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의 투쟁에서 나는 철저하게 패배했다. 크로노스에게 잡아먹혔다. 우선 그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한다.
시간과의 투쟁에서
나는 철저하게 패배했다.
크로노스에게 잡아먹혔다.
우선 그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한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시간 속에서
소중한 것을 움켜쥐기 보다는
불순물들을 움켜쥐어 왔다.
이제 특정 인간이나 사물과의 관계보다도
시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관계 재정립의 핵심은 '선택과 집중'이다.
마치 방통이 현생에 빙의한냥 한정된 시간 동안
모든 사무를 순식간에 다 처리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업무, 일, 사람만 선별해서
그것 위주로 판을 짜야 한다.
https://www.safety1st.news/news/articleView.html?idxno=4384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과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 12신중 막내로
어머니 가이아를 도와 아버지 우라노스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가이아가 키클롭스, 헤카톤케이르를 비롯한 괴물들을 낳자
우라노스는 이들을 타르타로스에 감금해 버린다.
크로노스는 가이아를 도와 왕위에 오르지만 키클롭스와 헤카톤케이르를 구출하라는 가이아의 명령을 무시했고,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네가 낳은 아들이 너처럼 반란을 일으켜 너를 몰아내고 왕이 될 것이라는 저주를 내린다. 이에 크로노스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집어 삼켰지만, 제우스가 태어나자 그의 어머니 레아는 아기 대신 돌을 강보에 싸서 크로노스에게 삼키게 하여 제우스를 살려낸다. 크로노스의 눈을 피해 장성한 제우스는 10년동안 벌린 티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올림포스의 왕이 된다.
카이로스(kairos)는 제우스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기회와 행운의 신인데 그 생김새가 독특했다. 앞머리는 덥수룩 한데 뒤는 대머리이며, 어깨와 발꿈치에는 날개가 있고, 저울과 날카로운 칼을 들고 다닌다. 그가 앞에서 다가올 때는 누구나 쉽게 머리카락을 움켜잡을 수 있지만, 지나가 버리면 결코 잡을 수 없다. 카이로스를 잡기 위해서는 저울과 같은 분별력과 칼 같은 결단력이 필요하다.
카이로스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 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그를 알아차려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반면 그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며, 그의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왼손에 저울이 있는 것은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라는 것이며, 오른손에 칼이 주어진 것은 칼날로 자르듯이 빠른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그의 또다른 이름은 '기회'다.
ⓒ크로노스(좌측 이미지), 카이로스(우측 이미지)/ 출처-1st-art-gallery.com, 중앙
ⓒ크로노스(좌측 이미지), 카이로스(우측 이미지)/ 출처-1st-art-gallery.com, 중앙시사매거진
크로노스의 시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리적 시간으로 객관적·정량적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질적인 시간으로 주관적·정성적 시간이다. 인간에게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소 길거나 짧을수 있지만 모두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그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일 수도 있고, 카이로스의 시간일 수도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보다 질적으로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수 있다. 우리가 인생을 의미있게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 물리적으로 주어진 크로노스의 시간을 질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꿀 줄 안다는 것이다. 그 능력이 한 사람의 운명과 인생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과거와 미래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98%를 과거에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데 사용한다. 현재를 생각하는 데에는 2%만 할애할 뿐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시간을 제어하는 능동적인 삶이 아니라, 시간에게 제어당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즐길 수 없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우리 삶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현재를 사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다. 현재는 과거를 비추고 미래를 준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불안 때문에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느라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한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 시간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크로노스는 미래에 자식이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될까봐 자식을 잡아먹는다. 그 결과 그는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없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삼키고, 또 미래도 집어삼켜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공허하고 무의미한 삶을 사는 이유는 어제의 기억과 내일의 준비에 갇혀 오늘을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면서 시간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후회로 인해 과거에 얽매이고, 두려움으로 미래에 사로잡혀 살다가 결국 자신도 크로노스의 희생물이 된다. 기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현재에 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영원히 현재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다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본질은 예외없이 영원한 현재일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며 분노하지 말고, 오지 않을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레우코노에여,
생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바빌론의 점성술에 묻지 마라.
뭐든 견디는 게 얼마나 좋으냐.
유피테르가 겨울을 몇 번 더 내주든,
그가 내린 최후의 때가 티레니아 해를 부스러뜨리든,
현명해 지게, 술을 걸러 따르게
이 짧은 시간동안 머나먼 희망은 잘라버리게
미래도, 과거처럼 어깨 위에 지고 가는 것이 차라리 좋다네
짧은 우리네 인생에서 긴 욕심일랑 잘라내게
내가 말하는 새에도 우리를 시셈하는 세월은 흘러가고 있으니
오늘을 움켜지고 내일은 조금만 믿게
-호라티우스-
출처 :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https://www.safety1st.news)
크로노스는 가이아를 도와 왕위에 오르지만 키클롭스와 헤카톤케이르를 구출하라는 가이아의 명령을 무시했고,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네가 낳은 아들이 너처럼 반란을 일으켜 너를 몰아내고 왕이 될 것이라는 저주를 내린다. 이에 크로노스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집어 삼켰지만, 제우스가 태어나자 그의 어머니 레아는 아기 대신 돌을 강보에 싸서 크로노스에게 삼키게 하여 제우스를 살려낸다. 크로노스의 눈을 피해 장성한 제우스는 10년동안 벌린 티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올림포스의 왕이 된다.
카이로스(kairos)는 제우스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기회와 행운의 신인데 그 생김새가 독특했다. 앞머리는 덥수룩 한데 뒤는 대머리이며, 어깨와 발꿈치에는 날개가 있고, 저울과 날카로운 칼을 들고 다닌다. 그가 앞에서 다가올 때는 누구나 쉽게 머리카락을 움켜잡을 수 있지만, 지나가 버리면 결코 잡을 수 없다. 카이로스를 잡기 위해서는 저울과 같은 분별력과 칼 같은 결단력이 필요하다.
카이로스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 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그를 알아차려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반면 그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며, 그의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왼손에 저울이 있는 것은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라는 것이며, 오른손에 칼이 주어진 것은 칼날로 자르듯이 빠른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그의 또다른 이름은 '기회'다.
ⓒ크로노스(좌측 이미지), 카이로스(우측 이미지)/ 출처-1st-art-gallery.com, 중앙
ⓒ크로노스(좌측 이미지), 카이로스(우측 이미지)/ 출처-1st-art-gallery.com, 중앙시사매거진
크로노스의 시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리적 시간으로 객관적·정량적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질적인 시간으로 주관적·정성적 시간이다. 인간에게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소 길거나 짧을수 있지만 모두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그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일 수도 있고, 카이로스의 시간일 수도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보다 질적으로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수 있다. 우리가 인생을 의미있게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 물리적으로 주어진 크로노스의 시간을 질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꿀 줄 안다는 것이다. 그 능력이 한 사람의 운명과 인생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과거와 미래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98%를 과거에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데 사용한다. 현재를 생각하는 데에는 2%만 할애할 뿐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시간을 제어하는 능동적인 삶이 아니라, 시간에게 제어당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즐길 수 없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우리 삶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현재를 사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다. 현재는 과거를 비추고 미래를 준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불안 때문에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느라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한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 시간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크로노스는 미래에 자식이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될까봐 자식을 잡아먹는다. 그 결과 그는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없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삼키고, 또 미래도 집어삼켜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공허하고 무의미한 삶을 사는 이유는 어제의 기억과 내일의 준비에 갇혀 오늘을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면서 시간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후회로 인해 과거에 얽매이고, 두려움으로 미래에 사로잡혀 살다가 결국 자신도 크로노스의 희생물이 된다. 기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현재에 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영원히 현재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다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본질은 예외없이 영원한 현재일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며 분노하지 말고, 오지 않을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레우코노에여,
생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바빌론의 점성술에 묻지 마라.
뭐든 견디는 게 얼마나 좋으냐.
유피테르가 겨울을 몇 번 더 내주든,
그가 내린 최후의 때가 티레니아 해를 부스러뜨리든,
현명해 지게, 술을 걸러 따르게
이 짧은 시간동안 머나먼 희망은 잘라버리게
미래도, 과거처럼 어깨 위에 지고 가는 것이 차라리 좋다네
짧은 우리네 인생에서 긴 욕심일랑 잘라내게
내가 말하는 새에도 우리를 시셈하는 세월은 흘러가고 있으니
오늘을 움켜지고 내일은 조금만 믿게
-호라티우스-
출처 :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https://www.safety1st.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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