현:도쿄 외국어대학 ) 서어 부문과(문학)에 입학 [1] [2] . 부모의 공급으로 학생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1학년을 끝낸 곳에서 외무성의 서기생이 되려고 했지만 「만 18 세에서는 너무 젊다」라는 이유로 원서는 각하되었다 [3 ] . 그 무렵부터 사회주의 의 책을 열심히 읽게 되었다.

1936년 (쇼와 11년) 3월에 대학을 졸업해 [4]보치 신문」기자가 되어, 아키타 지국이나 도치기 지국, 본사 사회부 에서 일한다. 근위 문면 , 도조 에이키 , 스즈키 칸타로 등 정권 중추의 정치가·군인, 화가의 후지타 츠지 , 소설가의 화노 갈대 평평  인터뷰했다. 1940년 (쇼와 15년) 아사히 신문사 에 입사, 중국 , 동남아시아 특파원이 되었다. 당시 일본은 일중전쟁 속 에서 불인진주 로 동남아시아에도 세력을 넓히고 있어 대립을 깊은 미영과 1941년(쇼와 16 년) 12월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중반인 1943년 (쇼와 18년), 사회부로 돌아온다. 류신 의 작품에 마음을 끌린다. 세어 4개의 장녀 연고를 역사로 잃는다. 1945년 (쇼와 20년) 8월 15일  패전을 계기로, 권력의 통제에 굴복해 태평양 전쟁의 전의 고양에 관여한 책임을 취해 퇴사했다 [주석 1] . 그 때는 민중이 봉기할 것을 예상하고 격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 각오를 하고 있었다 [5] . 1946년 아이 치현 나고야시 에 가서 『나카교 신문』의 일을 도와준다. 1947년 (쇼와 22년) 11월 5일,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아지아”라고 명명한다.

1948년 (쇼와 23년) 설날 , 부모와 자식 5명으로 아키타현 요코테시 에 귀향, 2월에는 타블로이드판 의 주간 신문 “타마츠”를 창간했다. 『타마츠츠』라고 명명한 이유를, 무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시중의 더러움에도 드물면서도 잃지 않았다(사회 체제의 변혁을 대망한다) 한 점의 불씨를 아무리 작아도 한개의 불에 바꾸고 싶은 기분이었다.」 [6]덧붙여 창간호 에는 이시자카 요지로가 기고하고 있다. 『타마쓰츠』에서는, 농촌, 농업의 진로, 이익 문제, 농민 운동의 존재 방식, 지방 문화나 서클 활동에 대해, 끈기 있게 추구했다 [7] . 「자신의 말에 자신의 전체 무게를 건다 [8]」기사를 1978년 (쇼와 53년)의 780호까지 계속 썼다 [9] .

류신 외에, 레닌 , 모택동  각각의 사상과 전투 만에 특히 깊게 영향을 받았다 [10] .

1955년 (쇼와 30년)의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에는 아키타 2구 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했지만 낙선했다 [11] .

만년에는 전쟁의 기억을 전하기 위해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나 강연회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했다. [ 12] [ 13 ] [14 ]

2012년 , 이와테현 하나마키시 의 「미야자와 켄지 학회 이하토브 센터」로부터 제22회 이하토브상을 수상 [19] [20] [21] . 2015년 도쿄 외국어대학 에서 80년이 넘는 졸업증서가 건네졌다 [22] .

2016년 8월 21일, 노쇠 때문에, 사이타마 시내의 차남택에서 사망 [23] . 101세몰.

주간신문 '타마츠' 전 780호는 요코테 시립 도서관 에서 디지털 촬영되어 보존되어 있다 [24] . 또, 소장하고 있던 도서, 서간이나 강연의 원고, 신문의 자르기 등이 요코테 시립 도서관에 기증되어, 오모모가와 도서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25] .

이름을 딴 ‘무노타케지 지역·민중 저널리즘상’이 마련되어 있다. [주석 2] [26]

저서 [ 편집 ]

  • 『다이마츠 16년』 기획 통신사 1963년/ 현대 교양 문고 1994년/ 이와나미 현대 문고 2010년
  • 『눈과 발과』문예 춘추 신사 1964년/ 삼성당 1970년
  • 『밟은 돌의 반서』 문예춘추신사 1965년/ 평론사 1983년
  • 『버러를 깃발로』 번마치 서방 1966년/이즈미야 출판 2003년
  • 『일본의 교사에게 기쁘다』 메이지 도서 출판 1967년
  • 『사집 타마츠츠――인간에 관한 단장 604』 삼성당 신서 1967년
  • 『1968년――보행하기 위한 소재』오카무라 아키히코 와의 대담 삼성당 신서 1968년
  • 「일본의 교육을 생각한다――풍부한 인간 교육에의 제언」사이토 키히로 · 사토 타다오 와의 고담 도시바 교육 기법 연구회(TETA 신서) 1970년
  • 「해방에의 십자로」평론사 1973년
  • 『우리 사는 곳 우리도』집의 광협회 1975년
  • 『사집 타마츠』 1 - 6 평론사 1976-2011년
  • 『무노타케지 현대를 베는』호조 조히사와 의 대담 이즈미야 출판 2003년
  • 『전쟁 필요 없을 수 없는 세상에』(무노타케지 말한다 1)평론사 2007년
  • 『생명을 지키는 세상에』(무노타케지 말한다 2)평론사 2008년
  • 『전쟁 멸종에, 인간 부활에――93세·저널리스트의 발언』청문자 쿠로이와 히사코 이와 나미 신서 2008년
  • 『후미씨, 타케지씨의 93세 대담』미네야마 토미미 아사히 신문 출판 2008
  • “희망은 절망의 한가운데에” 이와나미 신서 2011년
  • 『99세하루 한마디』 이와나미신서 2013년
  • 『타마쓰 유고집』 금요일 ​​2016년
  • 『일본에서 100년, 살아와서』 아사히 신서 2017년

 

 

 

 https://www.donga.com/news/BestClick/article/all/20151102/74538489/1

前아사히 종군기자 “군국주의가 개인유린” 졸업사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東京)에 소재한 도쿄외국어대 후추(府中)캠퍼스에서는 특별한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생 대표는 태평양전쟁을 취재한 전직 아사히신문 종군기자 무노 다케지(武野武治·100·사진) 옹이었다. 무노 옹은 이 대학 스페인어과에 다녔지만 1936년 일본 군국주의 과격파 청년 장교들이 벌인 2·26쿠데타 사태로 졸업식 자체가 무산돼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무노 옹은 대학 졸업 후 호치(報知)신문을 거쳐 1940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그리고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는 패전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신문기자로서 전쟁에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냈다. 아사히신문이 태평양전쟁 당시 정부의 선동을 앞장 서 전파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다. 이후 무노 옹은 고향인 아키타(秋田)로 돌아가 주간지를 창간하는 등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70년 동안 일본 사회에 반전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졸업 79년 만에 정식 졸업증서를 받은 무노 옹은 답사에서 “개인의 운명이 군국주의의 파도에 유린당한 시대였다”고 졸업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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